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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유산, 그리움 또 그리움
나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두 분 있다. 거제 연초중학교 1학년 담임 이명걸 선생님, 3학년 담임 김영진 선생님이다. 이명걸 선생님은 부산대 사범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막 첫 발령을 받으셨으니까 나는 그 분의 첫 제자인 셈이다.
이명걸 선생님은 나에게 “기우야, 니 부산고 가라!”라고 처음으로 말해 주신 분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첫 반장을 맡았고, 학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졸업할 때까지 3년 내내 수업료와 기성회비가 모두 면제였다. 선생님은 모교인 부산고등학교에 내가 입학하기를 적극 권하며, 내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셨다.
거제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명걸 선생님의 그 말씀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일깨워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큰 도시로 나가 꿈을 펼칠 희망을 갖게 되었다. 1학년 말에는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부산에 가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부일장학회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게 하셨다. 내가 장학생이 되어 좀 더 풍족하게 학교에 다니길 바라셨다. 부산대 사범대학 수학과 교수로 계셨던 선생님의 형님이 부산 서면에 사셔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푹신푹신했던 이불이 지금도 생각난다.
다음 날, 시험 보러 가기 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선생님은 나를 중앙동 현대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상영 중이었던 펄벅의 「대지」를 보여 주셨다. 나의 첫 영화였다. 처음 보는 대형 스크린에 영사기 불빛이 쏟아지며 왕룽 일가의 삶이 펼쳐지고, 황량한 대지 위에 가득한 메뚜기 떼! 그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극장 근처의 유명한 제과점에 가서 빵을 사 주기도 하셨다.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은 시골 소년인 나에겐 감동 이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학생 선발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거제도에서는 나름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큰 도시의 학생들에 비해서는 부족했다. 나는 괜찮았지만 선생님께 면목이 없었다. 나를 위해 장학회를 알아봐 주시고, 부산에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시험을 보게 해 주신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고 분했다고 할까. 그러나 선생님을 통해 나는 성큼 성장할 수 있었다. 거제도를 벗어나, 부산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 주고, 더 큰 세상을 꿈꾸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의 김영진 선생님도 내게 지속적으로 용기를 주신 분이다.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써야 할 때가 되었을 무렵, 선생님은 부산고 원서를 흔쾌히 써 주셨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넌 반드시 합격한다. 걱정 말고 마무리 잘해라. 그리고 앞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넌 충분히 가능해!”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애정 어린 목소리로 “기우, 너는 뭘 해도 잘할 거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선생님을 통해 누군가 나를 믿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배웠다. 가능성은 본인의 각성으로도 깨어나지만,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더 크게 피어날 수 있다. 선생님 덕분에 나는 부산고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 해는 유독 경쟁이 심해서 경남고등학교보다 커트라인이 몇 점이나 더 높았다. 그래서 그런지 거제도 11개 중학교에서 32명이 시험을 쳤는데 나 혼자만 붙었다. 모두가 선생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 김영진 선생님을 다시 뵌 적이 있다. 교육부 교육환경개선국장으로 이해찬 장관을 모시고 있을 때였다. 스승의날 행사로, 간부들의 옛 은사들을 한 분씩 초청했는데, 나는 김영진 선생님을 모셨다. 선생님은 김해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무척 좋아하셨고, 나도 그날은 종일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더 재미있던 일도 있었다. 이날 행사를 양재동 The-K호텔(당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진행했는데, 행사 도중 국장들이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도 목소리를 뽐내려 무대로 나갔다. 그런데 이해찬 장관님께서, 내가 무대에 서자마자 “이 국장은 노래를 부르지 말고 콩트를 하세요!”라고 말했다. 평소 나는 업무 진행이 매끄럽지 않거나, 첫 회의라 분위기가 서먹할 때마다 우스개를 하곤 했는데, 이 장관님은 이런 점을 좋아하셨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거나 띄우는 데 나름 재주가 있고, 제법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보니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업무도 긴장을 풀고 서로 웃으면서 논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가지만 하려다 앵콜도 받아 두 가지 설(說)을 풀었다. 갑작스런 요청이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고 분위기를 급격히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 해에는 이명걸 선생님을 모시려고 수소문을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사이 선생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쉽고 슬픈 마음에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사실 1996년 봄에 이명걸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다. 내가 부산시 부교육감으로 일할 때, 이명걸 선생님은 모교인 부산고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연락을 드려 날을 잡고 식사를 했는데, 선생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때도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은 그대로였다. 제자를 사랑하고 잘 가르치는 것은 물론, 자기 몸을 던져 제자를 위하셨던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나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너무 늦었다는 자책과 회한이 가슴을 저몄다.
