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남쪽방향으로 낙동강의 지류가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등서치, 율포, 음지, 정자마을 이 있다. 서치(棲雉)마을은 용흥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앞산에 꿩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율포마을은 서치 서쪽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가 많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음지마을은 응달쪽이 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정자마을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성산이씨의 연원(星山李氏의 淵源)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신라 말엽부터 확거(確據)한 호족(豪族)으로 그때의 성향(姓鄕)도 성산(星山)이라 했다. 후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자 이성(異姓)들의 지명(地名) 경제(更制)에 따라 성산이씨(星山李氏)가 경산이씨(京山李氏)로 불리었고, 성주이씨(星州李氏)로도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성산이씨 뿐만 아니고 성주(星州)를 성향(姓鄕)으로 하는 여섯 이씨인 성주(星州)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경산(京山)ㆍ가리(加利)ㆍ성산이씨(星山李氏) 등이 다 같았다. 그로 인하여 씨족(氏族) 구별에 허다한 혼란과 본의 아닌 오류가 여러 번 있기도 했다.
1914년에 이르러 대종회의(大宗會議)로서 ‘관향(貫鄕)은 본래 시조(始祖)의 성향(姓鄕)을 말한다.’ 라는 말을 근거로 하여 신라 때의 지명인 성산(星山)으로 그 근원(根源)을 찾았던 것이다.
시조(始祖)능일(能一)은 신라 말기 본피현(本彼縣ㆍ지금의 성주)을 지배해 온 지방의 호족(豪族)으로, 고려 태조 18년(935년) 겨울 왕이 후백제왕 견훤을 징벌(懲罰)하기 위하여 병(兵)을 이끌고 조물군에 이르러 능일(能一)을 본부장군으로 삼았다.
능일(能一)은 최언(崔彦)과 더불어 600인의 민병(民兵)을 거느리고 고려 태조를 도와 신검(神劍)의 진지(陣地)를 몰아치니, 싸움은 격전으로 벌어지더니 끝내 신검(神劍)은 완패하고 목숨만 붙어서 패주(敗走)하다가 탄현(炭峴)을 넘어 황산에서 사로잡혀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의 초명이 능(能) 또는 능필(能弼)이던 것을 필(弼)자를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상징하는 일(一)자로 개사(改賜)하여 능일(能一)로 부르게 하고, 사공(司空ㆍ정1품)의 벼슬을 내려 태조의 딸 정순대장궁주(淨順大長宮主)와 혼인케 하여 부마(駙馬)로 삼고, 고려의 최고 작위(爵位)인 벽상삼한삼중대광사공성산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司空星山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선 고종 26년(1900년) 후손들이 사창(司倉) 유허지(遺墟地)에 설단(設壇)하여 매년 단향(壇享)을 해오다 1980년에 시조묘(始祖廟)인 경원사(景源祠)를 지어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향사(享祀)를 지낸다.
그가 실제 살았던 옛 터전에는 후손들의 추모(追慕)로 세워진 성산재(星山齋)가 있으며, 재사(齋舍) 동쪽에는 아득한 옛날 그가 마셨던 우물인 이공신정(李公神井)을 복원하여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예로부터 편의상 14世 즉 고려(高麗 서기 1350년대)말과 조선조 초기에 살으셨던, 14世 이여충(李汝忠)을 파조(派祖)로 하는 인주공파(仁州公派), 14世 이여신(李汝信)을 파조로 하는 김산공파(金山公派), 14世 이여량(李汝良)을 파조로 하는 정언공파(正言公派), 14世 이희(李禧)를 파조로 하는 봉익공파(奉翊公派), 14世 이직손(李直孫)을 파조로 하는 기국공파(杞菊公派)로 5개 대파(大派)로 분류한다.즉 14世에는 우리선조가 열네(14名)분이 계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22世 즉 조선조(朝鮮朝 서기 1600년대)에는 이백육십(260名)분의 선조가 계셨는데, 이 시대를 집성촌(集姓村-씨족별로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던 동네)별로, 인주공파 33個派, 김산공파 47個派, 정언공파 82個派, 봉익공파 1個派, 기국공파 44個派로 총 207個 중파(中派)로 분류하는데, 260분 중 나머지 33人은 무후(无后)이다. 22世 이하에서는 각 문중에서 선조의 관작(官爵)이나, 아호(雅號)나, 동네별로 소파(小派)로 편리하게 부른다.
고려 초기 견수(堅守)는 4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족보상 등재(登載)되어 있는 분은 광(匡)과 직(直)등 두분으로, 5부자가 모두 과거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후 정당문학과 종2품에 오른 우당(宇唐),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여충(汝忠), 김산 군사(郡事)를 지낸 여신(汝信), 안렴부사(按廉副使)를 지낸 여량(汝良) 등이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15世·諱-중화(重華)·字-순서(舜瑞)·號-기국(杞菊)·창릉참봉(昌陵參奉)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용흥리)
♣기국제 기문♣
왕자산(王子山)의 脈이 東으로 달려 5리 남짓에 구불구불 고운 산기슭에 웅크려 앉은 龍이 머리를 든 것 같은 山을 서침봉(書枕峰)이라 한다. 봉의 아래에 기국재(杞菊齋)가 있으니, 참봉 李公 중화(重華)가 거주 하던 곳이요, 기국(杞菊)은 그의 號이다.
