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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과 권정생 선생 살던 집
이장희 추천 0 조회 119 14.10.07 22: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과 권정생 선생 살던 집

 

지난 여름방학 때 직원 연수로 전라남도 일원을 다녀왔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 올 여름 방학은 경북 북부지방의 선비 문화를 체험하자는 요구가 많아 사전답사를 다녀왔다.

답사의 순서는 부산을 출발, 신대구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남안동IC- 조탑리 오층전탑과 권정생 생가 - 안동시장 안동찜닭- 퇴계 예던길 - 농암종택(1박) - 퇴계종택 - 이육사문학관- 도산서원- 신세동 칠층전탑 및 임청각 - 조지훈 문학관과 생가 - 서석지 - 봉감모전오층석탑 - 봉정사 - 부산으로 정하고 떠났다.

 

내가 안동 인근을 답사하러 갈 때는 주로 서안동IC를 통해서 가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는 남안동IC를 통하였다. 그러다 보니 남안동IC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조탑리 오층전탑은 지나치기만 했지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다. 여행에서 귀가하는 길은 대부분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여서 그냥 겉모습만 보고 지나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이번 답사에는 마음먹고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 처음부터 남안동IC로 내려왔다.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남안동IC 톨게이트에서 나와 500m 정도 떨어진 조탑리 마을 앞 평지에 오층전탑이 있다. 전탑(塼塔)은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로 쌓아올린 탑이다. 탑의 형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중국은 목탑과 팔각형의 전탑이 주류를 이루나, 우리나라로 넘어 오면서 우리의 풍토와 환경에 맞게 변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이 많아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돌을 벽돌처럼 보이도록 다듬어서 만든 모전석탑과 나무로 만든 목탑이 있다. 안동 조탑동 5층전탑(보물57호)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 다섯 기 중 하나이다.

 

 

인왕상

 

이 전탑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基壇)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5∼6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塔身)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이 탑의 체감 비율은 지붕보다 몸돌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점과 5층 몸돌이 너무 큰 것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거치는 동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은 다음과 같다.

1. 안동 신세동 7층전탑(국보 16호)

2.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56호)

3. 안동 조탑동 5층전탑(보물57호)

4.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189호)

5.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을 제외하고는 4기가 모두 안동 지역에 현존하고 있다. 이처럼 안동을 중심으로 전탑이 많이 세워진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퇴적암 지대라서 화강암을 구하기가 어렵고,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양질의 펄이 생산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전탑 앞에는 수확할 시기가 된 마늘밭과 양파밭이 있고 양파밭에는  요즘 보기 드문 옛날식 펌프가 녹슨 채 남아 있다.

 

 

전탑을 보고 나오니 동화작가이신 고 권정생선생이 살던 집이 근처에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권정생(權正生, 1937-2007년)의 대표작으로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 등이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게 강제로 징용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방 후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다. 점원,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등을 하며 객지를 떠돌던 그는 195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인 이곳에 들어왔다. 그때 그의 나이가 18세였다. 이후 22세 때에 지병인 결핵 때문에 집을 나갔다가, 1966년에 다시 정착하여 1982년까지 마을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순수한 그는 마을 사람 누구나 좋아했으며,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창작동화를 구연하기도 했다. 1983년 이후 직접 지은 5평짜리 오두막집에서 강아지와 둘이서 검소한 삶을 실천하며 살다가 2007년 5월 17일 지병이 악화되어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권정생은 믿음을 바탕으로 자연과 생명, 어린이, 이웃 그리고 무고하게 고난 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다뤄왔다.

 

 

 

《강아지똥》은 닭과 진흙에게 무시를 당하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던 강아지똥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 내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6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현재 중학교 1학년의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몽실언니》는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지만 꿋꿋이 버텨내는 한 절름발이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1984년 첫 출간 이래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 1990년에 MBC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선생은 삶과 문학이 한몸을 이룬 작가로 일제 강점기,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을 두루 체험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왜곡된 역사인식과 시대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전,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자신의 집터를 허물어 다시 자연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집을 허물어 자연으로 돌려달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날도 대구에서 왔다는 초등학생들과 부산의 한 교회에서 온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집 풍수룰 보기위해 집 뒤로 가서 살펴보니 오두막집에 가려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예사롭지 않은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명당이다.  이 집은 천 년이상 갈 대명당으로 여겨진다.

 

 

집뒤 산책로를 따라가 보니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들꽃, 메꽃들이 한창이다. 꿀풀, 지칭개, 미나리아재비, 개구리자리, 애기똥풀, 백선...

 

백선

꿀풀(하고초)

미나리아재비

210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서로 엉켜있는 사람인가봐
나는 매일네게 갚지도 못할만큼 많은 빚을지고있어
연인처럼 때론 남남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걸까
그렇게도 많은 잘못과 잦은 이별에도 항상 거기있는 너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해줄 유일한 사람이 너란걸 알아
나 후회없이 살아가기 위해 너를 붙잡아야 할테지만

내 거친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같은 사랑
난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줄꺼야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해줄 유일한 사람이 너란걸 알아
나 후회없이 살아가기 위해 너를 붙잡아야 할테지만

내 거친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같은 사랑
난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줄꺼야
널위해~~~ 떠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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