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30 항공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이산가족 1차 상봉…금강산 상봉장 눈물바다 짧기만한 2시간여 상봉시간…끊이지 않는 울음소리 남북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가 30일 오후 3시10분부터 2시간 동안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에서 열렸다. 금강산=공동취재단 CBS정치부 이동직 기자 /노컷뉴스 2010-10-30 17:22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19739
- 박찬호, 인천방송 (공중전화 카드)
2009 - 박찬호, 생애 첫 월드시리즈 등판 두 타자 1안타 1삼진…필리스, 양키스에 져 1승1패 1994년 메이저리그 무대에 처음 선 뒤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유니폼은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 방출 설움도 겪어봤고,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꿋꿋하게 버텼고 마침내 ‘꿈의 무대’라는 월드시리즈에 섰다. 30일(한국시각) 뉴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2차전.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뉴욕 양키스에 1-2로 뒤진 7회말 무사 1·3루 위기에서 찰리 매뉴얼 감독은 선발 페드로 마르티네스(38)를 내리고 박찬호(36)를 올렸다. 박찬호는 양키스 타자인 호르헤 포사다에게 7타수 무안타로 강했다. 볼카운트 2-1. 4구째 147㎞ 싱커를 던졌지만 포사다가 잘 걷어냈다. 중전 안타였다. 박찬호는 데릭 지터를 스리번트 아웃으로 처리한 뒤 스콧 에어와 교체됐다. 월드시리즈 첫 등판 성적은 ⅓이닝 2타자 상대 1안타 1삼진. 포사다의 안타로 3루 주자가 홈을 밟았지만 마르티네스가 내보낸 주자라서 실점을 떠안지는 않았다. 박찬호는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유니폼을 입고 처음 포스트시즌 경기에 나섰으며, 지난해에는 엘에이 다저스 소속으로 챔피언십시리즈 마운드까지 올랐다. 한국 선수가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은 것은 김병현(2001년) 이후 두 번째다. 필라델피아는 양키스 선발 A.J. 버넷의 호투로 1-3으로 졌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한겨레 2009-10-30 오후 08:36:03
- Franz Boas, Claude Lévi-Strauss, Margaret Mead, Steppe Wisent-Cave painting from Altamira
- Le Corbusier and Levi-Strauss
2009 -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Claude) 사망 레비스트로스 [Lévi-Strauss, Claude, 1908.11.28~2009.10.30] 오늘의 역사 (10월 30일)[2009년]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타계 2009년 10월 30일 세계적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타계했다. 190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난 고인은 파리에서 공부했으며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에서 인류학 교수로 재직했다. 프랑스계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친나치 성향의 비시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뉴욕 망명 시절, 같은 이름의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 때문에 '클로드 L 스트로스'로 성(姓)을 바꾸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40년대 말 프랑스로 돌아가 60년 넘게 '살아 있는 국보'로 불리며 '슬픈 열대(1955년)' '야생의 사고(1962년)' 등 저서를 남겼다. 1981년 방한하기도 했던 그는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 20세기 지성계의 거목, 프랑스 지성계의 전설 등으로 불렸으며 특히 프랑스에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이후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91105_0002
‘슬픈 열대’ 쓴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타계 구조주의 이끈 세계적 지성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사진)가 지난달 30일 숨졌다고 프랑스 학술원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3일 밝혔다. 향년 100. 구체적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에프페(AFP) 통신은 측근의 말을 인용해 “2년 전 엉치뼈 골절상을 당한 뒤 줄곧 심각한 피로 증세를 보여왔다”고 전했다. 묻힌 곳은 레비스트로스의 집이 있는 부르고뉴의 리뉴롤 마을로, 유족들은 사생활 보호와 언론들의 취재 경쟁을 피해 장례식을 마친 뒤 사망 사실을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화·결혼 규칙·요리 체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의 심층에는 ‘구운 것과 끓인 것’ ‘손님과 친족’ 같은 이원적 대립구조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혀낸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의 로만 야콥슨,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과 함께 구조주의 시대를 열어 젖힌 20세기 지성계의 거목으로 꼽힌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회제도가 생물학이나 개인 심리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관계망’ 속에서 구성된다는 구조주의의 발견에 대해 20세기 지성사는 “데카르트 이래 인류가 자부해온 주체의 존엄성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미셸 푸코)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표작은 <슬픈 열대>(1955)와 <구조인류학>(1958) <야생의 사고>(1962) 등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1908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유대계 프랑스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대에서 철학과 법률을 공부한 뒤 중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재직했다. 1935년 상파울루대 사회학 교수로 초빙돼 원주민 사회를 연구했고,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대 민족학 연구소장과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1981년 10월에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초청으로 방한해 20일 가까이 머물며 경주와 통도사 등을 둘러본 뒤 돌아가기도 했다. 198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퇴임하고 1993년 <보기 듣기 읽기>라는 비평집을 낸 뒤엔 대외활동을 중단한 채 파리의 자택에서 칩거해왔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지칠 줄 모르는 휴머니스트였고, 항상 새로운 지식을 탐구했던 호기심 많은 연구자였으며, 어떤 분파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인간이었다”며 존경을 표시했다. 레비스트로스는 3번 결혼해 2명의 아들을 뒀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한겨레 2009-11-04 오후 07:38:11
