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yWAQ1jIA5Q
1231년 몽골군의 대거침공에 맞서 귀주성에서 반년을 싸워 패퇴시킨 맹장중의 맹장 김경손 장군의 아버지이자 전주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입니다
김경손은 몽골군을 대패시킨 전공으로 대장군이 되어 전라도지사를 역임했고 부친에게서 자신이 죽거든 삼태성의 점지를 얻었으니 묻혀야 할 자리가 전주 모악산 기슭에 있다 그곳에 장례하라는 유언을 받아 저의 등 뒤 봉분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후손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입니다
역사관2 천문학과 종교의 발생에서 다시 끄적여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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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최대영토는 바이칼 호수를 포함하는 황하이북 지금의 요녕 길림 흑룡강 내몽골 만주 연해주를 강역으로 하였고 중국에 현존하는 고구려 성만도 200개가 넘는다
왜의 해적이 한반도 남부와 서해안 강줄기를 따라 노략질 하고 백제의 패망에 구원병 5만을 영산포로 보냈다 철수했던 바 있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임나는 쓰시마에 있는 지명이고 일본의 전국시대 규슈에 걸친 세력권의 본거지 이기도 했다
앞글에 많은 것을 축약해 놓아서 다음과 같이 잇기에 불편한 감이 있지만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이며 일본황가를 도래시킨 백제와 신라가 특히 중원의 분열기 오랜동안 청도섬을 포함하는 해안선을 따라 당나라 내륙 수백km 깊숙히 진출 영토로 하고 있었다
알고보면 북방 도래족인 우리 조상들이 오랜기간 중국대륙을 운영 하였으며 이 때문에 한족 중국역사는 아주 오랫동안 지금의 북경이 아닌 낙양 중심 수도로 전개되었었다
위만조선이 몰락한 한나라 때에야 장안에 진출하였다가 삼한의 김씨 후손인 누르하치 천하인 청나라가 몰락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어부지리로 베이징 중심이 되었다
한나라 명나라를 세운 한족은 왕 황제 천자를 썻고 고조선 구이족은 간 가한 칸 킹을 썻다
진나라 수나라 양나라 원나라 당 청과 여러 짧은 중국 왕조들은 한족이 아니다
몽골에는 지금도 고구려성이 수십개 있고 징기스칸의 출생지는 전성기 고구려의 영토 사람이어서 당대 몽골인도 삼한과 요 금에 상당한 동질의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징기스칸이 사용한 전술이 고구려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여 날렵하게 치고 빠져 급습하기와 청야전술을 주로 사용하였고 청나라를 개국한 누르하치는 청사를 편찬함에 자신의 가계가 삼한에서 이주한 김씨성임을 밝혀 놓고 있다
청사는 청황제가 직접 참여하여 기술한 정사로서 우리민족과 연고가 깊은 청대에 이르러야 북경이 중국사 중심이 되었고 본래 우리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강역이었기 때문에 북경을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했던 것이다
고려 또한 당대의 슈퍼파워로써 친원주의 이전에는 요나라를 물리치고 견제하여 송나라에 상국이었고 친원 고려는 충숙왕이 다스리고 충선왕은 심양왕으로서 만주지역을 다스리는 대제국이었다
원과의 화친 이전 오랜동안 황제를 칭하여 독자연호를 사용하였고 흑인병사들까지 몽골군으로 참전했던 대몽항쟁 40년 국제전을 치르는 전시에도 대장경을 판각함이 지금에 비춰도 G2에 버금가는 국력을 갖고 있었던 나라였다
금속활자의 문화적 역량은 세계최고의 제철 제련기술을 증명하는 것으로 초일류 하이테크 경제와 군사력의 산물이었다
이와 같은 우리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며 당위를 주장하고자 려말 전래한 주희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충효이념으로 당시까지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최고 고려문화를 폄훼 멸실시키며 육백년을 지나왔다
이성계 정도전 정부가 정권의 안정을 위해 철저히 중국에 사대하게 된 때문에 은 허를 위시하는 황하문명의 본류였던 홍산문화의 위대한 고조선으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찬란한 한민족 역사를 축소왜곡 훼손하였다
