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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이안삼 깊이 읽기 한국가곡의 새출발 그리고 이안삼 이안삼을 읽으려면 한국가곡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만큼 한동안 방향을 잃었던 우리가곡사에 길을 낸 특별한 역할을 한 그이기 때문이다. 대중음악도 그렇지만 그것이 이태리의 가곡이라 할지라도 노래는 가수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며 발전한다. <비목> <목련화>로 클래식가곡이 호시절을 보낸 그 바탕에는 테너 엄정행의 대중적 인기에 편승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클래식작곡가들은 좋은 가곡만을 생산하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발전한다고 판단했는지 모르나, 엄정행의 흥왕과 관계가 있다. 우리 가곡사에서 보면 한국가곡은 해방이후 학교교과서 안의 음악이었다. 교과서밖으로 나와 극장에서 연주된 상품으로서의 노래가 된 것은 1970년대에 시작된 엄정행의 전국순회 한국가곡연주회를 통해서였고, 엄정행에 매료된 여성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가곡은 제1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83년 엄정행은 MBC-FM에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의 클래식 프로그람 진행자가 되며, 이때를 전후해 KBS-FM 등은 신작한국가곡을 찾고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장일남, 최영섭의 가곡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1987년 엄정행이 방송에서 물러나고 대학에 전념하고 사회적으로 상업방송 위주로 재편되면서 클래식프로그람이 밀려났고, 우리 가곡은 방송의 주 프로그람에서 밀려나게 된다. 세계 가곡의 발달사를 통해서 보면 유명 가곡은 뛰어난 성악가와 관계가 있었다. 델 모나코, 파바로티를 거치며 이태리 가곡이 세계 최고이 유명 가곡이 되듯이 우리 가곡도 유명 성악가오 함께 흥망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것을 대중가요 작곡가들은 발전의 법칙으로 따랐으나 우리 작곡가들은 무시하는 경향이었다. 이 때문에 엄정행에 의해 일어난 80년대의 한국가곡 붐을 이어갈 토양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한국가곡의 한계만을 부각시키며 침몰하는 시기로 빠져들었던 것인데, 이런 시기 작곡가 이안삼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안삼의 등장은 우리 문화의 고정관념이나 공식에 대한 저항아의 등장같은 의미로 처음부터 받아드려졌다 . 한국가곡은 예술가곡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우리 작곡가들이 자괴하던 시기에 그는 한국가곡 희망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 동의를 얻을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 사람이 아니라 경북 김천을 본거지로 평생활동해온 고등학교 음악교사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지지자들이 전무한 이방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 문화는 같이 목소리를 내주는 동료가 있을 때 번서할 수 있는데 그는 새 토양에서 어느날 불숙 싹을 낸 특별한 식물같았다. 이 때문에 그가 한국가곡에 대한 목소리를 낼 때, 한마디로 음악인들은 그를 장외의 작곡가로 쉽게 보았다. 그가 처음 한국작곡가회, 한국창작100인회나, 서울작곡가회, 한국예술가곡연합회 등에 속하는 중견작곡가였으나 기악곡이나 실내악곡을 쓰고, 대학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직장의 무게로 자곡가의 값을 평가하는 우리 토양에서 그는 택도 없는 언더였다. 그가 무슨 일을 하던지 반작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안삼은 특별난 장외였다. 처음부터 음악계 보다는 음악시장을 그는 주시햇고, 그들과 함께 음악운동을 펼쳤다. 그는 역으로 한국의 작곡계에 왔다. 이미 21세기의 문화주류가 되어버린 인터넷동호회를 자신의 호의적 지지층으로 재편했다. 그는 가곡아카데미나, 동호인들의 가곡교실, 또는 음악감상회, 발표회 등에 지도자로 참석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편이 되었고, 그들과 한호흡 속에서 공유하는 문화를 만드는 동역이 되었다. 동호인들은 처음은 음악교양인이 되기를 원했고, 조금이지만 연주기술을 배우고자했다. 이안삼은 동호인들이 한국음악, 한국가곡에 대해 아는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도왔다. 그는 성악동호인들이 노래를 배우고자 하는 것을 알았고 그들에게 성악인들을 소개해서 같이 노래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을 통해 음악동호회와, 성악가들이 그의 우호세력들이 되었다. 이안삼은 이들을 연합한 음악시장을 담보하고 등장하고 있었다. 다 아는 일이지만 우리나라 작곡가들은 하나의 생산자이다. 생산을 하고 그 다음문제에서 대책없이 쩔절매고 있다. 모든 부분에서 시장 없는 생산자는 다같은 운명이다. 이안삼은 생산자로 우리 음악계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시장을 갖고 이런 문화운동으로써의 한국가곡 시장을 제시하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안삼은 처음부터 언더가 아니라 오버그라운드의 작곡가였던 것이다. 2004년 광화문에 작곡연구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방송이 주목하고 있었고, 그와 활동을 같이 하는 성악가들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한국가곡 중흥에 동료작곡가들을 모아들이는 일을 하게 됐다. 그의 힘은 음악시장에 있었다. 