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에서 일어난 표적(요 6:1-13)
요한복음은 이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적엔 분명한 영적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본문은 요한복음의 일곱가지 이적 중 그 네 번째 기록된 소위 오병이어의 이적입니다. 이 표적은 빈들에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빈들 기적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이라고 하는 제자가 나옵니다. 허기진 수천수만의 군중을 보시고 주님께서 빌립에게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떡을 어디서 구할 수 없겠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빌립은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만 먹게 하려 해도 이백 데나리온이 더 들 겁니다." 재빠르게 계산해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에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수많은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굶주림을 바라보았습니다. 문제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주신 주님은 믿음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빌립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주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나이다. 주님만이 능히 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음을 믿나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명하소서. 저희가 순종하겠나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우리의 부족한 자원만 바라보고 어려운 처지만 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문제를 보지말고 문제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주님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물으신 것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믿음 테스트였습니다.
이어진 6절에 보면 분명히 이것은 "시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테스트에 대한 빌립의 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컴퓨터처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답을 내어 놓습니다. 7절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여기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으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10만원정도 될 것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면 2천만원 정도됩니다.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의 법칙, 세상의 법칙입니다. 이땅엔 이성의 법칙이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믿음의 법칙이 있습니다. 교회안에 빌립같은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어느 화가가 무서운 풍랑을 만난 배 한 척을 그렸습니다. 풍랑은 금방이라도 배와 선객들을 삼킬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두려워 떨기는 커녕 모두 여유있고,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키를 잡고 항해하는 선장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풍랑의 높이를 계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문제를 보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해결책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을 도와주시려고 하십니다. 눈의 방향을 위로 하십시요. 여러분의 인생의 핸들을 붙들고 계신 예수님을 보십시요. 문제를 바라보던 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야맹증에 걸린 사람은 눈의 초점이 흐려져서 밤에 길을 걸을 때 자꾸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시궁창에 빠지기도 하고 전봇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초점을 제대로 잘 맞추어야 합니다. 공중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는 앞만 바라보고 그 줄을 똑바로 걸어야지 술렁이는 군중들과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면 줄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망과 어두움을 보는 인생살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과 소망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부정적인 안경을 벗어 던지고 긍정적인 안경을 끼고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이성적인 눈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무런 신앙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예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빈 들에서도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도시락 하나로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5천배의 기적을 낳기까지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1. 한 어린아이의 헌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여기 보리떡이 무엇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 개떡이라는게 있었습니다. 돼지에게 주는 쌀겨나 보릿겨를 부드럽게 빻아서 만든 살겨떡입니다. 이 겨떡이 개떡이 된 겁니다. 여기서 보리떡은 가난한 집에서 아이들에게 간식으로도 주고 나귀에게도 먹인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여기 물고기라고 번역된 "옵사리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다가 큰 고기가 잡히면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오지만 작은 고기는 다시 물 속에 넣어주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성경법에 따라 작은 고기는 다시 물 속에 넣어 살려줍니다. 그런데 가져오기는 너무 작고 그렇다고 다시 물 속에 넣을 필요는 없는 어중간한 크기의 고기가 있습니다. 낚시꾼들은 이런 고기를 바닥에 던져둡니다. 그러면 고아나 과부,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바닷가에 나가 주워다가 소금에 절여 자기들의 양식으로 삼았는데 이처럼 소금에 절인 조기새끼 같은 물고기가 옵사리온 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개떡 다섯 개와 절인 물고기 두 마리가 바쳐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한 끼 도시락 식사입니다. 그런데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은 5천배가 아니라 일만오천배쯤은 되었을 것입니다. 남자 장정만 5천명이었으니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1만 5천명은 넉넉히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 기적은 어린 소년의 작은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기적의 씨앗을 요구하십니다.