2006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걸작 20선 영국의 권위지 <가디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걸작 20선 소개 영국의 권위지 <가디언>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걸작 미술품 20점’을 30일(현지 시각) 소개했다. <가디언>은 “당신의 인생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아예 바꿔버릴 수도 있는 걸작들”이라며 “이 작품들의 진수를 느끼려면 반드시 복제화가 아닌 원화를 직접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꼽힌 걸작 20점은 <가디언>이 예술 블로그(blogs.guardian.co.uk/arts)를 개설하는 기념으로 꼽은 것이다. <가디언>은 이와 동시에 누리꾼들을 대상으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걸작 미술품 50점’을 꼽는 설문조사를 시작했다. <가디언>은 “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은 없으며 그저 예술작품이 있을 뿐”이라며 독자들 나름의 작품 추천을 제안했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걸작 20선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잭슨 폴록의 '넘버 31'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렘브란트의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 산족의 암벽화 티티안의 '다나에' 카라바치오의 '성녀 루치아의 매장'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마크 로스코의 로스코 예배당의 유화들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얀 반 에이크의 '롤린 대주교와 성모' 파르테논 석상 엘긴 마블 앙리 마티스의 '댄스 II'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 마사치오의 '아담과 이브의 낙원 추방'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6-10-31 오후 09:38:46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68623.html
2005 -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비 유리원판 사진 공개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碑 사진 98년 전 프랑스 학자가 촬영한 광개토대왕비의 유리원판 사진이 30일 처음으로 공개됐다.<사진> 이 사진은 촬영자와 연대가 확실한 광개토대왕비의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07년 유럽인 중 최초로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했던 프랑스 학자 에두아르 샤반느(Chav annes·1865~1918)가 촬영한 것이다. 현재 프랑스 파리 기메미술관이 장군총 등 21장의 다른 유적 사진들과 함께 소장하고 있다. 이 사실은 임영방(林英芳) 전 국립현대미술관장과 서길수(徐吉洙) 서경대 교수(전 고구려연구회장)가 확인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1907년의 광개토대왕비는 표면에 석회가 발라진 상태로, 탁본을 뜨기 위한 나무 받침대가 보인다. 현재 높이인 6.39m보다 낮은 6.20m라고 기록돼 19㎝가 땅 속에 묻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샤반느는 답사 내용을 ‘고대 한국의 왕국 고구려(L’ancien Royaume Cor?en de Kao-Keou-Li) 유적에 관한 보고서’란 제목의 논문으로 기록해 당시 고구려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분명한 인식이 세계적으로 통용됐음을 보여준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조선닷컴 2005.10.30 22:07 07'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10/200510300348.html
2002 -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 첫비행 성공. 초음속기 보유 세계 12번째 2002년 10월 3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된 초음속 고등훈련기 겸 경(輕)공격기인 T-50 ‘골든 이글’의 비행성공을 기념하는 행사가 경남 사천 공군기지에서 이준 국방장관과 길형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지난 8월 20일 시험비행에 성공한 최고속도 마하 1.5의 T-50은 F16, F15, F22 등 세계 최신예 및 차세대 전투기의 조종 훈련을 위해 개발됐다. 디지털 비행제어 시스템과 첨단 디지털 엔진제어 방식의 엔진 등 최첨단 전자산업의 집약체로 고등훈련기 중 세계 정상급 성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T-50 개발로 한국은 자체 개발한 고유 모델의 초음속 항공기를 보유하는 12번째 항공선진국이 됐다. 공군과 KAI는 지난 1997년 10월 개발사업에 착수한 이래 5년 만인 작년 10월 개발을 완료하고 출고식을 가졌다. T-50은 길이 13.14m, 폭 9.45m, 높이 4.91m, 최대 이륙중량 1만3454kg, 실용상승고도 1만4783m이다. /조선
1991 - 중동 평화회담, 마드리드서 개막
1990 - 영국-프랑스간 해저터널 관통 나폴레옹 이래 정치가와 기술자들의 꿈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 해저터널 `채널 터널`이 1990년 10월 30일 맞뚫렸다. 착공 3년 만이었다. 도버 바로 옆 포크스톤에서 출발한 영국 토목 기술자들과 칼레를 떠나 바다 밑을 파 온 프랑스 기술자는 양국 국기를 흔들며 반갑게 만났다. 실제 승객이 오가는 철도 개통은 4년 후 (1994년 5월 6일) 이뤄졌지만, 유럽 대륙과 48㎞ 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나왔던 유럽의 변방 섬 나라 영국이 대륙에 문자 그대로 `연륙`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꿈 꾼지 2백년. 스스로 20세기의 나폴레옹을 자임했던 미테랑 치하에서 영불 해저 터널 건설은 현실로 이뤄졌다. 유럽통합이라는 정치적-사회적-역사적 대명제도 200년간의 꿈을 현실화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가지 차이라면, 순수한 민간 투자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 150억 달러가 투자된 20세기 최대 민간 토목 공사였고 정치적 투자이기도 했다. 해저 터널은 여객 전용 열차용과 자동차를 싣고 달릴 열차용 2가지로 설계됐다. 평균 깊이는 해저 44.4m, 총 거리 48㎞. 7년에 걸친 공사에는 모두 1만5000명이 투입됐다. 여객 전용 열차는 `유로 스타`, 자동차용은 `르 셔틀`로 명명 됐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가 투자한 유로 스타는 프랑스의 고속열차 TGV와 영국 벨기에의 열차 선로 관리 기술의 총화였다. /조선
[어제의 오늘]1990년 영국~프랑스 ‘해저터널’ 관통 ㆍ유럽통합·국제협력의 ‘표본’ 영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섬’이 아니다. 1990년 10월30일 영불해협 아래로 해저터널이 관통된 후 영국은 육로로 연결된 유럽 대륙의 일부가 됐다. 거대한 굴착기가 각각 영국의 포크스턴과 프랑스의 칼레를 출발한 지 3년여 만의 일이다. 약 150억달러(약 18조원)가 소요된 ‘유로터널’의 총 길이는 50.45㎞이며, 그중 바다밑 해저 구간은 38㎞에 이른다. 뱃길로 2시간 이상 소요되던 구간이 35분으로 단축됐고 고속철 ‘유로스타’는 3시간 만에 런던과 파리를 잇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저터널 건설 계획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즉위하기 2년 전인 1802년 프랑스 광산기술자 알베르 파비에르(Albert Mathieu Favier)는 두 나라 사이에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해저터널을 제안한다. 가스등으로 불을 밝히고 바다위까지 굴뚝을 뽑아 환기문제를 해결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이론상 가능한 설계일 뿐 당시 기술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정진호 기자 hotmail@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0-29 21:33:2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0292133225&code=100100&s_code=ap005
1981 - 제1회 항공의 날 기념 항공의 날 제정 항공운송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1981년 8월에 교통부 성기룡 항공국장은 관련과장과 김재환 항공대학장, 고충삼 대한항공 기획실장, 대한항공 대표 등과 "항공의 날 제정 심의위원회"를 개최하여 그 타당성과 기념일자 등을 토의한 결과 대한국민항공사가 서울-부산간을 첫 취항한 10월 30일로 정하고 윤자중 교통부장관의 결재를 받고 1981년 10월에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6615호)에 의하여 국무회의(의안번호 제1010호)안건 제1회 항공의 날 행사계획안을 상정하여 확정하였다. 가. 기념식 1) 일시 : 1981.10.30.10:00 2) 장소 :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나. 포상 : 총무처와 별도 협의 다. 기타계획 1) 항공기 기념탑승회 개최 2) 항공의 노래 제정 보급 3) 기념우표 발행 http://www.airportal.co.kr/life/history/unh/LfUnhMi005.html