나는 선생님들께 빚진 마음을, 학생들을 위한 마음으로 보은하고자 했다. 내가 대학 총장으로 재직했던 14년 동안, 나는 두 분 선생님께 배운 대로 학생들을 대했다. ‘학생의 행복과 성공’을 대학의 발전 목표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두 분 선생님의 길을 따르려 했으나, 내가 어찌 그 분들의 마음과 정성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제자들을 대할 때 선생님들이 보여 주셨던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선한 믿음. 그것은 항상 내 가슴 속에 가장 귀한 가치와 덕목이고, 나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참, 그 콩트가 뭐냐고? 고양이가 배가 너무 고파 먹이를 찾고 있을 때, 쥐가 나타났다. 고양이가 옳다구나 하고 잡으려 하자, 쥐는 바로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밖에서 아무리 야옹거리며 겁을 주어도 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어떻게 하면 쥐를 잡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쥐죽은 듯 있다가, 갑자기 멍멍! 개소리를 냈다. 그러자 쥐가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당연히 바로 낚아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쥐는 고양이와 상극인 개소리가 나니, 고양이가 당연히 없을 줄 알았던 것이다. 이때 고양이의 말이 가관이다. “나도 이제 2개 국어는 해야 먹고 살 수 있겠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에서 한 말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시로 바뀌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쉽지 않다’고 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면 어렵지 않게 일을 성취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이토록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은 없을까?
교육부 과장 시절, 교육방송 조직을 만드는 일을 맡았을 때다.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에는 여러 정부 부처의 협조가 있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기획재정부의 협조가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 조직은 일할 사람과, 운영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승인하는 곳이 바로 기획재정부다. 기획재정부가 먼저 이 계획에 충분히 동의하고 힘을 실어주어야만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교육부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기재부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에 기재부가 합의를 해주지 않았다. 기재부는 예산을 쥐고 있으므로 일을 진행할 때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부처긴 하다. 하지만 교육방송 건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도 들어 보지 않고 번번이 퇴짜를 놓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재부 예산실 예산총괄과장을 열 번이나 찾아갔다. 열 번 모두 거절당했다. 말이 열 번이지 사실 바쁜 업무에 쫓기면서, 자존심도 내려놓고 그렇게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의 진실함에 관한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보통 사람은 한두 번 찾아가서 안 되면 포기하고, 좀 더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세 번까지 시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열 번은 가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그런 노력이라면 통하리라 생각했다. 예산총괄과장은 내가 열 번이나 찾아온 사실을 알기나 했을까? 알 리 없었다. 찾아간 사람만이 숫자를 셀 수 있으니까. 내가 갈 때마다 예산총괄과장은 가볍게 지나쳤다.
“아, 이 과장, 뭐 그 일 때문에 또 왔어요?”
열 번 찾아간 후에도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다음 월요일 아침, 7시 30분. 나는 아예 예산총괄과장 방으로 출근했다. 7시 40분, 출근해 방으로 들어온 예산총괄과장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 과장님, 양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이 교육방송 관련 조직 건 때문에 광화문에서 여기 과천까지 열 번이나 왔다 갔다 했습니다. 오는 데 한 시간, 가는 데 한 시간, 머무는 시간 한참. 이렇게 하면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오늘은 여기로 바로 출근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어차피 며칠 여기 왔다 갔다 할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과장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콧방귀도 안 뀌고 무시했던 상대가 아침 댓바람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으니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말 없이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그 와중에 예산실 공무원들이 출근해 일과를 시작했다. 예산실에 손님이 오면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복도에 나가 있다가, 손님이 가면 다시 들어가 손님용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도, 과천 예산실로 출근했다. 예산총괄과장은 다시 온 나를 보고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또…… 왔어요?”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네, 과장님. 저 여기 앉아 있는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업무 보십시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는, 점심을 먹고 늦게 사무실로 돌아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답답하다는 듯 말을 건넸다.
