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 6/08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3 - 고대 이집트 '美의 화신' 네페르티티 왕비 미라 발견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고대 이집트의 최고 미인 가운데 한 명이자 파라오(왕)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전설적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 ?~?)의 미라를 찾았다고 더 타임스 일요판이 8일 보도했다.
요크대학 고고학 연구진은 12년 간의 조사 끝에 이집트 왕가 계곡의 무덤에서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던 미라가 투탕카멘왕(Tutankhamen, BC 1370~BC 1352?)의 양어머니이자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렸던 여성인 네페르티티 왕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가발 조각들과 뼈의 형태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왕이나 왕비의 미라를 만들 때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팔이 꺾여진 사실을 확인해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요크대의 조안 플레처 교수는 "미라는 18왕조(기원전 1575~1308) 말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왕실 여인임이 분명하다"며 "이 조건에 맞는 여성은 네페르티티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 미라는 지난 1898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속에서 다른 미라들과 함께 발견됐으나 훼손된 상태가 심해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07년 단 한차례 사진 촬영이 허용된 이래 더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플레처 교수는 `젊은 여인'이란 이름이 붙여졌던 이 미라의 사진이 1920년 이래 독일 베를린에서 전시되어온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과 흡사하다는 점을 발견해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미인이 왔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은 긴 목과 높은 광대뼈, 날렵한 콧날을 가져 현대적 기준으로도 손색없는 미인상으로 유명하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다신교를 버리고 유일신을 숭상했던 남편 아크나톤왕(Akhnaton, ?~?)의 재위기간(BC 1379∼BC 1362) 이집트의 수도였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크나톤왕은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이례적으로 유일신을 섬겼으나 사후 이교도로 몰리면서 그와 관련된 모든 유적과 유물들이 조직적으로 파괴됐다.
네페르티티 왕비는 아크나톤왕과 거의 동등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아크나톤왕의 사후 약 3년간은 직접 국가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06.08 연합뉴스/Google
- 속리산 법주사와 팔상전
2000 -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탄성스님 입적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진공당 탄성(眞空堂 呑性) 대선사가 8일 오후 5시 주석처인 충북괴산 공림사 감인선원 선심당에서 입적했다. 세수 71세, 법납 47세.
탄성스님의 영결다비식은 12일 오전 11시 법주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됐다.
탄성스님은 종단이 어려울 때마다 수습의 책임을 맡았으며, 소임을 마친 후에는 곧장 수행처인 공림사로 돌아가 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는 참수행자상을 보여줘 종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80년 10.27 법난 후에는 수습대책위원장, 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총무원장, 98년 조계종사태 때는 당시 총무원측과 정화개혁회의측의 중재에 나섰으며, 중재가 결렬되자 승려대회장을 맡아 현 종단 출범에 기여했다. 97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됐으며, 지난해 4월부터는 원로회의 의장직을 맡아왔다.
탄성스님은 1930년 충남 보은에서 태어나 44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해 이듬해 3월에 사미계를 받았다. 55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61년 수덕사에서 하안거 이후 17안거를 성만했다. 평소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불교와의 인연이 될지언정 도를 깨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실천과 참선수행을 강조했다. 정성운 기자 /swjung@buddhapia.com /Google
1998 - 독일의 수학자, 고고학자 라이헤(Reiche, Maria) 사망
라이헤 [Reiche, Maria, 1903.5.15~1998.6.8]
Maria Reiche (1903-1998) was a German-born mathematician and archaeologist who is famous for her research in the Nazca lines in Peru.
Maria Reiche was born May 15, 1903 in Dresden. She studied mathematics, geography and languages at the Dresden Technical University.
In 1932 she began work as a nanny and teacher for the children of a German consul in Cuzco, Peru. In 1934 she lost one of her fingers to gangrene. The same year she became a teacher in Lima and did scientific translations. When the World War II broke out, she decided not to return to Germany.
