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Vision) / 타락(Gefallen) / 행복을 향한 의지(Der Wille zum Glück) / 환멸(Enttäuschung) / 죽음(Der Tod) / 키 작은 프리데만 씨(Der kleine Herr Friedemann) / 어릿광대(Der Bajazzo) / 토비아스 민더니켈(Tobias Mindernickel) / 옷장(Der Kleiderschrank) / 응징(Gerächt) / 루이스헨(Luischen) / 공동묘지로 가는 길(Der Weg zum Friedhof) / 신의 칼(Gladius 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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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야기가 감동적이기는 해!"
라우베는 의자 흔들기를 멈추고 몸을 일으키며 흥분해서 대답했다.
"하지만 젤텐은 내 주장을 반박하려는 의도였어.
나는 그 반박이 성공 한 점이라곤 전혀 찾지 못했어.
이 이야기를 보더라도, 그 여자를 비난할 수 있는 도덕적 정당성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지…”
“아, 자네의 그 진부한 상투어들은 그만 두게!"
박사가 목소리에 설명하기 힘든 흥분기를 띠고 거칠게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아직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자넨 딱한 사람일세.
한 여자가 오늘은 사랑하기 때문에 넘어간다면, 내일은 돈 때문에 타락하지.
그걸 자네에게 이야기해주려 한 걸세.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자네가 그토록 외쳐댄 도덕적 정당성도 아마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걸!"
"그런데 말해 보게나" 갑자기 마이젠베르크가 물었다.
"그 이야기 실화 아냐?
대체 자네는 어떻게 이야기 전부를 그토록 세부적 사항까지 낱낱이 다 알고 있나?
그리고 자네가 그 이야기 때문에 대체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건가?!"
박사는 한순간 말이 없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그의 오른손을 거의 경련과도 같이 짧고 거칠게 홱 움직여, 자신이 여태껏 오랫동안 깊숙이 그 향기를 들이마시던 라일락 꽃 한가운데를 움켜잡는 것이었다.
"말이 났으니 할 수 없네만, 실은…" 그가 말했다.
“그 '선량한 녀석'이 바로 나였거든! 그렇지 않다면 이 이야기에 내가 대체 무슨 관심이 있겠나!”
사실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며, 침통하고도 서글픈 잔인함으로 라일락을 움켜잡는 그의 모습이며 모두 바로 그때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에게서 그 '선량한 녀석'의 흔적이라고는 더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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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날씨는 맑게 개어 있었다. 역으로 가는 동안 푸른빛 여름 하늘이 우리 위에서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별은 짧았다.
내가 그에게 행운을, 큰 행운을 빌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그가 넓은 창가에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깊은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승리감도.
더 말할 게 뭐가 있을까?
그는 죽었다.
신혼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아니 신혼 첫날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죽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죽음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의지, 오직 행복을 향한 그 의지가 아니었던가?
행복을 향한 자신의 의지가 충족되자, 그는 어떠한 투쟁도 저항도 할 수 없이 죽어야만 했다.
그에게는 살기 위한 구실이 더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과 결혼한 그녀에게 나쁘게, 의도적으로 나쁘게 처신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는 장례식에서 그녀가 그의 관 머리맡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그에게서 보았던 것과 꼭 같은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승리에 찬 엄숙하고도 강력한 진지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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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졌소. 게다가 선생은 내 이야기를 거의 귀담아 듣지도 않고 있소.
그 때문에 나는 오늘 다시 한 번 나 자신한테라도 고백하고 싶소
나도, 나 자신도 역시, 한때는 나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행복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인
간들과 함께 거짓말을 하려고 시도했소.
하지만 그런 허영심이 붕괴된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소.
지금의 나는 외롭고, 불행하고, 약간 기인처럼 되었소.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총총한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것이오.
이 지상과 인생에서 눈을 돌리는 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소?
그렇다면 내가 최소한 나의 예감들을 간직하려 마음을 쓰는 것이 어쩌면 용서받을 만한 일이 아니겠소?
환멸이라는 고통스런 찌꺼기를 맛보지 않고 내 위대한 예감 속에서 현실이 훤히 떠오르는 그런 해방된 인생을 꿈꾸는 것 말입니다.
수평선이란 것이 더는 없는 인생을 꿈꾸는 것 말입니다…
나는 그런 인생을 꿈꾸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소.
아, 그런데 나는 죽음도, 이 마지막 환멸도, 이미 너무 자세히 알고 있소.
'아, 이게 죽음인가?' 하고 내 인생 마지막 순간에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오.
'이제 내가 죽음을 체험하고 있구나!
그런데 이게 대체 왜 겨우 이것뿐인가?’
선생, 이제 광장이 추워졌네요.
이걸 느낄 능력은 내게 아직 있군, 허허!
자, 그럼,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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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로 둘러싸여 있어서 끝이 없어 보이는 잿빛 바다처럼, 나의 생각들이 내 앞에 펼쳐질 때면 자주 나는 사물의 연관 관계 같은 것을 보게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자살이 무언인가?