1979 - 마셜제도공화국(Marshall Islands) 정부 수립 마셜제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1년부터 일본의 위임통치령하에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부터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의 태평양 신탁통치령이 되어 미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1965년부터 마셜제도를 포함한 미크로네시아 일대에 자치와 독립에 관한 주장이 대두되었고, 그해 미크로네시아 의회가 탄생했다. 1967년 미크로네시아 내에 있는 여러 섬들의 정치적 미래를 논의할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77년 미국의 신탁통치를 끝내겠다고 선언하였으며 1978년 마셜은 미크로네시아연맹에서 탈퇴하였다. 1979년 헌법을 제정하여 자치정부를 발족하고 다음해에 아마타 카부아(Amata Kabua)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마셜제도공화국은 미국과의 자유연합협정의 조인으로 미크로네시아 내 다른 나라들과 함께 1982년 독립하였다. 하지만 내정과 외교는 독자적으로 수행하나 안보문제는 미국에 위임하였다. 1983년 국민투표에 의해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이 협정은 1986년부터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였다. 한편 마셜제도에 미군기지를 허용하는 대가로 2001년까지 15년 동안 매년 3000만 달러를 원조받았다. 1991년 UN에 가입하였고 초대 대통령인 아마타 카부아가 1980년 이래 5회 연속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1996년 아마타 카부아가 사망한 후 1997년 아부타 카부이의 사촌인 이마타 카부아(Imata Kabua)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99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야당인 케사이 노트(Kessai Note)가 승리하여 다음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naver
- World Heavyweight Boxing Championship match between George Foreman and Muhamad Ali, Kinshasa, Oct. 30 (postponed from Sept. 25)
1974 -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에 KO승 오늘의 역사 (10월 30일)[1974년] 1974년 10월 30일 아프리카자이레 수도 킨샤사에서 열린 프로복싱 세계헤비급 타이틀매치.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32)는 8회 종반 챔피언 조지 포먼(26)의 턱에 날카로운 원투 스트레이트를 터트렸다. 휘청거리던 포먼은 알리의 오른손 피니시 블로를 맞고 그대로 매트에 쓰러졌다. 알리의 KO승이었다. 1964년 2월 25일, 22세의 나이로 세계 챔피언 소니 리스턴을 7회 KO로 쓰러뜨리면서 등장한 새 챔피언 알리는 당시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이었다. 다음날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로 바꾼 알리는 한순간에 '권투 영웅'에서 '흑인 이교도'로 비난 받으며 백인들의 편견과 싸워야했다. 9차례의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1967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징병소집을 거부한 알리는 유죄를 선고받고,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했다. 반전 분위기와 흥행카드를 원하는 복싱계의 바램 속에 복귀한 알리는 1970년 10월에 성공적으로 복귀전을 치뤘지만, 1971년 3월 8일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에게 도전해 판정패했다. 벌써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후 알리는 포먼에게 챔피언 자리를 빼앗긴 프레이저를 상대로 리턴매치에서 판정승하면서 1974년 포먼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1102_0001
[어제의 오늘]1974년 알리·포먼의 권투 헤비급 타이틀전 ㆍ전설의 복서, 세계 최강 주먹 재확인 1974년 오늘, 아프리카 자이레(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세계 권투 역사상 길이 남을 명승부가 펼쳐졌다.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WBC·WBA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291744345
1973 -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지정 역사적인 인물의 초상화 중에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것이 많다. 눈동자가 닮지 않았다느니 입이 잘못 그려졌다느니 하는 평가 때문에 크고 작은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도 당초에는 청전(靑田) 이상범이 1960년대에 그렸으나, 복장과 투구 등의 고증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이당 김은호가 다시 그렸다. 그런데 그마저 얼굴이 지나치게 곱고 여성스럽다는 지적이 제기돼 월전(月田) 장우성이 다시 그렸다. 월전의 충무공 초상화는 2~3회의 수정을 거친 끝에 1973년 10월 30일에 충무공 표준영정으로 지정 공표됐다. 그전에 그려진 이당의 충무공 초상은 현재 한산도 영정각에 있다고 전해진다. /김정(화가) 신동아 2006.10.01 통권 565 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影幀) 최초의 영정은 1932년 일제치하에서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화백이 그려 현충사에 모셨으나 퇴색되어 위엄이 덜하였으므로 기념사업회에서는 한 때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화백이 그린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다. 현재 현충사의 영정은 서애(西厓)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타난 고증에 입각 하여 1953년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3년 10월 30일 선현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묘사된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현충사 외에도 충무공의 영정과 동상은 국내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다. 크기 : 세로 193cm, 가로 113cm /현충사
1970 - 중국 출신의 체스 대가 셰 준[謝軍, Xie Jun] 출생 셰 준 [謝軍, Xie Jun, 1970.10.30~ ] Xie Jun (simplified Chinese: 谢军; traditional Chinese: 謝軍; pinyin: Xiè Jūn; born October 30, 1970, Baoding, Hebei) is a chess grandmaster from China. She had two reigns as Women's World Chess Champion, from 1991 to 1996 and again from 1999 to 2001. Xie is only the second woman to have two reigns, the other being Elisabeth Bykova. In 1991, Xie became China's second Grandmaster, after Ye Rongguang. Xie Jun is married to her former coach GM Wu Shaobin. Career http://en.wikipedia.org/wiki/Xie_Jun