In 1940 she became an assistant of an American archaeologist Paul Kosok who had discovered the Nazca lines. Around 1946 she began to map the figures in Nazca. When Kosok left in 1948 she continued the work and mapped the area.
Reiche theorized that the builders of the lines used them as a sun calendar and an observatory for astronomical cycles. Because the lines can be clearly seen only from above, she convinced the Peruvian Air Force to help her with photographic surveys. She spent most of her time alone in her home in Nazca. She explained her theories in the book The Mystery of the Desert and used the profits from the book to campaign for the preservation of the desert and to hire guards and assistants.
Reiche wanted to preserve the Nazca lines from the encroaching traffic - the area is near the Pan American Highway - and various government schemes, and spent most of her money in the effort. She convinced the government to restrict public access to the area. She had a tower built near the highway so that visitors could see more of the lines. UNESCO declared the lines a world heritage site in 1995.
Reiche's health deteriorated over the years. She was confined to a wheelchair, suffered from skin ailments, and lost her sight. In her later years she also suffered from Parkinson's disease.
Marie Reiche died of ovarian cancer on June 8, 1998 in an air force hospital in Lima. Reiche was buried near Nazca with official honors. Her former home has been turned into a museum. There is a Maria Reiche centre in Nazca where you can get information about her life and work. There are lectures about the lines with a scale model, current research and the different theories of the lines. There you can get literature, photographs and maps. The centre is held by Maria Reiche's assistant and friend Viktoria Nikitzki. /wikipedia
나스카의 지상그림 (Nazca Lines)
남아메리카 페루 남부의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의 기슭 사이에 있는 나스카 평원에는 기이한 선들과 마치 거인의 손으로 그린 듯한 도형들, 그리고 일정한 양식에 맞춘 거대한 새들과 짐승 등 약 100여 개의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이 평원에 남아 있는 그림들의 전체를 보려면, 약 300m 높이의 공중에서 내려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 지구를 찾아 온 외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만나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곳이 우주의 정거장이었다고 상상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뒷받침해 주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나 나스카에 있는 거대한 그림을 보고서는 누구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기 마련이다.
나스카 평원은 안데스 산맥에서 연중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의 영향으로 바다에서 와야 할 습기가 거의 오지 못하기 때문에 지난 1만년 동안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불모의 땅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 곳의 지형이 미국 우주 탐색선이 밝혀낸 화성의 지형과 비슷하기 때문에 미국 항공 우주국은 화성에 생물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알아 내기 위하여 전문가를 이 나스카 평원에 파견하여 연구한적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건조한 기후의 특성 때문에 약 15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그림들이 비로 인해 파괴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그림에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8년 미국의 폴 코스크 박사가 이 그림을 살펴본 다음 `세계 최대의 천문력`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독일의 여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마리아 라이헤 박사가 이 곳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했다. 마리아 박사는 나스카 평원을 샅샅이 훑으며 여러 가지 모양을 이루는 직선 하나하나에 대해 세밀히 조사하였다.
나스카 그림들의 특징은 규모에 있다. 그림이 그려진 면적은 약 500제곱 키로미터에 이른다. 그러므로 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돌들이 운반 되었을 것이다. 또,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아주 정교한 설계도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나스카 평원 부근에서 발견된 작은 그림들로 보아 처음에는 약 2제곱 미터의 설계도를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거대한 그림들이 어떻게 그려졌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나왔다. 그 중에서 나스카의 채색 토기에 그려진 비행선 같은그림을 근거로 당시의 나스카 사람들은 기구를 만들 줄 알았으며, 이 기구를 타고 공중에서 그림의 전체 모양을 보아가며 그렸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면 나스카의 그림들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페루 유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폴로코스크 박사와 마리아 라이헤 박사의 주장대로, 이 그림들은 천문력을 나타내는 그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스카의 그림들에는 태양에 관계되는 그림보다 달에관계되는 그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그림들이 일종의 천문력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kckohkoh&folder=13&list_id=2665144 /Google
1994 - 옛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결정
국립박물관으로 쓰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1993년 김영삼정부 출범과 함께 정해진 일로 그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93년 당시 정부가 고려한 안은 ① 건물 자체를 완전해체하는 방안, ② 건물축소모형을 만들어 별도 장소에 보존하는 방안, ③ 별도 장소에 그대로 이전하는 방안이 있었다. 그 당시 처리반안에 대한 논란은 대통령이 건물 해체를 지시8)로 일단락이 지워지지만 성급한 결정이라서 2-3년후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게 된다.
