2024년 5월 16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사도 22,30; 23,6-11
복 음 : 요한 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일치’에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사상의 강요나 이념의 주입으로 이루어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 안에 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그 어떤 억지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발적 일치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복음은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 됨을 강요할 때 나오는 결과가 ‘불일치’이며 ‘분열’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를 고발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불일치’를 묘사합니다.
바오로를 고발하는 일에는 담합 하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그들은 결국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지고 맙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입장차이는 격렬하였습니다.
사상과 이념, 원칙과 엄격한 교의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려 주고 그 사랑이 진심임을 믿게 할 때 서로는 상대의 마음 안에 하나 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 하신 당부이고 기도였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많은 교육으로 성인이 되어 쉽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지식의 성장에는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영적 성장에는 외면하는 부모가 많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은
“지금은 공부 때문에 성당 다니기 힘들지만,
어렸을 때 복사도 했으니, 성인이 되면 열심히 나갈 것입니다.”,
“자녀의 종교 자유도 존중해 줘야죠.”라고 하십니다.
좋은 것이라면 아이가 싫다고 해도 챙겨주는 것이 부모 아닐까요?
그렇다면 신앙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자신의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현대인이 죽음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숫자가 늘어나고, 생명을 존중하지 못하는 많은 모습에서
죽음의 문화는 그 세력을 더 넓혔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복음을 주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죽음의 문화 속에서만 있으면 생명의 복음을
지루하고 오래된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학협회의 정식의학회지에 발표된 연구가 인상적입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종교의식에 참석하는 미국인의 경우
자살할 확률이 5배 이상 낮다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 연구에서도 정기적으로 교회나 회당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살할 성향이 적다는 발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 곧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적 성장만 무조건 ‘OK’를 외쳤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대상은 바로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 믿는 이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면, 아버지의 사랑을 매 순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영적 성장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분명히 훨씬 더 큰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는데도, 세상의 풍요로움과 안락함만을 추구합니다.
참 생명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닌 겉으로만 보기 좋은 것만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되어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에 응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예수님과 제자,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일치를 이루려면 사랑 없이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유의하시는 것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들을
생활 실천으로 옮겨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이고 영혼의 힘이며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히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렇다면 '하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라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속해’(소유됨, 곧 계약의 실현) 있음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아들 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父子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 ‘하나 됨’이란 곧 ‘사랑 안’에서의 이루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영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됩니다.”(에페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리하여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이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알게 하는 것이
‘대사제 기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누구나 당신이 계신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당신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나’ 되어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서로가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
오직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오니,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길 바라오니,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때, 감동적으로 읽은 ‘동화’가 있습니다. ‘의좋은 형제’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형은 이제 막 혼인한 동생을 생각했습니다.
동생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을 거로 생각한 형은
늦은 밤에 추수한 벼를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주려고 나섰습니다.
동생도 형은 아이들이 많으니 필요한 것들이 많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늦은 밤 추수한 벼를 형의 논으로 가져다주려고 나섰습니다.
둥근 달이 바라보는 가운데 형과 동생은 추수한 벼를 지게에 지고 만났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았습니다.
제가 이 동화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더 차지하려고 형제들이 법정에서 다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아픈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형제들이 핑계를 대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내 것을 나누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난’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형제들끼리도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합니다.
재물을 위해서라면 형제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성당에 일이 많았습니다.
오전에 장례미사가 있었고, 오후에는 구역 미사와 본당 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꾸르실료 모임과 전례 분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구역 미사를 마치고 식사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꾸르실료 모임과 전례 분과 모임의 방이 겹치는 것입니다.
그 방에 영상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
두 단체 모두 그날 영상을 이용해서 모임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전례 분과는 꾸르실료에게 방을 양보하려고 하였습니다.
꾸르실료에서 영상을 이용한 교육을 하기 때문입니다.
꾸르실료는 전례 분과에게 방을 양보하려고 하였습니다.
모임이 겹치면 본당 전체 행사를 준비하는 모임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양보하려 하니 문제 해결은 쉽게 되었습니다.
영상을 볼 수 있는 다른 방을 알아보았고, 꾸르실료 모임이 그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감정이 들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욱하는 마음에 말이 거칠어지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내가 먼저라는 이유를 찾으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는 부활에 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부활이 있다고 하였고, 천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가이는 부활이 없다고 하였고, 천사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이 있다고 하면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서로 갈등하고, 분열하게 하였습니다.