1966 - 아베베,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 17분 04초로 우승. 1위로 골인한 마지막 레이스 맨발의 황제, 동아마라톤 뛰었다 아베베, 1966년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서 우승 “한국에 두 번째 온다. 6.25전쟁 때 1년 동안 에티오피아대대 대대장경호병(상등병)으로 참전했었다. 마침 이번대회가 9.28수복을 기념하는 대회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더욱 감회가 깊다. 이번대회는 신발을 신고 뛸 것이다. 2년 뒤에 있을 멕시코올림픽에서 반드시 우승, 올림픽 3회 연속 제패를 하고 싶다. 그 뒤엔 후배들을 위해 은퇴한 뒤 코치생활을 할 것이다. 고지대인 멕시코올림픽에선 어렵겠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2시간5분대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966년 10월26일 ‘맨발의 마라토너’ 비킬라 아베베(1932~1973)가 서울에 왔다. 코밑수염에 깡마른 체격(174cm 58kg). 흰 와이셔츠에 붉은 줄무늬 넥타이 차림. 녹두색 스웨터에 쥐색 싱글을 받쳐 입었다. 서른넷의 중년나이. 그는 시종 무뚝뚝했다. 그러나 자신감이 철철 넘쳤다. 그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9.28수복기념국제마라톤대회에 초청선수로 참가했다. 호주의 크라크, 미국의 히킨스, 일본의 2시간15분대 두 선수(寺澤, 君原) 등 또 다른 초청선수들도 만만치 않았다. 10월28일 아베베는 코스답사를 하면서 20km를 1시간5분에 달렸다. 컨디션은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차부담이 있는 듯 몸이 무거웠다. 레이스는 10월30일 낮 12시에 펼쳐졌다. 날씨는 약간 더웠다. 섭씨 16도에 습도 75%, 초속 1~1.5m의 남서풍. 인천 올림포스호텔 앞을 출발해 서울을 향해 국도를 따라 달렸다. 레이스는 싱겁게 끝났다. 일본선수들과 선두권을 형성하며 달리던 아베베는 15km지점에서 치고나갔다. 일본선수들은 필사적으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20km지점부터는 아베베의 완전독주였다. 2시간17분4초 우승. 2위 일본선수(寺澤,2시간19분35초)와는 2분31초 차. 4위 한국의 김봉래(2시간24분57초)보다는 무려 7분53초나 빨랐다. 아베베는 “항상 우승했기 때문에 우승에 대한 소감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목표가 11분대 돌파였으나 25km지점에서 왼쪽발목을 삔 데다 발에 물집까지 생겨 한때 레이스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고 덧붙였다. 공교롭게도 아베베의 공식대회 우승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그 대회가 마지막이었다. 그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마라톤 레이스 도중(17km지점) 다리가 부러져 포기했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달릴 수 없었다. 아베베는 1956년 에티오피아 전국군인마라톤에서 첫 출전 우승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스물넷의 씩씩한 군인. 그는 원래 소치는 목동이었다. 해발 3000m 고지대 초원에서 소를 몰면서 자연스럽게 심장과 다리근육을 키웠던 것이다. 그는 생애 15번 공식대회에 참가해 12번 우승(2번 기권)했다. 63년 보스턴마라톤 5위가 유일하게 우승하지 못한 대회였다. 전성기인 64년(3회), 65년(1회), 66년(2회)엔 참가만 하면 모두 우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66년 10월30일 동아일보주최 9.28수복기념국제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뒤 내리막세가 뚜렷했다. 67년 참가대회에서 사상 첫 기권을 하더니, 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도 도중에 레이스를 접었다. 아베베 신화는 누가 뭐래도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탄생했다. 그는 맨발로 달려 우승했다. 결승선을 끊고도 “아직 20km는 더 달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는 그때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단 2번밖에 완주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2시간15분17초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면서 아프리카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더구나 이탈리아는 그의 조국 에티오피아를 빼앗았던 나라였다. 1935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침공해 1941년까지 6년 동안 무단 점령했던 것이다. 세계 언론은 그의 로마올림픽 우승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탈리아군이 필요했지만, 로마를 점령하는 데는 단 한명의 에티오피아군(아베베는 당시 하사관신분)으로 가능했다.” 아베베도 “나는 다만 달릴 뿐이다. 나는 내 조국 에티오피아가 항상 단호하고 영웅적으로 시련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며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침공 사실을 떠올렸다. 아베베는 왜 맨발로 달렸을까. 당시 에티오피아올림픽대표팀 후원사는 독일의 아디다스였다. 당연히 선수들에게 신발이 지급됐다. 아베베는 선수단에 막판에 합류했다. 신발여분은 있었지만 발에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맨발로 뛰는 게 나았다. 마침 아베베는 연습 때 거의 맨발로 달렸던 참이었다. 아베베가 로마올림픽에서 돌아오는 날, 에티오피아 하일레셀라시에 황제는 40여리를 마중 나와 그를 맞았다. “축하하오. 당신은 황제인 나보다 열배 백배 우리 에티오피아 이름을 만방에 떨쳤소! 장하오!” 황제는 왕관을 벗어 아베베 머리 위에 씌워줬다. 아베베신화는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도 계속됐다. 누구도 그의 우승을 예상하지 못했다. 올림픽 5주일 전에 맹장수술을 하는 바람에 그는 우승후보에서 일찌감치 밀려나 있었다. 9월16일 맹장수술을 받았고 9월27일 훈련을 재개했다. 그리고 10월21일 우승했다. 이번엔 맨발이 아닌 아식스 신발을 신고 달렸다. 2시간12분12초 세계최고기록. 올림픽 2회 연속 우승이자 2회 연속 세계최고기록 올림픽우승이었다. 하지만 시상대에서 에티오피아국기는 올라갔지만 국가는 일본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도쿄올림픽조직위가 “에티오피아국가를 모른다”며 개최국인 일본 국가를 연주한 것이다.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었다. “적은 67명의 다른 선수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그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나는 남들과 경쟁하여 이긴다는 생각보다 내 고통을 이긴다는 생각으로 달린다. 고통과 괴로움에 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렸을 때 승리가 찾아왔다.” 69년 2월 아베베가 쓰러졌다. 훈련을 마친 뒤, 황제가 하사한 폭스바겐을 몰고 가다가 빗길에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목이 부러지고 척추가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다. 하지만 아베베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1970년 노르웨이 25km 휠체어 눈썰매크로스컨트리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10km레이스에선 특별상도 받았다. 장애인올림픽 양궁과 탁구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내 다리로는 더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겐 두 팔이 있다.”며 의지를 불 태웠다. 아베베는 1973년 41세 나이에 뇌종양으로 숨졌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성 요셉 공동묘지에 묻혔다. 무덤 좌우엔 그의 올림픽우승골인장면을 묘사한 두 개의 동상이 서 있다. 한쪽은 로마올림픽 때의 맨발의 아베베, 또 다른 쪽은 운동화를 신고 결승선에 들어오는 도쿄올림픽 골인장면. 짧지만 굵직한 삶. 그의 무덤 안내문엔 ‘영웅, 여기에 묻혀있다’고 적혀있다. 그렇다. 그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영웅이었고, 아프리카사람들의 영웅이었고, 전 인류의 영웅이었다. 진정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다. 김화성 동아일보 전문기자 /동마지기 2010-09-08 http://blog.donga.com/rundonga/archives/364
1962 -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Ben-Zvi, Itzhak) 재선 우크라이나 폴타바 출생. 1905년 B.보르쇼프와 함께 시오니즘 사회주의결사인 ‘포알레 지온(Poale Zion)’을 조직, 1907년 팔레스타인에 이주하여 최초로 헤브라이어(語)로 사회주의지(社會主義誌)를 간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에 건너가 D.벤구리온과 함께 유대인 의용병을 모집하였고, 1920년 노동총동맹의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노동당 창립에도 참여하여 1931년 의장, 1944년 총재가 되었다. 1952∼1963년 C.바이츠만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naver
- 한국-호주 수교 50주년 (2011.10.28. 발행)
1961 - 한국-오스트레일리아 외교관계 수립 한국은 1953년 3월 주(駐)시드니 대한민국총영사관을 개설하고, 1961년 10월 30일 오스트레일리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1962년 1월 23일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주한 호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1966년 2월 대사관이 시드니에서 수도 캔버라로 이전하였으며, 1970년 6월 주시드니 총영사관을 재개설하였다.