전시대 선배들의 가곡이 방송에서 유명해지면서 유명해졌다. 이안삼에 의해 시작된 한국가곡운동은 음악애호가들에게서 먼저 유명해지고 방송관계자들에게 알려지는 그간의 방법과는 정반대되는 성공과정으로 존재했다. 이 때문에 작곡가 이안삼은 2004년이후 특별하게 많은 가곡발표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그 발표회현상은 이안삼 신드롬같은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 가곡사에서 이안삼이 어찌했기에 이안삼 신드롬이 불어닥친 것일까? 2000년 초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안삼의 한국가곡 발표회는 가곡의 운명을 바꿔놓을 정도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클래식 방송에서 그동안 <비목>과 <그리운 금강산> <내맘의 강물> <고향의 노래> 등이 장수하고 있었다. 우선 그런 방송판도에 변화가 온 것이다. 이안삼의 <사랑이여 어디든가서>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 새 가곡들이 밀고 일어섰다. 이안삼이 누구야? 라는 생각은 이때부터 작곡가들의 화두였다. 그동안 우리 가곡은 작곡가의 계획이 있고, 시를 찾아서 입히는 식이었다. 어떤 경우는 곡이 먼저 씌어지고 시가 나중에 채택되기도 했다. 그리고 작곡가는 작곡가고 시는 시인의 것 그것이었다. 가곡은 시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정서, 인토네이션을 작곡가가 노래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모든 가곡은 시가 어머니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우리 가곡을 살펴보면 작시자아 작곡가가 정서적인 교유를 하던 막역지기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를 무시한 가곡은 기계적인 노래가 되고 1회용으로 대부분 끝나는 운명을 맛봤다. 이안삼의 가곡들은 그동안의 우리 가곡과 다른 출생을 하고 있다. 그 의 가곡들을 살펴보면 알게 되지만 그는 서울에 올라오면서 시를 쓰는 사람들과 교유했다. 기존하는 시에 곡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가 참여한 가곡동호회 등의 자리를 통해 시를 쓸수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술로서의 시가 있고, 노래하는 시가 있다”고 말한다. 예전 시골 아낙들이 흥얼흥얼 혼자 신세를 담아 흥얼거리던 노래가락같은 노래말이 노래시라는 지론이었다. 이 때문에 이안삼은 음악애호가들과의 교류 중에 스스로 가곡에 맞는 노래시인들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그의 가곡들은 시인들의 시였다기 보다 이안삼의 가곡을 통해 시인이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안삼의 가곡은 모두 이런 식구성이다. 이안삼의 특성은 그가 시장 위의 작곡가라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장이 그의 작품들을 모두 상품으로 받아드리고 우리 가곡무대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우선 그의 가곡들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멜로디로 저작된다. 시장은 대중성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 가곡이 불려지지 않는 것, 특히 유명하다는 대학에 재직중인 교수들의 가곡이 발표를 위한 곡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무조화성을 동원한 새로운 가곡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적이고 시도하는 가곡은 전공자들을 위한 것일 수는 있으나 시장에서는 철저하게 배척된다. 시장에서는 실험적인 낯선 불편함이 아니라 부르기 편한 색깔이 특별한 노래다. 이 때문에 당대에 통하는 가곡이 되기 위해서는 유행하고 있는 대중음악을 관찰하고 그들과 같이 갈 수 있는 변화의 감각을 가져야 한다. 이안삼의 가곡은 대중성에 근거를 두었다. 뿌리ㄹ르 대중성에 두고 클래식화한 여러 가지 변용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또 호 불호에 대한 의견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를 말하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가곡이 쉽게 우리에게 들려오듯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나는 그를 뛰어난 어렌지(arrange)능력자라고 보고 있다. 클래식 가곡과 뮤지컬, 대중음악의 중간지대에서 아름다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이나 그가 팝과 클래식가곡의 중간음악을 선포하고 내놓은 클래팝의 곡들<마음하나> <금빛날개>, <그 사람> 등을 비교해보면 그의 가곡들이 같은 높이 같은 생까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쉽게 말해 그의 가곡은 시장에서 출발했다. 그가 시장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시장사람들과 같이 만들었다. 이안삼을 살펴보면 그는 서울에서 가곡작업을 시작할 때 그의 가곡을 보급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한 상태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작시라는 것을 고민하는 노래시인들이 결성되어 있었다. 박병순, 정완영, 정치근, 문효치, 김종해, 안문석, 일중, 김경희, 김명희, 전경애, 홍금자, 한여선, 김필연, 이재성, 황여정,이향숙, 노중석, 김연수, 박문재, 윤은경, 하옥이, 이시섭, 이후재, 서공식, 황명휸, 장정문, 엄원용, 이영기, 신영옥, 이한숙, 라홍연, 김기배, 이광수, 권택희, 신일웅, 장장식, 김종선, 이인자, 이상목, 김민정, 김원도, 송재학, 강현국, 현기홍, 민병도, 나영호, 김영준이 그들이다. 