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작가 제17집
특집 시비를 찾아서
횡성 서원 취석 최문발 선생의 취석시비
김영욱
1. 들어가는 글 - 나에게 횡성이라는 곳
횡성(橫城)하면 나에게는 각별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에서 무작정 가출을 했다. 부산, 대구, 서울을 떠돌다 추석이 다가오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머니엔 한 끼의 식사로 짜장면 사먹을 돈 밖에는 없었다. 갈 길도 막막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서울역에서 걸어서 경춘선과 중앙선의 시발역인 청량리역까지 걸어서 갔다. 늦은 오후라 역 광장에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허기가 졌지만 짜장면 사먹을 돈으로 무조건 중앙선의 부산방면 국수역까지 표를 끊어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추석 이틀 전이라 귀성객들로 차 칸은 시루 안 콩나물처럼 빽빽이 차서 숨통이 막히고 승강구까지 사람들이 서서가야 했다. 모두들 고향으로 간다는 들뜬 마음의 귀성객들은 그런 불편은 아량 곳 하지 않았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국수리에 있는 국수역(菊秀驛)까지 표를 끊었지만, 나는 영주역까지 가서 영동선 열차를 이용해 강릉으로 가려고 했다. 돈이 없으니 개구멍을 통해 무임승차를 하기로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영주역의 개구멍을 잘 알고 있었다. 가출해서 영주역에서 이삼일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덕소역을 지나고 양수리역을 지나고서부터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무임승차를 했다가 처벌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망설임 끝에 무임승차로 범법자가 되느니 차라리 국수역에서 내려 걸어서 강릉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열차가 국수역에 정차하자 내렸다.
해는 지고 어둠이 깔렸다. 막막했다. 그때서야 후회가 되었다. 내리지 말아야 했는데 후회한들 ‘똥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고 떠나간 기차 꽁무니를 바라본들 어찌하랴. 집찰구를 빠져나와 시골역인지라, 마당 한 구석에 큰 나무 아래에 평상이 있었다. 나는 온종일 굶고 지친 몸을 이끌고 평상에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부터 고생이 시작되었다. 먼동이 트자마자 6번 국도를 따라 걷기 시작해 양평, 용문을 지나 청운에 도착했다. 계속 6번 국도를 따라 횡성으로 가야하는데, 그만 길을 잘못 들어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으로 빠지게 되었다. 경기도 양평군과 강원도 홍천군 경계지점을 지날 때 이미 날은 저물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겼지만 오기로 걸었다. 추석을 하루 앞둔 날인지라 둥근 달이 훤히 길을 밝혀 주었다. 그래서 쉽게 밤길을 걸어서 날 샐 무렵 홍천버스터미널까지 갔다. 추석날 아침이다. 대합실이 한산했다. 긴 의자에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깊은 잠이 들었다.
누군가 어깨를 쳤다. 눈을 떠보니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가 신분증을 요구해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주었다. 그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 후에 나타난 사내는 주민등록증을 돌려주며 아무 이상 없다는 식으로 그냥 가버렸다. 알고 보니 형사였다. 이제는 배가 고파 더 이상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가출한 죄로 죗값을 치려야 한다고, 이를 앙다물고 대합실을 빠져나와 5번 국도를 따라 삼마치(三馬峙) 고개를 넘었다. 횡성군이었다. 공근면을 지나 서산에 해가 걸렸을 때 횡성읍(그 당시 횡성면, 1979년 읍으로 승격) 읍내에 도착했다.
