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열왕 19,19-21
복 음 : 마태 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과 1학년 때, 라틴어를 배웁니다.
솔직히 너무 어려웠고, 死語(어느 나라에서도 쓰지 않는 죽은 언어)를 왜 배워야 하는가 했습니다.
더군다나 매주 쪽지 시험을 보니 라틴어에 대한 압박은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라틴어를 가르쳐 주시는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라틴어를 1년 동안 배운다고 해도 유창하게 말할 수 없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너희가 사전을 펴고
라틴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이다. 공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부는 배우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어떤 강의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혀 얻을 수 없었어도,
배우는 법만 익힐 수 있으면 훌륭한 강의가 됩니다.
주님의 교육 방법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또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어떻게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배우는 법을, 즉 세상에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과 달리 우리는 늘 새로운 것만을 외쳤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힘든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고, 자기가 잘못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없애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특별한 것만을,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한 것을 달라고 하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이 가장 훌륭한 스승을 둔 제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라는
율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또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우리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뛰어넘어,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일상 안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기는 것을 무조건 달라는 식의 잘못된 모습이 아닌,
또한 주님께 헛된 맹세를 하면서 조건만을 계속 외치는 위선적인 모습도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모범 이십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늘 기도 하기보다는 아쉬운 일이 생기면 간절히 매달립니다.
늘 주님을 대면하고 찬미하며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서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기도합니다.
이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약속을 마구 해댑니다.
청을 들어주시기만 하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무엇이든 꼭 하겠다고 흥정하고 맹세합니다.
때로는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도 합니다. 나의 뜻을 관철하려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맹세를 잊고 전혀 거리낌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을 잊기도 하고 어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섣불리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고 하시며,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든 군소리를 덧붙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접해서 이러저러한 핑계를 얼마나 많이 댑니까?
나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헛된 약속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니 쉽게 잊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 위신과 체면을 살리느라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할 때도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잇속 때문에 하느님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히브6,17-18).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기도 모르는 약속,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그러므로 악에는 언제나 ‘아니요’, 선에는 언제나 ‘예’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
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파도바의 안또니오).
행동으로 따르지 못할 과장된 약속이나 맹세를 거두고
그저 삶으로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네 번째 새로운 의로움으로,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거나,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에사오가 성급한 ‘맹세’로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넘긴 이야기(창세 25,33),
헤로데의 경솔한 ‘맹세’로 한갓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이 목숨을 잃은 이야기(마르 6,17-19),
베드로가 추궁을 벗어나기 위해 맹세까지 하면서 스승을 모른다고 배신한 이야기(마르 14,71) 등을 압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맹세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계약체결 때(신명 4,31;7,8), 약속 이행의 보장을 말씀하실 때(창세 22,16;26,3),
심판 예고 때(민수 14,21;아모 4,2;6,8),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실 때(에제 20,3;33,11)에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개는 “나는 살아있는 자로다”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명 6,13;10,20).
그리고 <레위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9,12).
한편, 사람들끼리는 ‘맹세’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약속이나 결심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의 심문에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그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하느님을 보증자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거짓 맹세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가면서, 하찮은 일까지도 하느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이기적인 거짓 맹세’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피조물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우상숭배의 결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맹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주인이 아니기에, 하느님이나 하느님 것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자일 뿐, 스스로가 부르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의 뜻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정직함’(솔직함, 질실)이 요청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성실한 실행에 그 진실성의 여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응답하고,
응답한 바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는 이에게는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힐라리우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말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창세 12,5)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
이리하여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 4,11-12).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음으로 ~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주님!
오늘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주인 행세하기를 멈추고, 당신 뜻에 응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응답이 행동으로 진실 되게 하소서!
제 말과 행동이 참되게 하시고, “예” 할 것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게 하소서.
제 자신이 진리인 양 내세우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제서품을 받으면 성사적으로 사제는 미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교구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야 합니다.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교구장님으로부터 ‘전국공용 교구사제 특별권한’을 받았습니다.
교회법 규정에 따라 교구장이 아닌 사제는 신자사목에 있어
교구장으로부터 위임 또는 허락을 받아야만 유효하고 합법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항들이 있는데
교구사제 특별권한이란 교구장이 특정 사항에 관한 자기의 직권 중 일부를
자기 소속사제들에게 관례적으로 위임하거나 허락할 수도 있는 권한입니다.
