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강변
목차
- 정의
- 개관
- 사설
- 악보
- 내용
- 특징 및 의의
정의
일제강점기에 창작 발표된 경기민요 양식의 신민요.
개관
<노들강변>은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로 1934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창립 1주년 기념 특별호’라는 타이틀의 음반으로 발매되어 널리 알려진 경기민요 양식의 신민요이다. 현재까지 경기민요의 한 종목으로 애창되고 있다.
사설
1. 노들강변 봄버들 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2. 노들강변 백사장白沙場 모래마다 밟은 자국/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에 몇 번이라 지어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3.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삼 망령妄靈으로/ 재자가인才子佳人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한국가창대계
악보
내용
<노들강변>은 일제강점기에 창작되어 유통된 신민요 중 하나이다. 만담(재담)에 능했던 월북 연극인 신불출이 작사를 하였고, 바이올린을 잘 다뤘던 문호월이 작곡하였으며, 권번 출신의 기생 가수였던 박부용이 불렀다. 노래 제목의 ‘노들’은 ‘노돌老乭’에서 유래된 말이며, 서울의 노량진 일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전체 3절로 이루어진 가사는 매 절의 처음이 ‘노들강변’으로 시작하여 전통음악의 성악곡에 곡명을 붙이는 방식을 따라 <노들강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매절의 셋째 줄 첫 단어로 “에헤요”를 삽입하며 마치 후렴구처럼 사용하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가사는 대체로 4.4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장단에 4음보씩 배치하였다. 음역은 한 옥타브 반 정도이며, 선율은 경기민요의 것과 비슷하다. 즉, <노들강변>에 사용된 음은 최저음인 ‘솔’ 음부터 최고음인 한 옥타브 위의 ‘도’ 음이며, 선율은 경기민요처럼 ‘솔·라·도'·레'·미'’의 다섯 음이 음계의 최저음인 ‘솔’부터 순차적으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진행을 보인다.
그러나 완전히 경기민요 양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본조아리랑>처럼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음계의 최저음인 ‘솔’ 음이 아닌 음계의 중간음인 ‘도’ 음으로 종지한다. 리듬은 노들강변의 경관을 한원하게 표현하고 있는 가사에 맞게 느린 템포의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가사에 붙은 소박의 형태로 보아 처음에는 굿거리장단의 리듬형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징 및 의의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라디오 방송과 음반 산업은 그 이전의 음악 생산 방식을 바꿔 놓았다. 전통시대의 음악은 하나의 선율이나 노래를 변주變奏variation하는 방식으로 창작되었던 것에 비해 일제강점기에는 레코드 회사에 전속으로 있던 작사가, 작곡가, 편곡자, 반주자, 가수가 각각의 영역에서 ‘히트송’을 창작하였다. 서양식 혹은 일본식 레코드 회사에 소속된 작곡가들은 대부분 양악을 전공한 음악인들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민요풍의 노래가 바로 현재 신민요라 불리는 노래들이다.
<노들강변>은 처음 발매되었을 때에는 박부용이 불렀으나, 이후 크게 ‘히트’하면서 조모란·김인숙·이진홍 등 당시 경·서도민요를 잘 불렀던 가창자들이 민속음악 반주를 많이 하였던 김계선·한성준·고재덕 등의 반주에 맞춰 취입하기도 하였다. <노들강변>은 일제강점기 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으며 애창되다가 광복 이후에는 경기민요 명창들의 가창 레퍼토리로 편입되었다. 이를 보면 음반 발매 이후 사람들 사이에 애창되면서 일반인들도 쉽게 부를 수 있는 경기민요로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중가요였던 신민요에서 시작하여 전통민요권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노래의 템포가 느려졌다. 즉, 음반 발매 시에는 굿거리장단을 네 개의 덩어리로 나눈 듯한 3박자의 빠른 왈츠풍 리듬이었으나 현재는 세마치장단으로 바뀌어 전승되고 있다. <노들강변>은 <본조아리랑>처럼 경기민요의 특성을 많이 지닌 대중음악적 성격의 신민요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전통민요로 인식되어 전승된 예로 볼 수 있다. 또한 오케레코드사의 창립 1주년 기념 음반으로 발매될 정도의 대중성을 확신했던 음반인 만큼 이후 수많은 민요가수와 신민요의 양산에 기틀을 제공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