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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1:12-17절) 선지자의 질문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른 믿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온 세상을 파괴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절망과 어려움 중에 처해 있다 해도 올바른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건져내 주십니다. 아마추어는 망가진 기계를 분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부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부수어 버린 후에는 다시 조리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기술자는 완전히 분해한 후에 다시 조립해서 망가지기 전보다 훨씬 더 훌륭한 상태로 회복시켜 놓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믿음을 주시기 위해 전쟁(戰爭)도 일으키시고, 재앙(災殃)도 불러오시고, 기근(飢饉)까지 일으키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도저히 재기(再起)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능히 일으켜 세우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죄를 지어 교도소에 끌려가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교도소에 끌려갔다 나와서도 장관(長官)이 되고 국회의원(國會議員)이 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교도소 안에는 그래도 법(法)이 있고, 어느 정도의 인권은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극악(極惡)한 죄수라도 하루 밥 세끼는 꼬박꼬박 챙겨 줍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 법(法)도 없고, 인권(人權)도 없습니다.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고, 이유 없이 재산을 빼앗기며, 이유 없이 가족과 헤어지고, 이유 없이 노예로 잡혀갑니다. 그래서 전쟁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악(惡)중에서도 최고의 악(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항의(抗議)에 가까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하박국도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의롭다거나, 전혀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바벨론이라는 나라도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위(水位)였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바벨론을 사용하시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다를 비롯한 전 세계를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시는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의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 보좌(寶座)에서 내려와서 더 이상 세상을 다스리시지 않는 것처럼 온 세상에 살육(殺戮)의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법(法)도, 인권(人權)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짐승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정의(正意)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을까?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던진 질문(質問)이었습니다.
Ⅰ.선지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1:12절)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 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선지자는 아주 다급하게‘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제부터 그가 말씀드릴 주된 내용이 정의(正義)에 관한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서는‘거룩하다’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완전히 거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죄(罪)나 악(惡)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 한 순간도 악(惡)한 것을 생각하거나, 악(惡)한 감정을 품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악(惡)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악(惡)한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선하다는 표현을 사람에게 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善)하다는 것은 아무런 사심(私心)없이 100%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아무 사심(私心)없이 완전히 헌신적으로 남을 위해 일할 수 있겠습니까? 말로는 남을 위해 한다고 해도 사실은 무언가 자신에게 유익(有益)이 되고, 명예(名譽)에 도움이 되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게 함부로 선(善)하다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겉만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은 완전히 선(善)할 수가 없습니다. 설사 정말 선(善)할 때가 있다 해도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0% 거룩하신 분입니다. 악(惡)한 것은 생각조차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지금 계획하고 계신 일이 무엇입니까? 무지막지한 깡패 같은 나라 바벨론에 유다를 비롯한 온 세상을 맡겨서 한없이 살육(殺戮)하고, 짓밟으며, 파멸(破滅)시키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히틀러나 공산주의자에게 온 세상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그야말로 킬링필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았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왜 갑자기 이 말이 튀어나옵니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는 것과 유다 백성들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번역 성경은‘우리가’를‘당신은’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꾸어 놓으면, 오히려 문장(文章)이 더 어색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악(惡)이 그렇게 들끓는데도 힘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일 분 일초도 빠짐없이 이 세상을 통치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통치권을 포기하신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처럼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이 믿음만 가지고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존재하시며,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습니까? 짐승 같은 바벨론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12절)...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처럼 유다 백성들을 징계하고, 죄를 깨우치기 위해 바벨론을 사용하신다면, 아무 불만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몇 달 동안 고통을 주다가 회개하면, 다시 철수시키시고, 교만해지면, 또 다시 공격하게 하신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유다를 완전히 죽이려 하고 계십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켜서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전부 멸망시키려 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런 계획을 세우실 수 있을까?
죄(罪)지은 자들만 잡아서 가둔다는데, 불만을 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죄인(罪人)과 의인(義人)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즉 무차별적으로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고, 비참한 처지로 떨어져 버립니다. 우리 민족도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日帝)치하에서 남자들은 학도병으로 잡혀가고, 여자들은 정신대로 끌려갔습니다. 즉 딸도, 솥도, 다 가져가고, 교회의 종까지 떼어갔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빼앗아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했을 때도 반동분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집집마다 뒤져서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럴 때, 어디에서 정의(正義)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피해서 숨어 있어야지, 잡히면 즉시 죽는 것입니다.