한국과 같은 1일 생활권에서는 비록 소속 교구가 다를지라도
해당 교구의 교구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지 않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2005년 캐나다 토론토에 연수 갔을 때입니다.
저는 토론토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Faculty)을 받았습니다.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에 저는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뉴욕 브루클린 교구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브루클린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 텍사스 댈러스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신청하지 않았지만 서울 대교구와 댈러스 교구의 협의에 따라서
댈러스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난 4월 26일에 저는 포트워스 교구에 속한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저는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먼저 포트워스 교구로부터 혼인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 할 수 있는 것은 사제 본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운전면허증도 비슷합니다.
저는 뉴욕의 운전면허증이 있지만 댈러스로 주소를 옮기면서 텍사스 운전면허증으로 바꾸었습니다.
텍사스州는 주소를 옮기면 반드시 운전면허증을 바꾸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잘못하면 눈을 뽑아 버리고, 손이 잘못하면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잘못하면 발을 잘라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은 행위로 인해서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위 이전에 생각과 마음만으로도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된다고 하십니다.
율법을 어기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서 강론자는 자신의 삶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한 찬미가 되지 못한다고 자주 느껴서
그토록 위대한 사랑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항)”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니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기 뜻을 먼저 찾으려는 것은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의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기를 기원합니다.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 맹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맹세 비슷한 용어가 있습니다. 공약입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어떤 사업이나 일에 대해 백성들 앞에 실행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유권자들은 ‘혹시나?’ 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당선이 되고 나면 ‘역시나!’하고 실망합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촛대, 금속판, 금화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간에 오고 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돌아보니 지키지도 못할 실없는 약속들을 참 많이 남발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습관처럼 빈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실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조만간 전화 한번 할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맹세합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주님,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선심 공약, 빈말, 거짓 맹세, 탓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도 말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가 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말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기도할 때도 깊은 침묵 기도보다는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이것저것 다 갖다 붙였던가 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강하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 심지어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머리를 두고까지 맹세하곤 했나 봅니다.
허언(虛言)을 남발하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맹세와 관련해서 정확한 한 가지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복잡하게 늘어놓지 말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잔머리를 굴리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솔직해지라고 하십니다.
덧붙이지도 빼지도 말고 마음속에 있는 언어, 그대로를 표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내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표현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느낌, 사랑의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내용이라든지,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 상할 것이라면, 얼마나 또 망설여지는지요?
정직하고 진솔한 언어 사용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무한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상을 향한 기도와 정중한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그를 아예 무시한다거나, 깔보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조언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상대방을 향한 솔직한 언어 사용이지만,
상대방의 성장과 선익을 간절히 위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어려운 직언(直言), 고언(苦言), 충언(忠言)도 가능하게 됩니다.
맹세하지 말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이며,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심화하여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참말만 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참 진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맹세가 아예 필요가 없다.
신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순함 속에는 맹세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께서는 모든 맹세를 거부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을 피조물 이상의 영광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히브 6,16)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며,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36절) 하신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예형이며(갈라 4,26)
위대한 임금님의 도성, 즉 영적 천상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1코린 11,3)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가 허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진실한 사람으로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쓸데없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진실한 태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정말”의 의미는 가끔 자기변명이나 남의 흉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인 우리는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진실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5,37)
삶에서 최소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바꿀 마음을 먹어야 하고,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인간은 습관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로 ‘아니요’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무언가 부정하고 거부한 듯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지만,
사실 이 말은 부정이나 거부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 형의 손찌검처럼, 양성 초기엔 함께 사는 형제의 휘둘림으로 인해
저는 예전처럼 살아서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내적 소리를 들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Alain은 「권력욕」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표현하기를, 아니요는 어떤 그 무엇이나 누군가와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강력한 단어이며,
아니요는 불일치를 표시하는 말로, 실제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권력 형태나 외부 압력 앞에서 아니요는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표현한,
‘생각하는 것은 네라고 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마음에 새기며 살려고 다짐합니다.
알랭은 그래서 “잠든 자는 ‘네’라고 말하고, 깨어 있는 자는 ‘아니요’라며 고개를 내젓는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부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전에는 제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수도원 입회 후 어떤 사람 때문에 그리고 그가 저에게 한 폭력 때문에
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해 왔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맥락,
즉 참과 거짓 혹은 옳음과 그름의 관점에서 ‘예와 아니오’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겠지만,
아무튼 저는 이런 연유에서 어떤 문제 앞에서 ‘예’라는 말보다
‘아니요’란 말을 더 자주 빈번하게 표현하며 살아온 편입니다.
