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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일 오늘의 역사
2019년 방탄소년단 2019 빌보드 뮤직 어워드(라스베이거스) 톱 듀오·그룹 상 본상 수상 톱 소셜 아티스트 상 3년 연속 수상, 한국가수 첫 빌보드 뮤직 어워드 본상 수상
2014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추돌 사고
2014년 5월2일 오후 3시 32분 쯤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열차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 이는 뒤따르던 차량이 급히 멈춰 서다가 발생했다.
사고가 난 뒤 앞차 승객들은 승강장을 통해 빠져나왔다. 선로에 멈춰 선 뒤차의 승객들은 객차를 나와 반대편 선로를 통해 탈출했다. 승객들은 “이 과정에서 대피 안내 방송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사고로 1000여명의 승객 중 200여명이 다쳤고 이 중 154명이 한양대병원 등 서울 시내 10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은 경상이지만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서울시는 사고 직후 상왕십리역 주변에 시내버스 33개 노선 59대를 투입하고, 개인택시 부제도 해제했다. 하지만 복구가 밤늦게까지 지연되고, 지하철 운행이 약 8시간 이상 중단되자 시민들 항의가 빗발쳤다.
서울시는 사고와 관련해 3일 오후 3시 브리핑을 갖고, 지하철 추돌사고가 신호기의 고장으로 인해 열차 자동정지 장치(ATS)가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2014년 아프가니스탄 바다크샨 주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해 2,100명 이상이 사망
2011년 오사마 빈 라덴 미 특수요원에 의해 사살
테러의 배후,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bin Laden·54)을 응징하기 위한 미국의 최종 작전 단초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2일 미국은 빈 라덴을 사살하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수장(水葬)하는 것으로 10년간의 끈질긴 추적을 마무리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1일 오후 11시 35분(미 동부시각) 백악관에서 발표한 특별 성명을 통해 “오늘(1일) 미군 특수부대가 빈 라덴이 숨어 있던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가옥을 급습해 교전 끝에 그를 사살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은 지난해 8월 빈 라덴의 파키스탄 내 은신처에 관한 단서를 확보하고 이를 추적해 왔으며, 지난주에 빈 라덴의 제거 작전을 단행할 충분한 정보가 확보됐다고 판단해 작전 개시를 승인했다”고 했다. 이날 작전으로 빈 라덴과 함께 남성 3명, 여성 1명이 사살됐으며, 사망자 중 1명은 빈 라덴의 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행정부의 한 관리는 “무슬림인 빈 라덴의 주검을 이슬람 전통에 따라 바다에 수장했다”고 밝혔다.
9·11 테러 직후 “‘죽여서든지 생포해서든지’ 빈 라덴을 원한다”고 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미국은 물론 평화를 갈망하는 전 세계 모든 이들과 9·11 테러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이들의 승리”라고 했다.
한편 알카에다는 이날 미국의 빈 라덴 사살 발표 약 9시간 후에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하고 미국에 대한 보복을 천명했다. AFP 통신은 알카에다가 성명을 내고 빈 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망했음을 인정하고, 그를 미국에 맞선 성전을 이끌면서 자신의 영혼과 재산을 바친 기사(騎士)로 추앙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2009년 신종 플루 첫 확진환자 발생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Nargis) 미얀마 강타 사망 13만8천여 명 이재민 240여만 명,
2008년 청계광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시작, 경찰추산 1만여 명
- 5.8 1,500여개의 인터넷 카페와 시민단체 광우병대책회의 결성
- 5.22 이명박 대통령 대국민담화 “쇠고기 문제 송구”
- 5.24 제23차 촛불문화제에서 첫 가두시위
- 5.29 정부 장관고시 강행, 첫 유모차부대 등장
- 5.31 경찰, 물대포 동원 228명 연행 과잉진압논란
- 6.5-6.8 72시간 릴레이 국민행동
- 6.10 명박산성 등장, 촛불시위 규모최대(주최 측 추산 서울 70만 전국 100만)
- 6.19 이명박 대통령 특별 기자회견
- 6.29 서울광장 원천봉쇄
- 6.30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서울광장서 첫 번째 미사집전
- 7.3 개신교 시국기도회 개최
- 7.4 불교 시국법회 개최
- 7.5 국민승리 선언 촛불문화제(주최측 추산 50만 경찰추산 5만명)
- 7.6 촛불집회 수배자 6명 조계사 피신
- 8.15 100차 촛불집회, 서울광장원천봉쇄로 서울시내 곳곳에서 산발적 시위
- 8.27 서울광장에서 정부 규탄하는 범불교도대회
2007년 1기 대법원 양형위원회 발족
1기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김석수(金碩洙·75) 위원장은 2일 위원회 출범식과 1차 회의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민의 신뢰를 벗어난 양형이 있었다고 하는데 앞으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의 범위에서 양형 기준을 만들겠다” 고 밝혔다.