자발적인 죽음인가?
하지만 타의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의 포기와 죽음에의 귀의는 별 차이 없이 허약함에서 생긴다.
그리고 이 허약함은 항상 육체 또는 영혼, 혹은 그 둘 모두가 병든 결과이다.
인간은 그것에 동의 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나는 동의했는가? 나는 아마도 동의했을 것이다.
내가 10월 12일에 '죽지 않는다면', 난 미쳐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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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찾아오면 나는 죽음에 고마움을 전하려 한다.
그것이 너무 일찍 실현된 것이기에 내가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직 짧은 가을날 사흘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 순간, 그 최후의 순간에 대해 나는 얼마나 기대에 부풀어있는지!
그것은 황홀한 순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한 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최고의 쾌락을 맛보는 순간이지 않을까?
아직 짧은 가을날 사흘이 남아 있다.
그리고 죽음이 이곳 나의 방으로 들어설 것이다.
대체 죽음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나를 벌레처럼 취급할까? 나의 목을 잡아 조를까? 아니면 손으로 내 머리 속을 후빌까?
하지만 나는 죽음이 나에게는 위대하고 아름답고 야생적 위엄을 지닌 존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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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다 아시잖아요…날 그냥 두세요…더는 견 딜 수가 없어요…오 맙소사…오 맙소사…”
그녀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향해 낮게 몸을 굽혀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그로부터 몸을 약간 뒤로 뺀 채 앉아 있었다.
미간이 좁은 그녀의 작은 두 눈, 촉촉하고 희미한 강물을 반사하는 것 같은 그 두 눈은 멍하면서 긴장에 찬 표정으로 그의 머리 위를 지나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단번에, 짧고 당당하며 경멸에 찬 웃음 소리를 터뜨리며 그녀가 그의 뜨거운 손가락 사이에서 자신의 두 손을 홱 빼버렸고, 그의 팔을 움켜잡더니 그를 옆으로 끌어당겨 완전히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가로수 길로 사라져 가 버렸다.
그는 그렇게 내동댕이쳐진 채로 누워 있었다.
얼굴을 풀밭에 박고, 감각이 마비된 채 제 정신이 아니었으며, 매 순간 경련이 그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두 어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물가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내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렇게 일이 벌어진 상황에서?
그가 느낀 것은 어쩌면 저 관능적인 증오였을 것이다.
그녀가 예의 눈빛으로 그에게 굴욕감을 줄 때면 그가 느꼈던 그 증오 말이다.
그녀에게 개처럼 취급당한 뒤 땅바닥에 누워 있는 지금은 그 분노가 엄청난 분노로 바뀌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라도 분출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분노…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파괴하고, 자신을 산산조각 내버림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찬 그런 혐오감…
그는 엎드린 채로 몸을 조금 더 앞으로 밀다가, 윗몸을 일으켜 자신을 물속으로 떨어지도록 했다. 그는 다시는 머리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는 아직 강가에 놓여 있던 그의 두 다리조차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강물이 첨벙하는 소리에 귀뚜라미들이 잠시 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찌르르 우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고, 공원은 나지막하게 솨솨하는 소리를 내었으며, 억지로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그 긴 가로수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울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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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쓰기를 중단한다, 나는 펜을 내던져버린다.
혐오로 가득 찼다, 혐오로! - 끝장을 내자.
그러나 ‘어릿광대'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영웅적이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 계속해서 살고, 계속해서 먹고, 자고, 조금씩 일이나 하고 지내는 삶이 두렵다.
내가 '불행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고 익숙하게 될 것이 두렵다.
맙소사. '어릿광대'로 태어나는 것이 이처럼 치명적인 운명이며 불행인 줄 누가 생각했겠으며,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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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미친 듯 뛰는 모양새로 짐승을 덥석 잡았다.
번득이는 커다란 연장이 그의 손에서 번쩍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개의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 깊이까지 일격을 가하는 바람에 개는 바닥에 쓰러졌다. 개는 아무 소리도 내지도 못하고 그냥 옆으로 쓰러져, 피를 흘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다음 순간 개는 소파에 뉘게 되었고, 토비아스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수건으로 상처를 눌러주며 중얼거렸다.
"가엾은 내 강아지! 가엾기도 하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우리 둘 다 슬프기 그지없구나! 괴롭지? 그래 그 래, 난 알아. 네가 괴로울 거라는 걸.
네가 이토록 애처롭게 내 앞에 누워 있다니!
그러나 내가 네 곁에 있단다. 내가 너를 위로하고 있어! 내가 내 제일 좋은 손수건으로…”
하지만 에자우는 소파에 누워 숨을 가르랑거리고 있었다.
슬픔에 찬, 뭔가 묻는 듯한 그의 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아무런 죄도 없다는 표정과 원망으로 가득차서 주인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에자우는 두 다리를 조금 뻗더니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토비아스는 꼼짝 않고 그대로 꿇어앉아 있었다.
그는 에자우의 몸에 얼굴을 갖다 대고 몹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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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그는 매일 저녁마다 옷장에서 그녀를 발견했고,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많은 저녁이었을까?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을 그는 그 방에, 그리고 그 도시에 머물렀을까?
