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3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야고 5,1-6
복 음 : 마르 9,41-5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오늘 복음과 독서의 표현들은 꽤 위협적이고 과격합니다.
‘죄를 짓게 하는 요소’를 없애라는 표현을
“잘라 버려라.”, “빼 던져 버려라.” 등으로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말 ‘아포콥토’(자르다)는 무엇인가를 잘라 내어 없어지게 하는 행위를 일컫고,
‘에크발로’(-로부터 빼내서 던지다) 또한 무엇인가를 멀리 던져서
주변에 존재하지 않게 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모두 점진적 과정이나 단계와는 다른 ‘급진’과 ‘극단’을 부각시킵니다.
악의 요소를 단호하게 끊어 내고 분리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소모적이고 무모한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영성 생활에서 만나는 뜻밖의 복병은 나날의 작고 사사로운 변화입니다.
엄청난 비극과 급작스러운 불행에는 꺾이지 않는 강한 힘으로 용감히 대처하면서도
“소금”처럼 자잘한 일상의 습관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소하고 평범한 습관쯤이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스스로 속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는 손, 발, 눈 등 일상의 행동과 연결된 신체 부위를 말하며
그러한 사소함과 평범함이야말로 우리를 악에 노출시키는 의외의 도구임을 경고합니다.
적당한 선행이나 기도만으로 삶과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지 않습니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죄의 도구로 쓰이는
손과 발, 눈을 조심하는 데에 단호한 결단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단호히 맞설 필요가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약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희랍어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하마르티아는 화살 쏘는 이가 과녁을 빗맞히듯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는 핵심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에 물들어 있으면 인간답지 못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고통을 겪고 고통을 또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녁은 당연히 주님입니다.
주님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죄 중에 빠지게 되면서 힘든 삶의 연속이 됩니다.
사기를 쳐서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요?
이런 사람들은 언제 잡힐지 불안해서 공돈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순간적인 만족을 주는 유흥에 낭비하며 쓰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도 모으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뇌물을 줘서 높은 지위를 얻으면 어떨까요?
이 역시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불안함의 연속이 됩니다.
세상의 풍요, 또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다 보면 주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어렸을 때, 복사도 서면서 열심히 성당에 다녔었다고 말씀하시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세상일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당을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 순간 어렸을 때 성당 안에서 지냈던
행복한 기억들이 떠올려져서 다시 성당에 나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나의 과녁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전의 삶을 끊고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아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한 일을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이 아주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 주님으로부터 벗어나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하시지요.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작은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충격받을 만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래야 주님을 과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맛을 낼 수 없음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존재는 이웃과 함께하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주님의 관심 안에 있습니다.
단호한 결단
반영억 라파엘 신부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라 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표양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이란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 제자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이간질하거나 추종의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9,45-47).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죄의 유혹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혹은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 때문에 생기는 유혹을 말합니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세상에 타협하면 주님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9,41-50).
서열 다툼이나 특권 추구의 유혹을 극복하라는 촉구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시길”(에페5,10).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하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우리가 자주 빠지는 일이기에 가슴이 섬찟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죄짓게 하는 도구 세 가지,
곧 자신의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고 빼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구더기와 지옥 불과 지옥 불 소금을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을 잘라 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단초가 되는 ‘죄의 뿌리’를 잘라 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죄를 불러들인 마음의 뿌리를 절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곧 죄를 불러들이는 단초가 되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금’으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산상설교에서 보여주듯이,
“세상의 소금”(마태 5,13) 입니다.
곧 ‘소금’은 다른 이 혹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녹아서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에게 참여하는 모든 것,
곧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과 함께 타인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라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낸 것과 같아야 합니다.”(콜로 4,6) 아멘.
* <참고> : 소금은 곡물(레위 2,13)이나 향료(탈출 30,35)에 뿌려져 성별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제물(민수 18,19)에 뿌려져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의 상징이 되기도 함.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감명 깊게 읽은 글이 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배는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선장은 결정을 합니다. 배 안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배 밖으로 버립니다.
더러는 아깝기도 하고, 더러는 소중하기도 하지만, 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배를 가볍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욕심을 내서 자신의 물건을 배 밖으로 버리지 못하면
배는 험한 폭풍우 앞에 가라앉을지도 모릅니다.
본당 사도회에서 ‘바자회’를 준비하였습니다. 주보에 본당교우들의 협조를 공지하였습니다.
바자회에 필요한 물건들을 기증해 주도록 공지하였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좋은 물건을 기증해 주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아예 ‘포장’도 뜯지 않는 새것이었습니다.
사도회는 창고에 가득 쌓인 물건을 정리하였습니다.