1961 - 소련 제22차 공산당대회, 레닌묘에서 스탈린 유골 추방 결의 1930년대에는 망명 중의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1937) 등으로 스탈린의 지도와 그 정책을 비판하였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사후 베리야가 추방되자 당내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1956년 2월의 제20차 공산당대희에서는 미코얀이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였다. 특히 제1서기 흐루시초프는 비밀보고로 알려져 있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하였다.
1960 -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Maradona, Diego) 출생 마라도나 [Maradona, Diego Armando, 1960.10.30~ ]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Diego Armando Maradona, 1960년10월 30일~) 는 전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이다. 여러 논란거리가 있었지만 펠레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보카 주니어스의 중심 선수였으며, 은퇴 후에도 라 봄보네라을 자주 찾는 열렬한 보카 팬이다.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도 선정되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두 차례 짧은 감독 경력을 보낸 마라도나는 2008년10월 28일,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위키백과 선수 경력 디에고 마라도나는 역사상 펠레와 함께 역대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이다. 마라도나는 80년대가장 위대한 축구선수였다.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브라질의 지코,서독의 루메니게같은 수많은 스타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선수였다. 더불어 마라도는 60년대 펠레와 70년대의 요한 크라위프,베켄바우어,50년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준하거나 혹은 능가하는평가를 받고있으며 그에 합당한 완벽한 재능을 지닌 위대한 선수였다. /위키백과
1956 - 스페인의 소설가 피오 바로하(Baroja, Pio) 사망 바로하 [Baroja (y Nessi), Pio, 1872.12.28~1956.10.30]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가. 당시 스페인의 가장 으뜸가는 소설가로 평가된다. 의학학위를 받은 뒤 스페인 북부의 한 마을에서 한동안 의사로 일하다가 마드리드로 돌아와 가업인 제과점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98세대'의 일원으로 스페인인의 삶을 침해하는 일에 반기를 들었다. 처음으로 출간한 단편집 〈그늘진 인생들 Vidas sombrias〉(1900)과 장편소설 〈아이스고리가(家) La casa de Aizgorri〉(1900)는 이후의 작품들이 취하게 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민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당시의 사회문제를 다룬 3부작 11편을 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 〈삶을 위한 투쟁 La lucha por la vida〉(1904)은 마드리드 빈민가의 빈곤과 비참함을 그리고 있다. 확고한 반항자이자 비순응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는 사람들, 즉 떠돌이나 민중을 자세하게 묘사했는데 〈학문의 나무 El arbol de la ciencia〉(1911)는 바로 그러한 내용의 자서전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100여 편의 소설 중에서 최고의 야심작인 〈어느 행동인의 비망록 Memorias de un hombre de accion〉(1913~28)은 19세기의 한 폭도와 당시의 시대상을 다루고 있는 연작소설로서, 14편의 장편소설과 8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가장 훌륭한 소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모험가 살라카인 Zalacain el aventurero〉(1909)은 지리멸렬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반영하여 의도적으로 비약이 많은 문체로 씌어 있다. 반(反)그리스도교적 관점과 비순응적인 확고한 주장, 다소 비관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그의 소설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극히 절제된 언어로 표현된 간결하고 꾸밈없는 문체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1956 - 러시아의 안과의사 블라디미르 필라토프(Filatov, Vladimir) 사망 필라토프 [Filatov, Vladimir Petrovich, 1875.2.15~1956.10.30] Vladimir Petrovich Filatov (Russian: Владимир Филaтoв, 15 [O.S. 27] February 1875, Saransk, Russian Empire - 30 October 1956, Odessa, Ukrainian SSR) was a Russian ophthalmologist and surgeon best known for his development of tissue therapy. He introduced the tube flap grafting method, corneal transplantation and preservation of grafts from cadaver eyes. He founded The Filatov Institute of Eye Diseases & Tissue Therapy in Odessa, Ukraine. Filatov is also credited for restoring Vasily Zaytsev's sight when he suffered an injury to his eyes from a mortar attack during Battle of Stalingrad. First corneal transplantation was attempted by Filatov at 28 February, 1912, but the graft grew opaque. After numerous attempts over the course of many years, Filatov achieved a successful transplantation of cornea from a diseased person on 6 of May, 1931. http://en.wikipedia.org/wiki/Vladimir_Filatov
1938 - 미국, "화성인 습격했다" 대소동 오늘의 역사 (10월 30일)[1938년] 1938년 10월 30일 밤8시. 미국 CBS 라디오가 ‘화성인의 습격’이라는 라디오 드라마를 방송할 때였다. 드라마는 23세의 오손 웰스가 ‘우주 전쟁’이라는 소설을 할로윈용(用)으로 제작한 가상 드라마였다. 그런데 방송 도중 갑자기 ‘임시 뉴스’가 흘러나왔다. 필립스 기자로 분(扮)한 오손 웰스가 뉴저지의 한 농장에서 “화성군(軍)의 습격으로 미국 곳곳이 파괴되고 혼란에 빠졌다”고 전하는 가상 실황중계였다. 뉴스를 들은 미국인들은 방송 중에 “오손 웰스의 드라마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라고 했던 성우의 목소리도 잊은 채 이를 현실로 착각, 공포에 빠져들었다. 뉴욕에서는 수천명의 시민이 피난하고 뉴저지주에서는 “유독가스가 퍼졌다”며 20여 가구가 탈출을 시도했으며, 전투 준비에 나서는 사람들도 나오는 등 미 전역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매스미디어 해프닝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곧 세계대전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막연한 공포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실제상황으로 착각하게 할만큼 뛰어났던 오손 웰스의 연출력이 크게 작용했다. 웰스는 이 드라마로 재능을 인정받아 ‘신동’으로 불렸고, 1941년에는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격찬받고 있는 ‘시민 케인’을 연출ㆍ연기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404_0004
