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2ㅡ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조선의 역사를 보면 뭔가 해낼 만한 왕이나 세자, 또는 인물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너무 일찍 죽고 만다. 예종, 귀성군, 남이도 그런 예이다.
예종은 재위 기간이 1년 2개월밖에 되지 못했다.
실록에 따르면 예종은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 총명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음)하고 공검연묵(恭儉淵默, 공손하고 겸손하며 속이 깊고 말이 없음)하며, 서책에 뜻을 두어 시학자(侍學者)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씩 진강(進講)하게 하고, 비록 몹시 춥거나 더울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병세가 깊어져 자기 죽음을 예감한 세조는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세조 14)에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예종의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짧은 재위 동안 나름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나 채 실행해보기도 전에 느닷없이 죽고 만다. 하지만 남이를 역모로 몰아 죽인 것은 역사의 죄인이 되고 있다.
세조 말기부터 훈신 세력과 종친 세력의 대립이 격화된다.
예종 1편에서 말했듯이 이 대립은 세조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훈신 세력의 힘이 너무 거대해지자 세조가 죽기 전에 젊은 세자를 위해 그들을 견제할 신진세력을 양성하려 했다
그래서 세조 말기 세조는 조선조는 물론 우리 전 역사를 통틀어 존재하기 어려운 인사를 단행한다. 그들 중 종친 귀성군 이준과 외척인 남이의 사례는 특히 놀랍다.
하지만 이 인사는 세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예종이 즉위 후 세조 뜻대로 예종이 젊은 종친인 이준, 외척 남이와 힘을 합쳐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하는 훈신을 견제해야 하는데 예종은 정반대로 갔다.
예종은 귀성군 이준이나 남이를 싫어했다. 예종이 세자시절부터 세조가 그들을 너무 총애하는 모습에 질투와 함께 경계심을 느꼈다.
특히 귀성군 이준은 예종의 사촌 형으로서 언제든지 예종을 몰아내고 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 서열 몇 번째 순위 안에 있었다
그런 귀성군 이준이 총사령관이 되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니 스무 살이 못 된 젊은 예종이 질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귀성군 이준은 역사서에도 '귀성군은 가문 좋고(왕가) 키도 훤칠했으며 잘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세조의 후궁 덕중이에게 연애편지를 받는 당시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불충(?)한 짓이 벌어졌으나 귀성군은 곧바로 세조에게 보고해서 오히려 세조의 사랑만 더 받았다.
세조의 후궁으로서 열정에 빠져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연애편지를 쓰기까지 한 덕중이의 용기와 안타까운 사랑이 그 사랑 대상인 귀성군이 세조에게 직접 보고로 허망하게 끝나 버린 것이 가슴 아프다.
귀성군 이준은 이처럼 자신의 행실에 신중하고 사리판단이 밝았다면 밝았다. 종친이든 훈신이든 신하들 사이에서 처신도 두루두루 잘했다.
그래서 예종은 세조의 유지에 따라 즉위 직후 귀성군 이준을 그대로 영의정에 두고 섭정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귀성군 이준에 대한 경계심은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남이로부터 벌어졌다.
남이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증손자이며, 태종의 외손자로 (어머니가 정선공주貞善公主:태종의 4녀임)태어났다.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기도 했다. 예종의 외가 당숙 펄 되는 외척이었다.
남이는 1457(세조3)년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남이는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고 무예도 뛰어났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귀성군 이준과 대장군으로 출전하여 뛰어난 무공을 발휘하고 출셋길에 올랐다. 이어서 남이는 파저 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일약 조선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세조는 이런 남이를 귀성군 뒤를 잇는 병조판서에 제수한다. 남이 나이 귀성군과 같은 스물여덟이었다.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들은 외척을 병조판서에 임명해서는 안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세조는 강행한다. 그만큼 남이를 믿고 총애했다
그런데 남이는 귀성군 이준처럼 자신을 감출 줄 몰랐다.
남이는 자신 야망을 공공연하게 풀어 내고 있었다. 남이가 백두산에 올라 썼다는 시를 보면 남이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을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 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정말 지금봐도 대단한 호기와 기개이다. 하지만 이 넘쳐나는 호기와 기개가 남이의 뒷덜미를 잡는다.
신진세력의 약진을 고까워하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에게 호기와 기개를 숨길 줄 모르는 남이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예종의 눈에도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예종은 귀성군과 남이를 시기 질투했다. 세조가 예종을 위해 심어놓은 신진세력을 훈신들과 함께 시기 질투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런 예종은 세조가 승하하고 등극하자마자 남이를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정예 왕실 친위대인 겸사복 지휘관 하나였던 종 2품)으로 좌천시킨다. 명분은 외척은 군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훈신들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때쯤 유자광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유자광은 앞으로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조선의 최대 간신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가 꾸미는 계략과 모사로 수많은 중신이 죽임을 당한다. 연산군 시절 무오, 갑자사화에도 깊숙히 관여했고 중종반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유자광인 만큼 따로 한 편으로 다루고자 한다
어쩌든 무예가 출중했던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에 세조에게 자진 출병하겠다는 서한을 보내 세조의 눈에 든다. 그리고 이시애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서얼 출신인데도 파격적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유자광 입장에서는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특히 나이가 엇비슷한 남이와 비교해서 더욱 그랬다.
유자광은 남이를 시기 질투하고 있었고 예종은 물론 한명회, 신숙주 등 훈신 세력들도 자기와 같은 생각으로 남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간파했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인 만큼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더는 출세하기 힘들다 보았다. 단 역모를 고변하면 서얼 출신도 공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유자광에게 남이는 좋은 먹잇감이었고 출세 발판이었다. 그런 유자광에게 기회가 왔다.
남이가 어느 날 유지광의 집에 와서 “혜성이 없어지지 않는데, 광망이 희면 두 해에 걸쳐 반역이 있다. 그러니 내가 미리 선수를 치려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유자광이 남이 집에 가서 엿들었다고도 전해진다.
어쩌든 유자광은 곧 바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앞서 말한 남이가 백두산에서 지었다는 시를 증거로 댔다.
유자광은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男兒二十未得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서 보고 했다.
백두산의 평정비 있는 곳에 몇 번이나 사신을 보내 비문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한결같이 ‘미득국(未得國)’이라고 증언했다.
고문을 못 이긴 남이는 이시애 난 평정 때의 대장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강순을 같은 공범으로 지목하여 자백하여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남문 외형장으로 가는 수레에서 강순이 남이에게 "왜 나를 억울하게 죽게 하느냐" 고 묻자, 남이는
"당신은 영의정 자리에 있고 나이 80으로 함께 평정을 간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몸을 사려 한마디 변호도 하지 않은 불의를 범해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강순은 어처구니가 없어 좌우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젊은이와 친하다가 이런 화를 당하는구려. 반역이 어떤 죄인데 장난을 치다니..."
강순의 아내와 자제들도 죽음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남이는 젊은 나이에 원통하게 죽었지만 우리 무속신앙에서는 신령으로 남았다.
귀성군은 성종편에서 더 다루기로 한다.
이어서 유자광편이 이어집니다.
사진은
첫 번 째는 무속신앙속의 남이장군
제일 아래는 유자광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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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