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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공지예약신청 스크랩 건강보따리 찾아간 남원읍 한남리 내창길
걸레중광 추천 0 조회 200 15.08.01 22: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건강보따리 찾아간 남원읍 한남리 내창길

 

한남리 건강 보따리마을 표석 

한남리는 서귀포시가지에서 동쪽으로 약 15㎞ 지점에 있는 마을로 주민의 95% 이상이

감귤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산간마을로 마을면적의 72%가 초원지대다.

국제인증을 받은 제주시험림(사려니오름)과 친환경 녹색길인 머체왓 숲길,

생태 하천인 서중천을 비롯해 한남 7경의 명소가 있다.

한남리는 지난 2003년 감귤정보화마을로 지정되어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됐으며,

주민들은 '건강'이라는 테마로 '한라산 너머 남쪽 건강보따리 마을'로 탈바꿈하고 있는 마을이다.

 

한남리 노인정 앞 정자(漢南亭)

 

하눌타리 전망대와 한남리 어린이 집

 

한남리 마을 안내지도

 

한남리 내창 생태문화 탐방로 안내문

 

 법상치 않는 집으로 가는 길

 

족쟁이수?큰물

한남리 마을회관 동쪽 한남교 남쪽 50m 지점에 하천이 굽어지는 곳에 위치한 큼 물통으로

하눌타리 쉼터 북쪽 절벽 아래 자리 잡은 이 소(沼)는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수량이 풍부하여 마을 주민들은 ‘큰물’이라 하여 상수도가 공급되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돼 왔으며, 바위 절벽과 바위굴은 하천 웅덩이에

득고인 물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곳이 기도 하다.

 

 족은 물

 

 \쇠물도

牛?馬 급수용으로 사용하는 연못의 입구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말과 소가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이 물을 마소의 급수용수 뿐 아니라 마을주민의 생활용수로도 이용하였다고 한다.

 

 한남리 서중천 탐방로

 

 달달한 꽃향기 가득한 칡꽃(葛花)

 

 숯굴터

제주에는 곶자왈이라 불리는 바위와 나무들이 엉켜 자라는 원시림들이 있다.

이곳에서 지라는 나무를 벌목하여 숯을 굽던 숯가마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한남리 마을에 울창한 나무들이 많이 자라 이곳에서 숯을 굽던 숫가마터다.

아마도 제주지역에서 가장 큰 숫가마터라고 할 수 있다.

제주의 숫가마는 일회용으로 만들고 숯을 구어낸 후에는 허물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곳 숯가마터는 일회용이 아니라 반영구적으로 사용되던 숯가마터다.

숯가마터 내부에 돌을 쌓고 몇개의 배연구를 만들고 돌벽 내?외부 흙으로 마감한다.

 

  숯굴?낙인장 안내문

이 곳 숯굴은 마을 인근에 나무들이 황폐해 지자 높은 지역으로 숯가마들이 옮겨지만서

소나 말들이 낙인을 찍던 장소롤 활용 되기도 했던 곳이다.

 

 하전 계곡에 위태하게 자라는 거목

 

 한남리 서중천 탐방로

 

청수(廳水) ? 청소(淸沼)

소(淸沼)는 맑고 깨끗하며 수심도 깊은 소(沼)이로

80년대만 하더라도 어린이들의 한여름 목욕하며 놀이터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나무만 무성히 우거져 있다.

 

 부그리궤

고나물교 남쪽 약 500여m 한천계곡에 위치하며 바위그늘 모양이 마치 부그리(진득이의 제주어)

처럼 둥그스럼 하게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이 바위 동굴에는 마을이 무사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서중천을 따라

제일논다리 밑 ‘춘양이괴열’과 서중천 중간지점 어우창 밑 ‘톡궤, 거린오름앞 어거쉐궤,

제한이곱지궤, 섯내에 ’빌레도궤‘ 등이 있다.

 

  부그리궤 안에서 밖을 본 모습

 

 서중천 탐방로

 

 상여집?상엿집

 

 상여집?상엿집 안내문

 

 상여집?상엿집 내부에는 채막대로 사용되던 나무와 다 썩어져 버린 포장과 끈들이 흔적이 보인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상여 한 틀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여집을 짓고 보관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해 왔었다.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장을 치루고 영구차를 이용하다보니 이렇듯 방치되고 있다.