천인대장은 바오로 사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안전한 곳으로 바오로 사도를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오로 사도가 지혜롭게 처신한 것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의좋은 형제처럼 자신의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기 마련입니다.
집에서 새지 않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빵이 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가 하나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그런 모든 것도 기쁨으로 변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증거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계시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후, 그 혹독하고 끔찍한 수난 여정이 시작됩니다.
무죄하신 분이 죄투성이인 인간들 앞에 죄인으로 서십니다.
헤로데와 빌라도 앞에, 그리고 유다 산헤드린 앞에 서십니다.
그런데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체포된 바오로 사도 역시 천인대장과 유다 최고 의회 앞에 서셨습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지상에서의 사명 수행을 거의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거듭된 질문 앞에서 시종일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달릴 길이 남아있던 바오로 사도는 용감하고도 담대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합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의 체포와 사형 판결을 위해 당시 유다 사회를 주름 잡던,
잘 나가던 두 단체가 일시적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 문제로 견해를 달리하던 두 부류였지만,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는 합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촌철살인 같은 바오로 사도의 한마디 발언이 둘 사이의 관계를 깨어지게 만듭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바오로 사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아킬레스 끈을 여지없이 끊어버린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전략에 휘말린 두 부류는 즉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회중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재판 마당은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사이 쪽의 지지로 바오로 사도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 앞에 서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그날 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오로 사도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계시니,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적극적인 동반과 지원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적대자들의 혹독한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담대하고 기쁜 얼굴로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에너지를 모아 복음 선포에 쏟아붓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21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리도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하신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며,
같은 뜻으로 일치를 이루어 가야 한다.
하나가 된 모습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인 관계에 참여하는 것이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나게 한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2절)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은 세상에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반되는 성향과 욕망과 죄로 인해 스스로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의 불길에 의해 한마음이 된다.
하나가 된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주님과 함께 살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으려면
우선 당신을 통해 아버지와 일치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아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아들과 같이 되어 그분을 닮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25절)
아들이 아버지를 아셨듯이,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을 받아들였고,
그분의 말씀을 따랐고 그분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아들을 알고 또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아드님을 모시며,
아드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한 몸을 이룬 우리 지체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머리와 지체가 모두 포함된 한 몸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6절) 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하나가 되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될 때
우리는 모두 한 몸 그리스도가 되어 하느님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부분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대사제의 기도 마지막 부분,
즉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요한 17,20) 기도하시는데,
이는 바로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시는 내용이 실로 엄청난 것임을 우리가 더 잘 압니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정 생활을 하는 사람도,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 크고 작은 단체나 모임에라도 이름을 어떻게 걸쳐 본 사람이라면 다 겪어서 아는 바입니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회의가 들 정도의 아픈 체험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와 바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입니다.
성삼위 하느님을 "하나 됨"의 모델로 삼으시니, 황송하기는 한데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하나가 된다는 건 모두 획일적으로 똑같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하나가 되자고 타인에게 자기와 같아지라고 요구할 순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은 똑같아서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을 사랑하고 품고 포용하는 데서 일어나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고 성부께 청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실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요한 17,23)
이 말씀에는 하나 됨의 실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천양지차로 다른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분을 마음속 지성소에 모시고 산다면,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연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겠지요.
우리 각자의 육신과 재능과 성향 등 저마다 부여받은 껍데기가 다를지라도
서로가 내면에 모신 성삼위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 나뉠 수 없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분께서 한 분이시니
우리가 그분의 이끄심 대로 따라간다면 서로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경우 하나 됨은 '뚝딱!'하고 완성된 완료적 상황이라기보다,
끝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며 거리를 좁혀가는 무한대의 진행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사이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향해 베푸는
사랑과 연민과 수용과 양보와 희생이 각자 내부의 하느님을 드러내게 되고,
거기서 솟아나는 동질감과 일체감이 일치를 희망할 때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아시는 하느님께는 완성태의 하나 됨 이전에,
일치를 향해 가는 과정까지 포함해 "하나 됨"일 것이라 믿습니다.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사도 바오로가
수석 사제들과 최고 의회 앞에 서게 된 사건을 보여줍니다.
무자비한 전쟁에 익숙했을 천인대장이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다"(사도 23,10)고 하니
그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바오로 앞에는 당시 종교지배층의 두 권력,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여부로 뜻이 갈린 사람들입니다.