횡성 읍내, 그 당시만 해도 보잘 것 없는 군청 소재지였다. 외곽 언덕에는 초가집이 즐비했다. 더러 기와집도 있었다. 배는 고파 죽겠고, 쉬고도 싶어서 언덕배기에 있는 교회에 가서 사택인양 싶은 기와집에 들어섰다. 여러 번 목사님 계십니까를 부른 뒤에야 방문을 열고 목사님이 나왔다. 그동안 서울에서 횡성까지 온 과정을 얘기하면서 교회에서 하룻밤을 쉬고 갈 수 없는냐고 조아렸지만, 마루에 좀 앉아 있으라고 말을 한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앉아 있어도 목사님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추석이니까 명절 음식이라도 차려나오는 줄만 알고 창자가 뱃가죽에 말라붙은 배를 안고 기다렸다. 오산(지명 경기도 烏山아니고 誤算)은 비행장이고 망상(강원도 望祥이 아니고 妄想)은 해수욕장이라던가 예감은 빗나갔다. 방안에 들어간 목사님은 뒷문으로 나가서 마을 이장을 데리고 사택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서야 목사님께서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여겨 이장에게 신고했음을 직감했다.
이장은 나를 아래위로 살피더니 대뜸 신분증을 보자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그간 사정을 얘기하게 되었고, 이장은 이왕 가출했으니 우리 마을 부잣집에서 머슴살이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할까도 마음먹었다. 집에 가면 아버지의 야단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 지 겁이 났기 때문이다. 내가 가출한 이유도 아버지의 무서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야단칠 때는 꼭 밤에 잠을 재우지 않고 성인군자들의 말을 인용해 말씀하면서 밤새도록 꾸중을 했다. 그런 방식의 훈계가 싫어 가출한 나에게 머슴살이를 하라는 이장의 말이 솔깃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품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장도 어쩔 수 없는지 오던 길로 가버리고, 나는 씁쓰레 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볼품없는 작은 교회에 들어갔다. 안식교회였다. 할머니 한 분이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내 사정 얘기를 들은 할머니는 송편을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게눈 감추듯이 단숨에 송편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하룻밤 교회에 쉬고 가자고 청을 했으나 면사무소 부근에 가면 여인숙이 있으니 부탁을 해보라고 위치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할머니가 가리켜준 여인숙을 찾아갔다. 여인숙 출입문 앞에서 어떻게 말을 잘 해야 하룻밤을 쉬어갈 수 있을까를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늙으수레한 안주인에게 말 재주라곤 코빼기도 없는 나는 용기를 내서 사정을 얘기했다. 그래도 동정심은 유발시켰는지 몰라도 재워주었으면 좋겠는데 추석이라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종이돈 500원을 주면서 딴 데 가서 부탁해 보라고 했다. 그 당시 앞면에는 이순신 장군 초상화와 거북선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현충사가 그려진 지폐로 큰돈이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주머니 속에 500원은 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걸음이 옮겨진 곳은 횡성지서였다. 순경에게 도움을 청했다. 순경은 내 딱한 사정을 듣고 면사무소로 데리고 갔다. 그날 숙직 근무를 하고 있는 면 직원에게 숙직실에 하룻밤 재워 보내라고 부탁을 했다. 면직원은 순경의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순경의 부탁을 받은 면직원은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할 뿐이었다. 면 직원 두 명이 숙직을 서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책상 두 개를 길이로 붙이더니 군용 모포 한 장을 주면서 책상 위에서 자라고 했다. 지극히 사무적인 그들이었지만, 고마웠다. 막상 책상 위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다 잠이 들어 세상모르고 곤한 잠에 빠졌다.
깊은 잠 속에서도 무언가 달그락거리고 후루룩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떴다. 면 직원 둘이 얼굴을 맞대고 야참으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라면과 김치 냄새가 군침을 확 돌게 했다. 자는 척하면서 소주잔을 서로 권하며 맛있게 라면 먹는 모습을 엿보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 세상인심이 그렇구나. 굶주린 사람이 자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먹다니, 생각할수록 서글퍼졌다. 집에 가면 우선 라면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지 생각하면서 다시 잠을 청했으나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을 지새운 나는 면 직원들이 일어나기 전에 면사무소를 나섰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이었다. 안개 속 길을 더듬으며 강릉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 후 나는 라면을 먹을 때마다 그 때의 일이 떠올려지곤 한다. 그리고 한 때는 끼당 세 봉지씩 하루 세 끼를 라면으로 폭식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라면을 즐겨 먹는다. 때로는 생라면을 술안주로도 먹는다. 그래서 ‘라면 잡아먹는 귀신’이라는 소릴 듣곤 했다.