그리고 박세원, 김인혜, 김영미, 최현수, 김학남, 김향란, 강무림, 김요한, 이영기, 신용란, 차수정, 허미경, 이재욱, 조혜령, 강혜정, 송기창, 박영국, 이아경, 유승공, 김현주, 이현, 김승철, 이화영, 유미자, 김영옥, 최자영, 김명현, 길민호, 이미영, 전기홍, 이진희, 조정순, 백준현 등 성악가들과의 연대, 그리고 아트힐, 노래의 날개위에, 가곡사랑 등 인터넷가곡동호인 모임과의 포괄적 연대는 거대한 그의 시장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가곡들은 그동안의 우리 가곡들과는 성격이 다르게 세상에 등장했다. 그동안 성공한 우리 가곡은 먼저 방송이나, 개인발표회를 통해 상당기간 불려지면서 음악애호가들에게 알려졌다. 반면 이안삼의 가곡들은 음악애호가들의 음악회에서 상악가들에 의해 초연으로 소개됐다. 말하자면 생산자에게서 소비자에게 직접 연결이 되는 방법이다. 그런만큼 청중을 통해 즉각 어떤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안삼의 가곡은 방송에 의해 유명해져서 청중이 찾은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 의해 유명해져서 방송에서 곡을 찾는 역순으로 유명 가곡이 됐다. 클래식 가곡이지만 대중가요와 같은 방법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곡 작곡가로써 이안삼은 2000년까지는 전혀 주목되지 않았다. 초창기 성가곡 <선하신 목자>로 알려진 그는 서울에 본거지를 정할 때까지 합창곡 <메밀꽃 필무렵>으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 는 2000년 3회 발표회를 영산아트홀에서 가진 이후 2004년 12월 시인과 작곡가와 연주자들을 연합하여 <포럼 우리시 우리 음악>이라는 단체를 창립했다. 시인들이 노랫말을 쓰고 작곡가들이 그 시에 곡을 붙이고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는 단체가 포럼인데,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여 이루어지는 이 시스템은 가곡을 사랑하고 애호하는 일반 청중들이 가곡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시장의 감각과 요구를 알게 된 작곡가들에게는 작품의 방향성을 알게 된 것과 창작의 필요성으로 작용해 더 좋고 많은 작품을 쓰려는 노력으로 작용했다. 우리 가곡사에 창작벨트가 하나 만들어진 효과가 이 포럼의 등장일 것이다. 이 포럼의 결과로 서울과 지방까지 시인과 작곡가가 협동하여 창작곡을 만드는 운동이 번져나가 현재는 이 포럼효과는 우리 작곡계의 경향이 되었다. 이 포럼을 활용하여 이안삼은 기계처럼 다양하고 많은 가곡들을 쏟아낸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곡을 작곡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데, 대략 1천여곡에 이를 것으로 알려진다. 여곡에 이른다. 이안삼의 가곡을 읽다보면 그의 가곡의 성격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시인에게서 작품이 가진 선율이나 색깔 보다 그 시가 말하려는 성격을 더 중하게 보는 특성이 있다. 그의 가곡은 친절한 서두와 메시지적 종장 등 모든 곡이 계산된 구성법칙으로 완성된다. 그는 청중에게 친절하나 따뜻한 서정이나, 평온한 수채화적 가락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와 얘기를 해보면 그가 얼마나 직선적이며 자기의 메시지에 얼마나 단순하게 직통으로 연결하고 드는지 알게 되는데 그의 노래에서도 직통으로 주제에 멜로디를 끌고들어가 설득하고 강조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가곡의 대표작으로 통하는 문효치 시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보면 이안삼의 특성과 시인의 메시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폭발하듯 강렬한 성격성을 띠고 웅변하듯 사로잡아버리는 힘을 느끼게 된다. 솔직히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들으면 이안삼의 가곡세계, 자곡가의 성격, 인생관까지 모두 집작이 되어지고 느껴진다. 그만큼 이 가곡은 성공했고, 또 그만큼 자곡가 이안삼을 이 가곡 속에 가두는 역할도 했다. 나는 2007년인가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들으면서 이안삼이 이후 어떤 방법으로 이 가곡의 성공에서 벗어날까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안삼은 그 이후 참 많은 작품을 쓰고 있다. 아마 최고의 다산능력을 가진 작곡가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혁신과 자기 변화를 위해 실험적 노력을 하고 있는데 가곡 모두 시장의 감각에 연을 두고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천의 색깔, 천의 목소리를 하고 있어도 감각적이고 성격적이며 쉽게 혀에 와서 감기는 편한 가락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 두 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작곡가로 알려진다. 하나는 애초에 영어로 시를 쓰고 그 영어에 곡을 붙였을 때 우리 가곡의 세계화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피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클라팝이라는 클래식에 팝의 감성적 멜로디를 접목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새 장르의 가곡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간에 해 오던 기존의 작업과 함께 새로 시작한 두 실험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우리 가곡사에 더할지 현재로써는 예측할 수 없다. 이번 작곡 발표회를 통해 이런 고심의 작업을 이안삼은 어디까지 보여줄지 우리는 기대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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