양형위원회는 ‘투명하고 예측가능한 양형’, ‘신뢰받는 형사재판’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이날 출범한 대법원 산하 위원회다.
대법관 출신으로 30년 가까이 몸 담았던 사법부로 복귀한 김 위원장은 “수십 년간 지속된 관행을 바꾸는 일인 만큼 먼 길을 바라보되 주춧돌을 한 장씩 확고하게 쌓아간다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법관 시절 기억을 떠올려 봐도 판사가 형량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과정” 이라면서 “형량을 정하기 위해 동료나 선배 판사에게 묻기도 하는데, 양형 기준이 나온다면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서울지법 남부지원장, 부산지법원장, 법원행정처장, 대법관,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장을 역임했고 2002∼2003년에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2003년 중국 잠수함 사고, 70명 전원 사망
중국 산둥(山東)성의 옌타이(煙台) 해군기지 소속 중국 재래식 잠수함 361호가 한국 영해와 접해있는 서해의 네이창산(內長山)섬 동부해역에서 훈련 중 사고가 발생, 탑승했던 해군 장병 70명 전원이 사망했다.
신화통신은 해군 소식통들을 인용, “문제의 잠수함이 사고 당시 네이창산 동부해역에서 훈련 중이었으며, 함체에서 발생한 기술적 결함 때문에 70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고 전했다.
장쩌민(江澤民)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2일자로 사망한 해군 장병들의 가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 애도를 표시했다.
중국 군사 소식통들은 이번 잠수함 사고가 중국 해군 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라고 말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중국 구축함 한 척이 하이난(海南)성 남부에서 폭발, 약 100명이 사망했다.
중국 해군은 90대의 잠수함 함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노후됐고, 아직 첨단 잠수함 건조 기술에 문제점이 많아 작년 러시아와 대함(對艦) 미사일 시스템을 갖춘 636급 잠수함 8척 도입 협상을 벌인 것으로 보도됐다. 도입 액수는 약 16억달러선으로 알려졌다.
1999년 파나마 대통령에 미레야 모스코소(女) 당선
1999년 5월 2일 실시된 파나마 대통령 선거에서 제1야당인 아르눌피스타당 후보로 나선 미레야 모스코소(52)가 집권 민주혁명당(DRP)의 마르틴 토리호스(35)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모스코소는 파나마 첫 여성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모스코소는 세차례나 당선됐지만 그때마다 쿠테타로 물러나야했던 고(故) 아르눌포 아리아스(1901-1988)대통령의 부인으로 파나마 정치 평론가들은 이번 선거를 `독재자의 미망인`과 `장군의 아들`이 죽은 자들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싸운 대리전이라고 평했다.
모스코소에 대항해 집권 민주혁명당이 내세운 후보는 모스코소 남편인 아리아스를 몰아낸 오마르 토리호스 장군의 서자 마르틴 토리호스였다. 1994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이번 대선에서 두번째로 출마한 그녀는 남편 묘소 앞에서 `나를 선택하는 것은 곧 남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부르짖고 중하류층 거주지역에 살면서 `나도 민중의 한 사람`이라고 외쳤다. 집권 민주혁명당은 1977년 오마르 장군이 카터 미 대통령과 담판을 벌여 파나마 운하 반환 조약을 이끌어낸 업적을 강조했으나 실업률 12.8%라는 경제 실정에 지친 파나마 민심은 집권 민주혁명당에 등을 돌리고, 아리아스의 미망인에게 표를 던졌다.