총독부 철거문제가 본격 제기됐을 때만 해도 총독부 철거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양상은 '이전-복원론'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는 가운데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이 각각 역사학계와 고고-건축학계의 주장으로 제기됐었다. 그러나 '이전-복원론'은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채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총독부 건물을 독립기념관에 이전하여 독립기념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연구 기능을 보강하자는 案이 제기 되었지만, 철거된 총독부 건물의 자재를 전시한 공원이 98년 8월 11일 개원하였다. /Google
그리고 마침내 1995년 8월 15일 광복 반세기를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10여 년 동안 둥지를 틀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전격적으로 해체ㆍ철거되기에 이른다. /Google
1990 - 제14회 월드컵 이탈리아서 개막
제14회 월드컵축구대회(The 14th FIFA World Cup)는 2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90년 6월 8일부터 7월 8일까지 31일간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총회에서 이탈리아는 6개국을 제치고 제2회대회(1934)에 이어 56년만에 개최지로 선정되었고, 멕시코와 함께 대회를 두 번 유치한 나라가 되었다.
112개국이 지역예선에 참가하였는데, 개최국인 이탈리아와 전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하여 24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대회는 로마·밀라노·바리·나폴리 등 12개도시에서 열렸으며, 경기방식은 4개팀씩 6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 1·2위팀 12개팀과 각조 3위팀 6개팀 가운데 상위 성적 4개팀을 포함하여 총 16개팀이 2회전에 오른 후 토너먼트로 우승을 가렸다.
마테우스 로타르(Matthaus Lothar)를 중심으로 한 서독(지금의 독일)은 브라질·이탈리아에 이어 3회 우승한 3번째 나라가 되었고, 감독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우승하였다. 아르헨티나가 준우승, 이탈리아가 3위를 차지하였다. 52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251만 7348명, 평균관중은 4만 8411명, 총득점은 115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2.21점이다.
한국은 지난 대회에 이어 본선에 연속 진출하였으나 3패로 조별 리그전에서 탈락하였다. 강압수비 위주의 '압박축구'로 인하여 대회 사상 최소득점을 기록하였으며, 결승전 승부가 대회 사상 최초로 페널티킥으로 결정되는 등 대회 내내 지나친 수비 위주의 경기흐름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38세의 로저 밀라(Roger Milla)가 활약한 카메룬은 아르헨티나·루마니아·콜롬비아를 물리치고 8강까지 진출하면서 '아프리카 돌풍'을 일으켰다. 칠레는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골키퍼가 부상을 위장함으로써 몰수패와 함께 다음 대회의 지역예선 참가가 금지되었다. /naver
- Frederik Willem de Klerk - Nelson Mandela
1990 - 남아프리카공화국 비상사태 해제
4년 동안 실시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상사태가 1990년 오늘 해제됐다.
흑인분파 사이의 정쟁으로 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나탈주의 크와줄루 홈랜드만 제외됐다.
드 클레르크(de Klerk, Frederik Willem, 1936~ )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이날 의회연설에서 ANC, 즉 아프리카민족회의와의 합의에 따라 48명의 정치범도 석방한다고 밝혔다.
석 달 전 27년 동안의 복역생활에서 풀려난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1918~ )는 비상사태의 해제가 '민중의 승리'라고 환영했다.