 

 과수원으로 변해 버린 망동산

 

 한남리 본향 망동산 당밧당 당올레

 

한남리 본향 망동산 당밧당 제단

망동산 당팟당은 한남리 중앙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망동산이라는 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속칭 '당밧'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은 돌담이 둘러쌓았고

주변에는 여러 그루의 팽나무와 후박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팽나무를 중심으로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단은 직사각형의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마치 연극무대처럼 타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당은 약 460여년전 한남리 설촌때 부터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도니다고 하며,

당의 유래는 한남리 마을을 최초 설촌하신 정승벼슬은 지낸 허씨와 그의 부인과 첩의 이야기가

당에 관련되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제일은 음력 2월 12일이며, 제물로는 메 5기, 과일, 소주, 감주, 지전, 물색, 백지,

계란 등을 올리고 돼지고기는 금한다.

 

당주변은 나무들이 무성한 숲은 이루고 있으며, 당 입구와 제단 앞마당에도

잡초들이 무성하고 울타리는 일부 허물어져 가고 있다.

제단위와 주변에는 비원차 찾아온 당궐들이 피웠던 양초와 수줏병 등이 나뒹굴고 있다.

 

서중천교 맞은 편 탐방로 입구

한남리 내창(川) 생태?문화 탐방로는 머제왓 숲길 맞은편 서중천교를 지나 한남리

마을목장 서쪽 끝 서중천을 따라 순환하는 숲길이다.

 

서중천 탐방로

 

탐방로는 많은 사업비를 들여 만들어졌을 텐데 시작은 창대하나 지속적인 관리는 부실한듯 하다.

 

밀림 숲 같은 탐방로

 

 용수(龍水) 

고나물교 서북쪽 300m지점의 하천에 위치한 소이며 수량이 풍부하고

용의 살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중천에는 크고 작은 소들이 발달하여 가축 및 야생동물들에게 생명수의 역할을 한다.

한남리 서중천을 따라 고나물, 허개물, 족쟁이수, 바령수 등 하천에는

사철 물이 고여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릴라 머리바위

 

때죽나무 열매

 

황벽나무

 

제한이곱지궤

한남천 상류인 서중천이 아주 으슥하고 숨듯이 후벼 들어간 절벽에 바위동굴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제한이곱지궤

한남천내에서 가증 큰 궤로 내부로 올라가는 계단은 인위적으로 설치한 것처럼 보인다.

산이나 목장일을 하다가 잠시 소나기를 피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바위동굴에 서기 1948년 4.3때 주민들이 숨어 있다가 무참하게 목숨을 잃었다고 하며,

요즘도 으슥해서 마을주민들이 드나들기를 거의 기피한다고 한다.

 

 커다란 바위들로 이루진 제한이곱지궤에서 서쪽으로 높은 절벽은 나무가

우거지기 전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멀리서 하얀 색으로 보여 풍수지리적으로

좋지않다고 하여 무덤을 쓸 때 방사용 돌담으로 쌓은 곳도 있다고 한다.

 

탐방로 소경

 

밀림 숲 같은 탐방로

 

용암제방

 

용암제방

 

서중천은 한라산 해발 1,280m에 위치한 흙붉은오름에서 발원하여 남원읍 한남리 중심부를

가로질러 의귀리와 남원2리의 경계지점에서 갈라져 신풍리와 하천리를

갈라놓으며 바다로 흘러간다.

서중천의 지질 및 식생의 특성은 하폭이 좁고 하천바닥이 특수성이 큰 현무암과

기암절벽으로 형성되어 있고 용암층 밑으로 지하수가 흐르는 건천이며,

상록활엽수인 구실잣밤나무와 조록나무 등 각종 식물로 숲이 어우러져 있으며

원앙새 및 각종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생태이 보고이다.

 

 용암제방

점성이 강한 용암이 굳어지는 과정에서 커다란 덩어리고 한쪽 면으로 쏠리면서

틈이 벌어진 제방처럼 형성된 것을 용암제방이라 한다.

서중천 하천 한가운데 물이고인 소(沼)를 형성하고 있고 양쪽이

길고 커다란 바위로 용암제방이 형성되어 있다.

 

하천 바위타고 뿌리를 드러낸 사스레피

 

새끼줄용암(ropy lava)

 

새끼줄용암은 파호이호이(pah-oehoe) 용암의 일종으로 밧줄이나 로프 형태를 보이는 용암으로

흐르던 용암이 식어가면서 위쪽에 있던 용암이 공기와 접촉하면서 먼저 식기 시작한다.

먼저 굳어지기 시작한 용암이 무게에 의해 경사면으로 밀릴 때 밑에 있던 용암들도 식고,

밀리는 과정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새끼줄 용암이 형성된다.

이곳에서는 밭을 쟁기로 이용하여 밭갈이를 한 형태의 새끼줄용암이 분포하고 있다.

 

용암협곡을 따라 기암괴석들과 크고 작은 포트홀이 즐비하다.

 

오리튼물

한남천에 있는 큰 소(沼)인데 수량이 풍부하며 늘 오리가 서식하며,

물위에 한가롭게 떠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도 오리들이 찾아오곤 한다.