현제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이성계 정도전이 고토회복을 포기하고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 했던 치부를 가리고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이루어진 날조된 역사이다
정도전 조민수가 저술했던 고려국사는 너무나 날조가 심하였기 때문에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때까지도 차마 부끄러워 공인하지 못하였다
세종때 김종서 정인지 등이 쓴 고려사조차 태조 이성계가 고려실록을 모두 없앤 후 씌어진 것이다
수대에 걸쳐 스스로 부끄러움에 공인하지 못한 날조된 정도전 조민수의 고려국사를 바탕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백성에게 고려의 실체가 잊혀지고서야 비로소 공포 되었던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상고사는 이성계에서 세종대까지 거의 대부분이 멸실되고 변질 된 것이며 그마저 사대주의 훈구사림파의 득세에 철저히 뭉개지고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청소 되었다
천부경을 들어 보았는가 감히 실제 고려사를 책으로 보관하거나 입에 담는다면 목숨을 부지할수도 없던 오랜 세월을 산사의 땡초들과 선사들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온 그 지난한 여정이 담긴 책임에도 위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 글이 이해 하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비사의 내용들을 생략하여 쓰고 있기 때문에 두서없는 내용처럼 보일 것을 안다
사기와 유사를 존중하고 신뢰하나 성리학 사대주의 중국과의 주군관계 속에 우리 상고사는 철저히 부숴지고 망각되었다
한일합방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역사적 기술들이 거의 사라지고 친일사관이 팽배해져 우리의 역사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근래 우리역사 자료의 부실함을 페르시아제국 사샨제국 청나라 왜의 역사서 등의 편린을 통해 연구를 시작하고 있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일까
고문학의 해석이든 잘못 인식된 역사의 새로운 발굴이든 이전에 서울대 석학들이 한번 기술해 둔 것에 위배되면 그것을 수정하고 바로잡기 어려운 풍토는 하루 빨리 고쳐져야 한다
예를들어 해상왕 장보고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저 상당한 군사적 실력을 갖춘 장삿꾼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왜의 바다와 중국의 해안선 말라카 해협을 통한 서역부근에까지 완벽한 해상패권을 장악한 위인이었다
백제후손이자 신라인들의 기상에 감히 중국의 군사력으로도 대적할수 없었던 당시 군사 경제적 최고의 존엄이었다
장보고가 이끄는 헤아릴수조차 없는 선단을 따라 흩어진 선원들 자체가 군사력이었고 청해진 군사력 만으로도 신라 본국의 군사력을 뛰어 넘었다
실제로 정쟁에서 밀린 훗날 신무왕이 의탁하자 정부군과 전쟁하여 승리하고 민애왕을 죽였던 바 장보고가 자신이 옹립한 신무왕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화를 자초하였다
자객 염장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해상왕국은 영웅의 죽음과 함께 분열하여 사라지게 된다
신라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부여를 지나 주몽의 시대 후처 소서노는 강력한 지방호족의 딸로서 주몽을 도와 고구려 개국의 (광개토대왕비에는 고주몽이 고구려의 개국조가 아닌 중창조로써 그 훨 이전부터의 고구려 역사가 있음) 최대 공을 세웠음에도 아들들의 황위계승 서열에서 밀려 일가를 이끌고 남하 하였다
소서노는 두 아들로 하여금 마한지역을 점령 북한산 인수봉에 올라 도읍할 길지를 살폈다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오른 산은 한강변이 탁 트여 보이는 아차산으로 추정하고 각각 수도를 정하여 비류백제 온조백제를 열었다
사실 우리 상고사가 멸실 되었음으로 중국중심 뙈들의 역사서들을 기초로 지역을 인식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마는 고구려와 백제가 한뿌리임은 수천년을 내려오며 하늘아래 만인이 인식해왔던 바였다
반면 진한지역의 신라는 우랄알타이 로드를 통해 전래한 우리민족이 부족사회를 영위하고 있었다
