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Edition 창간 20주년 기획 백두대간 옛고개를 가다 ? 새이령
글 박기성(전 편집국장)
사진 신준식 기자
고성군 토성면 도원저수지~인제군 북면 창암계곡
무릉도원 도원리로 시집간 딸 용대리 친정가던 고개
내설악 사람들은 새이령, 큰령, 늘문령, 마등령을 넘어 동해의 해산물을 구하러 다녔다. 대간령, 미시령,
저항령으로도 불리는 고개들이다. 그렇게 구해온 소금을 인제나 양구읍까지 지고가 잡곡과 바꿔오기도 했다.
말고개와 광치령 넘어 양구 해안[면]으로 가면 소금 한 말에 쌀 한 말을 쳐줬다.
네 고개 저쪽 바닷가 마을들은 논도 많고 기온도 따뜻했다. ‘이밥에 고깃국’이 이상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소문을 들은 용대리 처녀들은 언제나 재 너머 저쪽으로 시집가는 걸 꿈꿨다.
“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마을 참 살기가 좋았습니다. 산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이밥을 사철 먹었어요.
계곡에는 송어, 은어, 뱀장어가 넘쳐났죠~ 바다 가찹죠~ 겨울이면 총 메고 돼지며 곰 사냥까지 다녔답니다.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었죠. 그래 용대쪽에서 시집을 열하난가 이렇게 왔어요. 우리 어머니도 거기서 왔습니다만…
한 사람이 오니까 연달아 소개를 해서 자꾸 완기 열하나까지 되었습니다.”
<백두대간 민속기행>에 나온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전기덕 노인의 말이다.
마침 명절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60년 전쯤, 추석을 맞은 전노인 가족이 이바지를 해갖고 새이령 넘어
용대리 가는 것으로 컨셉을 잡았다.
“한복과 침낭을 챙겨 오시기 바랍니다. 관동팔경 청간정에서 잔 뒤 도원리에서 출발할 거니까요.”
‘관종이 형님’과, 오랜만에 옛길 고개 취재에 동행하는 오은자씨에게 준비물을 일러주었다. 지난 겨울부터
붙박이 모델이 된 두 사람에게 “날 풀리면 정자 숙박을 하자” 했던 약속을 처음으로 지키게 된 셈이었다.
‘이밥에 고깃국’이 일상이었던 도원리
청간정의 아침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썹처럼 떠오르던 해는 리듬체조 공이 되어 바다를 벗어났다. 신준식
기자는 오메가가 안 만들어져 섭섭하다고 했지만 다들 그렇게 깨끗한 일출은 처음 보았다고 입을 모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깨어나는 설악의 모습을 대하니 잠이 골안개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건 울산바위, 저건 달마봉,
저건 화채릉, 저건 공룡능선, 저기 퇴석지대 긴 건 황철봉, 그리고 대청과 중청……. ‘그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류시화의 시가 그림으로 펼쳐지는 풍경이었다.
발아래 청간천에서는 고기들이 냇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치게 만들던 파도는
제풀에 지친 듯 길게 늘어진 모래사장만 간질이고 있었다. 그 한켠에서는 옹기종기 갈매기들이 모여앉아 새 날의
구수회의를 하고 있었다.
인적 없는 다박솔지대를 지나 도원리 1구에 이른다. 1966년 원(原)도원이 수몰되면서 생긴 마을이다. 그래선지
흙냄새 푸근한 오래된 구옥(舊屋)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저기 가마소? 형제바위 0.1km 이정표부터 따라가 보자고.”
문암천이 도원저수지로 흘러드는 어귀의 가마소는 급물살이 회오리치는 너럭바위 가운데 웅덩이다. 바로 옆
형제바위는 까까머리 형제가 물가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품세다. “이야! 동화 같은 풍경이네~.”
하지만 비경은 이내 사라져 저수지 속으로 가라앉는다. 저 저수지 속에 이런 경치와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사변 전에는 마방(馬房)이 둘이나 있었고 여인숙도 많았다니 안나푸르나 트레킹 루트 중간의 간드룽처럼 활기찼을 텐데….