전임 남아공 대통령인 보타(Botha, Pieter Willem, 1916~ )는 4년 전인 1986년 6월 흑ㆍ백인간, 그리고 흑인 상호간의 정치적 분규를 빚은 반(反)아파르트헤이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했었다.
드 클레르크는 이번 비상사태 해제 결정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협상의 주요 걸림돌이 제거됐다고 자평했다. /YTN
1986 - 발트하임 전 유엔사무총장,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
1986년 6월 8일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인 쿠르트 발트하임(Waldheim, Kurt, 1918~ )이 오스트리아 대통령 결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다. 발트하임은 제4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으로 취임해 1972~81년 2차례에 걸쳐서 사무총장직을 역임한 외교관이었다. 사무총장 역임 당시 발트하임은 방글라데시·니카라과·과테말라 등지에서 구조작업을 효과적으로 펼쳤으며,
1973 - 포항제철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9 일 용광로 쇳물 출선 시작)
포항종합제철의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이 8일 오전 10시 공장 현지에서 이낙선 상공부 장관을 비롯, 박태준 종합제철 사장 등 관계인사들의 참석 아래 열렸다. ... /동아일보 1973-06-08 /Google
포항제철(POSCO) 연혁
1968-11-12 박정희 대통령 포철현장 방문(13차례 방문 중 첫번째)
1969-01-15 제철연수원 현판식
1970-04-01 1기 설비 착공식
1970-06-23 중후판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0-09-19 열연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2-10-03 첫 열연제춤 출하, 박태준 사장 첫 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 휘호
1972-11-19 제품 해외수출 시작, 후판제품 7,400톤을 미국과 대만에 수출
1973-06-08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1973-06-09 용광로(1고로) 쇳물 출선 시작
1973-07-03 1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3-12-01 2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4-10-21 직업훈련원 개소 및 1기생 입소식
1975-11-29 1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78-12-08 3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9-02-01 4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9-09-27 4본주 입주식
1981-02-18 4기 설비 종합준공식(조강 연산 850만톤 규모)
1981-09-01 4기 2차 설비 착공식
1983-05-25 4기 2차 설비 종합준공식
- Martin Luther King Jr.
1968 -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암살범 체포
1968년 6월 8일 영국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King Jr., Martin Luther, 1929~1968) 암살 용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Ray, James Earl, 1928~1998)가 체포되었다. 레이는 주유소와 상점을 터는 좀도둑으로 일리노이에서 1번, 미주리에서 2번 복역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67년 4월 23일 미주리 주립교도소를 탈옥한 뒤, 1968년 4월 4일 테네시 멤피스에서 킹이 묵고 있던 모텔 옆 민박집 창문을 통해 모텔 방에 있는 킹을 쏘았다. 체포된 뒤 자신의 유죄를 시인해 99년형을 선고받았던 레이는 1977년 테네시에 있는 브러시마운틴 교도소에서 탈옥해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레이는 복역 중 1998년 4월 23일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James Earl Ray (March 10, 1928 – April 23, 1998) was convicted of the assassination of American civil rights leader Dr. Martin Luther King, Jr., which occurred on April 4, 1968 in Memphis, Tennessee. Ray had been placed on the FBI Ten Most Wanted Fugitives list twice.
http://en.wikipedia.org/wiki/James_Earl_Ray
1958 - 제6회 월드컵 스웨덴서 개막
제6회 월드컵축구대회(The 6th FIFA World Cup)는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8년 6월 8일부터 29일까지 22일간 개최되었다. 제5회대회의 스위스에 이어 역시 중립국인 스웨덴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지역예선에는 역대 최대인 53개국이 참가하였고, 개최국인 스웨덴와 전 대회 우승국인 서독(지금의 독일)을 포함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경기는 스톡홀름·말뫼·헬싱보리·할름스타드 등 12개도시에서 열렸으며, 4개국씩 4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에서 1·2위를 차지한 8개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렸다. 우승은 브라질이 차지하였고, 스웨덴이 준우승, 프랑스가 3위를 차지하였다. 35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86만 8000명, 평균관중은 2만 4800명, 총득점은 126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3.60점이다.