1998년 민속학자 임석재씨 별세
설화, 민요, 무가 수집에 평생을 바친 민속학자 임석재씨가 1998년 5월 2일 별세했다. 임석재씨는 송석하와 더불어 우리 민속학을 개척한 민속학계의 제 1세대 학자였다. 1958년 문화인류학회를 결성, 초대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 굿 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쳤다.
1918년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연루돼 퇴학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설화-민요-무가-민속극 등 민속학 전반에 걸친 자료조사와 연구에 있다. 그의 학자적 혜안은 1960년대 이후 녹음기를 둘러메고 전국을 돌며 각 지역의 민요를 수집한 데서도 드러난다. 가사중심으로 진행되던 당시의 민요사연구풍토로 볼 때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1995년 5장의 음반과 책으로 된 `한국구연민요`가 발간돼 근대화에 밀려 자칫 사라질 뻔한 우리 민요가 보존될 수 있는 길이 트게 됐다. 1960년대 이후 한국문화의 근간을 무속으로 생각하게 된 그는 이후 무가연구에 몰두, 1970년 우리 무속연구의 기틀을 닦은 논문으로 평가받는 `한국무속연구서설`을 발표했다. 1989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1994년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1998년 집중호우로 지하철 7호선 침수
1998년 5월 1일 밤부터 내린 비로 서울 지하철 7호선이 범람한 중랑천 물에 침수돼 5월 2일 오전 7시40분부터 지하철 운행이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물은 마치 점령군처럼 하행선쪽으로는 사가정역까지,상행선으로는 마들역까지 차례차례 진입해 7호선 강북구간 대부분을 잠식했다.
이번 지하철 7호선 침수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중랑천 지하철 6호선 6-12공구 공사장의 임시제방(가물막이) 붕괴였다. 그러나 이 임시제방의 붕괴에는 몇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천변에 붙어 있는 6호선 공사장이 침수되면 7호선은 물론,5호선,2호선까지 연쇄적으로 침수돼 서울 전역의 지하철 교통이 마비될 수 있다는 취약점을 사전에 알고서도 대비책을 소홀히 한 것이 이번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안전사고에 미리 대처하지 못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서울시 및 서울 지하철 건설본부와 시공사인 현대건설 등은 서로가 책임소재를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모습이였다. 이번 사고로 1천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고 복구작업 지연 등으로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1998년 리틀엔젤스 예술단 일행 64명 평양 방문
1998년 5월 1일 오전 첫 민간차원의 평양공연을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박보희(朴普熙) 한국문화재단 이사장과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2일 오후 평양에 도착, 송호경(宋浩京)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 등 관계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후, 공항에서 북한 만경대소년궁전 예술단원들과 함께 ‘우리의 소원’, 북한 애창곡인 ‘반갑습니다’를 불렀다.
이어 이날 저녁에는 인민문화궁전대연회장에서 열린 환영만찬에 참석,한복차림으로 ‘그리운 금강산’과 ‘선구자’를 불렀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평양에서의 첫밤을 보통강호텔에서 보낸 후, 평양 시내를 둘러봤고, 평양 시민들은 리틀엔젤스 단원들이 손을 흔들자 손을 마주 흔들며 환영했다.
방문 이틀째인 3일에는 평양 시내 개선문과 주체사상탑, 노동당 창건 50주년 기념탑, 놀이동산 등을 방문했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4, 5일 평양봉화극장에서, 7일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세 차례 공연을 갖고 금강산과 묘향산을 관광했다.
1992년 한국-중국,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0년 중국 정계거물 신화통신 허가둔 미국으로 망명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 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으로 관영 신화통신의 홍콩 분사장이었던 허가둔이 1990년 5월 2일 홍콩을 통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 그의 망명은 그가 중국의 막후 최고실력자 등소평과 군부의 최고실력자 양상곤의 측근이며, 중공당의 고급기밀은 물론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사생활까지 알고 있는 인물이기에 중국지도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사실상의 홍콩주재대사로 간주되고 있는데 허는 1983년 6월 홍콩 분사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7년간 재직해왔으며,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사건 때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한국 측과 접촉, 한-중 공식접촉의 첫 선례를 남긴 인물이다. 허의 망명은 천안문 사태 때 그 동기가 마련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홍콩주재 중국대사격인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이었던 허는 6.4사태 직전 홍콩에서도 벌어졌던 반중국 정권 시위에 좌익단체도 참가한 사실과 관련, 북경 당국과의 협의를 위해 북경으로 급히 날아갔다.
