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7일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베드 1,3-9
복 음 : 마르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에는 훌륭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달려와, 무릎을 꿇고” 질문할 정도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도덕성에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대견히 여기시며, 그를 더욱 성숙한 삶으로 이끄시고자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완성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추는 데에 있지 않고,
온전한 자유로 그분을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 자유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놓을 때에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부와 권력은 본디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허락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게 될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무겁고 불편해집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불안하고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돈과 권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워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이 나를 전능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들고 거짓 행복에 빠지게 한다면,
부자가 되고 권력을 쥐는 것보다 더한 구원의 악조건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베스트셀러인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조건 3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지식을 훔치는 힘. 둘째, 요약하는 힘. 셋째, 추진하는 힘.
사실 일등이 아니어도 괜찮고, 꼴찌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3류로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주연이길 포기하고 조연으로 사는 인생이 3류 인생일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기보다는,
남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대신해 주기를 또 남들이 나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해 주길 바랍니다.
3류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몇 등이 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3류 인생은 되지 말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측면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일류의 조건을 새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은 타인의 지혜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하고, 또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둘째, 요약하는 힘은 생각을 정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알아야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삶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진하는 힘입니다.
이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나 자신은 신앙인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일류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삼류 신앙인일까요?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에서 주님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까요?
두 번째 요약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삶에서 잘 실천하고 있을까요?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삼류가 아닌 일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일류 신앙인이라고 평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다시 여쭙습니다. 여러분은 일류 신앙인입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 일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생활공간도 컨테이너로 꾸민 한 칸의 방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봉투 하나를 주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 그 사람의 진면모를 알게 됩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 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결혼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이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어떤 부자가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는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바늘귀’를 아주 크게 만들어 주시든지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둘 중의 하나를 꼭 만들어 주십시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 질문은 “선하신 스승님”이 아니라, “주님”으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가 아닌,
‘당신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본질적으로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자기를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질문,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질문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 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린아이에게 다이아몬드와 과자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다이아몬드보다는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먹을 수 없지만, 과자는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에게 다이아몬드와 과자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과자보다는 다이아몬드를 선택할 것입니다.
과자는 먹으면 곧 없어지지만, 다이아몬드는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부유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축복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난민촌으로 봉사 갈 수도 있고, 유럽으로 여행 갈 수도 있습니다.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할까요? 어떤 사람은 유럽 여행을 선택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떠나라’라는 말처럼 휴가는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입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일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난민촌 봉사를 선택할 것입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난민촌 봉사를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도 난민촌 봉사를 선택하였습니다.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게 가능하면 말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따님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모님도 나중에는 딸의 선택을 축복해 주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 ‘도시 빈민 사목’을 선택한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삼양동, 금호동, 장위동, 봉천동(중앙동)에 둥지를 마련했습니다.
교구에서 신부님들이 거처할 집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집이 성당이 되었고, 그 집이 회합실이 되었고, 그 집이 친교실이 되었고,
그 집이 식당이 되었고, 그 집이 사제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동창 신부님들은 20년이 넘게 도시 빈민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용산의 철거민들의 모임에, 세월호 유족들의 모임에,
이태원 유족들의 모임에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들 무심코 지나가는데 한 친구는 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내어놓고 사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희생적이지 않았습니다.
사제 인사의 권한은 교구장님에게 있다며, 제게 주어지는 소임에 만족했습니다.
2018년 성소국을 마치면서 처음으로 주교님께 저의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는 인사 적체로 인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구청에서 일했기에 그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 주셨습니다.
저의 선택으로 저는 뜻하지 않게 미국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사에서 5년 있었고, 지금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선택한 신앙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선택한 신앙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재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보존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넘어지는 유혹은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 유혹이 너무도 강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은 희망찬 미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얘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부자 청년과 관련된 복음 말씀을 들으시고 나서 고민이 큰 분들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이자 전제 조건으로
모세를 통해 건네주신 십계명에 대한 준수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계명에 대한 충실한 준수 외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소유한 부를 혼자 독식하지 말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라는 권고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다들 살짝 혼동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권고라기보다는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권고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고 오랜 기간 더 챙겨야 할
여우 같은 부인과 토끼 같은 자녀들이 있는 경우, 말씀 그대로 실천하다가는 결론은 패가망신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부를 창출하고 절약하고, 재정 관리를 잘해서 가족들을 잘 챙기셔야 마땅합니다.
자선을 베풀더라도 현실을 잘 파악한 후에 적정선에서의 자선을 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큰 뜻을 품고 삶을 대대적으로 전환하고 싶은 분들,
이제 달릴 곳을 원 없이 달리시고, 인생에 있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혹시 나는 여유로운 재물이라든지 풍족함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오늘 복음과 나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시면 큰 오산입니다.
이 세상에 나눌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재물이라는 표현은 광범위하게 적용됩니다.
비록 재물이 부족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산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돈보다 훨씬 소중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측은지심, 기도, 희생, 미소...
베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서는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애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부자 청년의 이야기
조욱현 토마 신부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율법을 잘 지켰다 해서 교만해진 젊은이가 율법의 주님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행동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젊은이는 믿음이 없이 율법만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하셨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여겨 그렇게 불렀다면 ‘선하다’라는 표현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고 그는 대답하였다.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
계명들을 잘 지켰다고 하는 그의 대답은 진실이라기보다 교만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친구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리고 하신다.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열어 주시면서 선의 책무를 실현하셨고,
몸소 거기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 청년은 떠나갔고,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하다’라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기도하여야 하겠다.
기 여호수아 수녀
당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겠다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 수도의 길에서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오직 예수님인가?’하고 자문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에게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고 이야기하시며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넘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고 이야기하시며
재물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그가 이야기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마음? 열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그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눈을 잊지 못해
결국 모든 것을 팔고 예수님을 따라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당신은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나요? 그것을 진정 원하는 것이 맞나요?
어떤 사람처럼 입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말하지만, 내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많은 재물은 아닌지요?
저 또한 스스로에게 자문해 봐야겠습니다.
내 입으로는 무엇을 말하고 마음은 무엇으로 채우고자 하는지..
주님을 따르는 이 길에 부족한 한 가지가 무엇일지..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