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 章 운명의 날
소주(蘇州).
너무나도 아름다운 강남명도(江南名都)의 크고 작은 거리는 늘 사람
들로 북적거린다.
항주(杭州)와 더불어 천하의 색향이라 불리는 곳. 그곳의 밤은 대낮
보다 오히려 분주하다. 오색궁등이 내걸린 거리는 너무도 화려한 빛
으로 뒤덮였고, 거나한 취객들은 각지에서 몰려든 미기들을 만나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남대가(南大街) 근처도 마찬가지였다.
주루마다 내걸린 둥불 아래 점소이들이 지나가는 취객들을 유혹하고,
아직 손님을 받지 못한 나이 든 기녀들은 지분 내음을 풍기며 연신
추파를 던져대고 있다.
초경이 이미 지났으나 밤거리를 헤매이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때 이른 유월의 더위가 너무 극심했기 때문일까.
소주의 밤은 한낮의 열기를 피해 다니는 행인들과 더불어 분주할 대
로 분주해져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없는 곳을 골라 걸음을 재촉했다.
나이 열일곱 정도.
헌칠한 키에 다소 마른 듯한 체구였으나 그의 이목구비는 너무도 정
연해 다시 보기 힘들 정도이다.
짙은 검미 아래 차갑게 빛나는 눈.
우뚝 솟은 코는 다소 오만해 보였고, 짙은 입술과 조각을 대하는 듯
한 턱의 선은 남아의 기상마저 엿보이게 한다.
"어리석은 무리들……."
소년은 어딘지 모르게 세상을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며 초연한 걸음
걸이로 남대가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낯빛은 건강하다 할 수 없었다.
피부가 지나치게 하얘 창백한 인상이고, 미간(眉間)에 드리워져 있는
푸른 그늘은 소년의 몸 안 어딘가 근치(根治)되기 힘든 괴질이 있다
는 증거가 아닐까?
그의 몸뚱이는 초범(超凡)한 두뇌를 담기에는 힘이 모자라는 듯 걸음
걸이도 휘청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측은해 보였다.
이마 위,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방울은 소년이 짧은 거리도 잘 걷지
못하는 나약한 신체의 소유자라는 것을 밝혔다.
'아버님께서 왜 내게 심부름을 시키시는지 모르겠군.'
그는 인파에서 벗어난 어느 한적한 길에 이르자 눈살을 찌푸렸다.
근처에 여인이 있었다면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 정도로 지극히 아름
다운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생겼다.
"흠, 아버님께서 황도(皇都)에 갔다 오시더니 어딘지 크게 변한 인상
이다."
소년은 중얼중얼거리며 걷다가 한 곳에 이르러 발을 멈추었다.
소주 남대가 끝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원(莊院)의 문 앞이 그곳이
었다.
매우 웅장한 장원, 사두마차가 그대로 통과할 거대한 정문 위에는 커
다란 금빛 편액이 걸려 있다.
<소주염가장원(蘇州閻家莊院)>
무당검파 출신으로 일가를 이룩한 철검협(鐵劍俠) 염광천(閻光天)의
장원이다.
무당검학을 극상으로 익혀 강호명숙의 반열에 오른 인물. 그는 지금
무당파 속가장문인으로 있다. 무림 백도인 가운데 최상승의 지위를
차지한 지 어언 십 년이 넘으며, 호방한 기질 탓에 흑도의 인물들도
그와 친분을 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번잡한 거리와는 달리 일대가 조용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장원의 정문 좌우에는 도검(刀劍)을 멘 무사 십이 인(人)이 위풍당당
히 도열해 있다.
매의 눈으로 일대를 살피고 있는 무사들. 무공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라면 그들이 무당비전의 호검세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허
락 없이 들어서는 순간 일대가 검막에 휘어 감기게 된다는 것도.
소년은 검세를 느끼지 못하는 듯 장원을 향해 다가섰고, 무사들은 누
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일제히 허리를 꺾었다.
"냉 공자!"
"야심한데 어인 일이시옵니까?"
"냉상서(冷尙書)의 공자(公子)께서는 속세사(俗世事)에 초월하시어
명절날에도 범인(凡人)들이 한 자 알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수십 권
쌓아놓고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드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
무사들은 반갑다는 표정 가운데 놀라운 표정을 하며 장읍(長揖)해 예
의를 취했다.
소년은 냉씨(冷氏) 성(姓)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외자 운(雲), 즉 냉운(冷雲)이라는 소년이었다.