소나무 그늘로 들어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신기자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어제 인사동 들러 산 옥색 무명저고리를
보고서다. “어? 옷 새로 샀네요.”
“응. 머슴 일 열심히 했다고 보너스로 저고리 한 벌 받았어.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만날 같은 옷만 입고 다닐
순 없잖아?”
식당에서 얻은 소주 박스를 강릉한과 보자기로 싸 지게 위에 얹는다. 안에는 점심꺼리가 들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소주 한 짝일 수도 있고 한과일 수도 있다. 용대리 장인이 약주를 즐겨하거나 장모가 깨강정을 좋아하거나.
가마소 구경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와 계곡 옆 산길로 접어든다. 나무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담소(潭沼)들이
‘아름다운 시절’을 들려주고 있다. 선질꾼과 당나귀, 노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쩔렁쩔렁 두런두런 터벅터벅
삐그덕삐그덕. 고개 아래 참새물내기까지는 마차도 다녔다고 한다.
숲그늘이 사라지며 볕이 따가워 둘러보니 탁 트인 개활지다. 칡넝쿨 덮인 아득한 벌판 저 끝에 말잔등처럼 평평한
마산이 엎드려있고 남쪽으로 새이령이 잘쑥하게 들어갔다. 허물어진 돌담에다 여기저기 감나무, 복숭아나무,
뽕나무가 있는 것을 보면 마을이 있었던 자리. 논이 7천 평이나 되었다는 원터인 듯하다.
선질꾼들 묵던 주막이 있었고 술도가에 담배포까지 흥청댔던 원터마을이 사라진 건 1993년이라고 한다.
산 너머 선유실리에 포사격장이 들어서면서 모조리 소개를 시켰다는 것이다. 좁은 입구에 너른 평지, 논도 많았던
세상모를 승지(勝地)를 한 줄기 바람이 쓸고 간다.
원(原)도원 수몰돼 생긴 마을, 구옥(舊屋)은 없어
개활지가 끝나고 숲으로 들어서자 앞에 큰 계곡이 놓여있다. 물 건널목에는 산불감시용으로 여겨지는 컨테이너가
하나 있다. 프로판 가스통에다 식당용 버너, 그을린 솥뚜껑도 뒹굴고 있다.
컨테이너에 스쿠버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어 들여다보니 무슨 ‘수중’ 소속이다. 바닷가에서 스쿠버들의 아지트 노릇을
하다가 산중으로 ‘전출’된 것이다. 이야말로 웬 시추에이션? 포세이돈에게 바다를 떠나 무릉도원의 주인이 되라 했네~.
계곡을 건너 비탈을 올라가니 평지 숲이 펼쳐진다. ‘출입금지’ 경고판이 서있는 걸 보면 장뇌삼쯤 재배하는 것 같다
(나중에 들어보니 사실이었다). 도원리에 어울리는 작목이 아닐 수 없다.
다시 계곡을 건너면서부터는 길 흔적이 거의 없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자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임도로 올라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여자만>의 별내농원에서 싸 온 홍어회에 전 설악산악연맹
김회율 회장이 준 삼지구엽초 술이다.
참샘이라고도 했던 참새물내기가 이 근처에 있었을 것 같다. 여름에 손을 못 담글 만큼 찼다는, 결핵 환자가 3년을
마신 끝에 병이 나았다는 전설의 샘이다. 옆에는 주막도 하나 있었다 하고.
웬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굽이를 돌아 중년 사내가 나타난다. 아랫마을에 사는 정해용씨다. 산속의 오가피나무
농장을 둘러보고 오는 길. 영동사투리 구수한 무릉도원인에게 도끼자루 썩던 시절 이야기를 생방송으로 듣는다.
바야흐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아래쪽과 달리 길 흔적이 뚜렷하다. 대간꾼들 덕분인데 그들이 원래
길을 택하지 않고 임도를 따라 마을로 내려갔던 까닭에 아래쪽이 정글이 되었다고 한다.