그러나 홍콩에서의 대규모 호응시위와 문회보, 대공보 등 허가 장악해야 할 중국계 언론들마저 천안문시위를 지지하는 것을 본 등소평은 허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허는 결국 총리 이붕의 지시에 따라 1990년 2월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직에서 보직도 없이 물러났다. 결국 인사불만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을 한 것이다.
1986년 올림픽대로 개통
서울시가 한강종합개발사업의 하나로 건설한 올림픽대로가 착공 3년7개월 만인 1986년 5월2일 개통됐다
한강상류인 행주대교 남단에서 강동구 암사동 까지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올림픽대로는 총연장 36km, 폭17.4∼22m의 차량 전용도로로 총사업비 1412억원이 투입됐다
1986년 대처 영국총리 방한
1983년 성교육 교재 초-중-고교 교사에 보급
1982년 영국 잠수함 포클랜드전서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1981년 미국 심리학자 데이빗 웩슬러 사망
1980년 한국-키리바시 국교 수립
1980년 서울형사지법,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선고공판(이재문등 4명 사형)
1977년 단국대 학술조사단 진천군서 국내최대 마애여래입상 발견
1972년 이후락중앙정보부장, 평양 극비방문
적대적 관계였던 미국과 중국이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 베이징에서 화해의 축배를 들고 양국 간 거리를 서로 좁혀가고 있던 1972년, 한반도에도 데탕트(긴장완화)의 바람이 불었다. 미·중 간의 밀사가 키신저였다면 한국의 밀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었다.
1972년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정홍진 대한적십자사 과장과 비서·의사 각 1명씩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판문점을 경유, 평양을 방문했다. 출발에 앞서 이후락은 만일을 대비해 청산가리를 챙겼다. 그만큼 긴장관계가 첨예하던 때였다. 이후락은 5월 5일까지 나흘간을 평양에 머물며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을 갖고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보려 했다. 김일성도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며 ‘남침’을 시인했고,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1·21사태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5월 29일 박성철 제2부수상도 서울로 보냈다.
이후락이 방북하기 전에 행해진 남북 간 비밀회담은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이산가족찾기’를 제안하고 북한이 이에 동의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11월 19일, 판문점에서 가진 제9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서 정홍진이 북한에 비밀접촉을 제의함으로써 시작된 11차례의 비밀접촉은 3월 28일 정홍진을 북한으로 보내 이후락의 방북을 합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후락·박성철의 상호 방문으로 최소한의 신뢰를 쌓았다고 판단한 남북한은 마침내 7월 4일, 이후락과 박성철이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7·4 남북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1965년 한국-벨기에, 국교 수립
1964년 서울 도동서 4층집 무너져 14명 사망 27명 부상
1964년 민주, 자민, 국민 3당 통합 선언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민등록법 통과
1960년 곽상훈 국회의장 피선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
1958년 5월 2일 의원정수 233명을 뽑는 제4대 민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에는 후보자 841명이 나서 평균 3.6대 1의 경쟁률을 보였고, 유권자는 1천16만명이었다. 정당별 당선자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통일당 1명으로 여당인 자유당이 의석의 54% 를 차지했으나 개헌선에는 크게 미달했다. 특히 자유당은 서울에서 15석중 겨우 1석을 차지하는 등 대도시에서 참패해 민심의 흐름이 잘 드러났다. 그 후 6월 7일 개원하여 국회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이재학, 한희석을 선출했다.
제4대 민의원선거는 선거공영제와 정당 참관인제 등 공명선거를 위한 장치까지 마련했으나 대법원에 의해 선거무효 9건, 당선무효 2건이 선고될 정도로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판을 쳤다.
이로인해 제 4대 국회는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한 채 1960년 해산되고 마는 비극의 운명을 간직한 국회가 됐다. 어쩌면 4대 국회는, 4ㆍ19혁명의 격류에 밀려 만 2년 1개월 남짓하여 죽을 「死」자의 팔자를 면치못한 사대(死代)국회였는지도 모른다.