무척 자기방어 기제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저를 표현할 때 저는 똥개라고 말합니다.
왜 똥개는 자주 큰 소리로 짖어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스스로가 힘이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면 진돗개는 아무 때나 짖지 않습니다.
저는 겉으로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마음이 여리고 약한 사람입니다. 강한 척할 뿐이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그렇게 저를 방어하기 위해 살아왔지만
이젠 더 이상 저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기에 요즘은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회색 인간이 된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젊은 날에는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라고 생각했죠.
나이 들어가면서 회색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 분이 바로 돌아가신 박도세 유스티노 신부님이십니다.
그런 신부님의 표현이 예전에 제 성격이나 성향에 맞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젠 받아들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처럼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면서 침묵하며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흑백이 전부가 아니듯이, 흑백만이 진실이 아니더군요.
과거엔 남보다 피곤한 삶을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5,37)하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달리 아니오, 라고 말해 놓고서
예, 라고 변경하는 경우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진리나 정의 앞에서 우리 모두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욱 잘못한 권위자 앞에서는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아니요.’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진정으로 나이 든 사람의 자세와 삶이라 봅니다.
예, 라고 해야 할 때 예, 라고 응답할 수 있고, 아니오, 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리를 아는 사람이고 이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제 삶 앞에 어떤 상황이라도 예할 것을 예하거나,
아니요 할 것을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시119,36.29참조)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살인하지 말라 → 화도내자 말라”,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말라“,
그리고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하지 말라“는 산상설교의 본격적인 대당명제에 이어
오늘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맹세를 하지 말라“는 네 번째 대당명제가 선포된다.
盟誓란 자신의 증언을 다짐하는 약속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신의 증언을 다짐하는 약속을 함에 있어서
하느님을 증인이나 보증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하느님께) 맹세한다고 할 때는 두 가지 종류의 맹세가 있다.
하나는 ”과거지향적 – 단정적 맹세“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 지향적 – 서약적 맹세“이다.
前者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어떤 일을 했다, 또는 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면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율법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레위 19,12)고 규정한다.
後者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약속이나 서약을 하면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율법은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민수 30,3)고 말한다.
어떤 형태의 맹세가 되었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문이나 명예를 걸고,
나아가 天地와 하느님을 걸고 맹세를 한다.
사실 과거지향적 – 단정적인 맹세는 불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떤 일을 했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경우,
이를 주장하는 그 사람만이 사실의 眞僞를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맹세가 필요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사실의 진위를 말해도 주위의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경우 주위의 믿음을 얻기 위하여 되도록 비중이 큰 대상을 증인으로 걸고 맹세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때 구약의 율법은 결코 거짓 맹세를 하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
미래지향적 – 서약적인 맹세는 아직 成事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두고 하는 맹세이기 때문에
맹세를 함으로써 일의 성취를 위한 결심과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이때 구약의 율법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예외가 허락되지만, 과거 1970년대 모든 공적인 의례에서 반드시 해야 했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미래지향적 – 서약적 맹세의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굳게 다짐합니다.“(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제3조)
이 맹세문을 통하여 당시의 국가당국은 교육적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國家觀을 확립하려고 했다.
오늘 예수께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우회적으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하늘, 땅, 예루살렘, 자기 머리“ 등을 두고 맹세하는 관행까지도 나무라신다.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고,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며, 예루살렘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며,
사람은 자기 머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회적 수법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항상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출애 20,7)는 말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자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법칙은 총체적 진실성이다.
무엇이든 ”예“할 것은, 반드시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반드시 ”아니오“해야 한다.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다.
맞는 것을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것은 맞는 것이며,
아닌 것을, 아무리 맞다고 우겨도 그것은 아닌 것이다.
끝까지 우긴다면, 그것은 惡이다.(37절)
그러니 이젠 더 이상 맹세가 필요 없게 된 셈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Ehgsms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행위가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고 해서 닭 먹은 자신을 본인이 모르겠는가, 하느님께서 모르시겠는가?
하느님이 다 보고 계시고, 자기 자신이 알고 있지 않는가?
물론 억울한 경우도 있다. 억울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만 그렇다.
행한 일이 참되고 자신이 참되다면, 하느님 앞에서는 억울할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