제2회대회(1934) 이후 출전을 거부하다가 24년만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제16회 올림픽경기대회(1956)에서 우승한 소련 등 축구강국들이 고루 출전하였으며, 축구왕 펠레가 17세 나이로 월드컵축구대회에 데뷔하였다. 브라질은 월드컵축구대회 사상 유럽대륙에서 우승한 유일한 타대륙 국가가 되었으며,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축구황금기를 이어나갔다. 이 대회부터 월드컵축구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중계되기 시작하였다. /naver
1955 - 월드와이드웹(WWW)을 창안한 영국의 컴퓨터 공학자 버너스 리(Berners-Lee, Tim) 출생
버너스 리 [Berners-Lee, Tim, 1955.6.8~]
월드와이드웹(WWW)의 창시자.
월드와이드웹의 아버지로 불린다. 1955년 6월 8일 런던의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스칼리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플레시 텔레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여러 업체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운영체계 연구원 등으로 일하였다. 1980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몸담아, 같은 해 최초의 월드와이드웹(WWW) 아이디어인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엔콰이어(Enquire)' 시스템을 제안하였다.
1989년에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 사이에 정보 공유를 쉽게 하기 위해 글로벌 하이퍼텍스트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이 개념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월드와이드웹이다. 이듬해 자신이 만든 웹 브라우저의 이름을 월드와이드웹으로 정하고, 기술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믿음 아래 1991년 월드와이드웹 아이디어를 공개하였다.
버너스리의 아이디어 공개를 통해 전 세계 인터넷 시대의 문이 열렸고, 이후 월드와이드웹은 인터넷 주소 체계인 URL 등으로 발전하였다. 1994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월드와이드웹컨소시엄(W3C)과 컴퓨터과학 및 인공지능연구소(CSAIL)를 세우고, 2005년 현재까지 W3C 소장으로 있으면서 인터넷 발전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 밖에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영국왕립학회·영국컴퓨터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위빙 더 웹 Weaving the Web》(1999),《스피닝 더 시맨틱 Spinning the Semantic》(2005)이 있다.
2004년 대영제국 기사 작위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나이트 커맨더'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핀란드 정부가 제정한 제1회 밀레니엄기술상(상금 14억원)을 받았다. 2005년 1월에는 '2004년 위대한 영국인'에 선정되었다. /naver
1953 - 한국전쟁 포로교환협정 조인
포로교환문제는 1951년 12월부터 다뤄지기 시작하여 1년여를 끌었다. 합동소위원회에서 쌍방의 포로명부를 교환하게 됨으로서 같은 해 말 현재로 공산군측이 억류하고 있던 유엔군 측의 포로가 1만1천여 명으로 밝혀졌다.
1952년 4월 30일 공산군 측이 포로교환 교섭 재개를 요청함에 유엔군측은 이에 응하여 회담을 재개했으나, 핵심문제가 전혀 진전되지 않아 다시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 다음 해인 초에 크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상병포로의 선행교환을 공산측에 요구함으로서 3월 30일부터 회담이 재개되었다.
이때 주은래 중국 수상이 새로운 제안을 내 놓은 것이다. 그 동안 주장해 온 전 포로의 강제송환 요구를 포기하고 본국송환을 희망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으로 이송함을 승인하는 자유송환원칙을 수락함으로서 포로교환문제가 급진전된 것이다.
이 같은 회담 진전은 다분히 스타린의 사망, 미국의 수폭실험 성공 ,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종전공약 그리고 중공군의 피해 급증 등이 배후에 깔려 있었기에 순기능을 한 것이다. 1953년 4월 3일 김일성은 포로문제에 관한 주은래의 제안이 북한과 중국이 합의한 바라고 공식 표명함으로서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되었다.