빈들의 표적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 소년이 예수님께 드린 이 개떡과 초라한 물고기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 기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헌신이 1만5천배의 이적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언제나 기적은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 위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이적은 믿음의 그릇만큼 일어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빈 들 표적을 위한 필수적 요소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도 빈 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씨앗이 있습니다. 개떡이나 물고기와 같이 아주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도시락이 있습니다. 사실 이 도시락 하나가 5천명의 군중을 위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선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주의 손에 바쳐질 때 거기서 5천배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께 바치기를 꺼려함으로 말미암아 허실되고 마는 재능과 은사와 달란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노래하는 재능, 가르치는 재능, 봉사하는 재능, 전도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섬기고 접대하는 은사, 긍휼이 여기는 은사, 치유의 은사, 지혜와 지식의 은사, 이웃을 세워주고 위로하는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내가 숨겨두고 움켜쥐고 있으면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 위해 바치면 기적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 물질, 지식, 시간 무엇인가를 기쁜 마음으로 바치기만 하면 주의 손에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안드레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먹이시고자 하는 마음을 읽고 군중들 가운데 가서 음식을 찾았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인데, 그렇다면 가져온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먹으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이렇게 소리쳤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누구음식 가져온 사람 있습니까?” 그러나 그 누구도 내놓지 않습니다.
이때 한 아이가 자기의 것을 내놓습니다. 이 아이는 어렵게 사는 아이 같습니다.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소년은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초라하다고 위축되지 않았고, 아깝다고 인색하지도 않았고 그가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사실 이 5병2어는 이 가난한 어린아이의 한끼 식사였습니다. 이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면 이 아이는 굶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헌신입니다.
주님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아주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그 어떤 것은 나 자신을 보기에 너무 작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너무 부족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잡힐 때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릴 때 블레셋의 거대한 골리앗 장군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는 삼백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십만의 미디안 군사를 격퇴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삼손의 손에 들려진 나귀턱뼈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 일천명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내 손에 있을 때는 비록 작은 것이나 그리스도의 손에서는 큰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것은 대단히 가치 있고 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우리 장로님, 우리 권사님, 우리 집사님, 예수 손에 붙잡힐 때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소년의 도시락 하나 더하기 예수님은 5천명의 식사, 나와 하나님이 연합하면 문제해결의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필요는 굉장한데 여러분의 자원은 보잘 것이 없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는 항상 풍부한 자원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 편에 서십시오. 그분께 내가 가진 기적의 씨앗을 바치십시요. 나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십시요. 하나님이 그 문제를 움켜쥐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 주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의 일입니다. 곳곳에서 전투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양식은 부족하지요. 전쟁은 길어지지요. 그때 부하 한 사람이 링컨에게 "각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편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링컨이 대답합니다. "나의 관심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다만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를 묻고 있다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언제나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께 손을 내밀면 언제나 그분은 내 손을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언제나 하나님은 내 편에 계십니다. 저는 저 자신을 바라볼 때 한없이 못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저 자신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이런 보리떡같은 저를 사용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엔 코로나로 인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문제만 보지 마시고 문제의 배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지난 주일에 말씀가운데 베데스다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앞에 붙잡혀서 살기를 원하는 열망,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성도로 세워지기를 갈망하는 영적인 갈망이 있을 때 그 갈망을 통해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제자 안드레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8-9절,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빌립과는 달랐습니다. 주어진 문제를 자기 머리로 계산만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예수께로 가져왔습니다. 도시락 하나 가진 소년을 예수께로 인도했습니다.
안드레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주님이 행하실 것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도시락을 드리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안드레는 인도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나중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는 자기의 친형 베드로를 예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을 예수께로 인도했던 제자가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예수께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제자였습니다. 바로 거기에 만사가 해결되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찬539장)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안드레는 도시락을 내놓은 소년을 예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9절에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9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소년이 가지고 있는 도시락은 분명히 보잘 것 없는 아주 미약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이시라면 이 작은 것으로도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안드레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이 소년의 도시락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십시오.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주님께서 보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빈 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빈 들은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빈 들은 삭막하기 때문입니다. 빈 들에는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빈 들은 말 그대로 빈 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빈 들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면 빈 들을 푸른 초장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소낙비를 보았습니다. 작은 것에서 거대한 숲을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싣고 와서도
"조금씩만 먹게 한다고 할지라도 부족할 것이다"라고 진단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 인간의 계산으로, 인간의 자원만으로 살다보면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타령이나 하고 '부족하다'만 노래하다 끝이 납니다.
