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3.04.13(목) 10:00
참 가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김재일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이용환 정원길 등 9명
불 참 : 나종만(정광부와 회동) 윤정남(부인동반 병원행) 장휘부(봄철 알러지) 등 3명
회 비 : 90,000원
식 대 : 66,000원(72,000원-장어탕 6, 김치찌개 1, 애호박찌개 2 등-이정훈선배 박걸리 2병(6,000원 감액)
잔 액 : 24,000원
이월 잔액 : 477,000원
총 잔액 : 501,000원
오후에는 흐려진다고 예보하였다. 오전에는 등산하는데 이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시내버스를 탔다.
오늘 일행은 7명(강공수 김영부 김재일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이용환 등)이었다. 요즘 미세먼지가 많아서 등산객이 많이 줄었다. 그렇지만 목요일 마다 정해 놓고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인 숫자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식당가의 주차장은 간간이 빈 곳이 있어 보였다. 나종만이 식당에 와서 추어탕을 사가지고 갔다. 매주 사가지고 간 추어탕 2그릇으로 1주일을 먹는다고 하였다. 그가 오늘 산행에 참여하지 않고 일찍 돌아가게 된 연유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정광부 내외가 광주를 방문하는데 심원두 등과 점심시간에 합류하여 정담을 나누기로 하였다 한다. 다음 주에는 정광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윤상윤의 부인이 골다공증으로 넘어지면 뼈가 쉽게 부러져서 서너 군데를 철심을 박아놓았는데 요즘 철심부위가 통증이 있어서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기로 날을 받아 놓았다고 한다. 나이를 먹게 되니까 본인이 아프거나 또는 부인이 아파서 친구모임에도 못나가고 친구들이 추진하는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또 요즘 우리들에게는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있는 집과 걱정이 없지는 않지만 비교적 가벼운 걱정이 있는 집으로 나누어진다. 윤상윤은 둘째 아들에게 걱정이 많다고 하였지만 최후에 자신을 의탁할 경우에는 둘째 아들에게 의탁할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은 문제가 많지만 둘째 며느리는 계산적이지 않고 매우 인정이 많아서 그런 며느리라면 자기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럴 의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용환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걱정꺼리를 솔직하게 술회하였다. 나도 앞으로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어서 잠시 나의 앞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나는 기필코 내 아내와 함께 할 것이며, 만약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죽는 날까지 독립적으로 살다가 갈 것이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있는 스킬을 터득하고, 계속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나갈 것이다. 김영부는 아예 말을 하지 않고, 박남용도 일체 가정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가족 구성원도 잘 알지 못한다. 강공수는 (내가 보증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다가 항상 낙천적이어서 아예 걱정 자체를 하지 않는다.
어느덧 약사암에 도착하였다. 음양탕을 만들어 마셨다. 이제 약사암이 보여줄 수 있는 꽃들은 다 지고, 연록의 나뭇잎들만이 여름을 재촉하고 있었다.
음악정자에는 김상문과 정원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9명이 기습곡(旣習曲) <산 너머 남촌에는>을 불러 보았다. 이어서 새 노래 <꼬까신>(최계락 요, 손대업 곡)을 강공수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추어 불러보고, 또 가수의 노래를 따라서 불러 보기도 하였다. 노랫말도 좋고 곡도 매우 깜직한 노래여서 매우 흥겹게 부를 수 있었다.