[오늘의 경제소사/ 10월 30일] <1537> 화성인의 습격 1938년 10월30일 밤8시, 미국 CBS라디오에서 이런 전파가 흘러나왔다.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긴급 뉴스를 전해드립니다.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했습니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0/29 17:53:28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0/e2009102917533897490.htm
1929년 10월 30일 오후5시30분쯤, 전남 나주역 개찰구 밖이 소란했다.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해 여학생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에게 따졌으나 사과는 커녕 오히려 ‘조센징’이라며 놀림을 받았다. 순간 박준채의 주먹이 일본인 학생의 얼굴로 날아들었고, 이내 양국 학생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일본인 순사는 사건의 경위도 묻지않은 채 박준채의 따귀를 때리고 욕설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두둔했다. 이날은 일단 이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며칠동안 광주 시내 분위기는 살벌해졌고 11월 3일에는 마침내 억눌렸던 민족감정까지 폭발했다. 광주 전역의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로 진출한 것이다. 하룻동안 4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됐으나 이날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 5만4000명이 시위에 참가, 퇴학 582명ㆍ무기정학 2330명ㆍ검거 1462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3ㆍ1운동 후 국내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조선
1928 - 미국의 미생물학자 대니얼 네이선스(Nathans, Daniel) 출생 네이선스 [Nathans, Daniel, 1928.10.30~1999.11.16] 미국의 미생물학자. 1954년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국립암연구소, 록펠러대학을 거쳐 1967년 존즈 홉킨스대학 교수가 되었고, 1972년 동 대학 미생물학 부장에 취임하였다. 유전자를 분해하는 제한효소(制限酵素)를 대장균에서 발견하고 또한 그것의 분리에 성공한 후, 각종 제한효소를 사용하여 원숭이의 종양바이러스 유전자를 절단하여 그 구조를 설명하였다. 이 방법이 유전학 연구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1978년 W.아르버, H.O.스미스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925 - 존 로지 베어드, 텔레비전 개발 [이 주일의 역사] 베어드, 텔레비전 개발 대중이 볼 수 있는 실용적인 텔레비전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존 로지 베어드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 발명가는 어린시절 잡지에 실린 글을 읽고 전화기를 만들 정도로 손기술이 남달랐다. 그는 뛰어난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당대의 이론과 원리를 접목해 실제로 작동하는 텔레비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9-10-26 [10:11:00]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091026000040
1922 -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당수 베니토 무솔리니 로마 입성 [책갈피 속의 오늘]1922년 무솔리니 로마입성 “우리에게 정권을 내주지 않으면 로마로 진군해서 얻어내겠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20&aid=0000267866
1910 - 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Dunant, Henri) 사망 뒤낭 [Dunant, Jean-Henri, 1828.5.8~1910.10.30] [책갈피 속의 오늘]1910년 앙리 뒤낭 사망 의욕이 얼마나 컸기에 전쟁터까지 찾아갔을까. 31세의 앙리 뒤낭이 1859년 6월 이탈리아 카스틸리오네 인근의 솔페리노를 찾은 것은 사업 확장 때문이었다. 스위스의 부유한 실업가이자 자산가였던 뒤낭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경제관념을 강조했다. 그들은 아들이 은행가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자 매우 만족해했다. 뒤낭은 스위스 은행 알제리 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좋은 사업기회를 발견하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솔페리노를 찾은 때가 알제리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71030/8505866/1
1908 - 소련의 군인, 정치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Ustinov, Dmitry) 출생 우스티노프 [Ustinov, Dmitry Fedorovich, 1908.10.30~1984.12.20] 사마라(옛 쿠이비셰프) 출생. 193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까지 연구소 기사 ·병기공장 관리인으로 근무하였다. 1941∼1946년 군수담당 인민위원, 1946∼1953년 군수장관, 1953∼1957년 국방산업장관, 1957∼1963년 부총리, 1963∼1965년 제1부총리 겸 최고국가경제회의 의장, 1965∼1976년 당 중앙위원회 서기 등을 역임하였고, 육군원수(元帥)로 승진, 1976년 정치국원 겸 국방장관이 되었는데, 미사일 무기행정의 권위자로도 알려졌다. /naver
1905 - 러시아 황제, 10월선언 발표 1905년 10월 30일(구력 10. 17)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0월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출범했다. 1905년 일련의 혁명적 사태에 위협을 느낀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군사독재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헌법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의 조언에 따라 10월선언이 공포되었다. 10월선언의 주요 내용은 시민권(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참정권 확대, 두마(의회)의 창설 등이었다. 두마는 인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는 대의원들로 구성되며 법령승인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10월선언으로 반정부 세력을 약화시키고 혁명을 진압할 수 있었으나 정부는 선언의 약속들을 잠정적·형식적으로만 이행했다. 10월선언에 따라 1906년 4월 23일 러시아의 헌법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될 기본법이 선포되었다. 기본법은 두마에 양원을 마련하고 그 중 하원만을 인민이 직접선거에 의해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두마는 예산에 대해서 제한적인 감독권을 행사할 뿐 행정부서에 대한 통제권은 없었다. 시민권과 참정권 역시 공약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브리태니커
1900 - 스웨덴의 생리학자 랑나르 그라니트(Granit, Ragnar) 출생 그라니트 [Granit, Ragnar Arthur, 1900.10.30~1991.3.12] 핀란드 태생 스웨덴의 생리학자. 눈이 빛에 노출될 때 일어나는 체내 전기변화에 대한 분석으로 1967년 조지 월드 및 홀던 하틀린과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1927년 헬싱키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찰스 스코트 셰링턴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1937년에 헬싱키대학 생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스웨덴 국적을 갖고 있던 그라니트는 1940년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캐롤린 연구소의 의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겼으며 1946년부터는 신경생리학부를 맡았다. 1945년부터는 노벨 연구소의 신경생리학 책임자로 있었으며 1956~76년까지 20년 동안 여러 연구소의 객원교수나 연구원으로 일했다. 시신경섬유 하나하나의 활동전위를 측정하여 망막에 있는 각각 서로 다른 색깔의 빛을 감지하는 3종류의 원추세포뿐만 아니라 시신경섬유도 색깔을 감지할 수 있음을 밝혔고, 일부 신경섬유(지배자)는 모든 색깔의 빛을 감지하는 반면 다른 시신경섬유(조절자)는 특별한 색깔만 감지한다고 하는 '지배자-조절자'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또 빛이 시신경의 전기적 충격을 증가시키지만 때로는 억제하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하였으며, 그가 쓴 〈망막의 감각작용 Sensory Mechanisms of the Retina〉(1947)은 망막의 전기생리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이다. 그뒤 그라니트는 근육운동 조절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특히 근방추(筋紡錘)라는 감각기관과 힘줄의 역할을 연구했으며, 이와 같은 수용기가 근육운동을 조절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신경의 경로와 과정을 밝히는 데도 기여했다. /브리태니커
