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강한 회귀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받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경향이 강한 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비교적 중앙으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서양 사람들은 나가는 문을 Exit 라고 합니다. 단순히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출입구라고 합니다. 즉 나가는 문이요 다시 돌아오는 문이기도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라고 하여 올라가는 기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승강기라고 하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기계를 뜻하고 있습니다. 빼닫이도 영어로 뺀다는 뜻밖에 없지만 우리에게 뺐다가 다시 닫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합니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단어들이 시사하듯이 우리는 강한 회귀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귀의식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종교심이 강한 것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떠나면 불편하고 돌아가야 편안합니다.
떠난 자의 침묵
이러한 현상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떠난 자의 침묵과 고통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두마에 대한 경고라고 합니다. 두마가 어떤 나라인가는 의문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70인 역에서는 두마를 이두메라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두메가 헬라에서는 에돔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두마를 에돔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마를 에돔으로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본문 11절 초두에 "세일에서 나를 부르며..." 라고 한데 있습니다.
에돔의 여러 도시들은 세일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또 세일산의 세일은 털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에돔 지방의 산의 이름을 세일이라고 한 것은 털이 많은 에서와 관계가 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즉 본문의 두마는 에돔 족속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두마라는 뜻은 침묵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에돔 속을 왜 두마라고 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에돔 속이 아무 소리도 못하는 침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겪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에돔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의 후손입니다. 그날 이후로 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반면 에서는 인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족속은 아무 소리도 할 수 없는 침묵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기쁨도 찬양도 없습니다. 웨슬리는 성도가 감사의 찬양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영성의 최고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것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 자체가 멋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는 이러한 기쁨도, 감사도, 찬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깊은 침묵이 저들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현실입니다.
0고통속의 부르짖음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침묵이 있을 뿐 아니라 고통 속에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 에돔의 사람들이 파숫군에게 밤을 묻고 있습니다. 지금 저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밤중에 처해 있습니다. 아침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묻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절망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에돔 족속은 이 절망의 밤에 처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롯의 삶을 보십시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갔습니다. 롯이 소돔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소돔은 물론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양들을 위한 풀이 넉넉한 곳이었습니다. 물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죄의 소굴이었습니다. 동성연애가 극심했던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던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롯의 삶이 잘 풀렸습니다. 목축을 하기에도 좋았습니다. 재물도 많이 모았을 것입니다. 출세도 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가 창세기 19장에 보면 성문에 앉아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출세했던 증거입니다. 당시 성문에는 아무나 앉을 수 없었습니다. 롯이 출세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원히 승승장구하며 잘될 줄 알았겠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아내를 잃고 빈손으로 도망 나오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임하는 밤의 모습입니다.
선지자에게 묻다
하나님을 떠났던 에돔 족속이 깊은 밤에 빠져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선지자를 찾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질문을 받은 사람은 예언자 또는 선지자입니다.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라고 하였습니다.
즉 고통 가운데 있었으니 선지자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세일에는 물을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점쟁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점성가도 있었을 것입니다.
술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마다하고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별 문제 없을 때는 지식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시시한 문제는 경험에 물어볼 수 있습니다.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심각한 질문에 저들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고통 가운데서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로마로 끌려가는 바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끌려갈 때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때는 금식하는 가을이 지났으므로 풍랑이 이는 동절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이 지나고 가자고 했습니다. 무리하게 운항하였다가는 배와 화물과 생명에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죄수들을 인솔하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바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경험 많은 선장의 말이 때로는 유익합니다. 경험도 소중합니다. 계산이 빠른 선주의 생각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문제를 풀어나가려면 계산도 필요합니다. 백부장이 저들의 말을 더 믿고 바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배가 잘 나갔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왔습니다.
백부장과 선장은 자기들이 바른 선택을 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배는 어쩔 수 없이 풍랑에 떠밀려 갔습니다. 살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짐을 다 내던졌습니다. 배의 기구들도 다 떼어 버렸습니다. 저들이 의지하던 것을 다 버렸습니다.
저들은 그제야 바울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늦었지만 그래도 바울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늦게라도 바울의 말을 듣게 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이 복된 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바울의 지시를 따라 안전을 찾았습니다. 저들은 바울의 말을 따라 생명을 건졌습니다. 지혜도 중요하고 경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점쟁이나 무당도 찾아가면 위로 받을지 모르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지자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복된 길입니다.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
에돔 족속이 선지자를 찾아와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라고 물었을 때 선지자는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참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여러 책도 읽었습니다. 결국은 성경을 읽고 또 읽는 가운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평범한 말이지만 귀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침이 오면 또 다시 밤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뒤에 나오는 것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quot;는 말씀과 연결시킬 때 놀라운 메세지가 선포됩니다.
선지자가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막연하게 아침을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다림, 그것은 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기다리고 있노라면 아침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밤이 오고야 맙니다. 막연한 기다림은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해방되어 귀국하여 나라를 세워보려고 하였으나 채 기쁨도 누려보지 못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거듭된 침략으로 고통의 밤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2000년 긴 역사 속에 나라 없는 민족으로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36년간 일제의 압박으로 고통 당하다가 해방이 되었으나 불과 5년만에 동족상잔의 처절한 6.25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36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기다렸습니까? 그리고 기다리던 아침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큰 기쁨이 채 성숙하기도 전에 또다시 밤이 왔으니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막연한 기다림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음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돌아오라
선지자는 밤을 묻는 사람들에게 "아침이 오리니 밤도 오리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물으려거든 물으라"는 것은 밤이 얼마나 되었고 얼마 있으면 아침이 오겠는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즉 기다리되 돌아와야 궁극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IMF 라는 큰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언제 끝날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아침의 빛이 보디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아침이 오겠지요. 기다리고 있노라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겠지요. 분명 올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밤이 온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아침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다림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어지는 밤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리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존 뉴톤은 깡패대장으로 2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노예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도처에 들어갔습니다. 한참 취한 김에 장난 삼아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한 구석에 앉아서 얼굴을 변하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는 점점 숙여지고 드디어는 땅에 엎드려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날 그가 들은 설교는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때 모든 문제를 해결했던 탕자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날 존 뉴톤은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여 신생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체험을 기억하며 찬송시를 썼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성도 여러분! 돌아오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