냉운은 보통 상서가의 냉 공자라고 불리었다.
냉운의 아버지 냉엽문(冷葉文)이 과거 예부상서(禮部尙書)에 등용되
었던 전직 고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냉운은 괴벽하기로 소주 제일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얼굴을 아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
을 수 있을 정도로 거소 밖 출입이 없는 소년 냉운이 어인 일로 십
리(里) 길을 걸어 염가장을 찾아왔단 말인가?
그는 새벽에 일어나 한밤 침상에 들 때까지 책을 놓지 않아 서귀(書
鬼)라고 불리고 있지 않던가!
냉운을 아는 사람은 냉운이 밤에 길을 걸어 염가장에 왔다는 것을 쉽
게 믿지 않으리라.
냉운은 호위 무사들이 몸을 일으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예의 낭랑한
투로 말했다.
"장주(莊主)를 뵈러 왔다."
"헤헤……, 이제 보니 장주께서 청하신 모양이군요?"
무사 중 하나가 넌지시 물었다.
"아니다. 가부(家父)의 명으로 왔다."
냉운은 싸늘히 말하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지독히 냉정하군.'
무사들은 냉운의 성격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
며 얼른 장원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은 세외선경(世外仙景)이라 할 만큼 아름다웠다.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해 있는 화원이 수십 장에 걸쳐 이루어져
있고, 그 좌우는 송림(松林)이었다.
화원을 뚫고 난 일 장 너비의 돌길이 직선으로 백 장 이어졌고, 그
끝은 원래의 담보다 훨씬 얕은 붉은색 담이었다.
월동문(月洞門) 하나가 있고 그 좌우 두 노인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
는 중이었다.
"흠!"
냉운은 백 장을 급히 걸어 월동문 앞에 이르며 헛기침 소리를 냈다.
두 노인은 냉운의 얼굴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장읍했다.
"냉, 냉 공자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우리 늙은이들은 서동(書童)인
줄로만 알고 인사가 늦었습니다."
"흥! 나는 여기 못 올 사람이오?"
냉운은 고집스럽게 말하며 열려진 월동문 안으로 휙 걸어 들어갔다.
"쯧쯧, 괴팍한 성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군."
"냉 부인이 타계하신 후 더 심해졌지 않은가?"
"모두 병 때문이네."
"체, 아무튼 염 소저의 앞날이 암담할 뿐이네. 냉 공자와는 대조적으
로 기질이 활달하신 염 소저께서 만에 하나, 청상(靑裳)이 되신다면
……."
한 노인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그런 소리하면 안 되네!"
다른 노인이 정색을 하며 말을 가로막았다.
순간.
"흥!"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두 노인의 고막을 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백의소녀(白衣少女) 하나가 있었다.
월하선녀(月下仙女)가 하계(下界)한 듯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
에 냉기가 그득했다.
"쌍호법(雙護法)들께서 세상에 능통하시고 겸허하신 분들인 줄만 알
았는데, 사실 그렇지 않군요."
백의소녀는 두 노인이 말하는 것을 들은 후였다.
"냉 공자는 단명(短命)하지 않아요."
소녀가 싸늘히 외치자 쌍호법은 얼굴을 붉히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백의소녀는 이곳 염가장의 소장주(少莊主)였다.
이름은 염방채(閻芳彩), 나이는 냉운보다 한 살 적은 십육 세였다.
미인이 많다는 소주에서도 그 미색이 익히 알려진 소주 제일의 미인.
파락호들이 염가장의 담장을 뛰어넘다 다리몽둥이가 부러지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것도 그녀의 미가 너무도 뇌쇄적이기 때문이다.
― 철검협의 검보다 위대한 것은 빙기옥골의 소주옥향(蘇州玉香)이다
. 그녀가 바란다면 삼 일 안에 염가장은 일천의 영웅들로 가득 채울
수 있다.
미색 하나로 이미 철검협의 무명을 눌러 버린 천생의 미인. 그녀의
찌푸려진 아미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염방채와 냉운은 이미 정혼한 사이. 냉운이 세 살이고 그녀가 두 살
일 때 둘은 정혼자(定婚者) 사이로 맺어졌던 것이다.
염방채가 발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장차 자신의 낭군이 될 사람이 요절하리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면 탕녀(蕩女)라 불리어 마땅하지 않겠는가.
"흥!"
염방채는 다시 한 번 냉소치며 흘쩍 날아올랐다.