1885 - 미국의 시인, 비평가 에즈라 파운드(Pound, Ezra) 출생 파운드 [Pound, Ezra Loomis, 1885.10.30~1972.11.1] 미국의 시인. 아이다호주(州) 출생.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909년 영국으로 건너가, 언제나 이미지즘과 그 밖의 신문학 운동의 중심이 되어 T.S.엘리엇과 J.조이스를 세상에 소개하였다. 상징파(象徵派)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싫어하여, 언어를 조각과 같이 구상적(具象的)으로 구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집에는 《가면(假面) Personae》(1909) 《휴 셀윈 모벌리 Hugh Selwyn Mauberley》(1920) 《캔토스 The Cantos》(1925∼1959) 등이 있다. 특히 《캔토스》는 엘리엇의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1922)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동시에 구사한 신화적 방법으로 장편시(長篇詩)를 시도한 것이다. 그 연작(連作)의 하나인 《피산 캔토스 Pisan Cantos》(1948)에 의해서 보링겐상을 받았다. 또 번역가로서는 이탈리아의 카바르칸티, 로마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 이외에도 E.F.페놀로사의 번역을 토대로 한 이백(李白)의 영역(英譯) 《The Ta Hio》(1928) 등 다방면에 걸쳐 우수한 번역을 남겼다. 동서 문학에 관한 깊은 조예는 《문학안내》(1931) 《문화로의 길잡이》(1938)에 응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미활동의 혐의로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연금되었으나, 시인들의 운동으로 1960년 석방되어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네이버
1873 - 멕시코의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Madero, Francisco) 출생 마데로 [Madero, Francisco Indalécio, 1873.10.30~1913.2.22] 마데로는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반대한 멕시코의 혁명가이다. 혁명의 성공으로 1911년 대통령이 되었으나 보수파와 혁명파, 양쪽 모두로부터 반발을 사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마데로는 키가 작고 왜소하며 안색이 창백한 편으로 그리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절대 금주주의자, 유심론자였다. 독재자 디아스가 언론에서 발표한 약속을 어기고 1910년 선거에 재출마하려 하자, 마데로는 '재선반대당'을 결성해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반란 선동과 당국을 모독한 죄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혁명군을 결집했다. 혁명군이 1911년 5월 10일 시우다드후아레스를 점령하자 디아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11년 10월 대통령선거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11월 6일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미숙한 정치력과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가 장애가 되어 실패로 끝났다. 심복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에게 배신당해 체포된 마데로는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병에게 암살당했다. 마데로의 죽음은 군부독재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혁명적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멕시코 혁명의 민주주의 세력들은 그의 순국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마데로는 혁명을 창조하지 않았다. 멕시코 혁명은 이미 그 토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계획이 있었거나 없었거나 분출했을 것이다."
- 스탠리 로스, <프란시스코 마데로, 멕시코 민주주의의 선구자>에서
1871 - 프랑스의 시인, 비평가, 사상가 폴 발레리(Valéry, Paul) 출생 발레리 [Valéry, Paul, 1871.10.30~1945.7.20] [오늘의 책<10월 30일>]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 / 민음사 1871년 10월 30일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정점에 올려놓은 시인이자 20세기 최대의 산문가로 꼽히는 폴 발레리가 태어났다. 1945년 74세로 몰. 가장 잘 알려진 발레리의 시는 <해변의 묘지>다. 남불 항구도시의 수부(水夫)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지중해는 언제나 정신의 고향이었다. 죽어서 그는 고향 해변의 묘지에 묻혔다. '바람이 인다! …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김현(1942~1990)은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연 첫 구를 '바람이 인다! … 살려고 애써야 한다!'로 번역했지만, 개인적으로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는 번역이 우리말로는 더 매력있게 느껴진다. 20세기말 한국의 한 시인은 이 구절을 이렇게 변주하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남진우의 시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에서). "언어의 한쪽 끝에는 음악이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대수학이 있다." 시에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한 순수시를 지향했던 발레리의 엄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발레리에 감동한 릴케가 발레리의 평생의 지기였던 앙드레 지드에게 보낸 편지에 쓴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모든 작품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날 나는 발레리를 읽었다. 그리고 내 기다림이 끝이 난 줄 알았다"는 구절은 유명하다. 스콧 니어링이 인생의 경구로 삼았다는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도 발레리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한국일보 2007/10/29 17:17:50
1861 - 프랑스의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Bourdelle, Antoine) 출생 부르델 [Bourdelle, (Émile-)Antoine, 1861.10.30~1929.10.1] [오늘속으로(10월30일)] 부르델 1861년 10월30일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이 몽토방에서 태어났다. 1929년 몰(沒). 부르델은 오귀스트 로댕, 아리스티드 마욜과 함께 유럽 근대 조각의 세 거장으로 꼽힌다. 가구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미술학교에잠깐 다니다가 자퇴한 뒤 로댕의 조수로 15년 간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조각을 배웠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0-29 18:0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38&aid=0000204874
