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가 뭐냐]
“아윤아아아아- 나 못 찾겠어!”
안방에서 오빠 옷 못 찾겠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도마 위에 칼 꽂아놓고
대충 손을 씻고는 직접 가서 찾아 주는 수밖엔 없었다.
“자. 여기, 반팔. 반바지. 그리고 속옷. 로션은 화장실에 베이비 로션 밖에 없는데,
옆 집 아저씨한테 빌려다 줄까?”
“그냥 베이비 로션 쓰지 뭐. 그런데, 너희 오빠 팬티가 나한테 너무 작아서 낄 것 같으면 어쩌지?”
“제자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빨리 씻으러 들어가, 빨리 가! 여기, 큰 수건. 작은 수건.”
“히히- 땡쓰! 칼 조심해, 베이비.”
“어, 맨. 징그러.”
툴툴대면서 드디어 당근과 양파와 감자와 햄과 피망을 다 썰 때 쯤
아저씨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걸어 왔다.
“볶음밥 (fried rice) 먹을 줄 알지?”
“엉. 진아윤 벌써 다 썰어 놓고 참 빨리도 묻는다.”
“스프는 그냥 캔에 들은 거 먹자?”
“엉.”
“오, 웬 일로 고분고분? 예쁘다, 서비스로 아저씨 좋아하는 두부 구워준다, 내가.”
“고분고분 안 한다고 지금 메뉴가 바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주는 것도 못 먹지 않으려면 고분고분 해야지요, 제자님. 히히.”
그저 넉살 좋은,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해맑은 웃음에
피식-
나도 웃어버리면서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냈다.
“실내 온도 좀 더 낮춰도 돼?”
“맘대로 해.”
“어, 너 전화 오나보다.”
양 손에 무언가를 가득 들고 있는 나를 대신 해
아저씨가 내 휴대폰을 찾아 들고는 부엌으로 걸어오며 말한다.
“니 친구, 유민이 한테 전화 왔어! 받을까, 내가?”
“내가 받을게, 얘도 우리 언니만큼 한 성질 해. 기억나지? 진보리.
아저씨 이어 드럼 (eardrum: 고막) 찢어질라.”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댔다.
“응.”
“-뭐해?”
“밥 먹으려고.”
“-밥? 진아윤이? 메뉴를 읊어봐. 또 쵸콜렛, 쵸콜렛 쿠키, 쵸코우유,
이런 거 만 불러대면 라덴이 아들 불러다가 너희 집 테러한다.”
“볶음밥이랑, 치킨 누들 스프랑, 두부 구우려고.”
“-햇반에 볶음밥 해 먹으면 맛없는데?”
“아니야, 밥 했어.”
“-밥을 했다고? 진아윤이? 너, 지금 집에 누구 있지!”
“어, 어?”
아 씨, 지금 아저씨 있다고 하면 내 고막도 성치 못할 텐데. 그냥 구라를 칠까.
“아윤아! 야채들 막 다 타는 것 같아!”
어찌 합니까-
어찌 하나요-
진레인 이 인간은 항상 뭔가를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까지 몰고 가버린다죠-
“-야.”
“으응?”
“-지금 금방 들린 저 따위의 독특하고 재수 없는 male의 목소리는
우리의 미친 주니어 영어 선생 미스터 레인군의 육성이 아니더냐.”
“아, 그게. 하하하. 우리 유민이 기억력도 좋지.
어쩜 그렇게 2년 전 선생님 목소리도 안 잊어버리고..................”
“-그 미친 놈 목소리가 어디 잊혀질 만한 종류의 것이었던가.
되지도 않게 말 돌리지 말고, 바꿔. 넌 가서 가스레인지 불이나 낮추던지.”
난 볼륨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건넸다.
“유민이가 바꿔 달래. 귀에 너무 바짝 붙이지 마.”
크흥
아저씨가 짧은 기침 소리를 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시오-”
“-긴 말 하지 않겠다.”
“오랜만이구나, 우리 제자.”
“-니 제자였던 과거, 별로 기억 하고 싶지 않아. 긴 소리 안 하고 싶고.
도대체 아윤이네 집에는 왜 있는 건데?”
결코 유민이가 예의 없거나 싸가지가 이백 퍼센트 모자라서 반말 찍찍하는 게 절대 아니고,
영어엔 존댓말이란 게 없다는 깜찍한 사실.
“아씨, 나 오늘 내 동생 학교에다 까먹고 놓고 와서 집에 가면 우리 마미 잔소리가 대박이야, 안 갈 거야.”
