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여는 문
나무 안에 방들이 꽂혀 있다 나무 방을 품에 안았다
문은 여는 사람에 따라 가변적이다 어른이 인형집 같은 문에 들어 놀고 있다 열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바깥이 쌓여 안이 두꺼워지는 방이다
문 안에 들어가 누우면 넓어지는 벽 천장부터 늘어진 가지에 열매가 달려 있다 뒹굴며 놀다 익은 열매를 따 먹고 노트에 열매 맛을 적어놓고 모양을 따라 그린다
방에서 천년 된 숲 향이 난다 손과 입술에 향이 옮겨붙는다 옆 사람이 코를 만지며 묻는다 어느 방에 들어갔다 온 거야 무슨 열매를 먹은 거야
노트를 든 사람이 작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자물쇠가 보이지 자물쇠를 열고 들어오면 이중 자물쇠가 있고 열매방까지 들어오면 문안에 문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을 여는 건 여기까지
물망초를 가슴에 얹은 아가씨가 떠내려가는 삼백 년 된 방문을 연다
구룡령 서어나무
남의 손에 이끌려 산을 오르는 것은
갇힌 미움에 창문을 내는 일
철모 쓴 고집에 불을 켜는 일
혼잣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잘라내는 일
중턱까지 오르니 서어나무 잎이
좁쌀 막걸리색으로 물들고 있다
막걸리단지 안처럼 신음 부풀다가
문장으로 잇기 전 다리 풀려 주저앉았다
할머니의 할머니 같은 서어나무에 기대니
산에 산이 겹치며 눈시울 뜨겁다
이끼 앉은 나무주름에 손을 얹으니
하늘 가득 펼친 잎만큼이나 견디고 견뎌야
한평생이 지날 것이라고
서어나무 전언으로 잎 하나를 내린다
잠 못 드는 밤을 바람결에 펼쳐놓고
아름드리 둥치를 어루만졌다
용서하는 것이 잘못을 덮는 것이
마음 한도를 넘는 일이라
옷을 껴입어도 오한이 났다
비는 꼬리가 긴 새
긴 장마는 촘촘한 그물이다 비는 난데없이 기억을 물어오는 새다 회초리 비가 지난 기억을 치며 잇달아 내려온다
비 오는 수학 시간은 그물에 걸린 새의 몸부림을 푸는 날이었다 선생님이 기억의 바닥에서 퍼덕일 때 우리는 그 그물의 두께만 짐작했다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자대 배치받은 첫날 그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든 그날의 매를, 그날의 벌을 당해야 닫히는 나날이었어 비가 오면 몸이 시큰거려 견딜 수 없어 때려야 해
파스를 붙인 선생님이 교실 뒤에서 오락가락 뒤척일 때 우리는 앞만 보며 자습했다 우리 모두 수학을 수련했고, 한마음으로 빗줄기 한 줄 한 줄을 풀어보려 애썼다
비 그물을 뚫고 온 새가 서어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쳤다 긴꼬리딱새는 키워낸 새끼들을 데리고 장마 너머로 돌아갔다 아비 새가 떨군 긴 꽁지깃이 빗줄기에 걸려 있다
새탈*
밤이 꽉 차면 나간다 열어둔 문 사이로 숨소리 사이로 나간다 청소물고기처럼 편의점 앞 계단에 들러붙어서 찬바람을 태우고 가슴 가득 들이마신다 여드름 솟은 얼굴이 생생하게 펴진다 탈출기 물살에 오늘의 욕설들이 떠다닌다 찐득한 불만을 뱉어놓고 나면 매끈해지는 비늘 부글부글 이야기 속으로 몰려다닌다 동이 트는 계단에 서서 엉덩이를 털면 웃음 사이 스치던 지느러미가 사라졌다
숨 쉬려고, 숨이 다 같은 숨이야? 집이 핸드폰 깨진 날 같잖아, 그냥, 노래 듣고 가로수 새로 쳐다본 아파트가 목을 조르더라고 또 다른 나 같잖아 밤 안에서 밤을 느껴봤어? 내 밤을, 내가, 극세사 이불같이 둘둘 말고 있게 내가 가지게 내버려 두면 안 돼? 믿으면 땅이라도 꺼져? 소주에 컵라면 으흠 직접 먹어보든지, 뭐래, 자든 깨든 엄마나 지켜 왜 나를 지켜 편의점 계단에 앉아 보면 알잖아 자꾸 쫓아다니면 웃음소리 못 찾는 데로 가?
*새벽에 부모 몰래 집을 나가 친구들과 노는 일, 새벽 탈출의 줄임말.
염민숙_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과 졸업. 2015년 머니투데이 신춘문예. 2023년 인천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 시집 『시라시』 『오늘을 여는 건 여기까지』
첫댓글
인천문화재단 창작 기금을 받은 시집이라 시가 참 좋습니다.
공감도 되고 첫 시집 <<시라시>>와는 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시가 많아서 그동안의 내공이 깊이 느껴졌으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염민숙 시인님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카페지기님 좋은 시집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