휙!
백선(白線)이 흐르는가 하더니 그녀의 모습이 월동문 안으로 사라졌
다. 무당비전(武當秘傳) 암향표(暗香飄)의 신법인데, 이미 상당 수준
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염가장에서 가장 깊숙한 곳, 병풍처럼 둘러진 검은 대나무 숲을 지나
면 삼층의 누각이 나타난다.
묵죽헌(墨竹軒).
염가장의 장주이자 무당 속가장문인(俗家掌門人)인 철검협(鐵劍俠)
염광천(閻光天)이 거소로 삼고 있는 곳이다.
그는 태사의(太獅倚)에 앉아 달빛에 젖은 처마를 감상하다 만면 가득
웃음을 떠올렸다.
호안(虎眼)의 흑포중년인, 바로 철검협 염광천이다.
그의 일점혈육 염방채가 지극히 영준한 장래의 사위와 함께 묵죽헌으
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허허허……, 자네가 여기 어인 일인가?"
염광천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냉운이 얼른 장읍을 취했다.
"장주! 가부(家父)의 명이 있어 왔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또렷또렷했다.
"냉 상서께서 자네를 여기 보냈다니……?"
염광천은 놀란 표정을 하고 냉운에게 대청 위로 들기를 권했다. 그러
나 냉운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나갈 뜻을 비추었다.
"급히 장주를 모시고 오라는 밀명(密命)이 있었습니다. 어서 저와 함
께 냉가장(冷家莊)으로 가시지요!"
"으음, 무슨 일이기에 자네를 보내 야심한 때 나를 청한단 말인가?
설마 같이 술을 마시고 시(詩)를 읊고 싶다는 말은 아닐 텐데? 그저
께 보았을 때만 해도 별일 없는 듯했는데……."
"가부는 지난 사흘 내내 황도에서 갖고 오신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살
펴보시며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냉운이 힘주어 말했다.
"얼마 전 갑자기 지극히 놀란 표정이 되시어 거소 밖으로 나서시며
저를 불러 장주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냉운이 허리를 숙이자 염방천이 미끄러지듯이 날렵히 움직여 냉운 바
로 앞에 이르렀다.
"냉 상서께서 그런 행동을 보이셨다면 보통 일이 아닐 걸세. 급히 가
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네."
"예."
냉운은 길게 대답하려다가 엇!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염광천이 찰나지간에 냉운의 팔뚝을 잡고 훌쩍 날아올랐기 때문이었
다.
휘익!
염광천은 단숨에 십오 장을 날아 울창한 묵죽림을 벗어났다.
'이것이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경공(輕功)이군!'
냉운은 자신의 몸이 훌훌 날자 아득한 표정이 되었다.
무가와 인연을 맺었으나 무림과는 상관없는 서생. 또한 그의 신체는
병약하기 이를 데 없다. 간혹 장원의 호위 무사들이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본 바 있으나 절정의 무인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검과 더불어 경공에서도 일가를 이룬 염광천의 손에 이끌려 허공을
날아가니 그 놀라움이 더 클 수밖에.
냉운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휘익!
철검협의 신법은 쏘아진 화살만큼이나 쾌속했다. 그는 냉운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듯 빠르게 신형을 이동시켰다.
냉운은 호흡이 가빠짐을 느꼈다.
'이런 빠르기라면 십 리 거리를 달려 냉가장에 이르는 데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는 염가장까지 가기 위해 반시진을 소비했었
는데……. 만일 경공이라는 것을 배운다면 어디든 오고가는 시간을
단축시켜 남은 시간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겠군.'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염광천이 문득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지 짐작 가는 것이 없는가?"
"모, 모르겠습니다."
"하인들 중 걸음이 빠른 자가 수백 명이 있거늘, 걸음이 늦은 자네를
보냈다니 보통 일은 아닐 것이네!"
"예."
"사흘 전 황도에서 돌아오신 이후 쭉 무엇인가를 살폈다는데…… 그
것 때문이 아닐는지?"
"그런 듯싶습니다."
"급한 일이니 서두르세!"
염광천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신법을 돋우었다.
스으읏 ―.
비조보다 빠른 움직임.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이십여 장의 거리를
치달려 나간다. 그는 십 리 길을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려 소주성 외곽
지대에 이르렀다.
시중의 번잡함과는 동떨어진 거대한 죽림(竹林)이었다.