“-잘 하는 짓이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동생을 까먹냐?
내가 지금 둘이 한 집에서 밥 차려 먹는 다는 사실만 해도 걱정이 태평양인데,
그 집에서 외박을 하겠다고?”
“응.”
“-너무 천연덕스럽게 응, 이라고 하니까. 화도 못 내겠네. 제정신이야?”
“뭐 어때. 히히히히. 진아윤 미스터 진 레인 마누란데.”
“-시끄러, 마누라고 뭐고, 너, 아윤이 건들이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알았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아 낸 유민이는
그제야 목소리를 낮췄다.
“응, 그래 유민아. 소리 지르느냐고 고생 했다.”
“-흠흠, 괜찮아, 원체 목소리가 커서.”
“허허. 그거 참 사랑스러운 현실이구나. 그런데, 두부에 찍어 먹는 간장에 뭐, 뭐 넣더라?”
“-간장하고 참기름?”
“식초는?”
“-난 초간장은 만두 먹지 않는 한 안 키운다. 야, 배고파. 끊어. 지금 컵라면 물 올리고 있는데.
그만 약 올리고, 먹고 얼른 자. 그리고 너 자기 전에 휴대폰에다가 911 찍어 놔.
옆에 있는 퍼피가 이상한 짓 하면 어떡해.”
끊고 라면이나 마저 먹으렴.
혼인 신고서가 떡하니 눈 시퍼렇게 뜨고 존재하는 한, 그런 신고는 접수될 일 없다.
이 말은 내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 한 채
마음속에서만 맴돌았고. 아쉬운 현실은,
“하하, 라면 불겠다. 얼른 끊고 맛있게 먹어. 나중에 추수감사절 때 놀러와!”
“-알았어, 너, 조심해!”
이거였다.
“아빠, 밥 다 됐어!”
또, 또
나도 모르게 아빠, 라고 부엌 창문 건너 거실을 향해 아저씨를 불렀다.
“아빠.”
“응.”
“좀,”
“응.”
“씹고 삼키랬지!”
배가 많이 고팠는지, 밥도 스프도 두부도, 한꺼번에 툴툴 털어 넣고 꿀떡 꿀떡 삼킬 때부터 알아 봤다.
“머리 아파?”
끄덕 끄덕-
“토할 것 같아?”
끄덕 끄덕-
“술병 난 기분이니?”
끄덕 끄덕-
“결국엔 내가 아저씨 채할 줄 알았다. 씹고 삼키라니까, 말도 안 듣더니. 아빠, 한의학에 관심 많댔지?”
“응.”
“그 거, 믿을 거 못되는 거 아닌 것도 알고, 온 몸은 다 연결 되 있다는 한의학적 학설도 믿는 다고 그랬지.”
“응. 그런데, 제자야. 왜 이렇게 무섭게 물어봐.”
“이럴 때만 제자라고 그러지. 잠깐 기다려, 곧 구해 줄 테니까. 얼굴이 하얘지니까 더 송장 같네, 그냥. 무서워.”
덜컹 덜컹 거리며 나무 바구니를 뒤적여 꺼낸 건, 반짝이는 바늘.
“바늘?”
“기다려봐. 곧 구해 줄게.”
아저씨의 호기심 반 무서움 반의 목소리를 무참히 짓밟고 부엌에 가서
가스 불에 대략 삼 초 쯤 바늘을 달구고는, 둘둘둘 실을 잘라 소파에서 뒹구는 아저씨에게 갔다.
“엄지손가락.”
“으응? 왜?”
“요고, 요 바늘로, 손가락 푹- 찔러서 피를 살짝 봐 주면 채 한거 내려 가. 한의학에 관심 많다며,
이 게 제일 기초적인 건데 모르냐?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빨리 손가락이나 줘.”
나는 그 큰 눈동자를 숑숑 굴리며 야단맞는 강아지- 마냥 내 손끝에 잡힌 아저씨 엄지손가락과
열심히 손가락을 묶고 있는 실을 응시하는 내 눈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까. 마음 약해 져. 찌르는 나도 가슴이 아프다. 저 쪽 봐, 나 보지 마. 별로 안 아파.”
셋, 세고 찌를게-
해 놓고 아직 ‘하나’도 시작 하지 못 하는 나 때문에
아저씨는 벽 쪽으로 돌렸던 고개를 다시 나를 향해 틀었고.