올리는 올란이 > 올랭이>과 아울러 오리, 튼>은 뜨다의 '제주어'이다.

 

밀림 숲 같은 탐방로

 

절도(절터 입구)

이 지역에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거기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남리 북쪽 공동목장 안에 양쪽으로 하천이 모이는 삼각형의 터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절로 넘어 다녔던 길로 추정되는 곳이다.

 

절터

이직도 절터로 추정되는 이곳에는 기왓장, 깍은 돌 등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며,

이 절터에 있었던 사찰은 고려시대의 사찰로 추정되는데 조선시대

척불승유정책에 따라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 근 玄氏 집안의 비석에는 이곳 지명을 사도(寺道)라고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탐방로 개설시 설치한 평상 쉼터.. 으찌!!

 

함께하는 나무

 

용암협곡

 

 

 

이름 모른 버섯

 

밀림 숲 같은 탐방로

 

 한남리 서중천 탐방로

전망대

 

한남리 마을목장 풍경 

한남리는 서귀포시가지에서 동쪽으로 약 15㎞ 지점에 있는 마을로 주민 95% 이상이

감귤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산간마을로 마을면적의 72%가 초원지대다.

 

목장길을 지나며

 

 한남리 서중천 탐방로

 

풀고사리

 

 잃어버린 마을 한남리빌레가름 마을 고나물 길

 

잃어버린 마을 빌레가름 표석

이 곳은 1948년 11월 7일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빌레가름 터이다.

‘빌레가름’이란 지표면 바로 밑에 암반이 널려 있는 데서 유래한다.

1845년 무렵 제주고씨 네 형제들이 처음 이 곳에 삶의 둥지를 튼 이래 24가호 130여 명의

주민들이 고나물 인근인 이곳에 고씨 집성촌을 형성하고 불모지를 일구어 보리, 조,

밭벼, 콩 등 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이 마을에도 여지없이 불어닥쳐 마을이 전소되었으며, 주민들은 거린오름 기슭이나

서중천 주변에 흩어져 몸을 숨기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이 와중에 25명이 희생되었고 후대가 끊긴 가호만도 5호가 된다.

1953년 한남리가 현재의 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재건되면서 남아 있는 100여 명의 주민들은

그 때의 비극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빌레가름으로 돌아오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억울하게 희생된 고혼들을 신원하고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연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상생의 염원을 모아 이 표석을 세운다.

2002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잃어버린 마을 한남리 빌레가름 올레 길

 잃어버린 빌레가름은 4.3의 아픔을 보여주진 않으려는 듯 갑자기 짙은 안개가 드리운다.

 

빌레가름 올레길

빌레가름은 한남리 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한 현무암 지대로

 이 일대는 지표면 바로 밑에 암반이 깔려있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곳으로

약 260여년 전 제주고(濟州高)씨 부인 현씨가 들어오면서 30여호가 정착, 고씨 집성촌을 이뤄

마을을 이루니, 암반위에 조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선비들이 많아 유림촌으로도 유명하다.

빌레가름은 한남리 본동과 약 2㎞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1845년경 제주 고씨

4형제가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었었던 곳이다.

‘빌레가름’이란 지표면 바로 밑에 암반이 널려 있는 데서 유래한다.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빌레가름 주민들은 4.3사건 발발 후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1948년 11월 7일 불시에 마을에 들이닥쳐 가옥을 소각하던 토벌대는 미처 피하지 못한

노약자 등 4명의 주민을 현장에서 사살되고 또 산속 피난과정에서 토벌대에 발각된

주민들은 현장에서 총살당하거나 군부대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약 24가호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던 이 마을의 4·3사건 희생자는 25명으로, 주민 4명 중 한 명꼴로 희생되고

가옥들은 모두 불태워져 삶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렸다.

이후 주민들은 ‘제안이곱지’ 등의 하천변 궤(바위 굴)나 거린오름 뒤편 ‘고냉이든밧’ 등의

깊은 숲속에 몸을 숨겨 힘든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4·3사건의 풍파 속에 살아남은 한남리 주민들은 1953년경 한남리 본동에 성을 쌓고 재건했으나,

본동과 멀리 떨어져 있던 ‘빌레가름’은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오순도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집들은 흔적이 없고 신우대만이 남아 있다.

 

한남리 선사유적지 바위그늘집자리

 

한남리 선사유적지 바위그늘집자리 안내문

 

바위그늘집자리

한남리는 마을 해안가 북쪽으로 3.5km 떨어진 마을 서쪽 구릉 지대에 위치하며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확인된 선사유적지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집자리는 높이 165cm, 깊이 350cm로 정남향 방향으로 바깥에는 용암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1985년 발굴당시 조개. 동물뼈. 토기 등이 일부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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