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신씨들의 집성촌인 황산전통한옥마을은 수승대 주차장 맞은 편으로 들어서는
도로를 따라 2백여m 정도만 가면 이 마을의 작은 주차장에 도착을 하게된다.
덕유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황산마을은 청정한 개울이 마을을 안고 흐르는 빼어난
자연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또 고풍스런 돌담과 전통한옥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 사계절 운치있는 한옥 민박체험
이 가능하다.
인근 명승 수승대에는 매년 거창국제연극제 개최시기에 맞춰 많은 관광객들이 황산마을
을 찾고 있다.
마을 입구도로에서 오른쪽 언덕에 서 있는 느티나무다.
멀리서 보아도 눈길이 끌리는 나무이기에 차를 가까이 접근시킨다.
전국적으로 온다는 비가 그치고 모처럼 햇살이 눈부시다.
비가 내리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는데 차에서 내리자 숨이 멎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느낀다.
정말 대단히 무더운 날씨라 걸음을 걷기가 힘들 정도이다.
수령은 6백년 된 나무이며 밑둥의 둘레는 7.3m 이며 높이는 18m 라고 한다.
옛날에는 나라의 길흉이 있을 때마다 기이하게 울음소리를 냈다고하는데 근세에 들어
서도 8.15광복과 6.25 동란때도 울었다고 하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나무라고
한다.
무슨 글자인지 한참을 들여다 본다.
안정좌목(案亭坐木)이다. 이 나무를 가르키는 이름 안정좌목인 듯하다.
이 거창 신씨 마을을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보기로하자.
마을 뒤쪽에는 호음산의 정기가 서려있고 마을앞으로는 절경의 수승대가 멋진 풍경을 자랑하고 있질 질않은가?
참으로 아늑하여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을 닮았다고하여 금계포란형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덕유산 남쪽에 위치한 마을을 감싼 산이 호음산이다. 호음산은 포효하는 호랑이가 개를
쫓는 형국이고 마을 앞 개밥말산은 호랑이한테 쫓긴 개가 달아나지 못하고 웅크리고
누워 있는 형국이다.
또 황산마을의 지형도는 거북 형상인데 마을의 중허리를 기점으로, 위에서는 ‘부’가
나고, 아래에서는 ‘귀’가 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황산마을 거창신씨 상계를 살펴보면 참판공 신기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4형제
중 막내 신후경과 함께 전남 영암에 정착했다. 신후경은 형제를 두었고, 그중 맏이인
신영수는 3형제(우평, 우회, 우맹)를 두었다.
맏이인 신우평은 거창읍으로, 둘째 신우회는 전암 영암에 남아 있었고, 셋째 신우맹은
황산마을에 첫 정착한 황산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신우맹은 초계 정씨인 정옥행 창원부사의 사위로, 장인이 사는 거창으로 와 살게 됐던
것이다. 신우맹이 당시 거주했던 수승대 정문 앞의 집은 없어지고, 현재 그 자리에는
펜션이 들어섰다.
신우맹은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요수 신권, 둘째가 신규, 셋째가 신준이다. 셋째
신준은 외지로 나가고, 신권·신규 두 형제는 조선 연산군 7년(1501년) 황산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후 이 마을은 거창신씨 집성촌으로 번창했고,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원학고가" 라?
원학고가의 ‘원학’은 옛 안의면 삼동 중의 하나인 원학동 중심에 신씨고가가 자리함으로
써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필귀정이구나
그렇지!
직역을 하게되면 바른 일이 반드시 돌아온다 라는 말이고
의역을 하자면
올바르지 못한 것이 임시로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결국 올바르지 못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바른것이 이기게 된다는 뜻이니 사람의 행동은 정도를 행하여야 할 것이다.
암 그랗고 말고
멍석을 보관하는 방법인데 이 것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여름밤 나다에 멍석을 깔고 모기
불을 피우며 더위를 식히던 기억, 추억은 정지된 시간으로 남는 것인가?
신씨는 1068년(고려 문종 22) 개봉부 출신인 신 수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수는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수사도(守司徒)와 좌복야를 지내고 참지정사
(參知政事)에 이르렀던 분이시다.
참고로 좌복야와 참지정사의 품계는 정2품~종2품 정도이니 지금의 장차관급이 될 것
으로 생각한다.
거창 신씨는 두 분의 조선조 두 분의 왕비를 배출하였는데 한 분은 연산군의 정비였고
다른 분은 연산이 퇴출되고 왕에 오른 중종의 왕비였으나 반정공신들에 의해 7일만에
폐위되는 불운을 겪은 분들이다.
참고로
중종의 비 신씨는 1499년(연산군 5)에 중종이 진성 대군(晋城大君)으로 있을 때 혼인하
여 부부인(府夫人)에 책봉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후가 되었
다.
폐비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은 여동생이 연산군의 비였으므로 연산군과 처남 매부
지간이므로 매부를 폐위시키고 사위인 진성 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가담하기가
곤란하여 반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종반정을 주동하였던 세력들이 신수근을
제거하고 반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정 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두면
훗날 후환이 있다고 여겨 중종에게 폐비를 주장을 하였고 이를 반대 하던 중종도 반정
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폐출하였던 것이다.
어때요?
중종의 비는 신수근의 딸이고 연산군의 비는 신수근의 여동생이었으니 고모가 되고
조카딸(질녀)이 되는 사이지요?
중종의 비 단경왕후,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의 주인공 그 아픈 시련의 세월에도 거창
신씨들은 이 전통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더 들러보고 싶어도 동행한 미몽께서 더위에 지쳐 탐방을 못한다하기에 아쉽지만 발길
을 돌려야 했다. 수승대의 구연서원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