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업상의 세력 범위를 뜻하는 말로 ‘역세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져서 부동산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도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일상용어가 되었습니다. 주택건설신문이라는 신문에 이런 기사내용이 있었습니다.『입지가 뛰어난 주택 단지는 거주 수요가 탄탄해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몰리는 곳의 집값이 더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시설이나 장소에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권’ 마케팅이 활발해진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역세권’은 세권계의 시조새라 할 수 있습니다. 역세권은 지하철 역과 가까운 아파트를 말하는 용어입니다. 이동의 편의성을 보장하는 데다 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상권이 형성된 만큼 지하철역 또는 기차역은 부동산시장에 있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집니다. 역세권의 절대적 기준이 없는 만큼 ‘역세권’이라고 주장하는 아파트가 점점 많아지자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지하철역과 딱 붙어있다는 뜻으로 ‘초역세권’, 지하철 노선이 여러 개 중첩된 노선 개수에 따라 ‘더블역세권’, ‘트리플역세권’, ‘쿼드러플역세권’이란 용어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세권이 있습니다. 쾌적한 자연환경을 찾는 사람들은 숲이 가까운 ‘숲세권’아파트를 찾습니다. 우리나라가 초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대형종합병원과 가까운 아파트를 ‘병세권’아파트라고 합니다. 대형쇼핑몰과 가까운 아파트란 의미의 ‘몰세권’, 백화점 인근 아파트를 ‘백세권’, 스타벅스 인근 아파트란 뜻의 ‘스세권’ 혹은 ‘별세권’, 국공립 도서관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세권’, 퇴근 후 한잔하기 좋은 동네란 뜻의 ‘주세권’ 이라는 용어도 부동산시장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 슬리퍼를 신고 편한 복장으로 편의시설 이용이 가능한 아파트란 뜻으로 ‘슬세권’이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또한 뜨거운 교육열을 반영된 학교 관련 신조어도 있습니다. 학군이 좋거나 학원가가 몰려 있다는 뜻의 ‘학세권’, 아파트단지내에 초등학교가 있다는 뜻의 ‘초품아’, 초등학교가 단지 바로 옆 코닿는 곳이 뜻의 ‘초코아’도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이젠 하다하다 탁 트인 시야의 강이나 호수, 바다, 공원 등 탁월한 조망권을 갖췄다는 뜻으로 ‘뷰세권’, 비판이나 욕 많이 들으면서 이름이 난 아파트가 집값이 오른다는 뜻으로 ‘욕세권’도 있습니다.』이것이 신문에 나온 ○세권 관련 아파트기사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O세권 아파트에 관심을 두든지 그런 아파트를 찾아볼 환경에 놓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제가 어릴 때 자랐던 교회 옆에 큰 대형아파트를 보면서 O세권 아파트가 이런 것도 있구나 경험했습니다. 그 아파트는 특별하지 않은 아파트였고 학군이나 교통이나 풍경이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아파트였지만 그 아파트가 한 순간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가격이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런가?"봤더니 제가 출석하며 신앙생활하던 그 교회 성도들이 너나나나 할 것없이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 교회가까운 곳에 와야 한다며, 그래야 새벽기도, 금요철야, 주일예배, 성경공부, 각종 봉사활동 등등 할 수 있다며 무더기로 교회 옆 아파트를 찾고 그 아파트를 사는 바람에 갑자기 아파트 가치가 올랐습니다. 제가 자란 교회 성도들이 교회 옆 아파트를 갑자기 많이 구입하게 된 이유로 아파트가격이 급격하게 올랐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하나요? 교회근처니까 ‘교세권’이라고 해야하나요? 아무튼 사람들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 어떤 대상의 근처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을 나중에 평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오늘 본문의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나라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예수님께 무엇을 물었고 무슨 대화속에서 그가 하나님나라에 가까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는 지 우리가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 하나님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우리가 알아야 할 참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적 양식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가치관이 제대로 서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며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의 신앙회복을 위해 강하게 전한 메시지는 우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외에 다른 것에 절하며 하나님외에 다른 것이 자신에게 평안과 기쁨을 준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스라엘이기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백성이나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추구하며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세상의 것을 주인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우리는 에스겔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14장 3,4절입니다.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우리의 마음에 두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의지하고 따를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죄악이 됩니다. 인간이 범하는 죄악중에서 최악의 죄는 하나님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대신에 다른 어떤 것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섬기는 것이 최악의 죄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실 뿐 아니라 유일하신 신이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이사야 37장 16절입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민족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1967년 아랍공화국과 이스라엘사이에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랍공화국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이 발발 6일만에 아랍공화국이 항복하고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전쟁입니다. 전쟁이 이후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250만 명의 인구가 1억 2천만명의 아랍공화국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총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250만명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나치에게 학살당한 600만명의 전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절망의 적신호를 보며, 내일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고 모실 때 그 절망은 희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가 편히 자는 것처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절망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살 길, 우리 민족이 복받을 길은 이 나라 이 민족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유일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기 위한 첫 조건은 바로 하나님을 깨달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은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만 유일하신 주이신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둘째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데이빗 제러마이어’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 말을 배운다. ‘공부’를 하면서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 ‘달리기’를 하면서 달리기를 배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참 좋은 말입니다. 내가 타인을 섬김으로서 섬기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내가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 사랑의 표현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성경에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성경에는 ‘heart’로 목숨은 ‘soul’로 뜻은 ‘mind’, 힘은 ‘strength’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지성과 의지, 목숨과 본능, 본성, 최선의 노력과 헌신을 다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지, 정, 의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아주 비슷한 말씀이 구약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신명기 6장 4,5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신명기의 이 말씀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면서 신명기에 기록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목숨도 더하여서 오늘 본문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를 다해서 심지어 목숨까지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는 이 만큼만 사랑해야지…’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업무나 과제를 할 때는 목표를 정하고 힘조절하며 컨디션조절을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마음을 쏟아붓고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나의 모든 정성을 다 쏟아내며 그 사람에게만 집중합니다. 목회자도 진정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 교회일, 신앙적인 일, 하나님을 찾는 일에 관심을 둡니다. 자신이 관심을 갖던 취미생활이나 세상적인 관심사에서 멀어집니다. 