“이휴, 진아윤 어린이. 바늘 줘, 내가 한다. 피 날 때 까지만 찌르면 되는 거야?”
“으응. 아, 내가 나는 찌르겠는데 남 찌르려니까 잘 안 된다, 허허.”
내가 허허, 웃고 있는 사이
아저씨는 망설임 없이 바늘을 쥔 손가락에 힘을 줬고.
(고양이 알러지를 극복하기 위해 칼 빵 몇 번 했다더니, 그 솜씨 죽지 않았구나.)
“뭐 하러 그렇게 새게 찔러!”
검붉은 피가 철철 흘러넘쳤고
무의식중에 ‘아빠, 피나잖아!’ 라고 외치며 아저씨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한참을 그 상태로 있다가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는데.
“추워? 열 있나? 얼굴도 빨갛고 콧물도 좀 훌쩍대는 거 같은데. 감기 들은 거 아냐?”
이젠 거의 지혈이 되었을 손가락을 뱉어- 내고는
손가락으로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아저씨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얼마쯤 젖히고는
촉- 내 입술을 그 위에 가져다 댔다.
“어, 진짜 열 있나봐. 확실히 체온은 입술로 재야 정확해. 집에 그런데 해열제가 있나?
애기 먹는 시럽은 있는데, 그 거라도 줄까? 맛있어.”
“아, 아니. 괜찮아. 나 약 안 먹잖아.”
“잘났다. 그럼 에어컨 좀 줄일 거니까 덥다고 하지 마. 찬물로 샤워 한 건 아니지?
칫솔 꺼내 줄게, 양치질 먼저 해. 나 목욕 할 거야.”
오랜만에 쌀밥을 먹으니 기운이 나는 구나-
따뜻한 물에 찰방 찰방 목욕을 하고
기분 좋은 향이 풍기는 샴푸로 머리를 씻어내고
개운하게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빠, 거실에서 뭐 해. 이리 들어 와. 밤 되면 거기 추워.”
씻으러 가기 전에 미리 이불을 깔아 놓은 덕분에 뒹굴 거릴 곳이 있어 좋구나.
“아저씨가 침대에서 자. 난 밑에서 잘게.”
“아냐, 너 침대 써.”
“됐거든요. 이게, 바닥에서 자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스페셜 에빌리티. 히히.”
“그럼 나 거실 소파에서 자지 뭐.”
“됐어, 거기서 자면 지금은 얼어 죽어. 동사, 동사. 일로 내려와. 나랑 좀만 놀자. 나 심심.”
“어, 어.”
“아, 뭐야. Female roommate (말이 좋아 룸메이트, 번역 하자면 동거녀) 도 있어 봤던 사람이
왜 이렇게 얼었냐?”
“어, 니가 그 걸 어떻게 알아.”
“전에 수업 시간에 수업은 안 하고 얘기 해줬잖아, 골초 동거녀 미쉘. 아저씨 손에 든 거 무슨 책?”
“응,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뭐 이렇게 많이 적어 놨냐, 책에다가?”
“그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건 또 어떻게 찾아서. 아- 피곤해.
아빠아아아아- 아빠한테 베이비 로션 향 난다 푸히히히, 언밸런스.”
“너한테서 나는 거겠지.”
“아니다, 아저씨한테 나는 거다. 맨날 나던 향수 아로마 없으니까 이상해. 아빠, 졸려, 졸려, 졸려, 졸려.”
ADD도 전염인 걸까. 한참을 졸리다며 혼자 베개를 끌어안고 노래를 부르던 나는
그대로 누워서 잠이 들락 말락 눈커플이 꼬물락 거렸고
이미 잠들어 버린 머리 덕분에 이해는 하지 못한,
그래서 기억에도 남지 않은 아저씨의 말들이 내 고막을 두드렸다.
“니가 이렇게 열심히 책에다 필기하고, 노트 적고, 시험도 잘 보고, 숙제 잘 해왔어도,
넌 평생 가도 나한텐 F student 인거야. 제자 녀석이 여자로 나타나 버렸으니까. 알았냐, 진아윤.”
그 날 밤,
꿈에서 조차 아저씨에게
‘아빠, 아빠’ 라며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고 안기고 매달리는 날 보며
잠결 속에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니? 누군데 자꾸 내 입에서 아빠 소리가 나오고 누군데 내가 아무 생각없이 허그 하고,
누군데 내가 그렇게 ‘딸’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누군데 자꾸 나를 웃게 만드니? 당신,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