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1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제1독서 : 스바 3,14-18
복 음 : 루카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에 봉독되는 독서와 복음은 기쁨과 환호로 가득합니다.
이유는 ‘주님의 오심’ 때문입니다.
독서는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촉구로 시작됩니다.
같은 뜻의 내용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며 최상급으로 기쁨을 표현하는데,
이토록 열렬한 기쁨의 이유는
“이스라엘 임금 주님”이신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그분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시며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보다 더한 기쁨과 구원이 있을까요?
복음 또한 조용하였던 즈카르야의 집이 마리아의 방문으로 기쁨에 충만함을 묘사합니다.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가 그들 집에 오셨기 때문이고,
이에 성모님께서는 그 유명한 성모의 노래(마니피캇)로 응답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두려움을 조롱하고 폭력 앞에 용감할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에 계심’을 알고 깨달을 때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시는’
참된 진리와 자유, 정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쁨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에서 나오는 선물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에서도 제일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역이 좋았습니다.
구연동화 말하기 대회에서도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때, 한 번은 선생님께서 책의 어느 부분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제일 자신 있었던 책 읽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벌벌 떨면서 간신히 읽었던 그때의 기억이 오랫동안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두려움이 제게서 언어를 빼앗았습니다.
제게 이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가 믿지 못합니다.
지금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다시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사람들로 인해 치유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면서 사람들 곁을 떠나는 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다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늘 놓여있습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얻는 두려움에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나 혼자 극복하기란 너무 힘듭니다.
의지를 세울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을 통해서이고,
지금과 다른 변화도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성모님께서는 큰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부담이지요.
하느님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편하고 쉬운 삶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 성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 또한 뱃 속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았고
이 아기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는 만나십니다.
분명히 배 속의 아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배 속의 아기가 서로 만나면서 그들은 큰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십니다.
큰 어려움이 함께하면서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하기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오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 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어머니의 청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여러분의 모든 바람을 어머니의 마음과 일치시켜
예수님의 구원 능력에 맡겨드려서 풍성한 열매를 반드시 얻기를 바랍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고
또 그것을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뱃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으로 가득 차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두 여인은 참으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 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달프고, 미운 사람은 봐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더 풍요로워집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28)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성 베르나르도).
여러분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굽어보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여인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나이가 많은 돌계집인데도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 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두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오게 됩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그리고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곧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와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싱그럽고, 그만큼 따듯하고,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5월을 성모님의 달로 지내고 있습니다. 계절의 여왕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5월에 본당에서도 다채로운 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에 함께하려 하니 몸이 2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4일에는 본당 성모의 밤 행사와 평화의 모후 프레시디움 2,000차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5일에는 첫영성체와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비자 연장 때문에 한국에 간 신부님을 대신해서 포트워스 미사가 있었습니다.
15일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면서 보현사를 방문했습니다.
18일에는 댈러스 교구 서품식과 본당 성령 기도회 찬양의 밤이 있었습니다.
23일부터 26일까지 중남부 남성 제17차 꾸르실료 교육이 있었고,
26일에는 본당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30일부터 6월 1일까지는 본당 학생들을 위한 여름 캠프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계절, 성모님의 달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생각해 보니 서울에 있을 때도 발품을 많이 팔았습니다. 하루에 3번 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오전에는 길음동 성가 소비녀회 피정의 집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오후에는 해방촌 성당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안양 나자로 마을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알콩달콩 정을 나누며 사는 것도 사제의 기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교우들과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좋은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난 걸 기억하는 날입니다.
분단된 한반도를 생각하면서 저는 2018년에 있었던 만남을 기억합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고위급 정치인들이 방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북한의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시간은 10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쉬운 만남이 65년이나 걸렸습니다.
같은 해 9월에 남한의 대통령은 북한의 평양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연설하였습니다.
이런 화해와 일치의 분위기는 북한의 위원장과 미국 대통령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는 3번 만났습니다. 판문점, 싱가포르, 하노이에서 만났습니다.
내심 많은 사람은 만남의 결실을 기대했습니다.
북한에 미국의 대사관이 설치되고, 북한은 핵무장을 포기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풀릴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이렇게 순풍이 불어오면 한반도의 허리를 이어주는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비무장 지대는 세계적인 생태공원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상이몽’이었는지 만남의 결과는 선언과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집니다.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듯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꿈은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를 축복해 주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였던 것처럼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이 ‘동상동몽’의 꿈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만남’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면서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복음서 안에 등장하시는 성모님은 참으로 말을 아끼십니다.
신비로운 베일에 싸인 아들 예수님의 때로 이해하지 못할 언행 앞에서,
그저 성모님은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성모님은 침묵과 기도가 일상이셨던 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께서는 억울한 일들을 꽤 많이 당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수태고지 사건 때,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는 요셉과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삶을 물 건너갔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이러쿵 저러쿵 억울하다며 하소연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딱 한 사람, 연세가 들고 지혜로운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분의 영적 동반을 받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을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 말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2-45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당신은 항상 부드러움과 신중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곁을 지키셨으니,
시련을 당할 때 저희를 버리지 마시고,
믿음이 흔들리는 어둠의 순간에 저희 손을 잡아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 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신다.
마리아의 이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아주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고,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이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즉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 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 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후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사람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
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마리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구원을 보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우리는 보통 스바니야서를 오늘 첫째 독서로 읽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가지고
저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왜냐면 바오로 사도의 서간이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라고 하는데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이 바로 이런 뜻에서 방문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 전례가 이 서간을 택한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고,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생각도 해봅니다.
마리아 편에서 필요는 없었을까?
이 방문에 엘리사벳을 위해서만 방문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을 위한 것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기 전에
마리아에게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복음을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임신 사실을 통보받을 때
마리아는 놀랍고 두려웠으며 의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래서 가서 본 것일 겁니다.
가서 보면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두려움도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입니다.
가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눈으로 확인해 보면 더더욱 그리될 것입니다.
확인에 의한 확신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고,
확인하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는 마리아라고 우리가 믿지만
마리아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면도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시메온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봤을 때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고 하느님을 찬송하는데
이것이 목동들에게도 보라고 하는 루카 복음사가의 일관된 생각입니다.
구원을 보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공통적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믿지 않는 이들은 서로에게서 구원을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을 보고 싶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며 이 두 분에게서 배울 점은
우리의 수많은 만남이 인간적인 위안이나 기쁨을 주고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원을 보고파서 서로 만나고 그래서 마침내 서로에게서 구원을 보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구원을 보는 사람이고,
서로에게서 그리고 만남 안에서 구원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