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드레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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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617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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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변인이 된 원인 가운데 성별 또한 빠질 수 없다. 주짓수 도장은 체육관이라는 공간이 으레 그렇듯, ‘형님 문화’를 기반으로 운용된다. 그러니까 형도 아니고 ‘형님’이다. 가끔 누가 ‘형님!’하고 육성으로 내뱉으면 나도 모르게 키득거렸다(이러니까 소외되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보다 웃기는 단어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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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블루 벨트를 받은 다음이었다. 보호와 배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살아남아서 중간 계급인 퍼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짓수를 한때 즐겼던 취미로 추억할 것인가 이 시기에 결정해야 한다.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적자생존의 매트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남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블루 벨트를 받았어도 그들은 나처럼 우울해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 살길을 찾아서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들의 생존법은 ‘믿고 의지할 상급자를 찾아서 구애를 시도하고 성공하기’였다.
남자들은 용케도 누군가를 찾는다. 몸소 터득한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그러면서 자신을 성장시켜줄 또 다른 남자를. 그는 도장에 채용돼서 수업을 담당하는 지도자와는 다른 존재다. 훨씬 더 사적이고 친밀하며 정신적이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매트의 형님’인 셈이다.
상위 포식자를 향한 남자들의 치열하고 열렬한 구애는 주짓수 도장뿐만 아니라 테니스장, 당구장, 기원 등 남자들이 죽치는 여가의 장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이다. 구애에 성공한 피식자와 구애를 받아준 포식자의 주변에는 이상한 사랑이 넘실거린다.
그렇다면 나도 구애할 대상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여성 포식자가 많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렵게 만난 포식자와 마주하자 두려움과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긴장할 것 없다. 그토록 원하던 ‘누군가’를 찾았으니, 이제 준비한 의식만 치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구애는 시작도 전에 완전히 실패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소개하는 동안 포식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아름답고 두려운 포식자는 여성 집단이나 연대에는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나에게 ‘한국식으로 변질한 페미니즘’이 싫다고 했고 ‘주짓떼라’(jiujitera, 주짓수를 수련하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남자들이 겪는 고충’에 관해서 한참이나 설교했다. 그렇게 구애 의식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나는 모든 희망과 기대를 접고 돌아섰다.
그날은 한없이 쓸쓸했다. 다음 날에는 슬픔이 밀려왔다. 이 슬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왜 여성은 다른 여성을 통해서 성장할 수 없는가? ‘언니님’을 모시게 될지언정 일단 구애에 성공하고 싶었다. 하나의 관계를 작은 집단으로 키우면 여성이 소외되지 않는 매트도 허황된 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은 첫 단추를 끼우기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여성들끼리는 근본적으로 온도가 낮다. 엄밀히 말하면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렇다고 싸울 정도로 미워하지도 않는다. 여성 집단 내에는 언제나 조금은 냉랭한 온도와 데면데면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우리는 공감의 천재라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고충에 관해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눈물, 위로, 연민이 솟구친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한 행동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열기가 식고 머쓱해진다. 여성 집단의 열등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소수자 집단의 숙명에 관해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어떤 지향점이나 본보기가 없다. 이대로 가면 뭐가 되는 걸까? 아마도 ‘주짓수를 오래 배운 여성’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후 블루 벨트로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 구애를 거절한 포식자를 다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주짓수를 버릴 수 없어서 남성을 지향하고 본보기로 삼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자 다시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가 겪었을 좌절과 한계를 가늠하기만 해도 고독했다.
첫댓글 여성들은 서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정도로 거리감 유지한다는거 공감해요. 선배 여성을 보고 반가워해도 그들은 이미 남초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변형을 거친 후더라구요. 그 선배들이 느꼈을 벽도 글쓴이가 느꼈을 좌절도 다 이해되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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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아파요 ㅠ
씁쓸하네요 ㅜ 생각 못해본 부분인데 공감가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