1957년 ‘매카시즘’의 선동자 매카시 사망
“정부의 가장 중요한 부처인 국무성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나는 그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 이 한 마디로 20세기 미국을 광기 ‘매카시즘’으로 몰아넣었던 매카시가 1957년 5월 2일 실의 속에 간장병으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 위스콘신주 아일란드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9세에 최연소 주 순회재판소 판사가 됐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 자원, 이같은 경력을 배경으로 4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예상을 뒤엎고 당선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소위 ‘적색 사냥’ 소동은 온 매스컴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여론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조사위원회를 소집했다 . 애초에 매카시가 말한 ‘명부’란 없었다 . 석달 후에 그의 발언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나긴 했지만 적색 사냥 선풍은 이미 손댈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된 뒤였다. 매카시선풍의 마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부에까지 미치자 1954년 마침내 상원 공청회가 열렸고, 전 국민은 36일 동안 TV를 통해 이 공청회를 주시했다. 무책임하고 야만적이며 정략적인 매카시의 언동에 사람들은 속았음을 깨달았고, 마녀사냥 열기는 급속히 식었다.
결국 매카시는 ‘상원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고 파문됐고, 4년에 걸친 집단 광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결국 매카시 선풍은 2차 대전 후의 냉전 전개와 한 정치신인의 야욕이 함께 빚어낸 한 시대의 우화였다.
1956년 중국최고국무회의 백가쟁명 시사
1955년 한미민간원조협정 조인
1953년 요르단 후세인 1세 즉위
1953년 이라크 파이잘 2세 즉위
1952년 세계 첫 제트여객기 영국서 취항
1945년 영국-인도군 랑군점령
1945년 소련, 독일 베를린 점령
1936년 영화감독 임권택 출생
1927년 흥남 질소비료공장 설립
1924년 경성제국대학 관제공포. 예과 개설
1921년 시인 조병화 출생
1902년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 펠레이 화산 분출로 4만명 사망
1896년 한국 최초의 육상경기대회 개최
1895년(조선 고종 32) 덕수궁에 최초로 전기 가설
1893년 미국 국립광업회사 파산. 전미국에 대공황
1863년(조선 철종 14) 석왕사 중건
1857년 프랑스 시인 알프레 드 뮈세 사망
151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망
천재 중의 천재, 몇 세기를 앞서간 과학자,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둘러싼 수사는 실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기의 뛰어난 화가, 기계학·해부학·건축학 등에 비상한 능력을 보인 자연과학자가 구체적으로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다.
다빈치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 왔으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외에는 화가로서 이름을 알릴 만한 작품이 흔치 않은 화가다. 열다섯 남짓한 회화 가운데 몇 점은 미완성이고 또 몇 점은 공동작품이기 때문이다. 조각은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신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손꼽히는 것은 어느 분야든지 그가 관심을 갖고 파고든 후에는 여느 전문가 못지않은 업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처 분화되지 않은 해부학, 천문학, 지질학, 항공학, 기계공학, 지리학, 광학 등의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과학'이라는 용어가 아직 생소한 시대에도 사물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사색했다. 특히 사물에 대한 정교한 습작과 라이트 형제에 영감을 준 비행기 설계도 등의 각종 기록을 1만 3,000쪽 분량의 노트에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일종의 성형술을 창안하고 정교한 카메라의 반사장치를 발전시키고 콘택트 렌즈와 증기의 힘 등을 기록한 것만으로도 그가 발명가의 반열에 오르는 데 손색이 없지만, 특히 해부학에서 보인 노력과 성과는 단연 발군이다. 다빈치는 인체의 비밀을 풀기 위해 30여구의 시체를 해부했다. 교회가 인체의 분해를 엄격히 금했음에도 송장까지 철저히 해부했으며 간과 심장 등까지 조각조각 저몄다. 평생을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생활했으나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519년 5월 2일 67세로 숨졌다.
1360년 중국 명조의 제3대 황제(1402~24 재위) 영락제 출생
1036년 고려 정종, 내외명산 벌목금지령
1688(조선 숙종 14) 천체 측정기구인 준기옥형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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