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현입니다.
글 써본지가 언제인지.. 두서없이 쓴글이니 편집과 수정 부탁합니다.
김명한-친구이자,동생이자,거울이자 동지인 사람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만남이었다.
김명한 동지와 저 뿐만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의 출발점이 90년도쯤이 아닌가한다.
금강공업투쟁이 한창이었고 민중당 지구당 창당준비위 시절
얼굴을 알고 지낸지가 몇 개월 전인지 정확히 기억은 없으나 내가 상근자로 활동하던 안산 민
중당에 닥친 비상시기에
서로에게 관심과 지지를 보였던게 시발점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전투경찰 기동대장의 사망과 관련하여 지역의 거의 모든 운동단체들이 침탈당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민중당 안산지구당,
합법적인 정당의 간부및 상근당원들이 조직 침탈에 겁을 먹고 피신하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반기를 들며 당사무실을 사수하자고 나섯던 몇 안되는 당원 중의 한명이다.
신흥노조 쟁의부장 시절.
강고한 사상적 조직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말더듬에 대한 열등감,피해의식,주변의 편견,
학출에 대한 피해의식, 열등감에 대한 설득과 토론으로
수많은 나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표현의 형식도 형식이지만 내용이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게해준 장본인이다.
처음에는 정말이지 도데체 무슨말을 하는지 간파하기 힘들었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안갖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이 투사로서의 열정을 키워가게 만드는것 아닌가.
솔직히 초기에는 동지의 행동보다는 표현에 무시하고 폄하하고 희화화하는 눈초리,모습들이 곳
곳에서 비춰졌던 점은 깊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지 스스로가 열등감에 얽매이거나 가슴아파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는 생각이든다.
현실을 판단하는 감각은 거의 동물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열
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총선투쟁에도 안양에 힘을 집중했던 시기 김명한 동지는 여러가지 주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안산지역에서 총선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했다. 자신이 서있는 활동영역의 중요
성을 굽히지 않았다. 동지의 사고와 실천에는 일관성이 있다.
지역의 많은 단체들을 오가며 공동투쟁,연대투쟁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이 참여하는 단위에서의 역할과 임무,직책과 직위에 열성을 다했다.
그 스스로가 감당할수 있었던,할려는 마음이 있었던 직위를 맡아갔는지도 모른다.
첫번째가 노조부위원장에 대한 도전이었다.그 고민도 상당기간 진행되었고 결심하기까지의 노
력도 눈물겹다.노조부위원장 출마 연설문을 만드는데도 작성과 수정을 몇차례 했는지 셀수도
없다.
사무장출마와 당선.책임감과 노력은 부위원장시절과는 또 달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무능력의 부족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또 얼마나 했는지...
단협에서의 부담감 압박감은 어느 정도였는지...
김명한 동지에 대한 기억중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지 얼마되지않아 소위 위장취업했던 대학출신들이 원래대로 돌아가거나
복학바람이 유행처럼 번저간 일이 있었다. 김명한동지도 나에게 넌즈시 말을 꺼내기도....
정치도,사업등등도 사상이나 조직 이전에 "의리"가 있어야함을 잊지 않고 있다.
김명한과 관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반말을 한 최초의 동지 김명한
한두살 차이임에도 꼬박꼬박 형님이라 불렀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반말을 누구에게나 안했던 나에게 처음으로 하대하라고 고집부려 내고집
을 꺽겄던 인물이다. 그후론 7-8년 차이도 나면서 굳이 하대를 하기를 바랬던 후배들에게는
하대를 하게된 계기도 김명한 때문입니다. 물론 경어를 쓰느냐 하대를 하느냐가 상대방 존중의
잣대는 아니지만
나의 경우에는 존대가 더 자연스럽고 편했고 동지들에 대한 애정을 긴장시키는 표현이기도 했
던거 같다. 이점은 지금도 주변사람들을 대함에 변함없지 않나 싶다.
-김명한 동지에 대한 생각중에는 "술"에 대한 단편이 자리 잡고 있다.
제일 먼저든 생각이 술이 웬수다...
술이 해방구 일수는 없는거야...
세상살이,분위기,이야기의 안주로서의 "술"이라는 변함없는 나의 생각에 반하는
"이 팍팍한 세상에 술 안먹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반복되는 말과 소득없는 소모전,여전히 토론과 술은 합치되지 않는다.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찿아와 당황스러웠던 경험을 한 동지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나 한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 것으로 보면 아무리 힘듬을 위로하고 격려한다고
하더라도 동지 자신의 삶에 독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김명한 동지의 마지막 단협과정 중에도 고뇌와 몸부림이 이어졌던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에게 있어 건강관리는 노조.정치지도자로서의 덕목이다.여전히
그시기 내가 광주에 가 있던 불과 한두달 되었던때에
연락받고 오던 막차에서는 슬픔 애통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원망스러움도 있었다.
명한이를 죽음으로 몰고간 작금의 상황에 대한 분노는 분명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지
못한 개인의 불철저함에 대한 실망감과 원망은 내 개인의 이기심 일 수도 있다.
김명한동지는 최일선에서 견디고 부딪히다 하다하다 장렬한 전사를 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더욱더 떠나간 그의 자리가 더 커보이는 것이 아닐까...
처음 이 삼 년 간은 추모식에 참여를 해도 내심 원망스런 생각이 들었던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김명한은 내가 봐온 진짜노동자중의 한명이다.아니 김명한외에는 못봤다고 하면 심한가..과장
하고 싶지도 영웅시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의 진짜 고민,실천력,하고자 했던바를 되새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명한 동지때문에...글을 쓰게 됐다.
말로만 지나치던 "추모집"에...글이라고 써 본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난다. 이런 용기를 갖는것
도 김명한의 힘으로 생각한다.
김명한 동지 추모 10주년 5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