월광(月光)이 죽엽(竹葉)에 떨어져 내려 금빛 고기 비늘같이 튀어오
르며 기이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십여 리를 가득 메운 거대한 묵죽림.
사실 염가장의 묵죽헌을 둘러싼 묵죽은 이곳의 대나무를 옮겨 심은
것에 불과하다. 하늘마저 가리고 있는 무성한 죽림. 방향을 잘못 잡
는다면 두 시진 정도는 죽의 바다에서 헤매야 한다.
염광천은 거침없는 기세로 묵죽림을 치달려 나갔다.
이곳의 지리는 눈을 감고도 찾아 들어갈 수 있을 정도. 염광천은 쾌
속한 동작으로 죽림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몸놀림이 둔해진 것은 죽림 가운데 자리 잡은 장원이 시야에 들
어온 직후였다.
일 장 높이의 담장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원. 주변에 펼쳐진 묵죽림과
이룬 조화가 너무도 절묘하기에 압도감은 들지 않는다.
염가장이 무의 상징이라면 이곳은 문(文)을 상징한다.
<냉가장(冷家莊)>
황제(皇帝)의 어필(御筆)로 쓰여진 현판을 달고 있는 곳. 이곳은 다
른 고관(高官)들의 장원과는 달리 호성하(護城河)도 없었고, 근처를
지키는 무사도 없다.
장주인 냉엽문은 인망 높기로 소주 제일이 아닌가.
늘 타인에게 후덕함을 베푸는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
도 없다 할 수 있다.
지금 냉가장의 정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이상하군."
냉운은 죽림을 뚫고 냉가장의 정문 앞에 이르는 순간 불길한 표정이
되어 중얼중얼거렸다.
"이런 시각에 문이 열려 있다니……."
냉운은 중얼거리며 염광천을 바라보았다.
염광천의 얼굴빛은 전과 달리 창백히 질려 있었다. 또한 그의 눈에서
는 비수날보다 차가운 한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염백(閻伯), 어서 안으로……."
냉운이 급히 말하며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때 완강한 염광천의 팔이 그를 잡아끌었다.
"아니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염광천의 음성은 너무도 차가웠다.
"예?"
냉운이 주춤거리며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
"긴 말할 시간이 없다. 너는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라."
염광천이 엄숙히 외치며 잠룡승천(潛龍昇天)의 신법을 펼치며 일 장
높이 담을 가볍게 뛰어넘어 안으로 사라져 갔다.
냉운은 잠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머뭇했다.
"안에 무슨 일이 생겼음에 틀림없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해 온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고 이제껏 살아온 삶의 터전이 아닌가. 냉운은 염
광천의 당부도 망각한 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장원을 향해 다가섰다
.
그리고 문 앞에 다가섰을 때, 그는 얼어붙은 듯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반쯤 열려진 문, 그 뒤로 보이는 빛깔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지면을 축축이 적시며 흘러나오고 있는 시뻘건 액체. 달빛에 번쩍이
고 있는 붉은 액체는 바로 선혈이었다.
"피, 피가 아닌가?"
냉가장 안이 온통 선혈에 뒤덮여 있다니…….
냉운은 한동안 아무런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더불어 느껴지는 진득한 혈향, 이것은 결코 꿈은 아닌 것이다.
염광천이 그를 만류한 것은 무림인답게 질펀한 혈흔을 먼저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이 온통 피로 덮여 있다니……?"
냉운은 오금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깨비가 나타나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삐죽 일
어났고 소름이 돋아났다.
"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냉운은 뒷머리에 철퇴를 맞은 기분이 되어 벌벌 떨다가 겨우 걸음을
내디뎠다.
피가 질퍽질퍽한 곳을 지나 냉가장 안에 한 걸음을 디디는 찰나.
"흑!"
냉운은 망막에 비추이고 있는 무서운 광경에 저도 모르게 비명 소리
를 내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
냉가장은 이전의 냉가장이 아니었다.
수백 구 시체가 즐비하게 쓰러져 있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바닥에 흥건한 핏물은 수백 구 시체에서 쏟아져 나온 피였다.
"……."
냉운은 사지에 힘이 빠져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이었다.
충격을 받자 심맥(心脈)이 비틀려 곧 죽어 버릴 듯 괴로움 속에 빠지
는 것은 당연했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냉운은 입가가 찝찔해 옴을 느꼈다.
어느새인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죽어 있는 사람 모두 냉운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를 소장주(少莊主)라 부르며 잘 대해 주던 냉가장의 하인(下人)들
이 떼죽음으로 화해 있을 줄이야.