첨예한 대립의 현장에 선,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비록 그는 신념이 다른 이들 한가운데 서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이신 성부 성자께서 현존하시고,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염원이 존재하기에
적어도 바오로를 통해 "하나 됨"의 시동이 걸린 것이라 보여집니다.
결과가 나오기는 요원하나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사도 36,6)라는 증언으로
이미 씨앗은 뿌려졌으니까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왜 꼭 예루살렘이고 꼭 로마였을까요?
모든 이들의 하나 됨을 향한 예수님의 바람은,
구약에 묶여, 눈과 귀를 닫은 유다인들의 땅 예루살렘에서뿐만 아니라,
황제와 이교신을 숭배하는 제국주의 폭력의 온상지 로마에서도 선포되고 증언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극점에 선 이들이 방향을 틀어 서로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면
비스무리한 것들을 조금씩 양보하며 이루는 일치에 비해
실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천 년 넘게 지난 오늘 우리는 그 열매를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은 선한 지향을 가지고 모인 이들의 영원한 바람이자 숙제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염원이기도 하고,
우리를 당신 모상으로 지어내신 하느님의 꿈과 기대이기도 할 겁니다.
정치, 종교, 사회, 이념, 성별, 계급, 빈부, 나이, 인종, 민족, 국가, 소속, 직업, 재능, 취미, 성향 등등
미처 다 셀 수 없이 무수한 다양성을 안고,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서로를 향해 나아갈 때
하나 됨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완성은 내 안의 예수님(과 그분 안의 하느님)과
상대방 안의 예수님(과 그분 안의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고, 이 기도는 이루어지는 중입니다.
그러니 벗님, 용기를 냅시다!
세기의 역전극
박상대 마르코 신부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의 복음(15,26-16,15)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 하느님의 정체는 실제적이고, 학습적인 차원으로 계시되었다.
성령 하느님의 실제적인 차원은 굳건한 신앙의 행위에 대한 ‘보호자’로 계시된 점이고,
학습적인 차원은 올바른 신앙의 내용에 대한 ‘진리’로서의 계시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파견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조건으로 가능한 것이기에(16,7)
다시금 예수님의 ‘떠남’이 언급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떠남’은 ‘잠 동안’에 해당한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조금 더 있으면’ 즉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6절)
오랜만에 제자들이 반응을 보인다.
2차 고별사가 시작되고 꽤나 오랫동안 침묵으로 스승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함’, ‘조금 더 있으면 다시 보게 됨’, ‘아버지께 가심’ 등의
말씀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 보이면서 서로 수군거린다.(17-18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아심을 직감하시지만, 직접적인 해답을 주시기보다는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임을,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이 곧 기쁨으로 전환될 것임을 예고하신다.(19-20절)
제자들의 머릿속이 꽤나 혼란스럽다.
보지 못한다? 보게 된다? 못 본다? 본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보면 보는 것이고, 못 보면 못 보는 것이지, 보지 못하겠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가?
제자들의 머릿속에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는 말씀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님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을 못 보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신가.
성경을 앞에 둔 우리는 이 대목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발현, 승천과 성령강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再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다.
우리 인간은 만나서 헤어질 때, “그럼, 잘 가. 다시 보자.”, “또 보자.”고 말한다.
꼭 언제 다시 볼 것을 약속하지 않더라도 막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에야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별이 죽음이라면 그런 말은 더 이상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못 본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있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 죽음과 부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이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의 고통에서 기쁨이 솟아나고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생명과 기쁨이 죽음과 고통을 대체할 수는 없다.
죽음 없이 생명이 있을 수 없고, 고통 없이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 고통은 참혹하고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제자들 또한 스승의 고통과 죽음의 시간에 죽어가는 스승과 함께 어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두 번 다시는 없을 가장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고 세상은 말한다.
“우리가 예수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제거했다.”고 세상은 확신한다.
세상은 이렇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를 제거했음을 오만과 자만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기쁨도 제자들의 슬픔도 그 어느 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둘을 바꾸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20절)
세상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그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눈을 가진 자도 잠시 동안은 못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오시게 될 성령’ 안에서 그분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 사이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시간적 不在는 제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난다.
다시 없을 世紀의 역전극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사건을 보는 자만이
참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참된 생명과 기쁨은 사실상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효한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