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라는 말은 건설현장에서 막일하는 노동자를 일컫는 속어다. 노가다라는 말이 일본어(가다=틀)와 영어(노(NO)=아니다)의 합성어로 그 뜻이 ‘틀이 없다’ 즉 ‘막 돼먹었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노가다라는 말 자체는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단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노가다라는 직업을 가지고 이날 이 때까지 살아가고 있다.
내가 처음 노가다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이 지금까지 나와 한 평생 관계를 이어오게 된 것은 1972년 12월 우리 큰 아들이 태어나던 그쯤부터 이니 제법 오래됐다. 세상 모르고 철없이 살던 그때 나는 내 핏줄이 세상에 나오는걸 직접 보면서 내 눈가가 젖어옴을 느꼈다. 간호사가 아이를 꺼꾸로 들고 볼기짝을 때릴 때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나는 그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전신을 압박 해옴을 느꼈었다. 이때부터 나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장을 찾아 보려고 애를 쓰며 여기저기 다녔으나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이른 다음해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충주비료공장’의 ‘사립 기원 양성소’란 곳에 기계과 원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 기억에 아마 10대1이 넘는 치열한 시험관문을 뚫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든 고향 춘천을 떠나 내 식솔을 끌고 목단강을 건너 영 낮 설기 만한 충주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1년 동안 월급 주며 공부 가르쳐준 양성소를 마치고 충주비료에 입사해서 정비과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 때 충주비료공장에서는 암모니아센터(제6비료공장)란 큰 비료공장을 미국의 벡텔이란 건설회사의 힘을 빌려서 짓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 때 발주처 직원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드디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노가다 반열에 들어섰던 것이다. 노가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 토목, 건축, 기계, 전기…. 등등의 분야에서 일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무실에만 앉아있는 비 노가다 같은 사람들도 자기들 스스로를 노가다라 부른다.
근대 한국 노가다 역사를 잠깐 들쳐서 세대 개념으로 족보를 굳이 따져보면 나는 노가다 2세대쯤 될 거다. 1세대는 부산 감천화력발전소와 충주비료공장 건설현장에서 일한 분들로 지금은 거의 다 80세가 넘었거나 또는 근접해계시다. 나처럼 70년대 초반 제6비료공장건설 단계에 노가다로 입문한 사람들은 2세대 인 것이다. 그리고 한 20년 전, 노가다 인재가 부족했던 시절에 나같이 운 좋은 노가다 2세대가 건설현장소장자릴 꿰차고 있을 때 노가다에 입문한 사람들은 3세대쯤 될 것이다. 이3세대들도 지금은 말년부장 달고 정부의 은퇴연령연장 같은 뉴스에 귀 기울이는 노가다 말년대열에 들어서있다.
내가 1988년 바레인의 담수화공장 건설현장에서 벌벌 기며 모셨던 발주처 공사감독에 브레스웨이트(Braithwaite) 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그 당시 72세였다. 영국사람으로 토목엔지니어인 이분은 그 당시 기계공구장이었던 나를 툭하면 집으로 쫓아 보내겠다며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노가다를 좀 아시는 분이라면 이해 할 수 있겠지만 이 기계공사라는 것이 토목기초공사가 돼야만 뭔 기계를 설치하던 가 배관을 깔던 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기계 작업자들이 기기를 설치하다가 조금이라도 토목기초를 손상시키거나 하면 정말 난리가 나곤 했었다. 백발을 휘날리며 내게 달려와 너를 ‘디어쏘씨에이션(deassociation)’시키겠다며 현장소장 나오라고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했었다. 아직도 생소한 단어인 디어쏘씨에이션은 맞는 번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를 조직에서 제거해 버리겠다’라는 의미로 이해를 하고 있다. 그렇게도 나를 괴롭혔건만 속없는 나는 그래도 그런 그분이 좋았다. 나는 그 분이 갖고 있는 토목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이 부러웠고 또 존경스럽기까지 했었다. 나도 저 나이에 현장에서 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택도 없는 바램으로 그 분을 내인생의 롤 모델(role model)로까지 그렸었으니 말이다.
언제적 지병석이야? 아니 그 양반이 아직도 현장에 있단 말이야? 강호동이 잘 쓰는 말로’언 빌리버블! (unbelievable!/믿을 수 없어!)10년 전에도 이런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 어떤 분이 서울에서 누굴 만나서 내 얘길 했더니 같은 말을 하더라고 전해온다. 기분이 과히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슨 자랑거리도 아닐 것이다. 사람은 그만 둘 때를 알아야 한단다. 맞는 말이다. 주제도 모르고 나이 값도 못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은 얼마나 불상 사나운 일 인가. 브래스웨이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철 공짜로 타면서까지 노가다를 하고 있으니 나도 어지간히 해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이 프로젝트 마치면 어디 아파트단지 안에 작은 점포라도 하나 얻어서 쌀국수 식당이나 개업해보면 어떨까 한다. 10년 전에 불암산 넘어 논골 길남이네 집에서 내 쌀국수 맛을 본 36친구들(서울, 춘천 친구들 해서 한 열댓 명 왔었나 보다)과 주식회사 형태로 동업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육수가 생명이니 나는 육수 만들고 주주들은 돌아가면서 일일 써빙 하면 우선 인건비는 절약 될 터이니 파산할 위험은 없을 거다. 이나 저나 길남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이번에 들어가면 찾아가 봐야겠다.
오늘 중국 노가다들과 최종 타협을 봤다. 일주일 후면 공사는 재개될 것이고 그리고 모두 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으려고 서두러 댈 테고 그러면 현장은 많이 바빠질 거다. 착수 전 일주일 동안은 휴가 비슷하니 여유가 좀 있을 듯싶다. 이 참에 내 노가다 인생을 글로 정리해보면 어떨까. 요새 는 나오는 회고록마다 히트를 치고 있는 세상 아닌가, 내 자전적 노가다 인생얘기도 꽤나 들어 볼만 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보름 걸린다는 내 “까미노 데 싼띠아고 순례기” 검토는 어떻게 돼 가는 건지 모르겠다. 영선이한테 내 여행 에세이 파일을 출판사에 넘겼다고 얘기한지가 제법 됐는데 말이다. 진득하지 못하게 여러 사람들한테 기행문 낼 거라고 폼을 좀 잡았는데 어쩜 좋다. 상업성이 없다 라는 연락이오면 자비로라도 출판해서 돌려야겠다. 오늘은 메아리가 헤집고 간 텅 빈 현장에서 사무실 문 열어놓고 혼자 앉아서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
첫댓글 파란 만장한 좋은 기록들, 기대가 됩니다.
지형의 충주시절, 우리36 '태백의 8인'은 탄광촌을 누볐다오.
아, 꼴남이네 집에서 먹은 '월남 쌀국수'는 처음 먹어본 맛인데---,
그 날, 그 맛, 그 인연도 기가 막혔습니다.
36동문들 가운데 정말 색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병석형의 놀라운 정열에 놀랄
뿐입니다.그리고 자서전과 기행문이 기대됩니다.건강도 지키시고요 ^()^
존경 스럽습니다. 그리고 지형이 많이 부럽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