신라의 역사 또한 조선시대 철저한 사대사상에 의해 파괴된 한국사인 바 대한제국도 지나간 어느 날 개울가에 아낙들이 빨랫독으로 쓰고 있던 몇조각으로 깨뜨려버렸는지조차 알수없는 신라 문무왕의 비석이 발견 되었다
비문에 적힌바 나는 흉노왕 김일제의 자손이다...라는 귀절이 있는대 오직 중국만을 상국으로 다른 것은 오랑캐로 여겼던 조선은 흉노의 자손을 운운하는 문무왕 비석을 부숴 버렸다
사림들은 문무왕비를 깨뜨려 벼루로 만들어 썻고 그 중 한조각만이 남아 누군가가 주워다 개울가에 놓고 빨랫독으로 쓰고 있었더라
사실상 한족은 중국대륙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한나라와 명나라의 짧은 때 외는 갖은 적이 없었고 항상 이민족의 지배와 헤아릴수 없는 침략을 받으며 민족적 흔적조차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마저 근래에는 유방과 주원장조차 한족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있어 중국에 한족이 세운 중국은 모태동을 인정했을 때만 하나가 있다
그나마 한족이 맞을까 모택동으로부터 본격화된 중화주의는 주변국의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짜 맞추며 흉노를 오랑캐라 칭했다
그러나 실제 흥성기 흉노는 중국대륙의 세배 영토를 운영하던 대제국이었으며 투르크 돌궐이라고도 불렸다
신라와 밀접한 소통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의 아랍권 역사서에도 기술돼 있다고 하니 과거 신라의 지배계층이 유독 고구려 백제와 융화하지 않은 이유였을 수 도 있겠다
근세 조선에 이르러 위화도 회군으로 우리의 역사는 위변조가 워낙 심각하여 원형을 찾기 어려워졌음으로 중국사 편린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현제의 중국은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며 청나라의 역사를 계승한다고 천명하였지만
대만은 오랑케의 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명나까지만 중국역사로 삼았다가 본토정부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나서야 공히 청나라를 계승하고 있다
그런대 청나라 선조들은 본래 여진 거란 지역 사람이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연나라의 강역의 후예였고 중원을 제패함에 고려말 왕씨들과 신라의 김해김씨들이 대거 만주로 도피 진출하여 금나라를 세웠다가 몽골제국에 멸망된 후 후신이다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와 우리의 아사달 아사녀를 비교하면 이름을 짓고 부르는 것에 어떤 차이도 없이 동일한 것을 알 수 있겠다
수양대군에 의해 김종서가 피살되자 의붓딸이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에게 달려가 알렸다
이징옥의 책사가 말하길 함경도는 여진족의 발원지 이므로 이곳에서 금나라를 다시 세우고 웅거하면서 조선군을 나는 새도 넘지 못하는 황철령에서 방어하면 만주지역 여진이 모두 호응할 것이라 하였다
함경도는 아들과 손자를 전세계를 경영하는 대칸으로 만든 산세의 정기가 뛰어난 기황후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비분강개한 이징옥은 도성을 먼저 공격하여 김종서 장군의 원한을 갚아 대의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군마를 모아 진군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군이 먼저 김종서의 죽음과 동시에 말을 달려 황철령에 매복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고 궤멸되었다
여진 거란은 상고 이래로 우리 민족과 동일한 강역과 동질의 민족이었지만 한자의 수용시기 차이와 조선 오백년 동안 분리되면서 같은 북방계 종족이면서도 북방족을 오랑캐로 여기는 중국을 따라하는 정서로 인해 별개의 족속처럼 되버렸지만 본시 우리의 강역 우리의 인민들이었다
여튼 여진은 후에 다시 중국대륙을 복속 청나라가 되었는대 청나라의 황제가 쓴 현제 중국의 정규 역사서중 만주원류고에는 청황실의 선조가 김씨이고 고구려 말갈 여진 백제 신라 삼한땅으로부터 계승되어 왔음으로 청나라는 고려와 신라 삼한 말갈을 계승한 나라이다 라고 명백히 기술 되 있다
청나라는 쇄망한 고려의 왕씨와 특히 고신라지역의 김해김씨 패망한 백제인들 일부는 일본으로 도해하고 일부는 만주로 진출하면서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인 것이다