이젠 유다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運命)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하박국은 너무나도 답답했습니다. 회개하면,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회개(悔改)고 뭐고 무조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모르고 당하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미리 알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절망을 소화(消化)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 비극적인 미래를 소화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믿음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절망의 돌덩이를 삼켜서 소화(消化)하는 믿음입니다.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상황을 소화(消化)하는 믿음, 한 번 펑펑 울고 난 후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지금 하박국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과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조화(調和)되지 않아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사랑하시는 방법도 우리 생각을 넘어섭니다. 그러니까‘내가 온 세상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 얼른 믿어 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즉 텔레비전을 부수면서, 집을 부수면서, 회사를 부수면서‘내가 이것들보다 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Ⅱ.하나님의 침묵 선지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하나님의 침묵(沈默)이었습니다. 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침묵(沈默)을 지키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13절)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은 하나님이 마치 온 세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환히 보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패역(悖逆)한 자들이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악(惡)한 자들이 완전히 승리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밟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을 킬링필드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신앙은 일종의 인과응보(因果應報)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의롭게 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은 지켜 주시고 패역(悖逆)하고 악(惡)한 자들은 벌(罰)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있어서,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창조의 원리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은 복(福)을 받습니다.
즉 욕심을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노력하는 사람은 성공하고, 건강이든, 권력이든, 돈이든, 남용(濫用)하는 사람은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이 전면에 나타나시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반은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악(惡)한 자들이 세상의 권력(勸力)을 차지하고, 자기보다 의(義)로운 자들을 짓밟는데도 형통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마치 불이 꺼져서 온 방안이 캄캄한 것처럼 세상이 온통 혼란과 어두움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이 침묵(沈默)을 지키실 때보다 더 성도들에게는 절망스러운 때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쟁이 터지면, 악(惡)한 사람들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의(義)로운 사람들이 더 많이 죽습니다. 또 홍수나, 지진이 일어날 때, 건물이 무너지거나, 비행기자 추락할 때도 선악(善惡)을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전부 히틀러의 전부 무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악(惡)해서라기보다는 히틀러 정권이 미쳐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악(惡)의 세력이었습니다.
설사 유대인들에게 죄(罪)가 있었다 해도 히틀러 정권보다는 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어 가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沈默)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조금만 간섭(干涉)하셨어도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안네의 일기』같은 책을 읽어 보십시오. 물론 안네라고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히틀러보다는 확실히 의(義)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조금만 보호해 주셨더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는데, 결국 안네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13절)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을까? 지금도 하나님이 세상에서 침묵(沈默)하실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침묵(沈默)하실 때가 있습니다.
100%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얼굴을 돌리시며, 못 들은 체하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 우리에게는 가르침만으로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죄 성은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엄격한 훈련을 받아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깎아내기 위해 철저한 절망 중에 몰아넣고, 귀를 틀어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조금 깎여 나갑니다. 우리 속에는 쇠말뚝이 하나씩 박혀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있는 교만의 심지가 곧 그것입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예루살렘이 불타 버리고, 예루살렘이 피바다로 변해야 비로소 이 쇠말뚝이 조금 깎여 나갑니다. 다 뽑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조금 깎여 나갑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을 깎아내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놀랍게 침묵(沈默)하셨을 때가 언제일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그때입니다. 예수님이 마27:46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는데도 하나님은 침묵(沈默)을 지키셨습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좀 덜 악(惡)하다고 해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철저하게 해결하십니다. 즉 철저한 구원, 아니면 철저한 심판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간단한 치료만을 원합니다. 가능하면 수술 받지 않고, 알약 한두 알로 치료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알 약 한두 개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대수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와 보혈로 철저하게 수술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저절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자동적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몇 마디하고 마음속으로‘미안하다’는 생각만 가진다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정결(淨潔)하게 하십니다. 즉 고난(苦難)의 용광로에 던져 넣어서 교만을 녹이시고, 하나님만 신뢰하게 하신 후에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거나, 제자훈련을 받거나, 성경공부를 함으로써 거룩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죄 성을 철저하게 보아야합니다.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부패하고, 못돼먹은 짐승같은 놈인지, 피눈물을 흘리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의 모습을 외면하거나, 남의 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가공할 죄 성을 보고, 스스로 사망선고를 내려야 합니다. 세상 적으로도 손해를 보지 않고, 신앙적으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있는데, 시장바구니 챙기려고 주저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또 버스가 한강으로 추락하고 있는데, 가방 챙기려고 머뭇거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여유를 부리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나이롱 신앙입니다.