그러나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원대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씩 주는 것과 원대로 주는 것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가 배부른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빌립의 방법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방법은 언제나 넉넉하고 남습니다. "원대로 주라. 배부르게 먹으라. 그리고도 남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께 당신이 만든 답을 가지고 나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십시오. 내 모습 이대로 주님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믿음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 주님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주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기적은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 위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이적은 믿음의 그릇만큼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인생 여정에서 빈 들에 서 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믿음을 붙들고 그 빈 들에서 당당하게 일어나 꿈과 비전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믿음이 필요합니다. 안드레처럼 자기의 최선을 주님께 내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앞에 기도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새벽 기도를 드립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철야기도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금식기도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 물질을 드립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는 길은 인간의 계획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된다."
한 구두 회사에서 아프리카에 판매사원을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구두를 판다고요? 그곳 사람들은 다 원래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구두를 신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지점을 내는 것에 저는 반대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지금 다 맨 발로 다니니까 앞으로 그들이 한 켤레씩만 구두를 사 신어도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구두를 팔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빨리 지점을 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구두회사에서 누구를 파견했겠습니까? 물론 가능성을 보고 빨리 지점을 내자고 한 사람일 것입니다. 똑같이 절망적인 상황,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에 따라서 결과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3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싹티거 웨인이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책제목이 좀 특이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진짜 그렇게 된다』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실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로 실패합니다. 행복하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행복하게 살지만, '나는 불행해. 나는 팔자가 사나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생각은 마치 씨앗과 같습니다. 무슨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 독초가 나기도 하고 약초가 나기도 하는데, 약초를 심어서 약초를 먹겠습니까 아니면 독초를 심어서 독초를 먹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가장 큰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감사기도로 이루어진 이적이었습니다.
11절,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예수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자연스럽고도 태연한 식사 감사기도를 의미합니다. 즉 개떡 다섯 개를 놓고도 마치 5천명의 식사가 태산처럼 쌓여있는 것처럼 감사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5천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감사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당장 전세금 수천만원이 필요한데 단돈 십만원을 손에 들고 감사하라고 한다면 여러분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 5천배의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이 감사는 감사가불 혹은 선불감사입니다. 이는 베풀어 주셨던 축복만을 감사하거나 도움의 통장을 손에 쥐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베풀어주실 축복을 영상으로 그리면서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믿음으로 미래의 것을 미리 잡아당겨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것은 보리떡 다섯 개에 불과하지만 주님은 얼마 후에 5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 것을 벌써 바라보시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소낙비를 보았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를 해야 들으신다고 하셨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어느 부인은 자기도 남편 문제로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한 숨을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였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같이 술로써 인사불성이 되어 겨우 집에까지 도착해 문 앞에서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더니 세상 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고 화도 나서 기구한 팔자타령을 하며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합니까?" 하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면서 절반은 신세타령하고 절반은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감사 기도하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다가, 감사할 것이 없어서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했답니다. 바로 그 때 성령의 감동으로 감사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취했어도 집을 찾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토요일은 더욱 술을 많이 먹어 주일날은 집을 잘 봐주어서 교회 나오는 데 불편하지 않아 좋고, 계속해서 감사해야 할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정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은 갈증이 나서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더니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를 구체적으로 나열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나도 예수 믿어 줄께" 하며 선뜻 교회에 나갈 것을 약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그동안 왜 몰랐겠습니까? 또한 자기 아내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이 부인이 간증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써 이루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느 때 들으실 것 같습니까? 오천 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하는 이런 감사기도에 기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떡을 떼어서 나누어줍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13절,“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주님의 은혜는 차고도 넘쳤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풍성한 은혜였습니다.
남은 조각만 12바구니였습니다.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비록 작은 것이었지만 어린 소년이 자기의 것을 희생하여 예수님께 드렸더니 큰 기적을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아무 희생이 없는 것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주님을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가지지 않은 이백 데나리온을 바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있지도 않은 것을 내놓으라고 닥달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저 물고기 두마리 보리떡 다섯 개여도 좋습니다. 그저 내 모습 이대로 주님앞에 드리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받으시고 역사하십니다. 빌립은 200데나리온으로도 조금씩 밖에 못먹는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풍족하게 먹고도 12바구니가 남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빌립같은 합리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안드레처럼, 오병이어를 드렸던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게 있는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게 주어진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감사합시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감사할 때 광야가 풍성한 축복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광야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염려하지 맙시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주님께 붙잡힌바 되어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