여진 거란의 나라들은 중원의 한족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던 낙양이나 장안이 아닌 우리민족과 고대로부터 깊은 연관이 있어 가까운 북경중심 왕조였다는 것을 봐도 알수있다
이성계의 후조선이 고조선을 이었으면서도 고려사를 저질왕조로 둔갑시키고 사대하면서 자신들의 위화도 회군으로 포기한 청의 황실 도래지인 만주를 고려가 경영한 바 없다고 회피해버림으로써 우리는 만주에서의 역사와 인민의 울타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사대조선 이전 고려는 려몽항쟁에서 당대 최고의 슈퍼파워만이 해낼수 있는 유례없는 대장경 대역사를 수행해냈고
그 훨씬 이전부터 패권국가의 기초인 초일류 제철 제련 기술로 현대사회에 와서야 구현된 수준의 제대로 된 금속활자를 사용 지상최대의 인문시대를 구가 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려정부가 몽골에 항복한 것이라 알고 있는대 서로간 전쟁을 포기하자고 했던 것이지 결코 항복이라고 할수 없었다
고려는 평화조약 7개항을 몽골에 제안하고 합의하였다
몽골의 군대를 고려에서 철수시킨다
고려의 왕이 몽골군에 몸을 낮춰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강화도에서 본토로 환도함에 있어 그 시기는 고려의 재량에 따라 정한다
다루가치 등을 파견하여 고려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고려국 황제의 칭함은 거두나 왕의 칭호를 쓰고 유지한다
등으로 결코 항복이라고 보기 어렵고 거의 대등하지만 황제칭호는 포기하는 선에서 평화협정 하지 않겠다면 우리 고려는 끝까지 싸울 것임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몽골은 고려가 이전 당나라와 수나라가 백만의 대군으로도 굴복시킬수 없었던 나라였다
모든 제안을 수용하며 자주적 왕권과 몽골제국 바로 아랫단의 주체국임을 인정한다 하였다
실제로 송나라든 금나라든 서역의 어떤 나라도 독립된 국체를 유지하지 못했고 러시아를 부흥시킨 피요트로 대제의 로마노프 왕조도 기존체제를 완전히 엎어 놓은 몽골계 지배층 이었던데 반해 자주적 왕권국가로 유지된 고려와 같은 예외는 거의 없는 사례였다
결국 몽골이 오랜동안 간섭함으로 친원주의가 널리 자리잡았고 위대한 문화와 군사강국인 고려왕실은 점차로 무장해제 되어 원의 영향력 안에 놓였다가 지방군벌의 사병이 커짐으로써 훗날 이성계의 역성혁명 발단이 되었다
몽케칸이 죽고 남송과 전쟁중 대칸계승에서 밀려났다 봉기하여 내전에 승리 대칸이 된 쿠빌라이가 가장 아끼던 막내딸 노국대장공주를 충렬왕에게 시집보냈는대
수부타이에 필적할 티무르같은 대전공 장군조차 천손인 칸의 혈통과 결혼동맹에 들기 어려웠다고 한다
세계를 통털어 몽골왕실 외 인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왕을 칭할수 있는 자가 몇손가락 되지 않았다
소수정예로 대제국을 유지 운영해야 했던 징기스칸은 항복하지 않는 적과의 전투에 승리하면 몽골군 10만명에게 1인당 24명씩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남녀노소 불문 꿈틀거리는 모두를 죽이고 도시를 초토화 시켜 초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반란의 씨앗을 애초에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대몽항쟁에 화친한 이후 고려는 황조에서 왕조로 격하되었을뿐 몽골황실 행사에 충렬왕이 입장하면 쿠빌라이의 열두아들 위의 전 몽골서열 7번째 상석에 앉았다
원은 고려민과 중앙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저항의지를 차단하며 지방의 산성세력과 연계를 느슨히 하고자 군세가 가장 강력한 함길도 동북면 성주와 동맹하였고 성주의 딸 기씨 여인이 대칸의 황후가 되연서 고려군 중앙의 힘의 약화가 가일층 되었지만 반대로 몽고내부에서의 영향력은 커졌다
충선왕은 몽골에서 지내며 친구로 지냈던 몽골왕자가 대칸이 되도록 공을 세웠고 계승전에 밀려나자 반란한 천손들을 진압하고 처단하는 임무를 맡아 권력의 절정에도 이르렀다
이와같은 공을 치하받아 고대로부터 고구려의 고토이자 고려의 강역이었던 금나라 즉 만주지역 왕인 심양왕에 봉해져 다스렸고 한반도는 세자인 충숙왕에게 운영하도록 양위하였다
고려의 위상은 위로는 오직 몽골의 아래였을뿐 고토중 만주를 회복하였던데다 전 몽골 서열 4위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우리 대한의 건아들 고구려 백제의 후손들은 민족정기를 스스로 폄하해버린 후조선 이전에는 위대한 역사를 지나온 바 있었다