그 후 포로에 관한 회담이 급진전되어 5월 30일까지 송환이 끝났다. 그리고 공산 측은 본국 송환거부 포로는 중립국으로 보내고 귀환희망자는 송환 후 30일 내에 군사적 관리를 해제하기로 유엔군 측과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53년 6월 8일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7월 27일 드디어 회담 시작 2년여만에 158회의 회담 끝에 휴전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다. 그 당시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여 휴전을 결사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시위를 주요도시에서 계속하게 하고, 휴전회담 한국군 대표이던 최덕신 장군에게 협정 서명을 거부토록 명령했으며, 2만7천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등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①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② 200만 달러의 장기경제원조제공 ③ 한국군 증강 ④ 휴전협정에 의한 정치회담 이전에 한미고위급회담 개최란 전후 보장 5개항에 동의함으로서 더 이상 미국과 등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Google
1949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Nineteen Eighty Four> 출판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Orwell, George, 1903~1950)의 역유토피아 소설 <1984년 /Nineteen Eighty Four>은 1949년 간행되었는데, 1984년, 가공의 초대국(超大國) 오세아니아에서 자행되는 전체주의적 지배의 양상을 묘사한 저자 만년의 작품이다. 권력집중이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한 당(黨)에 의한 대중(프롤레타리아계급)지배, 지배수단으로서 항상적(恒常的)인 전쟁상태의 유지, 거의 신격화한 지도자 빅 브러더에 대한 숭배, 개인생활의 감시,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한 언어의 간략화, 당의 무류성(無謬性)을 증명하기 위한 역사의 개서(改書) 등 모든 지배기구가 내포하는 위험성이 미래소설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제도에서 소재를 인용한 이 작품은 때마침 냉전(冷戰) 분위기를 타, 출판 후 1년 사이에 영국 ·미국에서만 약 40만 부가 팔렸으며, 세계 각국에서 잇달아 번역 출판되었다. 반공(反共)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체제를 불문하고 당시의 사회 및 그 연장으로서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전체주의적 정신풍토를 경고(警告)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naver
1948 - 독도 부근서 미군기가 어선 10여 척 오폭, 사상자 20여명
미군정기인 1948년 6월 8일. 우리 어민들은 힘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너무나 큰 비극으로 겪어야 했다. 미 공군기가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에게 폭탄을 퍼부어 15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역사는 그것을 '독도 오폭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수로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실수였는지 의도적인 폭격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독도의 악몽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 동해상에 있는 독도 부근 해상에 있는 우리나라 어선을 미국 극동항공대의 중폭격기군이 이만 삼천 척 상공에서 폭격하야 11척의 어선을 침몰시키고, 14명의 조선인 어부를 살해한 일로 인하여 전국 동포는 불안으로 민심이 들끓었다.’(신천지 1948년 6월 30일)
“미국 극동함대 사령부가 독도 폭격이 고공폭격 연습대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이 성명서는 11척의 조선 어선을 총·폭격하여 14명의 조선인을 살해하고 기타를 부상시켰다고 전해진 이 사건을 불행한 유감스런 사고라고 말한다.”(동아일보 1948년 6월14일, 17일)
폭격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어민들은 옷가지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총알이 지나간 뱃전은 헝겊으로 구멍을 막아 울릉도로 도망쳐왔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 고(故) 김도암 씨는 “태극기를 흔들어 목메어 소리쳤지만 야속한 비행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총을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숫자 등 폭격의 실상이 상당 부분 숨겨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5년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과 한국외국어대 ‘독도연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기록한 결과 폭격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어민은 무려 1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안돼 50여 년 간 유족들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이 사건은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장학상 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이 사건 직후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로 돌아와 세상에 알려졌다.
