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 한율아!
숲의 푸르름이 가득하구나. 8월의 여름 장마가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물 폭탄을 쏟아부은 탓인지 산야의 풀과 나무들이 저마다 흠뻑 물을 머금고 녹음(綠陰)의 푸르름은 더욱 짙어졌어. 여름이 그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어.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할아버지의 농원도 그 푸르름이 한결 더 두터워졌어. 농원 안쪽의 과수나무들도, 산 숲 모든 나무의 잎새가 푸르러지고 그 색깔이 깊어졌어. 숲의 색깔이 깊어지다 보니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더욱 뜨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푸르름이 주는 생명의 힘찬 숨결 또한 아주 가깝게 들리는 것만 같아. 때로 숲은 그곳에 사는 숲의 정령이나 요정이 그들의 모습을 드러낼 것과도 같이 어둑하고 검푸르기까지 해.
그렇다고 모든 숲이나 나무가 그렇게 어둡고 검푸르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야. 특히 과일을 키우고 난 농원의 나무들은 그 색깔이 그렇게 검푸르지가 않아. 매실이나 자두나무, 많은 열매를 달고 힘겨워하는 모과, 꽃사과, 아그배나무 따위의 과수나무는 그 기력이 다했는지 벌써 그들의 잎새가 노르스름한 단풍의 기운을 띄고 있어. 한 봄에 꽃을 피운 정원의 벚나무와 라일락의 잎새에서도 온화한 느낌의 색깔의 묻어나. 농원이 잇닿아 있는 산자락의 자작나무나 물박달나무의 잎새는 더욱 밝고 깊은 연둣빛이지. 무수한 잎새의 작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듯해. 버드나무도 마찬가지야.
언덕 너머 큰 밭둑 가장자리에는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어. 과거에는 논이었던 곳인데 그곳을 가꾸지를 않자 버드나무가 들어서기 시작했어. 그들은 무리를 이루며 이제는 아름드리 크기의 거목으로 자랐고, 물이 흐르던 도랑은 습지가 되어 온갖 수초가 자라고 있어. 마치 동화『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케네스 그레이엄, 1908 )』에 나오는 강가의 버드나무와도 같아. 우리가 영어 공부를 하면서 함께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The Wind in the Willows(LittleFox, 2009)』에 나오는 여러 동물도 그곳에 살고 있을 것만 같아. 물쥐(Water Rat), 두더지(Mole), 두꺼비(Toad), 오소리(Badger) 등의 주인공 네 친구는 물론 수달(Otter), 토끼(Rabbit), 너구리(Raccoon), 주머니쥐(Possum) 따위의 강둑이나 물가에 사는 다른 작은 동물들이 말이야. 바람이 불면 물결과도 같이 길게 늘어트린 수많은 잎새의 버드나무가 일렁이지. 부드러운 버드나무의 가지와 초록 나뭇잎 다발 사이로 부는 바람은 버드나무 숲과 그 근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야.
할아버지의 농원 밭둑 너머에 우거진 버드나무숲의 나무들은 아마도 그 숲과 밭 자락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을 거야. 작은 연못 속을 헤엄치는 개구리, 두더지와 물놀이 하는 물쥐, 그리고 숲을 찾아드는 온갖 새와 곤충들... 밭으로 달려와 달콤한 알맹이가 박힌 옥수수를 먹어치우는 멧돼지, 콩 싹을 맛나게 잘라 먹는 고라니, 쌉싸래한 씀바귀로 특별한 성찬을 즐기는 토끼의 모습도 빠짐없이 지켜보았을 거야. 또 땅을 헤집고 다니며 땅콩을 까먹고 고구마를 갉아 먹는 부지런한 두더지의 모습도 바라보았을 테지.
농원 주변의 산자락에는 더 많은 산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졸참나무와 떡갈나무 따위의 참나무, 소나무와 낙엽송, 산벚나무, 야광나무,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오리나무 따위의 큰 나무들과 개암나무, 생강나무, 고광나무, 올괴불나무, 붉나무와 옻나무, 두릅나무, 산초나무, 화살나무, 진달래와 철쭉 따위의 작은 나무들... 그런데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은 키가 큰 나무들의 무리지. 그중에도 푸른 하늘에 맞닿을 듯이 솟아오른 큰 키의 참나무와 소나무, 낙엽송, 밤나무 따위들이야. 이들은 모두가 잎을 살찌우고 검푸른 색깔로 각자의 기상을 하늘 높이 뽐내고 있어.
그리고 이 큰 키의 나무들이 무리를 이루는 곳에는 거친 야생의 숲이 만들어지지. 작은 동물들이 모여 사는 도랑 가 언덕과 개울 둑, 그리고 버드나무 숲의 언저리에서와는 달리 오소리와 너구리, 멧돼지, 고라니와 같은 큰 동물들이 살고 있어. 또 깊은 숲을 좋아하는 족제비나 다람쥐, 청설모, 그리고 딱따구리, 소쩍새나 부엉이와 같은 새들도 살고 있지. 이곳은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의 가족들이 주로 사는 마을인 ‘강둑(The Riverbank)’으로부터 안쪽에 깊숙이 떨어져 있는 ‘야생의 숲(The Wild Wood)'과 같은 곳이지. 숲과 나무들의 색깔은 검푸르고 이곳 어둑한 야생의 숲에서는 금방 어디에서라도 무엇인가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도 해. 녹음이 가득한 한여름의 숲에 고요한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는 특히 그래.