몽골과 흉노 삼한에 아우르는 알타이 민족 고조선의 후예였던 고려는 세계최강 몽골에 맞서 그 턱 밑에서 40년을 싸웠음에도 멸족되지 않았고 결코 몽골이 어쩔수 없는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몽골이 소승불교를 접하여 국교로 삼고 인명존중을 알기 전에는 그들이 지나고 승리한 곳의 모든 두발로 서 있는 것들을 남기지 않고 죽여 없애버리고 방목지로 바꿔버렸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제주도에도 한라산을 빙돌아 중산간지대가 아직도 몽골인이 만든 목초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대 대몽항쟁 사십년을 격고도 고려는 황제호칭의 포기 외의 다른 어떤 불리함도 격지 않았고 오히려 대등했거나 승전국 준한 대우를 받았으며 몽골군 스스로 완전철수 했다는 것도 유래가 없었으니 그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쓰고있는 북한산 산행기가 바로 그 이유에 관한 것이다
고려가 항쟁은 포기하고 몽골과 화친했지만 전몽골 서열 7위~ 4위에 이르는 위상을 유지했고 쿠빌라이가 가장 아끼는 친 딸을 고려왕에게 보냄으로써 동맹에 준했다
항복하지 않는 적은 초토화를 추구하는 몽골답지 않은 스스로를 낮추는 동맹에 준하는 관계를 맺었다
고려의 동북면 산성세력이 몽골과 동맹하여 성주의 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었고 그녀의 손자와 증손자가 4한국의 본국 원나라의 대칸황제가 된 것은 상응한 권력기반이 없는 여인의 궁궐생활이란 비참커나 죽거나 인것에 비춰 몽골의 실세들과 합종연횡 할수 있는 힘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남는다
나는 그러한 고려의 위상과 실체를 산을 다니며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고려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하며 한반도 전체가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초토화 되었다고 상식처럼 알고 있다
그랬다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왕조는 아마도 육지와 단절되고 철기 등을 보급을 받을수 없어 결코 수년도 버틸수 없었을 것이며 고려강토에 인명이 씨가 말라 흖적조차 찾기 어려웠을 상황이 되었어야 한다
잘못된 역사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대몽항쟁에서 실상은 고려가 패하지 않았고 민족의 자긍심을 잃은적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결단코 분명하고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양때를 몰다가 칼을 빼들고 말을 달리면 그대로 신선한 군량이었고 용장들인 몽골군에게 한해의 절기를 따라 식량을 생산해야 하는 농경고려가 괭이와 전답을 버리고 험산준령에 의지해 전쟁을 치러야 했던 기습초기 몽골군의 기동력에 미처 준비되지 못했으므로 전 국토가 유린되는 큰 피해를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후의 몽골군은 고려 인민이 물러난 무주공산에서 군량을 축내며 빈절이나 태우고 다녔던 것 뿐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강한 외적이 처들어 왔을 때 모든 것을 스스로 태우고 없애 적들이 편하게 운신할수 없도록 하였고
성에 틀어밖혀 적들의 보급에 어려움을 격어 허점을 보였을 때 치고 빠지는 청야전술을 써왔다
반면 당시의 몽골은 서역정복과 서하와 금나라 호라이즘 정벌을 통하여 완벽한 공성전술과 공성무기들을 갖추고 있어 기타 왕조들까지 거의 초토화를 마친 상태였다
인구가 적은 몽골은 승리하면 상대를 전부 죽여 빈공간을 만들어 버림으로 승리와 정복지를 유지하고 반역의 싹을 잘라버림으로써 소수의 인구로 거의 지구상 모두를 정복 유지 할수 있었다
그런대도 자신들의 턱밑에서 40년을 개긴 초강성 고려를 초토화 시키지 못하고 군대를 스스로 철수 하였다
그 이유가 몽골군의 고려에 대한 동족의식이나 자비라고 생각한다면 천부당 만부당이다
나는 산행을 다니며 핸폰의 편리함으로 글자로 적은 것일뿐 30년 전에도 세계관 우주관 역사관이 지금과 같았다
혹자들은 근래 나타난 유튜브를 접하고서 여몽항쟁기의 몽골이 당대 유럽과 남아시아 서하 남송 요 등 거의 전 세계를 상대로 동시전을 치르며 비주력 일부를 고려에 보낸 전쟁이어서 고려가 장기간 항쟁할수 있었던 것이지 몽골과 고려가 일대일 맞다이를 벌였다면 얼마도 버틸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단언하건대 쿠빌라이가 직접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는 수부타이 티무르 바투 같은 용장들과 한명 한명이 탱크같은 몽골군 전부를 이끌고 몰려왔더라도 일찌기 정변으로 장기간 강력한 무신정권 체제에 있었던 고려땅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대규모 몽골군은 스스로에게 유리할수 없었다