그 대신 이젠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성도돌보는 일과 교회의 행정등에 더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충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극단적이고 치명적으로 끝까지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도 우리가 지키기에 정말 어렵지만 그것또한 의무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자리잡으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교회간다고 고문받거나 교회간다고 폭력당하거나 교회가기 위해 나섰다가 힘들어서 쓰러진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전심을 다하여 드리다보니 탈진하거나 예배를 전심으로 드리면서 목숨의 위협이나 가족을 잃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건강, 생명, 가족, 나의 힘, 나의 체력, 나의 지식을 온전히 드린 적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14장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7세기 중엽 프랑스에 한 화가가 자신의 생업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원래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누드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 누드화로 인지도가 올라가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어떤 두 젊은이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야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술작품이라고 그렸던 그림을 보며 사람들이 음탕하고 지저분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일이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래 내가 이제 부터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누드화는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 사람의 마음속에 지저분한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그림이 아닌 사람의 심성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림만 그려야겠다.’ 결단한 이후에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제부터는 내가 누드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았으면 해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의 생활형편이 어려워질 수 있고 굶는 날이 생길 지도 모르는데 당신 괜찮겠소?” 이 소리를 듣고 그의 아내는 오히려 정말 기뻐하며 찬성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누드화를 그리지 않으면서 대신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중에 우리가 잘 아는 작품 하나는 ‘만종’이라는 작품입니다. 화가이름이 누구일까요? 중고등학교 미술시간 이론수업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나 잘 알것입니다. 바로 ‘밀레’라는 대화가입니다.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미술가입니다. 세상적인 욕망과 먹고 살 궁리가 우선이었으면 절대 탄생할 수 없었던 작가입니다. 세상에서는 손해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살려고 하니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탈탈 털어서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모든 가치관과 생활환경속에서 항상 하나님만 의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마지막으로 셋째,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1절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표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계명 중에서도 으뜸이고 가장 큰 계명이며 모든 말씀에 적용되는 기독교의 핵심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몸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들과 함께하면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고 서운한 마음에 이젠 더 이상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사회와 나라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기쁨이 넘치고 평안이 항상 함께하며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동부 뉴펀들랜드라는 주에 래브라도해안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 백인들이 거주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고, 그 전에는 척박한 환경 때문에 소수의 에스키모들만 작은 어업활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곳 에스키모들은 오랜 세월을 별 다른 교류없이 살았기 때문에 외부인들에게 매우 배타적이었고 선교를 위해 찾아온 기독교인들에 대해 대단히 위협적이고 마음의 벽이 크게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렌펠목사님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 지역의 많은 에스키모들을 개종시켰고, 또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렌펠 목사님이 나중에 퇴임을 하고 난 뒤에 여러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목사님을 초청했는데, 목사님은 선교의 사명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던 노하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래브라도 지역에는 파도가 매우 심해서 어부들의 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들의 배는 쉽게 망가졌고, 그물은 금방 상했습니다. 저는 먼저 튼튼한 그물을 만들 수 있는 방법과 배를 수리하는 법을 배워서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선교의 비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실제적인 전도는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21세기 전도는 지역사회에 좋은 영향을 줄 때 더욱 효과적입니다. 쓸데없는 변론, 비난과 비방으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과 종교적인 논쟁을 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며 세상과 다른 주님의 사랑으로 말과 행동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야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욕설을 많이 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하거나 자기 사욕만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절대 전도도 안될 뿐 아니라 결국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마음의 문을 막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만 하면 불평이 앞서고 불만의 모습이 가득한 사람은 전도를 막을 뿐 아니라 아예 예수님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 참 사랑을 보여주며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보여줘야할 참 사람, 진정한 사랑은 이웃을 끝까지 변함없이 대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웃을 사랑할 때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무감이나 형식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며 나에게 하듯이 완전한 사랑, 끝까지 하는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웃을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그 정도로 정말 가족에 대해, 이웃에 대해, 나라와 민족에 대해 사랑할 수 있다면 엄청난 헌신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사랑할 수 있다면 정말 이런 사랑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의미있고 행복한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갈라디아서 5장 14,15절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을 지니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속하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하듯이 가족을 대하고 성도를 대하고 이웃을 대하고 나라와 민족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요구나 필요를 이야기하는 주변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경험하고 이렇게 도움을 요청할 상황이라면 내 마음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면 이웃을 섬기며 참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서기관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칭찬을 받기 직전에 이 서기관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마가복음 12장 32,33절입니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서기관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진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전심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고백했습니다. 심지어 이 서기관은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계층의 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종교적 행위와 보여주기식의외식적 신앙내용보다 참 사랑의 신앙, 참 사랑의 행동이 우선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형식적 신앙생활에 매여서 하나님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참 모습을 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형식적 신앙생활에 매여서 이웃을 향한 참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서론에 O세권을 말씀드리며 우리가 가까이 하기를 원하는 곳 근처에 우리의 삶의 거처를 정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에게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곳은 ‘천세권’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 가까운 곳이라는 뜻으로 말을 만든다면 ‘하세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정말 ‘천세권’ ‘하세권’에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백성, 하나님 가까이 있는 백성이라면 이젠 정말 하나님의 존재를 제대로 의식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더 깊게 느끼며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개인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 우리의 이웃에게 임하는 것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