요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 주셨으니까 나는 내 일이나 잘 하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대충 대충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진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는'대충’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모두 다 파괴해서라도 믿는 자들에게 제대로 된 믿음을 심기 원하시며, 세상의 헛된 명예나 욕심에 속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죄 성을 드러내실 때, 사생결단하고, 그 죄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자존심이나, 작은 애착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말씀에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망(死亡)의 골짜기에서 놀랍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을‘반석’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반석이신 하나님이 왜 예루살렘을 망하게 하실까? 하박국이 몰랐던 사실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망하는 편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는 망하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당한다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 밑바닥에 떨어지면, 인생이 끝날 것 같지만, 막상 떨어져 보면, 견딜 만하고, 오히려 유익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감옥(監獄)에 들어가면 인생이 끝날 것 같지만, 밥주지요, 필수품 주지요, 운동하게 하지요, 요즘은 인권이 있어서 마스크도 주지요?, 잠재워 주지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苦難)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순수해지고, 정결해집니다. 신앙 없는 사람들은 환난이 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난(患難)이 와야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차라리 터질 게 터져서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등에 커다란 고름덩어리를 이고, 혹시라도 누가 건드릴까? 조마조마하게 살았는데 막상 터지고 나니까 후련한 것입니다. 이처럼 터질 게 터지고, 깨질 게 깨져야 반석(盤石)이신 하나님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완전한 절망이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어서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또 태양과 달을 멈춰 세워 놓고, 전쟁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박국이 미리 내다보며 걱정해서 그렇지, 사실 바벨론 포로생활이 예루살렘의 타락한 생활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오히려 반석(盤石)을 되찾았습니다. 세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을 때는 이 반석(盤石)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고 바벨론에 잡혀갔을 그때, 이 반석(盤石)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Ⅲ.바벨론의 잔인성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토록 잔인(殘忍)한 바벨론 손에 맡기시는 것에 이렇게 항의(抗議)했습니다. 14절)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바벨론이 얼마나 사납기에 하박국이 이처럼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것일까? 바벨론은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즉 물고기 취급 하고, 벌레 취급을 했습니다. 물고기가 수백 마리 죽었다고 통곡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루살이나, 개미가 수천 마리 죽었다고 애곡(哀哭)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바벨론은 그런 물고기나, 하루살이를 죽이듯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15절)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여기에서‘낚시’는‘갈고리’입니다. 바벨론은 포로들을 갈고리 같은 것에 꿰어서 끌고 갔던 것 같습니다. 전에 북한 당국이 탈북자들의 코를 철사에 꿰어서 끌고 갔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소처럼 꿰어서 포로로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또‘투망’은 저인망(底引網)을 가리킵니다. 저인망(底引網)은 작은 물고기까지 싹쓸이를 해서 씨를 말려 버리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이처럼 사람의 씨를 말릴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여서 병든 자나, 불구자들은 죽이고, 쓸 만한 자들은 갈고리에 꿰어 포포로 끌고 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는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16절)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이것은 풍어(豐漁)의식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마치 풍어의식을 행하듯이 그물에 제사를 드리고, 투망에 분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마치 어부(漁夫)들이 그물에 제사를 지낸 후에 사정없이 모든 물고기들을 잡아 버리는 것처럼, 바벨론도 사정없이 모든 사람들을 잡아서 포포로 끌고 간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福音)으로 사람을 낚아야 할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바벨론의 악(惡)한 어부들이 와서 거꾸로 그들을 모두 다 잡아가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어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福音)으로 사람을 낚는 선(善)한 어부요, 다른 하나는 닥치는 대로 죽이기 위해 사람을 낚는 악(惡)한 어부 입니다. 즉 선(善)한 쪽이 이기든지, 악(惡)한 쪽이 이기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바벨론이 이처럼 저인망(底引網)으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어부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福音)의 선(善)한 어부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악(惡)한 어부들이 와서 저인망(底引網)으로 싹 다 훑어가 버립니다. 어린아이, 청소년 할 것 없이 전부 멸망(滅亡)의 자리로 끌고 가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굉장히 심각한 사랑입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합니까? 한 사람이라도 믿음에 올바로 서게 하기 위해 전쟁(戰爭)을 허용하실 정도로 심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 속에 있는 교만을 꺾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분해(分解)하시고 징계(懲戒)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매는 가능하면, 맞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깡패에게 맞는 것과 부모에게 맞는 것 중, 선택하라면, 누구라도 부모에게 맞는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부모는 아무리 아프게 때려도 사정을 봐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깡패에게 맞는 것과 하나님께 맞는 것 중, 선택하라면, 차라리 깡패한테 맞는 편이 낫습니다. 하나님의 매는 그만큼 무섭습니다.