라고 판단한다
만약 고려가 만주지역 같은 평야에서 농성전을 펼쳤다면 항복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멸족을 피할수 없었을 것이었다
우리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여 40년 전쟁을 하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장경 대역사까지 병행할수 있었다
결코 포기를 모르는 몽골군이 우리 고려의 무주공산를 휘젓고 다녔을 지라도 실제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몽골 스스로의 국력만 소모하다 지처 짐짓 물러섰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려의 피해라면 전국의 호국사찰들이 고려의 정신이며 원동력이라고 여겼던 몽골군에 의해 거의 불탄 것 정도였고 그런 이유로 고려는 그 난국에서도 기어코 대장경 역사를 완수해냈던 것이다
세계를 삼킨 몽골이 결코 고려를 범하지 못했던 이유
고려 민중들이 항쟁을 포기 하기는 커녕 바다에서 육지에서 초기 피해 외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으며 몽골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굳건히 강화도 정부군과 한몸처럼 항쟁 할수있었던 이유
패전국의 모두를 다 죽여버려 소수로 대제국을 유지했던 몽골전체에서 평화협정 후 고려가 국호를 유지하며 전몽골황실 서열 4위 대접을 받았던 이유
40년을 쟁투하고도 본래 우리의 고토였고 고려의 강역이었던 만주까지 돌려받아 다스릴수 있는 심양왕으로 대우했던 이유
우리 황제국 이었던 고려왕이 잘났든 못났든 이성계의 역성혁명 이전까지 건재할수 있었던 이유
더하여 이후 대일본 원정에서 산중전에 익숙한 고려정예군이 전투를 촉구했음에도 몽골장수가 산속에 숨어버린 일본군과 전투를 회피하다 가미카제에 휩쓸려버렸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도해한 사람들이 집권한 일본과 매우 친밀하여 왜구라는 적이 없었다
여몽군의 일번정벌 실패 이후로 한반도와 일본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끊임멊이 왜구들의 복수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한반도인들을 고쿠리라 부르며 하늘아래 같이 하지 못 할 원수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동학군 잡겠다고 스스로 일본군을 불러들여 도장찍고 나라 넘긴 우리가 사죄를 받을게 아니라 해야지 않겠는가
미소가 북태평양 비키니섬 등에서 터뜨린 원폭이 몇개인데 사고로 인한 배수에만 시비말고 언플쟁이들은 미국 소련에도 항의하라
이것들 모든 이유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의 전국에 몽골의 간섭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기황후 집안같은 지방 산성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산성들은 험준한 고지에 넓은 지역 봉우리들을 돌아 화강석과 현무암으로 켜켜이 쌓은 일당 천도 어렵지 않은 성곽높이 수백m 또는 천m를 넘는 난공불락이다
거기에 사계절 눈비가 많아 골짜기 안에서 식수해결이 무난했으며 콩 귀리 조 등의 능선을 넓게 두른 산성내에서 작물경작이 가능했다
스스로 평야와 초목들 고을의 주거지까지 완전히 태우고 비워버리는 청야전술을 쓰고 천 몇백미터 험준한 산성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는 고려의 성들은 세계최강 전투기계 몽골군 이었을 지라도 백만의 군사력과 공성장비를 동원한다고 해도 함락시킬수 없었다
기나긴 헛수고에 지친 몽골군의 헛점을 수시로 찌르고 빠지는 고려군의 용맹한 게릴라전과 몽골의 화살이 닿지 않는 고지의 고려군들에게 몽골은 속수무책 이었다
천하무적 몽골 기병대라도 산악지형 오솔길에서 일인당 다섯마리의 말들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스스로를 죽게하는 장애였을 것이다
오랜 마상생활로 안짱다리인 몽골군들은 고려군과 민중이 웅거하는 산성에 접근조차 하기 어려웠다
우리 산들은 하나같이 골짜기가 깊고 절벽투성이에 경사가 심해 바위 하나만 굴려도 산아래의 적들까지 지그재그로 밟아버렸을 것이다
몽골의 공성장비는 산성에 접근은 커녕 스스로를 짓밟는 무용지물 이었다