公이 일찍이 자양서(紫陽書-주자의 글)의 기국(杞菊)의 글귀를 우러러 보고 마음을 어루만지며, 즐겨 말하기를「즐거움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밖에 이르기를 일삼겠는가?」하고 이에 손수 집 모퉁이에 구기자와 국화를 심고 그 즐거움을 부쳐 글을 써서 말하기를 「구기자에 장생(長生)하는 이치를 얻었고, 국화에 대은(大隱)하는 뜻을 알겠네.」라 하고 字號를 위와 같이 하여 일생을 마쳤다.
아! 公은 벼슬하는 가문에 태어나 영리(榮利)로 그 마음이 끌리지 아니하고, 책을 안고 도를 지키니 조정에 알려지고 또 천거되어 창릉(睿宗陵) 침랑(寢郞-參奉) 한성판관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드디어 이에 몸을 숨기고 이름을 감추어 드러나지 아니하니 군자(君子)가 애석(哀惜)해했다. 유문(遺文)과 행적(行蹟)이 임진란 때에 잊어버리고, 후손 조현(祚鉉)이 행장을 닦고 유허지에 정자를 세워 옥산 장승택(玉山張升澤)이 기문을 지었다.
그러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여러 번 거듭함에 물건이 能히 오래도록 영원하지 못하니, 재사는 이미 폐허가 되었으나 정채(精彩)는 남음이 있어 사람들이 오히려 아름답게 추앙하기를 다함이 없다. 하물며 후예가 여기에 거주하는 者 상재(뽕나무와 가래나무-고향)를 공경하니 재사를 어찌 중신하지 않겠는가?
임자년 중추에 公의 후손들이 서로 더불어 의논해 말하기를「선대의 재사는 중건하지 아니 할 수 없다.」하고 이에 성력을 다하여 그 역사를 경영하기 시작하여 지붕을 덮고 흙을 바르고 하여 여러 달을 지나 준공을 알리니, 꿩이 날아가는 듯 우뚝하게 아름다워 옛 재사보다 빛남이 있다.
어느 날 公의 15대손 한주(漢柱)가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 비록 글 솜씨는 없으나, 통가(通家-인척)의 의가 있으므로 敢히 사양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 재사의 역사는 다만 선대의 뜻을 이어 집을 지은 것이 아니고, 장차 선대의 아름다움을 천양하고 또 족의를 돈독케 하여, 서로 정도로 인솔하고 세세로 아름다움을 이어 시례(詩禮)의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제일의 의체(義諦-의롭고 긴요함)가 될 것이다.
하늘을 가리는 가지와 잎은 그 근본이 두터움이 있는 것이고, 땅에 흩어진 물갈래의 흐름은 그 근원이 먼 것에 있는 것이다. 조선의 적선여경(積善餘慶)이 있지 않았다면, 能히 자손의 창대함이 있었겠는가?이 재사에 오르는 사람은 여기에서 禮를 강론하고 예술을 배워봄에는 구기자를 채취하여 세상 사람을 수역(壽域)에 이르게 하고, 가을에는 국화를 머금고 몸가짐을 청결케 한다면 기국옹에 후손에 두터이 바라는바가 돌아 보건데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난간을 기대니 푸르름이 옷깃을 적시고 벼개를 통하여 샘물소리가 귀에 들어오고, 아침과 낮의 연기와 노을이 일어나는 자연의 경치와 소나무 등나무에 비치는 풍월 같은데 이르러서는, 다 재사에 있는 바이라 마땅히 간략하게 하고 能히 다 기록하지 않는다.
갑인년 청화절(淸和節-음력 4월) 동래 정영우(鄭泳佑) 삼가 짓고
성산 여상기(呂相琪) 삼가 쓰다
성산이씨 기국공 유허비 제막식 및 기국제 준공식이 2009년10월17일 대가면 용흥리 282번지에서 거행됐다.
이기재 기국제 건립추진위원장은“기국제 중건 추진위원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 기국공파의 모든 후손들의 협조와 대종회 임원들은 물론 여러 종인들의 관심과 지도에 힘입어 큰 과오없이 준공식을 개최할 수 있게 됐다”며 “잔치에 축하차 참석한 내빈들과 행사를 준비한 관계자는 물론 오늘의 영광과 자랑을 기국공파 후손들은 물론 함께 자리한 종친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이영돈 대종회장과 이창우 군수 또한 이 자리에 참석, 축하의 인사를 전했고 모쪼록 조상의 은혜를 추모하고 과업을 기리는 한편 후손들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으며 기국 성지를 오래토록 가꾸고 지켜 나가길 기원했다.
한편 성산이씨는 인주공파, 김산공파, 정언공파, 봉익공파, 기국공파 등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대가면 용흥리에 기국공 묘소와 기국제, 유허비 등을 건립하고 이날 준공식 및 제막식을 가졌다
첫댓글 네~ 좋은 정보감사합니다.
꼭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