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 조마 하며,한번도 한눈 팔지 않고 150분을 보냈다.
평소 별로 영화를 즐겨보지 않았고,남들과 대화에 빠지면 섭섭할 영화들 즉 이름난 영화만 그것도
제때에 본적이 없고 철 지난 다음 보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들의 평가도 아주 달랐으며,영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적 도 없었다.
그런데 제발로 걸어가,그것도,심야 영화를 본 것이다
2.이청준의 벌레이야기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읽었다
40이 넘어 낳은 약국 부부의 아들 알암이.
주산 학원 귀가 길의 아이의 유괴,
아이를 찾기 위한 기복적인 신앙 생활,아이의 살해를 확인한 후의 아이의 영혼 구원을 위한
광신적인 신앙 생활,
이후의 하느님의 구원과 인간적 위로사이의 갈등.
옆집 집사님의 끝임없는 설교, 설익은 자의와,강한 타의가 뒤섞인 용서 결심.그리고 교도소 방문
원장과의 대면,
아이를 살해한 원장의 성자 같은 모습
주님의 용서를 받았으며,구원 받아 새 삶을 얻었다는 원장의 의연함
원망과 분노,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배신감
인간적 위로가 결여된 구원만을 이야기 하는 집사님.
망연자실,자아 상실,원망과 통곡, 그러면서도 변하지 않는 현실.
자신의 구원조차도 기구할 의지 마저 잃어버린 왜소하고 나약한 인간의 본성.
그 후,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는,원장의 두 눈과 신장 기증을 통한 평화로운 죽음.
용서의 표적마저 잃어버린 절대적인 절망감과 또 다른 배신감.그리고 자살.
이렇게 벌레 이야기는 결말을 짖고 있었다.
3.신애와 종찬
이창동 감독은 지독히도 똑 바르게,자신이 가고자 하고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마치 날카로운 면도날로 선을 그어 놓고, 그 선 위에서 영화를 시작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작은 종지에 꼭 맞게 반찬을 담아 놓고,
꼭 그만큼만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강요를 하였다.
신애가 그러했고, 종찬 또한 소설에 없는 가공의 인물을, 이창동 감독은
신애에게 요구 했던 것 처럼, 종찬에게도 철저하게 의도 되고 절제된 대사와 행동을 요구 하였고,
두 명의 배우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다.
신애의 절망적 저항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 짖는 소리와,
부릅뜬 눈동자.
종찬의 어눌한 듯 툭 툭 던지는 말들,,
그러면서도 감독이 말 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한
“밀양이라고 별거 있나요,다 사람 사는 곳이지요,,”
감독은 이토록 철저하게도 참혹한 현실을 만들어 놓고,
옴짝 달싹 할 수 조차 없도록 신애를 가두어 놓고,
종찬으로 하여금 숨 쉴 공간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
4. 신앙이라는 이름
달마대사:
마음,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 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구나..
상처를 받으며 옹졸해진 마음.
인간적 위로 없이,느닷없는 신앙의 이름으로의 초대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맘과 몸으로 온전히 용서하기 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치유되기 위한 아픔의 노출.
이를 넉넉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넉넉하지 못한 주변 환경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며,상대방이 뉘우쳤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과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 보는 눈을 가졌을 때 비로서
몸과 마음으로 용서가 이루어 지며,이는 대단한 은총인 동시에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신애는 복수와 용서의 갈림길을 넘나들며,비 정상적인 생존본능에 이끌려
마지막까지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곳 마지막 이라고 생각된 바로 그 순간이,진정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아니 었을까.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밀양이라는 더 없이 좋은 자연 풍광에 자신을 한번 던져 보는 것은 어떠 했을까.
사람들 속에 존재 하시는 하느님은
자연속에도 풍요로운 위로와 위안을 만들어 놓고 계시지 않았을까.
5.개인적 감회
울산과 창원에서 근무를 한적이 있다.
밀양은 지금은 부도로 존재여부가 알 수 없어진 주요 거래처가 있었다.
한달에 두세번 방문을 하였고,
인천 집에 올라 오지 않는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가지산,재약산,천황산과 표충사,얼음골등
밀양을 근거지로 하는 주변 산들을 자주 찾아 갔었다.
절대적 위로.
자연이 주는 위로와 위안은,분명 또 다른 선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 하고 그러면서도 끝임없이
퉁퉁한 몸을 이끌고 산으로 산으로 찾아 갔던 것은,
어쩌면, 그 속에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결코 현실은 한가롭게 산속을 거닐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나는 어쩌자고 그토록 오랫동안 산속을 걸었을까,,,,
산속을 거닐다 신애를 만났어야 했었다.
작은 천사가 자동차 수리공이 되어 나타난 종찬이가 한,두 발 자욱 뒤어서 건들 건들
허허롭게 웃으며,따라오고
앞서가는 멍한 표정의 신애를 나는 만났어야 했다…
6.후기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소설과 다른 결론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이창동 감독이 신애에게 느끼는 연민의 표현 일지 모른다.
허름한 거을속에 자신을 바라보며,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모습.
그 알 듯 모를듯한 표정.
그 순간 찾아온, 종찬에게 거울을 맡기는 신애의 모습을 통하여,
감독은 병아리 처럼 여리고, 홀씨 처럼 작지만
희망이라는
숨겨진 햇볕을 은근히 그러나, 진한 여운을 남기며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첫댓글 내일 친구들과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이 글은 영화감상 후 읽어야겠다. 그때까지 기다려~ㅎㅎ
나도 함 봐야지~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