여기에 숫자가 답으로 나온들 그것은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대체 누가 그 초라한 숫자를 반기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알브레히트 판 데어 크발렌이 여러 의사들로부터 더 이상 여러 달을 인정받지 못했음 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안이 없이 슬픈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달콤한 짐이 가슴 위에 내려앉았고, 가슴을 더 천천히, 더 황홀하게 뛰게 했다.
그는 자주 자기 자신을 잊었다…
그의 내 면에서는 피가 끓어올랐고, 그는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었으며, 그녀는 그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여러 저녁에 걸쳐 옷 안에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여러 저녁 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 주지 않다가, 그가 또 다시 자기 자신을 잊게 되면 그녀는 서서히 다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일이 지속된 것인지…누가 그걸 알겠는가?
알브레히트 판 데어 크발렌이 예의 저 오후에 도대체 실제로 잠에서 깨어나기는 했는지, 그리고 그 미지의 도시로 가기는 했는지, 누가 그걸 분명히 알까?
오히려 그가 일등석 객실 안에서 잠을 자면서 남아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그가 베를린-로마 행 급행열차를 탄 채 엄청난 속도로 수 많은 산을 넘어 수송된 것은 아닌지?
우리들 중의 누가 감히 이 질문에 확실하게, 그리고 스스로 책임을 지면서 어떤 대답을 하겠다고 나서고 싶겠는가?
그것은 매우 불확실하다.
"모 든 것이 불확실한 채로 남아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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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좀 차리세요." 그녀가 말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요! 나는 당신의 약점을 알아요. 하지만 이건 당신답지 않은 짓이에요.
내가 싫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갖는 호감이 전적으로 정신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도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이해가 안 되세요?
이제 그만 가볼게요. 시간이 늦었네요."
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 정신도 되돌아왔다.
"그러니까 퇴짜네!?" 나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우정을 담아놓은 꽃바구니만큼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오.”
"천만에요, 그럴리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친구에게 하듯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는 그녀의 못생긴 입 언저리에 상당히 비웃는 것 같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 뒤 그녀는 갔다
나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내가 이 근사한 모험을 다시 한번 관능적으로 상상해 보는 동안 내 얼굴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결국 나는 한 손으로 내 앞이마를 쳤다. 그러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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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으로 밝은 홀은 모든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추문들이 발산되어 불륜 스캔들로 모아지는 분위기였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 모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그 얼굴들을 밝은 조명으로 인해 선명하게 보았다.
이들의 눈빛에서 그는, 모두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저 아래 피아노 치는 한 쌍의 남녀와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섬뜩한 정적만이 감도는 동안, 그는 점점 커져가는 두 눈으로 천천히, 그리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 남녀와 관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제는 알겠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치더니 피가 얼굴로 솟으면서 그가 입 은 붉은 비단옷 색깔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곧 바로 밀랍처럼 누렇게 시들어, 이내 그 뚱뚱한 남자는 무대 바닥에 쿵하고 쓰러졌다.
한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들리고 큰 소란이 벌어졌다.
용기 있는 몇몇 신사들과 한 젊은 의사가 관현악단석에서부터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고 무대의 막은 내려졌다.
암라 야코비와 알프레트 로이트너는 모르는 척 서로 딴 쪽을 보며 여전히 피아노에 앉아 있었다.
로이트너는 고개를 숙이고 바장조로 넘어가는 음에 아직도 귀를 기울이는 듯했고, 암라는 참새 대가리처럼 자신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재빨리 파악할 수 없었기에 완전히 얼빠진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곧바로 젊은 의사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홀에 다시 나타났다.
뾰족한 검은 수염을 기른 작은 키의 유대인 신사였다.
그는 문가에서 자신을 둘러싼 몇몇 신사들에게 어깨를 들먹이며 말했다.
“끝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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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갖고 웃으면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는 커다란 로지아 앞 모자이크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인 이 세상의 허영덩어리들, 즉 가장무도회의 의상들, 장식물들, 화병들, 장신구와 정물화들, 나체 조각상들과 여성의 흉상들, 그림같이 아름다운 이교도풍의 복제품들, 대가가 그린 유명한 미인들의 초상화들,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한 연애시들과 예술 선전문들이 그 자신의 무서운 설교를 듣고 감복하여 노예처럼 따르는 사람들의 환호 아래 탁탁 소리를 내며 불타 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테아티너 거리로부터 작은 천둥소리를 내며 다가온 노르스름한 구름층 쪽으로 널따란 불의 칼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유황빛 칼은 즐거운 도시의 상공에 뻗쳐 있었다…
"신의 칼이 땅 위로(Gladius Dei super terram)…”
그의 두꺼운 입술에서 나직이 새어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후드 달린 외투 속에서 몸을 더욱 꼿꼿하게 세우면서,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던 주먹을 남모르게 부르르 떨면서 중얼거렸다.
"신속하게 그리고 빠르게(Cito et veloc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