숲속의 나무들은 잎을 살랑거리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바람이 전해주는 산 너머 다른 숲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 나오는 네 친구가 벌이는 여행과 모험, 우정과의 이야기를 바람에 실어 들려주는 것처럼 그 숲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되풀이해 들려주는 것일까? 큰 나무들이 우거진 이런 야생의 숲속에 들면 쏴 하는 바람과 함께 무수한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작은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며 서걱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해. 소나무 아래에서는 솔잎 사이를 빠져나가는 재빠른 흐름의 바람 소리가 들려와. 작고 가벼운 나뭇잎들을 소복하게 달고 있는 자작나무나 물박달나무 아래에서는 은밀한 속삭임과도 같은 부드러운 떨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또 잎새가 제법 큰 떡갈나무와 같은 참나무 아래에 서면 여러 사람의 수런거림과도 같은 즐겁고 정겨운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아.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라는 사람의 시 속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는『풀잎(Leaves of Grass, 1855)』이라는 시집의「나는 루이지애나에서 자라는 한 그루의 참나무를 보았네(I saw in Louisiana A Live-Oak Growing」라는 제목의 시에서 한 그루의 참나무를 바라보았어. 그리고 ‘... 그것은 암록의 잎새들을 즐겁게 수런거리며 거기에서 자랐다(... it grew there uttering joyous leaves of dark green)'고 노래했어. 그것은 아마도 이맘때의 한여름 참나무 모습이었을 거야.
숲의 이야기 하니까 오스트리아 비엔나(Vienna) 태생의 음악가인 요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ss)의 음악이 떠오르는구나. 그는 경쾌하고 즐거운 리듬의 많은 춤곡, 왈츠(Waltz)를 작곡해서 ’왈츠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작곡가이지. 자신이 태어난 고향, 비엔나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옥 같은 음악에 담아냈어. 그중에서도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비엔나 숲속의 이야기(The Tales from the Vienna Woods, 1868)』라는 왈츠곡이지. 이 곡은 큰 나무가 노래하는 듯한 더블베이스의 선율로 시작해서 슾속의 예쁜 새가 즐겁게 지저귀는 듯이 풀루트를 연주하는 카덴차(Cadenza)라고 하는 작은 간주곡이 인상적이야. 이어지는 연주는 온갖 새들이 노래하고 슾속의 나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그 숲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한 여러 악기의 하모니 속에 마치 한 줄기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것과도 같은 바이올린의 연주 또한 무척 인상적이지. 한편 마치 이 숲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강을 이루어 즐겁게 흘러가는 듯한 곡조의 그의 왈츠『아름답고 푸른 다뉴브(The Beautiful Blue Danube, 1866)』또한 ’비엔나 숲속의 이야기‘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이기도 하고.
한비, 한율아!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이야기해 주지. 물쥐, 두더지, 두꺼비, 오소리, 이렇게 네 친구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이 살았던 강둑과 숲속의 여러 동물에게 대를 이어 이야기되고 또 이야기되었다고 하지. 그래서 그 이야기는 결국에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의 일부‘가 되었고. 비와 율이도 애니메이션『The Wind in the Willows』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해설자의 대사를 기억할 수 있을 거야.
The stories about the friends were told and retold.
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야기되고 또 이야기되었어.
The tales became the music of the reeds.
그 이야기들은 갈대들의 노래가 되었어.
The poems became the song of the woods.
그 시들은 숲의 노래가 되었어.
And all became the part of the wind in the willows.
그리고 그 모두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의 일부가 되었지.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숲속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구나. 할아버지 농원과 숲의 나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푸르름이 깊어진 녹음의 숲과 나무들이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지는구나. (2022.8.11.)
첫댓글 이 계절에 맟춰 숲속의 바람에서 소리를 듣고 새소리와 더불어 이야기를 엮으셨군요. 좋은 소재로 아기자기한 기분이 드네요. 시원한 그늘 속에서 순우의 오밀조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입니다.
순우의 글을 읽으면 과거에도 현재도 계속 무언가를 읽고 탐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식물, 동물, 음악, 미술에 대한 박식이 활기넘치게 기술되고 있지요. 무엇보다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기본이라고 생각되는 세밀한 관찰자를 만나게 되지요. 모든 것을 자세히 보면 정이 들고 이뻐진다고 하더군요. 자연 속에 사는 이 노쇠한 농부는 부끄럽게도 다리를 넘쳐 흘러가는 화난 계곡물을 보면서 장마걱정, 고추걱정, 그리고 김장밭 걱정이나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1년이 지나면 <나래실의 4계>라는 자연관찰기 한 권이 될 것 같군요.
말로만 듣던 나래실농원을 사진으로 보니 정말 멋진 곳이네요. 순우의 자연과 더불어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릅답습니다. 좋은 글을 써서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좋습니다.
능통한 영어실력을 값지게 발휘하니 보기에 너무 좋아보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은 후대가 얼마나 큰 일을 하게될지 사뭇 궁금하네요~ 폭넓은 지적탐구에도 최선을 다하니 시대가 요망하는 참 지성인의 사표가 되겠어요! 그나저나 그 농원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나무전시관인듯 싶어 구경하러 가야겠네요!
전혀 특별할 것 없이 주변에 그냥 온갖 나무들이 자라는 곳입니다. 지난해 모임때 안 오셨으니 언제 한번 바람쐬러 오세요~
순우의 자연과의 대화는 예술입니다.
세밀한 관찰력에 감동입니다.
마치 숲속을 거닐며 동식물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요. 출근하는 길 양 옆에 있는 울창한 숲을 바라보면서 100%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