최계락(1930~1970)은 경남 진양 출생으로 국제신보 문화부장을 지냈다. 동시를 많이 썼다. 그의 대표작은 <꽃씨>, /꽃씨 속에는/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꽃씨 속에는/빠알가니 꽃도 피어서 있고//꽃씨 속에는/노오란 나비 떼가 숨어 있다.//
이어서 강공수가 자기 교회(중흥교회)의 부활절 주보(週報)에 실린 이야기를 해 주었다.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큰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매달아 주세요.>
뉴욕을 출발하여 <플로리다>로 가는 기차에 한 젊은이가 타고 있었습니다. 옷도 허름하고 얼굴도 초췌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침울하고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얼굴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노신사가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젊은이, 무슨 걱정이 있기에 그렇게 얼굴이 어두운가요? 제가 무슨 도와 줄 일은 없습니까?” 그 젊은이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한 후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기의 사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저는 4년 전, 뜻하지 않게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뉴욕의 감옥에서 살다가 만기 출소하여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줄지 걱정입니다. 사실 그 동안 아내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고 편지를 했지만 아내로부터는 답장도 한 장 없었고, 소식도 없었습니다. 이제 감옥을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습니다. 저의 고향은 <프로클일>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인데, 이 기차가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갑니다. 그 기찻길 옆에 큰 참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마지막 편지에 ‘이제 출감한다. 마을 앞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하나 매달이 놓으면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그것을 보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줄 믿고 집으로 돌아가겠고, 없으면 당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고 떠나간 것으로 알고, 멀리 떠나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노라.’고 써 보냈습니다. 저 작은 고개를 넘어 커브를 돌면 저의 고향마을입니다. 저는 그 나무에 손수건이 없을까봐 너무 초조합니다.”
이 이야기가 기차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숙연해졌고, 조용해졌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그 사람의 고향마을로 들어섰습니다. 그 젊은이는 아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큰 나무를 찾았습니다. 어디에 나무가 있는 것일까? 나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저기다.”하고 소리치며 밖을 가리켰습니다. “와!”하는 큰 함성이 터졌습니다. 젊은이도 놀라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을 앞에 큰 참나무가 온통 노란 수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노란 꽃이 활짝 핀 것 같았습니다. 아내의 생각에, 혹시 남편이 수건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면 어떻게 하나 해서 노란 수건을 수없이 매달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기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그 젊은이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젊은이의 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노란 손수건은 죄를 지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아내의 사인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광사 13회 이정훈선배가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나가시다가 내가 아는 채를 하니까 굳이 막걸리 2병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가시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네였다. 그 분은 나의 고향 선배로-내가 사는 득량면 바로 옆에 있는 조성면 출신으로 나와 각별한 사이이다. 내 중학교 친구(문승환)의 미인 여동생과 혼인하였고, 문승환의 누님이 내 집안 족 숙모가 되니 우리 집안 아저씨와 동서간이 되었다. 시인이고 문학인으로도 활동하고 또 운동을 좋아하여 테이스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우리 동창생(이승정 류상의) 들과도 동호회 활동이 활발한 만능인이다.
첫댓글 산행을 마치고 귀가하여 만보기를 보니 10000보를 넘겼다.
그 중 6000보정도는 내가 친구들에게 내 속사정을 이야기하는 시간인 듯 싶다.
가정 이야기. 가족 이야기 . 신상이야기 모두 들어 준 목요산우회 친구들이 항상 고맙다.
철따라 멋진 자연과 풍광을 촬영하여 15야 카페에 올려준 우리 회장 아석의 수고가 항상 돋보인다.
모두들 수고했습니다.
녹음속에 자리잡은 약사암을 멋진 사진을 통해 다시 보니 실 풍경보다 더 고운 자태를 뽐내는 듯 참 곱고 한가롭네 마음을 기우려 쓴 산행 후기 잘 보았고" 노란손수건을 참나무에 매어 달다+ 의 이야기는 지난 일요일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이었는데 부활의 의미는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를 아직도 사랑하여 그의 품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인을 우리들에게 보내는 것임을 상기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 방송 선교 자료임을 소개 함
아래 시는 내가 평소 좋아해서 그의 시는 거의 다 읽고 있는 이해인 수녀님의 글
병상 일기
오늘은 약을 안 먹기로 한다
한 번쯤
안 먹으면 어때 하고
포기했다가
혼난 일이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환자가 아니고 싶고
아무 약도 안 걱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해 본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
약을 안 먹고 사는 이들이
요즈음은 제일 부럽다
병원에 안 가도 되는 이들이
정말로 부럽다
그러나 이 한 번쯤이
너무 오래가면 안 되겠지
오늘 하루만
내가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