기꺼이 좋은 물건을 기증해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좋은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 준 사도회 형제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부자가 된다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야고보 사도는 재물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이웃을 착취해서 얻은 재물은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재물을 사용한다면
그런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이 탐욕을 찾는 데 쓰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귀는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귀가 감언이설에 놀아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은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 손으로 이웃을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갖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고, 가족까지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그 어리석음을 경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만큼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종교인도, 성직자도 이런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지만, 신앙은 결단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손님 중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 손님들끼리 화목하고 친교를 나누는 손님,
손님들끼리 다투고 욕하는 손님, 직원을 하인처럼 대하는 손님, 말을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손님들 중에는 배움이 많고, 재산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배움의 크기가, 재산의 많음이, 능력의 뛰어남이
손님의 친절과 예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종교인들 중에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서로 다투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마치 제가 그런 것처럼 미안했습니다.
직원은 다행히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처럼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혹시라도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 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인 동시에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이 연자매 관련 경고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죄와 관련해서 이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미처 인지하지 못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악 표양으로 인해,
우리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멀리 보지 않아도 그런 인물 중의 대표주자를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매일 여기저기 수시로 등장하는데,
그분 얼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옵니다.
그분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같은 사제 수도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참 많은 인생입니다.
많은 시선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언행에 신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우들은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교우들이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마다 제일 먼저 우리 얼굴을 떠올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 얼굴만 봐도 갑자기 뒷골이 당기고 혈압이 급상승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보고 성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 신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자선을 베푸는 데는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뿐 아니라,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다 그 몫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남과 나눌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
나누는 것이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애정은 같을 수 있지 않겠는가?
목말라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자선이라고 하셨다.
자선은 못 하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42절) 하신다.
이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려지는 모습이다.
땅에는 그가 묻힐 곳이 없어서 돌을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45절) 하셨다고
지체를 잘라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잘라 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 육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달려가는 방향을 멸망의 길에서 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47절)
눈은 우리 마음의 창과 같고 온갖 더러운 욕망은
갈라진 틈새와 같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핑핑 돌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우리 눈을 가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놓고 갈등하는 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지 않는 구더기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지옥에 있는 구더기나 불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구더기와 불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감각의 고통도
저승에서 죄인들이 받을 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꺼지는 불과 꺼지지 않는 불은 차이가 크다. 구더기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죽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제할 길 없는 탄식과 후회가 있는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죽고 싶어도 죽음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주님 안에 희망을 품고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절)
소금은 말씀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롭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청중의 일치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며
더욱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마음에 소금을 뿌려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독서는 부자들의 죄에 대해 경고하고,
복음도 죄짓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합니다.
어느 정도로 엄중하냐 하면 죄짓게 하는 것이라면
그 손발은 잘라버리고 눈은 빼 던져 버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강하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짓게 한다면 정말로 손발을 자르라는 말인가?
우리 인간은 다 살자고 밥 먹는 것이고,
살기 위해서 죄도 짓지 말자는 것인데
이 말씀은,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죽으라는 얘기밖에 되지 않지 않은가?
우리 지체 중에 죄짓지 않게 하는 지체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러다가는 남아나는 지체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주님의 가르침도 정말로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며
지체를 다 잘라 낼 정도로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말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죄는 다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지체를 다 잘라버릴 정도로 단단히 마음먹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의 끝에 마음 얘기를 꺼내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
마음이 물러지지 않고 썩지 않게 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조심(操心)이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을 잡는 것입니다.
조(操) 자가 ‘잡다’, ‘쥐다’, ‘부리다’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방심(放心)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방심은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신체를 잘라서라도 마음을 잡으라는 말씀이고,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먹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욕심(慾心)과 연관이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마음이 물러서도 안 되지만
욕심의 마음이어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오늘 야고보서의 끝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부자들의 죄에 대해 경고하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한 것인데
품삯을 주지 않는 것 때문에 원성을 사고,
곧 죽을 텐데도 이 세상에서 온갖 욕심을 부리는 것에 대한 경고이지요.
그러니 주님 말씀은 욕심에 소금을 뿌려, 마음이 청빈해지면
이웃과 평화롭게 되리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제노 수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우리가 목마를 때 물 한 잔을 내어주는 이 작고 사소한 행위조차
예수님은 이를 기억하시고 그에게 상을 내리신다면
예수님의 사람인 우리가 받을 상은 얼마나 클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작은 이들이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마라.
그리고 너의 지체, 즉 네 손과 발과 눈이 너를 죄짓게 하면 그것들을 잘라버려라.
멀쩡한 육신으로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소금의 비유를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 10,28-30).
그러나 그리스도인(좋은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복음적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 소금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 13-16).
하느님의 사람이면서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선택된 첫째가 꼴찌가 되지 않도록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매일의 삶 안에서 복된 상급을 누리는 이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