장씨 등 생존자 2명은 “울릉도 방향에서 날아온 12대의 폭격기가 2개조로 나눠 600m 상공에서 선회하며 융단폭격, 조업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30여 척의 동력선에 척당 5~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정은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폭격사실 등을 부인했다. 그러다 미 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고 발표했을 뿐 진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Google
1948 - 일본, 독도 영유권 운운 파문
1942 -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타보 음베키(Thabo Mvuyelwa Mbeki) 출생
타보 음베키 [Thabo Mvuyelwa Mbeki, 1942.6.8~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부 퀸스타운(Queenstown) 에서 출생. 1962년 통신강의로 영국 런던대학교를 마치고, 석세스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ANC 런던사무소에서 일하였고 구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1956년 14세의 나이에 ANC 청년동맹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전 생애를 ANC에 헌신하였다. 1975년 ANC 중앙집행위원, 1984년 ANC 정보국 책임자, 1989년 ANC 국제국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넬슨 만델라 정부에서 1994년 부통령이 되었고 1997년 넬슨 만델라의 뒤를 이어 집권여당인 ANC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99년 양원제 의회의 하원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 시절부터 1994년에 입안된 재건개발계획(RDP)과 성장고용재분배정책(GEAR)을 주도하는 등 경제개혁을 이끌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기존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통령 보좌 기능을 강화하고, 흑인 전문 관료의 등용을 확대하는 한편, 야당인 인카타자유당(IFP) 소속 인사를 등용하는 등 친정 체제 구축과 정치적 안정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고수하였다.
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부문에 걸친 인종 간 불평등과 비효율을 치유하는 데 역점을 두고,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경제교류 확대와 외국인 투자 및 외국 자본 유입, 고용 및 내수시장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 밖에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치료를 위한 국제적인 신탁기금 마련 등 에이즈에 대한 세계 공동대처운동을 추진하고, 비동맹운동(NAM)회의 의장으로서 이집트·요르단의 중동평화안을 지지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004년 4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naver
1935 - 파리에서 최초의 자동차 박람회 개막
1921 -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하르토(Suharto) 출생
수하르토 [Suharto(Soeharto), 1921.6.8~2008.1.27]
중부 자바의 욕야카르타에서 태어났다. 하급 중학교 및 이슬람 학교를 마친 후에 인도네시아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43년 일본군 보호 아래 인도네시아 육군장교가 되어, 1945∼1950년 욕야카르타에서 대대장·연대장을 지내고, 1953년 중부 자바의 연대장, 1960년 준장으로 진급, 1960~1965년 육군참모차장을 지냈다. 1965년 9월 30일 쿠데타 때 당시 국방장관 나수리온과 협력하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육군사령관이 되어 치안회복을 실현하였다.
1966년 3월 대통령 수카르노에게서 치안 대권을 위양받고, 7월에는 총리·국방치안장관·육군장관·육군총사령관을 겸임하였으며, 1967∼1968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국민협의회에서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3년 3월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78년 3월에는 3선(選)저지운동을 탄압하고 3선(選)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11월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이 일어나고, 1980년 4월 전국에서 반(反)중국인 폭동이 발생한 데 이어, 5월 퇴역장성과 정치가 50명이 대통령비판성명을 발표하는 등 한때 정정(政情)이 불안했다. 하지만 1982년 5월의 총선에서도 수하르토를 정점으로 하는 골카르(Golkar) 조직이 압승함으로써 4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 뒤에도 두 번의 재선을 했지만 1998년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몰락하고 말았다.
