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하루/靑石 전성훈
악마의 손길은 인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온한 일상 안으로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찾아온다. 세상에는 기쁜 일도 끔찍한 일도 뜻하지 않는 곳에서 한순간에 생기거나 다가온다. 사전에 어떤 징조나 낌새를 느낄 수 있다면 만반의 방어진지를 만들어 놓지는 못해도 최소한의 준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듯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치면 그야말로 두 손 들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햇볕이 거실 창밖에서 따사로움을 전해주는 10월 어느 금요일, 주말을 앞두고 신문을 보다가 졸음에 쫓겨 하품하는데 핸드폰에서 메시지 도착 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팔을 뻗어서 메시지를 보니 우리카드사에서 온 문자였다. 신청하지 않은 카드가 발급되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본인이 신청한 게 아니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문자를 보내온 곳을 잘 읽어보았다면 해외에서 발송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졸음에 쫓긴 상태에서 카드가 발급되었다는 문자에만 얽매여서 당황한 마음에 전화번호를 누르고 말았다. 길고 긴 끔찍한 악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순간적으로 멍한 상태에서 속절없이 진흙 구렁텅이 속으로 한 발걸음씩 빠져들어 갔다. 전화를 받은 여자가 우리카드라고 하며 영등포구 문래동 우리은행 지점에서 카드와 통장이 발급되었다고 했다. 그 순간 꼼짝없이 그 말을 믿었다. 여자와의 통화 시간이 거의 한 시간에 이르러,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음에도 전화금융사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핸드폰에 악성 앱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내가 설명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하지 못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원격조종에 의한 악성 앱이 설치되자, 그 여자는 금감원에 신고하라면서 금감원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디테일에 강한 악마는 따듯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얼과 혼을 빼놓았다.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사연을 말하자 담당 부서로 연결해주었다.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나오면서 친절하게 안내를 하였다. 우리은행에서 발급된 통장이 범죄행위에 연루되어 지금 검찰에서 비공개 수사하고 있다며, 핸드폰에 악성 앱이 깔려 있는지 확인해주겠다고 유도하는데, 기계치인 내가 주문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바람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도중에 전화가 끊기면 그쪽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여하튼 그들이 깔고 싶은 악마의 앱이 깔렸다. 금감원에 신고서를 작성하려면 주민번호를 입력하라고 하여 입력하였고, 거래 은행과 보험회사 계좌를 몇 개나 사용하는지, 어느 정도의 금액이 있는지를 물어보는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였다. 그 와중에도 다행히 계좌 번호와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 남자는 가족 누구에게도 이런 사실을 말하지 말고, 일주일 동안 금융거래도 하지 말고,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검찰청에 연락할 번호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주말을 편히 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오후 5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혼이 빠진 채 그야말로 맨붕 상태로 멍한 표정이면서도 아직도 전화금융사기라고 인식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집에 온 딸이 넋을 잃은 내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그들이 보내온 문자를 딸에게 보여주니 ‘보이스피싱’이라며 함께 은행으로 갔다. 은행은 이미 마감이 끝난 시점이었다. 옆문을 통하여 은행에 들어가 딸의 전화로 콜센터에 연락하여 계좌 입출금을 정지시켰다. 경찰서 민원실을 찾아가니, 핸드폰에 설치된 악마의 앱을 제거해주면서 월요일에 은행에 가서 입출금 현황을 조회해 보라고 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연락받은 아들이 찾아와서 핸드폰 초기화 작업을 해주고 인터넷에 확인하여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인터넷으로 금감원에 신용정보 도용 신고를 하였다. 다음 주 월요일 은행에 확인하니 천만다행으로 입출금이 정지되어 거래가 없었다. 은행 계좌는 입금은 가능하지만, 출금은 정지된 상태로 해 두고 비밀번호도 바꾸었다. 여권과 주민등록증도 갱신 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열흘 동안 바뀐 전화번호로 모르는 곳에서 여러 번 전화가 오고 욕설이 담긴 해괴한 문자도 왔다. 모르는 곳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이 뛰고 정신이 멍해지는 상태가 한동안 지속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마음도 조금씩 안정되어갔다. 금융기관과 보험회사 거래의 불편을 해소하려고 금융감독원에 신용정보 도용 해지 신청하고 은행 계좌도 거래 정지를 풀었다.
이제는 입력된 전화번호 이외는 받지 않고 그래도 계속 오는 전화는 수신 차단을 한다. 관계없는 문자나 메시지는 즉시 삭제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고, 황당하고 무섭게 변해버린 세상을 보면서 덜컥 겁이 난다. 핸드폰을 통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도록 일부러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 또한 지나가는 시련이겠지만,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화를 찾으려면 어느 정도 무심한 세월이 필요하다. (202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