세계를 무너뜨린 몽골의 기병과 공성무기는 산성근처에 얼씬거리기도 어려웠고 뒤뚱뒤뚱 안짱다리 몽골군과 산에서는 날개를 단 듯 비호들인 고려인들과의 백병전 이라면 일방적 학살수준 이었을 것이므로 우리민족은 결코 몽골에 패할수 없었다
가정하여 강화도 정부가 패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산성들은 몽골에 질 일도 우리의 지방세력 민중들이 몽골에 짓밟힐수도 없는 완벽히 상극체계가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대몽항쟁 40년은 고려의 청야전술과 산성전 40년 승리와 이꼬르였다
반면 호라이즘 서하 등 몽골군의 공성전에 밀려 멸족된 왕조들의 성은 쌓은 돌의 높이가 족히 30~60m를 넘는 매우매우 견고한 성들이었지만 눈비가 적고 물이 귀해 산아래 물이 솟는 지역에 세운 성들이었다
그 견고함에도 오히려 몽골군이 성의 뒷산에 올라 아래쪽으로 공성할수 있었거나 모래와 돌을 더 높이 쌓고 석포를 날릴수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에 함락당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가축까지도 죽임을 당하였다
성을 함락시킨 몽골군은 능력있는 군사전문가 일부만 자국군대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적어도 60만에서 백만정도의 성민과 적군포로를 남김없이 배어버린 적도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 호란을 당했을때도 우리는 평지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인조 효종이 웅거하였는대 압록강 이남 난공불락 산성들을 돌아 직진해온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족군 2만의 연합군과 전투에 져서 항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 권세를 유지할수 있고 오히려 호의호식 할수 있다고 달래니 주화파가 세를 불려 스스로 백기를 든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산성들은 성곽높이가 대부분 천미터가 넘어 백만이 몰려와도 산성 안에서 농사 지으며 버틸수가 있었지만 험난하게 살기 싫어 내려가버린 부류들 이야기였다
고려는 몽골에 지지 않았으며 명실상부한 G2의 위상을 갖은 나라였음이 분명하고 일본이 독도를 분쟁화하여 끊임없이 야욕하고 있고 중국이 을사늑약의 결과로 만주와 간도를 차지하고 있다
아리랑과 한글이 중국의 것이라고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등재하려 했던 냉혹한 작금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렇게 자랑스런 한민족 환국의 후손들임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https://youtu.be/wyCSQCyBiE0
몽골버전
신성한 위인이셔서 징기스칸역이 없는 듯 쿠빌라이 바투 수부타이 티무르 역 일 듯..
징기스칸은 낮에 말을 달려 천리를 정복하고 밤이면 일곱명의 처녀들과 일곱명의 아이를 잉태시켰다는데 영웅처럼 살지는 못해도 일생에 독고다이를 면해야 할 것인데 말이죠~
고려가 힘을 잃은 것은 너무나 강력해져서 통제가 어려워진 삼별초를 고려 스스로 제거한후 서서히 친원파가 늘고 무장을 해제한 탓이다
몽골전을 끝내고 화친하면서 몽골영향력에 순응하는 대신에 수부타이와 더불어 몽골 최고의 장수 티무르조차 소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몽골황실의 황금씨족 쿠빌라이칸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공주를 받아 혼인동맹을 맺었고
싸우지 않고도 본래 고구려땅 이었고 고려가 적통 계승인 만주를 충선왕이 할양받아 심양왕이 되었다
이후 원나라로 체제를 개편하면서 지금의 함길도 동북면 성주의 딸인 기황후의 손자와 증손자가 고려계로서 두 차례 연이어 원황제로 등극했다
그러므로 따로 만주를 완충지역으로 둘 정당성을 주장할 여건이 아니었고 군사력도 쇄잖해져 다시 몽골과 항쟁할 의지도 없었으니 원에 되돌려 준 것이다
제반상황에 비춰 몽골항쟁의 종전 당시 고려는 승전국이면 승전국이었지 패전국은 아니었다 할 수 있다
첫댓글 스크롤의 압박~ ㅋㅋ
존 노래 즐감하고 갑니다~
^^ 들어주셔 감사요 원체 댓글이 없어 후에 저의 여친이 생긴다면 다 읽어줬을지 평을 부탁해보려구요
언제쩍이엿을까...
전 최수종씨의 연기력은 인정하지만 그와 그 제작 사단이 배불비하 성향이 강한 이유로 강감찬역이나 왕건 등 번번히 맡는거 짜증입니다 ^^
@시리 드라마정말 좋아하는데 대하드라마는 잘 안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