다윗의 전쟁은 영토(領土)를 정복하는 전쟁이 아니라, 죄(罪)와 싸우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년에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정복하는 전쟁을 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감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징계(懲戒)하기 위해 세 가지 벌(罰)을 그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즉 7년 동안 기근(飢饉)을 겪든지, 3개월 동안 적(敵)에게 쫓겨 다니든지, 3일 동안 온역(溫疫)을 당하든지, 셋 중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 벌(罰)을 선택했습니다. 온역(溫疫)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벌(罰)이니까 사정을 좀 봐 주시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온역(溫疫)이 가장 무서운 벌(罰)이었습니다. 그 벌(罰)을 받을 때 다윗의 마음속에 얼마냐 큰 두려움과 공포가 임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맞아 본 사람들의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는 절대로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깡패한테 맞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매에는 심리적(心理的)인 두려움과 철저한 절망(切望)이 동반(同伴)됩니다. 즉 하나님의 매는 몸 뿐만 아니라, 가슴 깊이 파고듭니다. 살 소망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사람은 아무리 미친 듯이 괴롭혀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기세가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징계(懲戒)하시면, 육체적인 고통보다 마음의 두려움이 그렇게 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박국은 아무리 유다가 부패하고, 타락했어도 하나님이 직접 징계(懲戒)하시기를 원했습니다. 바벨론은 너무나 무자비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차라리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직접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매를 피할 방법은 없을까? 즉 하나님께도 맞지 않고, 바벨론에게도 맞지 않을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미리 말씀을 듣고, 무릎 꿇는 이것입니다. 미리 말씀의 매를 맞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바벨론처럼 악(惡)한 사람들을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이 때리시기 전에 스스로 자기 몸을 때려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이처럼 철저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오늘날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미리 주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으면, 바벨론 같은 세력에 짓밟힐 필요가 없습니다.
즉 인생 밑바닥에 내려가 절망을 겪을 필요가 없습니다. 유다 백성들도 그렇게 했더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70년의 포로생활이라는 비싼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0:28절)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신 수 있는 이(하나님)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Ⅳ.하나님께 질문하라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이 침묵(沈默)을 지키실 때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데도 듣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화내면서 돌아서 버리면 안 됩니다. 즉‘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니까 나도 하나님 버리고 세상으로 가겠다.’라고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화를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沈默)을 지키실 때, 사실은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호흡(呼吸)과 맥박(脈搏)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침묵(沈默)을 지키실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데에는 우리의 지각(知覺)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챙겨 주신다면, 우리는 늘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불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沈默)하실 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주관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나는 다 잘했고, 남들은 다 잘못한 것 같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 지엽적(枝葉的)인 문제, 남에게 들은 기분 나쁜 말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즉 여기도 썩어 있고, 저기도 썩어 있는 실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즉 말로는‘주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고집과 교만으로 뭉쳐진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며, 자기의 생각을 진술하는 기도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곧 지각(知覺)을 사용하는 기도입니다.
처음 기도할 때는 날마다 떼어먹힌 돈 이야기만 합니다. 즉 나를 속인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점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마치 저 높은 곳에서 남을 내려다보듯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미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의 고민을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악(惡)을 꿰뚫어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사람은 이미 시험(試驗)을 이긴 것입니다. 즉 고난(苦難)가운데 자기 교만을 깨닫고, 그것을 기도로 말씀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바벨론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간의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른지를 잘 압니다. 겉으로는 신실(信實)을 말해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이 있는지, 가장 겸손해 보이는 사람도 속에는 얼마나 무서운 교만(驕慢)이 있는지 잘 압니다.
사람 속에는 선(善)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직 선(善)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진실(眞實)해지며, 진정으로 겸손(謙遜)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그 어려운 일을 내 안에 이루시려고, 자연을 파괴하고, 전쟁을 일으키며, 재난을 일으키는 일을 불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일하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느냐? 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나서서 무엇을 하려고 들기보다는 기도에 더욱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쉽게 신앙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일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이끌어 가십니까? 라고 질문하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문제의 해답이 그리스도 안에 다 있다는 사실, 우리 인생의 모든 어려운 문제가 참 해결 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온 세상보다 나 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부수시기 전에 올바른 믿음을 갖는다면, 세상도 건지고, 나 자신도 건질 것입니다. 선(善)한 어부의 역할을 포기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믿음의 선(善)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그것이 바벨론 같은 악(惡)의 세력이 일어날 기회를 막는 길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담대하게 기도합시다. 성령이 이 땅에 임하셔서 더 많은 좀비(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服從)하는 축복(祝福)을 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살후1:8-9절)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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