- 'Canal du Loing' - 'The Flooding of Port Marly'
시슬레 [Sisley, Alfred, 1839.10.30~1899.1.29] 프랑스에서 활약한 영국의 화가. 파리 출생. 모네, 피사로와 비견되는 대표적인 인상파화가로 평생을 프랑스에서 살아 국적은 영국이지만 프랑스 화가로 통한다. 한때 부친의 권유로 영국으로 건너가 상업에도 종사했지만, 그림을 좋아하여 1862년 파리에 있는 C.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거기서 C.모네, 르누아르 등과 친숙하게 지냈다. 1866년 살롱에 첫 입선하고, 1870년 보불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갔다. 이때부터 점차 초기의 G.쿠르베나 J.B.코로풍(風)의 작풍을 청산하고, 자연을 외광(外光) 아래서 포착하는 밝은 화풍을 확립하였으며, 1874년 이후는 인상파그룹전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인상파 중에서도 특출하게 순수한 풍경화가로서 일 드 프랑스지방(파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을 대상으로 물과 숲의 반짝임을 묘사한 많은 수작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밤나무숲의 오솔길》(1867) 《아르장튀유의 길》(1872) 《마를리항구의 만조》(1876) 《루브시엔, 겨울》(1874) 《홍수 속의 보트》(1876) 등이 있다. /naver
1786 - 캐나다의 작가 필립 오베르 드 가스페(Gaspe, Philippe Aubert de) 출생 가스페 [Gaspe, Philippe Aubert de, 1786.10.30~1871.1.29]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로 된 최초의 대표적 소설을 썼다. 퀘벡 명문가의 아들로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의 토지를 물려받았다. 퀘벡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보안관이 되었다. 파산 뒤 3년 이상을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가 40대에는 어쩔 수 없이 공직에서 물러나 독서와 명상으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19세기 중반 캐나다 민족주의 부활에 고무받아 나이 76세가 되던 해에 〈옛날의 캐나다인들 Les Anciens Canadiens〉(1863)을 썼다. 프랑스어 캐나다 소설의 고전이라 할 만한 이 책은 영국에 점령당한 시기(1760)의 캐나다를 배경으로 한 낭만적 역사소설이다. 그 책의 '좋았던 옛시절'에 대한 이상화, 흙을 소중히 하는 농부의 애정, 영국령 캐나다에 대한 불신은 1930년대까지 번성을 누린 캐나다 지방주의 문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 /브리태니커
1762 - 프랑스의 서정시인, 정치언론인 앙드레 드 셰니에(Chenier, Andre de) 출생 셰니에 [Chénier, André-Marie de, 1762.10.30~1794.7.25] 외교관의 아들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나바르학원을 졸업하고, 1787년 주영대사관 사설 비서로 런던에 체류하던 중에 1789년 프랑스혁명 소식을 듣고 파리로 돌아가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반대하다가 체포되어, 로베스피에르 실각 2일 전 32세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생전에는 2편의 시밖에 발표되지 않았으나, 유고 중에 많은 걸작이 발견되어, 1819년 라투시에 의해 불완전하나마 전집이 간행되었다.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옛시를 짓자”는 것이 모토였던 그의 시집이 발간되자, 낭만파와 고답파 시인들이 선구자라고 환영하였다. 대표작으로 인류의 진보를 주제로 한 철학시 《헤르메스신(神) Hermes》, 고대로부터 얻은 영감과 낭만적인 감성을 결합시킨 《목가 Bucoliques》, 지배자에 대한 증오, 학살의 공포, 혁명의 과격성을 비판한 옥중시 《풍자 시집 iambes》 등이 있다. /naver
- 'Portrait' - 'Ariadne Forsaken' - 'Self-portrait'
카우프만 [Kauffmann, (Maria Anna Catharina) Angelica, 1741.10.30~1807.11.5] 초기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화가로 J.J.빈켈만, J.W.괴테, J.G.헤르더, 요제프 2세, 바바리아의 황태자 루트비히 등의 지우를 얻은 재원이었다. 어려서부터 화가인 아버지 J.J.카우프만과 함께 각지를 편력하고, 1766년부터 15년간은 런던에 체류하여 영국 왕립미술원 창설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R.애덤의 건축에 장식벽화 등을 제작하였다. 1782년 이후는 로마에 정주하였다. 로코코풍의 섬세함과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합일한 개성 있는 작풍이 특색이며, 괴테와 빈켈만 등의 초상화도 그렸다. 대표작으로 《미란다와 페르디난트》(빈의 오스트리아미술관 소장)가 있다. /naver
1735 - 미국의 초대 부통령,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Adams, John) 출생 애덤스 [Adams, John, 1735.10.30~1826.7.4] [책갈피 속의 오늘]1735년 존 애덤스 美대통령 출생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는 2002년 로널드 레이건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장수였다는 것 외에는 대중의 관심에서 까맣게 잊혀진 지도자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20&aid=0000212054
1513 - 프랑스의 주교, 고전학자 자크 아미요(Amyot, Jacques) 출생 아미요 [Amyot, Jacques, 1513.10.30~1593.2.6]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수, 왕실의 교육책임자, 가톨릭 교회의 주교 등 다채로운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 작품의 가장 훌륭한 번역자로서 평생을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론고스(Longos)의 설화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e》와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논집 Oeuvres morales》 및 《영웅전》의 번역은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번역서들은 간결하고 우아한 문체로 말미암아 당대에 커다란 인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여러 세대에 걸쳐 프랑스 작가의 정신형성과 근대 프랑스 산문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의 명역은 영국에까지 알려져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영문번역은 아미요의 프랑스어역을 대본으로 삼아서 이루어졌으며, 셰익스피어는 로마를 무대로 삼은 희곡들의 체재를 여기에서 따오기도 하였다. /naver
1485 - 잉글랜드 헨리 7세 즉위 1485년 10월 30일 튜더 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1485~1509 재위)가 왕으로 즉위했다. 헨리 튜더는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마거릿 보퍼트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헨리 4세가 보퍼트가를 왕위계승의 가능성에서 제외시켰으므로 헨리의 왕위계승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계승 가능한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인해 헨리는 랭커스터가의 혈통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무찌른 후 왕위를 요구했고 그해 10월 30일 왕관을 쓸 수 있었다. 왕위를 계승한 헨리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랭커스터가와 요크가를 통합하고 장미전쟁을 종식시켰다. 헨리는 의회를 통하지 않는 수입원을 늘리고 재판업무를 효율화함으로써 지배권을 강화했다. 1500년 무렵에는 국왕의 통치권이 북부 여러 주와 웨일스까지 확장되었다. 1509년 사망한 헨리 7세는 안정된 왕위, 능력 있는 정부, 기름진 영토, 통합된 왕국을 아들에게 남겨줄 수 있었다. 헨리 7세로 시작된 튜더 왕가는 118년 동안 유지되다가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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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