외교면에서 수하르토 정권은 수카르노 시대의 반제국주의 ·비동맹노선에서 180도 선회하여 미국 등 서방 여러 나라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신체제’라고 일컫는다. /naver
1916 -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크릭(Crick, Francis H. C.) 출생
크릭 [Crick, Francis (Harry Compton), 1916.6.8~2004.7.28]
런던대학교를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949년부터 캐번디시연구소에서 X선을 사용, 나선상단백질 분자구조를 연구하던 중 미국의 생물학자 웟슨과 킹스 칼리지의 윌킨스의 협력을 얻어 1953년 DNA의 2중나선 구조를 발표하였다. 이 연구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1962년 웟슨, 윌킨스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이 밖에도 대장균의 인공돌연변이에 의한 DNA의 뉴클레오티드 배열 순서의 변화를 해석하고, 유전정보의 단위가 3개로 조합되어 있음을 예언하였다. 또, 콜라겐 단백질의 구조, DNA에서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올렸다. /naver
1903 - 벨기에 태생 미국의 소설가 유르스나르(Yourcenar, Marguerite) 출생
유르스나르 [Yourcenar, Marguerite, 1903.6.8~1987.12.17]
본명 마거리트 드 크레이엥쿠르(Marguerite de Crayencour). 벨기에 출생.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아버지와 함께 유럽 및 중동의 각지를 전전하며 보내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에 정주하였다. 처녀작 《알렉시스 또는 헛된 전투 Alexis ou le Traite du vain combat》(1929)에 이어 《최후의 일격 Le Coup de Grace》(1939),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 Memoires d’Hadrien》(1951)으로 일약 문명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역사소설의 체제 속에 인간의 전체성을 파헤친 것으로 《흑(黑)의 과정 L’œuvre au Noir》(1968, 페미나상 수상)이 그 하나이다. 회상록 《Souvenirs pieux》(1974), 《Archives du Nord》(1977) 외에 H.제임스와 A.V.울프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여성작가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1980)이 되었다. /naver
1876 - 프랑스의 여류소설가 상드(Sand, George) 사망
상드 [Sand, George, 1804.7.1~1876.6.8]
본명 오로르 뒤팽(Aurore Dupin). 파리 출생.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 프랑스의 베리주(州) 노앙에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6세 때 지방의 귀족인 뒤드방 남작과 결혼하였으나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파리로 옮겼다(1831). 그 후 친구의 권유로 신문소설 《앵디아나 Indiana》(1832)를 써서 일약 유명해지면서부터 남장차림의 여인으로 문인들 사이에 끼어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녀의 분방한 생활은 남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시인 뮈세와 음악가 쇼팽과의 모성적인 연애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상드의 창작 활동은 크게 4기(期)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기에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처녀작 《앵디아나》나 《렐리아 Lelia》(1833)와 같은 루소풍(風)의 연애소설을 썼고, 제2기에는 《콩쉬엘로 Consuelo》(1842)를 대표작으로 하는 일련의 인도주의적 사회소설을 썼다.
제3기는 어린 시절에 살던 추억 많은 노앙에 머물면서, 이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소박하고 선량한 농민의 생활을 그린 전원소설의 시기로서 《마(魔)의 늪 La Mare au Diable》(1846) 《기아(棄兒) 프랑수아 Fran
ois le Champi》(1848) 《사랑의 요정 La Petite Fadette》(1849) 《피리 부는 사람들의 무리 Les Maitres Sonneurs》(1853) 등의걸작을 발표하였다. 제4기는 만년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필력에 쇠퇴함이 없이 회상록 《내 생애의 역사 Histoire de Ma Vie》(1854∼1855)를 쓴 뒤, 원숙한 필치로 파리 상류사회의 연애를 다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일생은 모성애와 우애와 연애로 일관된 분망한 생애로서 그야말로 낭만파의 대표적 작가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편, 선각적(先覺的)인 여성해방운동의 투사로서도 재평가되고 있다. /naver
1867 - 미국의 건축가 라이트(Wright, Frank Lloyd) 출생
1845 -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잭슨(Jackson, Andrew) 사망
1829 - 영국의 화가 밀레이(Millais, John Everett) 출생
1810 - 독일의 작곡가 슈만(Schumann, Robert) 출생
1809 - 미국의 혁명이론가 페인(Paine, Thomas) 사망
1625 -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시니(Cassini, Jean Dominique) 출생
632 -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uhammad/Mahomet) 사망
|
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