“이 과장, 대체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아니, 신경 쓰지 말라니까 왜 신경을 쓰십니까?”
나는 예산총괄과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안 쓸 수가 있습니까. 뭘 어쩌자는 거예요?”
화가 난 목소리였다. 나는 그제야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과장님은 헤아리질 않았을 겁니다. 제가 여길 몇 번 왔다 간 줄 아십니까? 열 번 왔다 갔습니다. 과장님은 늘 과장님이 하시고 싶은 이야기만 했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 주신 적이 있습니까?”
예산총괄과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로소 자신이 나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깨달은 듯했다. 내친김에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한 시간만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예산총괄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늘 준비해 다녔던 자료를 펼쳐 놓고 간결하지만 진실하게 설명했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예산총괄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예산기준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서류를 가져오라고 한 후, 드디어 사인했다. “오늘은 내가 이 과장한테 졌습니다.” 만약 내가 단순히 과장의 사인이 목적이었다면, 그 말에 미소를 짓고 흘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이 나서 곧바로 교육부로 돌아왔겠지만, 그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의 중요성과 가치를 믿고 있었기에 열 번이나 예산실을 찾았고, 새벽부터 예산실로 출근해서 이틀을 더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말했다.
“과장님, 저한테 졌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교육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신 겁니다. 과장님이 이겼지 졌다는 말씀은 말이 안 됩니다.”
나는 이것이 진실이고, 진정성이고,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열 번 가도 일이 풀리지 않으면, 사무실에 앉아 내 말을 들어 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답이 없다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손님용 의자에 앉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일의 가치를 나 스스로가 확신하지 않았다면 이런 과정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렇다. 자신의 진실을 믿는 자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진실 앞에서 닫힌 문은 결국 열린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그건 무슨 특별한 비결이나 기술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인내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 다시 말하면 그 일을 꼭 해내겠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 바로 삼실(三實)이다. 지금 일터에서, 사업의 현장에서 또 각자 처한 상황에서 일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는 많은 젊은이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 불만이나 분노를 갖기 전에, 자신을 믿고 얼마나 절실하게, 얼마나 진실하게,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했는지 돌아보자고 말이다.
가장 절망적 순간을 이긴 독서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생긴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는 말은, 고교 시절 내 가슴에 새기며 실천한 말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시련을 겪는다. 내게는 그 시련과 기회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찾아왔다.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돈이 필요했다. 나를 아꼈던 선생님들이 입주가정교사 자리를 알아봐 주셨고, 난 초등학생을 가르치며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동기들은 입학과 동시에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등 거제도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내 공부하랴, 학생 공부도 가르치랴 나에겐 24시간이 모자랐다. 제법 공부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공부에만 몰두하는 친구들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내 공부는 하지도 못하면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으니 자괴감마저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입주가정교사를 그만두고 부산 대연동에 살고 있던 형님의 단칸방에 합류했다. 그런데 2학년 1학기 5월 중간고사, 이틀째 시험을 친 뒤 나는 쓰러졌다. 결핵성 늑막염, 폐에 동공이 두 개나 생겼다. 어떻게든 뒤처진 공부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몸을 혹사시킨 결과였다. 몸도 몸이지만 분하고 화가 났다. 그만큼 피 끓는 시절이었고 꿈 많은 청춘이었다. 그런데 그 팽팽한 긴장이 갑자기 뚝 끊어져 버린 것이다.