저만치 앞서 가던 신기자의 재촉 소리를 듣고 보니 방금 전까지 보이던 햇볕이 사라졌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면서
대간 동사면에 그늘이 진 것이다. 이어 어둠이 지면 사진을 찍을 수 없을 테니 그의 재촉이 이해가 된다.
옛날에는 마부들이 저렇게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거품을 무는 당나귀 엉덩이를 회초리로 내리치며 초조해지는
마음을 추슬렀을 터다. 맞추어 선질꾼들은 잰걸음을 떼었을 것이고.
마침내 고갯마루에 닿는다. 32년 전 겨울에 본 모습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잊을 수 없는 첫 겨울등산 첫날
야영지다.
“설악 준령을 넘어가자/ 모진 눈보라 헤쳐가며/ 빛나는 봉우리는 우리들에/ 사랑에 파라다이스으↗”
어깨동무를 하고 캉캉춤을 추면서 눈을 다지던 산벗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금방이라던 마장터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햇볕은 이제 한 줌도 찾아볼 수 없다. 날머리 용대리는 아니더라도
마장터 사진은 찍어야할 텐데… 타고 있는 신기자 속이 어항처럼 들여다보인다.
키를 넘는 억새숲이 앞을 가로막는가 싶더니 귀틀집 한 채가 유령처럼 나타난다. 마방은 물론이려니와 편자를 가는
대장간까지 있었다는 전설의 고향 마장터다.
16년 전 마산·신선봉 취재를 왔을 때 처음 보았던 저 집에는 약초 하는 이가 산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디 외국이라고
갔는지 오랫동안 집을 비운 흔적이 역력하다.
일대에 넓은 평지는 온통 낙엽송 숲이다. 겨울이면 이 숲에 ‘겨울 나그네’가 흐른다.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간 나무들
아래 하얀 눈밭의 아련한 소실점 끝 그리움이 회오리바람 타고 올라간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때 그대로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작은 새이령 넘는 길에는 음력 팔월 초닷새 상현달이 떴다.
“개나리 고오개에 거얼린 저어달으으으으은/ 님 오시이는 지르음 기일만 비추어 주운대나/ 에에헤야 개애나리 아무렴
그렇지 개애나리…”
노래를 불러도 흥이 일지 않는다. 달빛 사라진 골짜기에서 핸드폰 뚜껑을 열어 길을 찾는다. 조금 서둘러 출발할걸.
팔십 노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도무지 속수무책이잖아.
어두운 산길을 한 시간 가까이 더듬더듬 걸었더니 미시령 넘어가는 차 불빛이 보인다. 드디어 끝난 것이다.
그런데… 건널 수 없는 개울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미시령쪽 물이 모두 모여 내려오는 창암계곡이 돌다리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처음으로 신을 벗어 지게목당에 건다. 바짓가랑이를 올리고 지게작대기로 돌다리 위쪽 냇바닥을 조심스럽게 짚으면서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갑자기 발이 쑥 들어가면서 허리께가 척척해진다.
“아이고 저걸 어째? 우리 장모 이바지!”
정종원 기자 jjw3570@naver.com
2001년부터 사진기자로 근무하며 백두대간, 호남정맥, 한강기맥 등 한국의 산하를 촬영했다. 《제천의 명산》,
《산림청 찾아가는 100대 명산》, 《산림청 50주년 화보》, 《가고 싶은 산 충북 50선》 등에 참여했다.
첫댓글 우리는 용대리에서 새이령을 넘어 도원리로 " 그 때 그 친구들, 모두 어디로 갔니?"
갈 사람도 없으니 ~ 상봉에서 갈 사람 상봉하여 ~~ 용대리에서 ~~~ 조용하게 함 더 가 봅시다요 !
한적한 길 ~ 인간들이 마니 오지 안으니 ~~ 코로나도 욤려 없을거 가타요....가다가 션한 산천수 한잔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