죽은 모습은 한결같았다.
극악무도한 수법에 의해 가슴 부위가 박살나 죽었고, 그렇기 때문인
지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냉가장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최심수( 心手)라는 수법에 당한 시체들이었다.
아주 악랄한 수법이라 무림에서 금기(禁忌)로 불리우고 있는 수법이
최심수였다. 심장을 파해시키고 영혼마저 짓이겨 버리는 악마의 수단
. 그 수법에 격중되면 살아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으으……."
냉운은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그는 아버지를 힘껏 부르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짤막
한 신음 소리에 불과했다.
냉가장주 냉엽문의 거처는 냉가장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정문에서의 거리는 이백 장 정도였다.
정문에서 냉가장주의 거처까지 가는 길에는 시체가 줄을 이루며 누워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신음 소
리가 들릴 텐데 냉가장 안은 무덤 속같이 적막했다.
냉가장은 하인이 사백이 넘었고 상주하는 식객의 수도 무려 이백이
넘었다.
냉엽문은 검박한 생활를 즐기는 선비이나 그의 부인은 그러하지 않았
다.
냉엽문의 아내, 즉 냉운의 어머니는 현 황제와 팔촌(八寸)이 되는 정
령공주(正靈公主)였다. 그녀는 냉가문에 시집올 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왔으며, 그날 이후 냉가문은 소주 제일의 부호로
통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대던 냉가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다니……
"으으……."
냉운은 이 순간이 꿈이길 바랐다.
그가 태어나 이제껏 뼈를 굳힌 냉가장이 귀역(鬼域)으로 변할 수는
없으리라.
하나, 보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최심수에 죽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냉운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
들이 죽어 있는 장소는 친숙하기 이를 데 없는 장소였다.
"아, 아버지를 뵈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모든 해답을 주실 것이다."
냉운은 애써 시산을 피하며 걸음을 옮겼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얼마를 걸었을까, 야트막한 돌담 위로 삐죽 모
습을 드러낸 이층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백석을 깎아 만든 돌담이 운치를 자아내는 곳, 그곳이 바로 냉엽문의
거처이다.
돌담 주위, 일곱 구의 시체가 가슴이 박살난 채 흩어져 있다.
칠위사(七衛士)라고 불리우는 그들은 강호에 내노라 하는 무사들인데
, 누군가에 의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있는 것이다.
돌담 사이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그 안을 들어가면 냉가장주 냉엽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아, 아버지……!"
냉운은 불끈 치솟아 오르는 부정(父情)에 지난 순간의 공포를 잊고
문 안으로 힘차게 달려 들어갔다.
아담한 이층 누각, 견지루(堅志樓)라 불리우는 장주 냉엽문의 거처이
다.
그 앞, 냉운보다 먼저 들어갔던 염광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꿇어앉은 채였다. 그 앞으로 황색 장포를 걸친 사람이 길게 누
워 있는 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혀가 굳어졌다.
"아…… 아, 아버지!"
냉운은 더듬더듬 말하며 염광천 쪽으로 다가갔다.
"……."
염광천은 냉운이 다가서는 것을 알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진 후였다.
"……."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한곁으로 물러났다.
그의 몸에 반쯤 가리어져 있던 황의인의 모습이 냉운의 눈 안 가득해
졌다.
나이 오십 정도의 문사(文士)였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부릅뜨여진 채 감기지 않았다. 얼마
전 죽은 시체인 것이다.
황의인의 심장 부근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나 있고, 그곳에서 흘러나
온 피가 거의 굳어 있었다.
"……."
냉운은 황의인의 시체 앞에 꿇어앉아 무엇인가를 외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넋은 얼음굴 안에 빠진 것처럼 꽁꽁 얼어붙어 아무 말도
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일순.
"크으으……!"
냉운이 입을 벌려 시뻘건 피를 토하며 홍의인의 시체 위로 쓰러져 사
지를 버둥거렸다.
"이 사람아!"
염광천이 얼른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네……."
염광천은 크게 말하지 않았다.
냉운이 혼절한 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도 보기 힘든 멸문지화(滅門之禍)가 냉가장에 닥치다니……
. 대체, 대체 어떤 놈의 짓이란 말인가?"
염광천은 하늘을 바라보며 저주해 말했다.
"냉엽문을 죽인 자는…… 내 손에 죽으리라……."
그는 절절히 외치며 피눈물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