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경기도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와 되돌아온 사리
왕실사찰이 폐사된 데 대해 어째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까?
지난 2월 19일, 경기도 양주 회암동 회암사지(檜巖寺址)에서 ‘회암사 사리 이운 기념 문화축제 및 삼대화상 다례재’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운(移運)이란 불화나 불구 등을 옮긴다는 불교 용어다. 이날 행사는 미국 보스턴미술관으로부터 가섭불, 정광불, 석가불, 나옹선사, 지공선사의 사리가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이번에 돌아온 사리는 본래 회암사의 지공선사사리탑에 모셔져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불법 반출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동안 미국 보스톤미술관과의 교섭으로 반출 후 100년 만에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온 것이다.
기념행사가 열린 다음 날인 5월 20일, 미국에서 돌아온 회암사지 사리 유물을 보기 위해 회암사지를 찾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21년 9월, ‘회암사지 사리탑’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회암사지(사적 128호)’를 다녀왔었으니 무려 3년 만에 다시 걸음한 것이다. 회암사는 조선 최대 왕실사찰로 절집 가운데 정청은 임금이 행차했을 때 행궁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지공선사,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 그리고 비석 등 여러 문화재가 있는 사찰이다. 비록 오래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절터에 있는 유구를 통해 회암사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다.
회암사(檜岩寺)는 언제 창건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 우왕 11년(1385년)에 건립한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2세기 이전에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증국사탑비는 고려 공민왕 때의 국사였던 보우(普愚)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회암사는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으며, 조선조 초에 불교계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할 때도 선종 본찰로써 크게 번영했다. 그리고 당시 불교계를 이끌었던 지공선사, 나옹화상, 무학대사 등 숱한 고승들이 주석함으로써 한때 나라의 최고 사찰이 되었다.
회암사는 조선 초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속에서도 왕실 후원으로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한때 승려 3천여 명이 머물 정도로 크게 번창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회암사에서 거행한 왕실 관련 행사 내용과 왕실이 후원한 중창 중수에 관한 내용이 여러 군데 수록돼 있다. 회암사는 산자락 구릉지에 조성됐음에도 불구하고 평지 가람에서 볼 수 있는 회랑과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정한 목적으로 건립된 건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건물들의 배치 형식이 궁궐과 닮은 것으로 밝혀져 왕실사찰의 웅장했던 자태와 찬란했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넓디넓은 폐사지에 들어서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가운데 사리탑만 오도카니 서 있다. 흥망성쇠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있는 법이다. 그토록 대단했던 사찰이 폐사되었을 땐 언제 어떤 일로 폐사되었는지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회암사에 있던 승려나 종사했던 개인의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고, 사찰 종무의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며, 양주 관아의 기록이 있어야 함은 물론 나라의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한때 크게 번창했던 사찰이 폐허가 돼 버렸으나 폐사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일언반구 남아 있지 않으니 어찌 된 셈인지 모르겠다.
왕실사찰이 폐사된 데 대해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뭔가 석연치 않다. 누구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모종의 강압이나 묵계라도 있었던 걸까? 다만 당시 전국 유생들이 임금에게 ‘백성들이 회암사에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청한 바 있고,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작은 불상들이 목이 잘린 채 몸체와 따로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폐사된 것으로 막연히 짐작될 뿐이다. 증오란 언제나 집요하고 그 결과는 참혹한 법이다. 회암사지를 둘러보는 동안 당대 최고의 대찰이 어째서 폐사되었는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기와, 도자기, 점토공예, 금속품, 석제품 등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상당수 유물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후원자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고, 제작 배경과 함께 당대 유물들의 편년을 설정하는 데 기준이 되고 있다. 또한 궁궐이나 왕실 관련 사찰에서만 사용된 청기와를 비롯해 궁궐 건축물의 지붕 추녀마루에 올리는 용두와 잡상이 출토되어 당시 왕실사찰로서 회암사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절터에는 월대, 당간지주 등 석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석재를 다듬은 기법을 보건대 상당히 우수한 석공들이 관여했음이 확인된다.