부산에서 치료받을 형편이 아니어서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거제도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친구들은 좋은 환경에서 부모 지원을 받으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데 나만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동네에 있는 의사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주사도 맞고, 나 스스로도 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서 빨리 건강을 되찾아 학업을 따라잡아야겠다고 동동거리며 애를 태웠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니 병세는 차츰 나아졌다. 그렇다고 복학해 공부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무료했다.
이를 달래기 위해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책은 다 읽었다. 글자로 된 것이라면 뭐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조선 정조시대 뛰어난 실학자였던 이덕무의 별명이 책만 보던 바보인 ‘간서치(看書痴)’라 했던가. 나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책을 탐독했다. 학교 공부에서 벗어나 정말로 다양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만난 것이다. 동네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어서 옆 동네로 책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나중에는 읽을 책이 없어서 『세계대백과사전』을 비롯해 『의학대백과사전』까지 서너 번씩 읽었다. 책을 읽기 위해 여름 가뭄에는 물 퍼 나르기, 가을 벼가 익을 즈음에는 새 쫓기 등도 기꺼이 했다. 그렇게 책이 읽고 싶었고 또 좋았다.
그 때 읽은 책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책이 있다. 104세인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는 김형석 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등이다. 그 당시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은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을 만큼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혔다. 이 책들은 감수성이 풍부한 내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특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에 깊은 철학적 내용을 담아내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 책을 펼쳐 놓고 “존재의 의미는 사랑이다”,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은 고뇌 어린 열정”, “어떻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허무를 넘어 다시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장을 읽을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밀고 올라왔다. 열 번도 더 읽은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에 만난 이 책은 나의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줬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나 자신만 정지되어 있다는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이 책은 위로는 물론 성찰하는 힘을 길러 줬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나는 그 때 알았다. 역경이 왔지만 당당하게 부딪쳐,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책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 존재와 사랑의 의미, 그리고 고통 끝에 얻은 용기와 새로운 희망까지 얻었다.
또한 『영원과 사랑의 대화』 후반부에는 「어느 구도자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신부와 그를 연모하는 제자의 이뤄지지 못한 러브 스토리가 실려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애틋한 마음에 사로잡혔던가. 책을 보면 제자는 사랑은 하되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신부(神父)를 놓아주기로 결심하는데, 그 방법이 다른 사람과 약혼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당시 풋풋한 마음을 가졌던 후배와의 만남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나의 처지나 아픔과 비슷한 상황이라, 더 많이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란 언제든지 사랑의 짐을 지는 동안은 모질고 거친 성격이 둥글고 원만해지는 법이다. 한 번도 사랑의 부채를 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집스런 성품을 고치지 못하는 운명에 빠지게 된다”라는 구절이 아직도 생각나는 것을 보니, 얼마나 내 속 깊이 자리 잡았는지…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2016년, 한 번 더 소환됐다.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지정을 기념해 기호일보사 ‘인천시민과 명사가 함께하는 애장도서전’을 열었다. 그 때 명사로 초대돼 이 책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학교와 서재 어디를 봐도 이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서점과 헌책방 등을 다니며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김형석 교수님께 직접 연락드려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보시던 책을 직접 보내주셨다. 이후 책을 다 보고 책과 함께 「외롭고 불안하던 사춘기 소년 마음 다독」이란 기사 그리고 대학의 쿠키를 댁으로 보내드리며 감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절망의 시간, 그러나 독서와 함께 한 1년은 나를 크게 성장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마음 놓고 철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하다 보니 인문학의 기본 소양은 물론이고 깊은 통찰력을 기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갖게 된 이 기간이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입시에 쪼들리는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이었다면, 그런 독서는 꿈조차 꿀 수 없었으리라. 나는 가끔, 내가 아무런 고난 없이 공부만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랬다면 책이 던진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고뇌의 시간도 없었을 것이고, 그를 통한 성숙의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김형석 교수님이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낸 것을 보면서 여전히 책을 쓰고 강연하는 모습에 어찌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휴학 시절에 감동을 주고 인생을 풍성하게 해 준 김형석 교수님의 매력은 100세가 넘어서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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