회암사지에서 백여 걸음 떨어진 천보산 기슭에는 여말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선각왕사비(보물 387호)와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부도인 무학대사탑(보물 388호), 그리고 무학대사탑 앞에 서 있는 쌍사자석등(보물 389호) 등 보물로 지정된 유적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리고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유형문화재 50호), 지공선사의 부도비(문화재자료 135호) 등 유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지공선사는 서역과 중국을 거쳐 고려에 들어와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 출신 승려이고, 나옹선사는 지공선사의 제자로 공민왕 왕사였던 고승이다.
‘선각왕사비’는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나옹이 입적한 이듬해인 우왕 3년(1377년)에 세웠다. 글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이 짓고, 글씨는 당대 명필인 권중화가 썼다. 왕사비는 거북 모양의 대좌와 비문을 새긴 비신, 그리고 두 마리의 용이 뒤엉킨 형태의 이수로 되어 있다. 당초 왕사비에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있었으나 1997년에 일어난 산불 때 비각이 불타면서 오히려 비석이 크게 훼손됐다. 그래서 비석은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과정을 거쳐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의 비석을 대신해 대좌 앞에 똑같이 만든 비석을 세웠다.
‘무학대사탑’은 구름무늬를 조각한 팔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을 놓고 탑신과 머리 장식 부분을 포개놓았다. 그리고 탑 주변에 팔각의 난간이 둘러쳐져 있으며, 탑 앞에 쌍사자석등이 있다. 무학은 이성계의 스승으로, 조선 개국 후 왕사로 임명됐으며 회암사 주지로 부임했다. 이성계는 무학을 위해 미리 회암사 북쪽에 탑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후 무학이 입적하자 미리 만들어놓은 탑에 사리를 안치하고, 비석을 건립했다. 탑의 규모가 웅대하고 가지런하며, 비석 전면에 새겨진 조각 장식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이러한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회암사지사리탑'은 조선 전기에 왕실이 발원해 건립한 진신 사리탑으로 회암사지 중심 사역에서 다소 벗어난 외곽 북편 집수정 시설 바로 아래에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10년(1464년)에 효령대군이 회암사 동쪽 언덕에 석종을 세우고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안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탑은 일부 마모되었지만 결실된 부재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사리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그리고 각 부의 문양과 돌을 다듬은 수법이 뛰어나 조선시대 석조미술과 불탑 양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2021년에 보물(2130호)로 지정되었다.
부처님처럼 크고 넓고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한 스님들의 발원이 먼지처럼 쌓여 있는 폐허, 조선 후기의 승려 해원(海源)은 폐사된 회암사를 돌아본 뒤 너무 처연하여 <천경집>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멀리 양주의 천보사(회암사의 별칭)를 찾으니, 우뚝 솟은 석탑에 이르러 이제 머무른다. 남계는 천추의 한이 물 흐르듯 흐르고, 북악계는 만고의 시름이 구름진다. 담장은 무너지고 누대는 황폐해져 토끼굴을 이루었는데 금전(金殿)과 옥루(玉樓)는 속세의 티끌을 모아서 지었는가. 계단에 사람이 있길 바랐건만 어찌 떠났던가. 해 질 무렵 홀로 서니 눈물 그치지 못하리’
회암사지 사리는 2004년 보스턴미술관이 사리구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여 그동안 반환 협의를 이어갔으나 결렬됐다. 그러다가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미술관 측에 사리 반환 논의를 요청하면서 협의가 재개됐다. 그래서 양측은 사리는 기증 형식으로 영구 반환하고, 사리구는 임시 대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사리는 5월 21일부터 3주간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친견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사리 공개는 고려 후기 사리탑 봉안 후 600년 만에 처음이다. 그러나 공개 하루 전에 간 탓에 사리를 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현재 해외에 있는 우리의 문화재는 약 12만여 점이 된다. 국가별로 보면 일본에 6만여 점, 미국에 3만여 점이 있으며 그 밖에 영국, 독일, 프랑스 등 20여 나라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이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들의 수치이며 개인이 소장한 문화재를 감안하면 20만여 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던 한말,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는 동안 약탈과 도굴에 의해 밀반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 되돌려받은 ‘회암사 사리’처럼 앞으로도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 반환에 국민의 많은 관심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