2. 횡성의 각별한 친구 이규삼
그런 각별한 횡성에 각별한 관계의 친구가 있다. 횡성군 서원농협(書院農協) 조합장 이규삼이다. 그 친구를 말하자면, 농협 본래의 목적인 농민들의 생산력 증진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나라 베스트 원(Best 1) 농협조합장이다. 그래서 오로지 신용사업보다는 경제사업을 중시하고 실천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한때 내가 역마살을 못 이겨/ 강릉에서 서울을 왔다 갔다 하던 시절/ 횡성 둔내농협에 이규삼 부장을 만나면/ 이 친구 사람 알아보는 씀씀이가 있어/ 나를 막국수 집에 앉혀놓고/ 수육에다 찡한 쐬주로 내 속을 후려치면서/ 우리 농민도 잘 살아야 할 텐데/ 조합장 전무라는 게 어디 농민 생각하던가/ 울분을 토하다가 나를 6번 국도가 지나는/ 태기산 고개까지 바래다주는데/ 옆구리에 양주 한 병을 찔러주면서/ 가다가 춥고 배고프면 한 잔 하라던 이규삼/ 나는 그때부터 그를 알아보았다/ 농민을 위해 뭔가 할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가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전무 시험 몇 번 떨어지고 나서/ 아 내가 전무나 할 사람이 아니지/ 농협을 확 뒤집을 조합장을 해야지/ 그렇게 마음먹고 고향 서원에 가서/ 횡성 서원농협 조합장 선거에 당선 되더니/ 농민을 위한 농협장 되겠다고/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이 많든 적든 고사리 하나라도/ 서울로 끌고 가 팔아주고/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로 간장, 된장, 고추장/ 가공 공장을 만들어 팔아주고/ 서울에 직판장을 만들어 농민이 키운/ 한우 쇠고기를 파는 세일즈맨으로 뛰었다/ 10여 년을 그렇게 뛰다보니/ 이젠 서울에 직판장이 10여 곳이 넘어/ 전국에서 제일가는 조합장이 되어서/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는/ 내 친구 이규삼 서원농협 조합장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조합원인 우리 연곡 농협을 떠오리곤 한다// 우리 조합장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 조합장도 저렇게 할 수 있을 텐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도// 내 친구 이규삼 같은 조합장 아무나 하나”
몇 년 전 친구 이규삼에 대해 쓴 시로「내 친구 이규삼 같은 조합장 아무나 하나」이다. 그 시를 쓰기 전, 그 친구를 찾아 서원농협에 갔다. 그때에 친구의 안내로 취석정(醉石亭)에 간적이 있다. 그땐 무심코 둘러보았을 뿐이다. 최근에 취석정이 있는 계곡이 섬강 상류로 물이 맑고 깨끗해 여름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 친구 이규삼 얼굴도 볼 겸 취석정 계곡에서 하루 쯤 피서나 할까 계획을 세웠으나, 둘째 처남의 농사일을 돕느라고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그곳에 가지 못한 아쉬움에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취석정 사진을 보다가 취석정 옆에 취석시비(醉石詩碑)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취석’이란 중국의 옛 송(宋)나라 진성유(陳聖兪)가 지은 「여산기(廬山記)」에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거쳐하던 율리(栗里)에 큰 돌이 있는데 도연명은 술에 취해서 항상 그 돌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하여 그 돌을 취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즉 취석은 옛날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벼슬을 그만 두고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이 취하면 집 앞 돌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얘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사람이 욕심 없이 유유자적 한가롭게 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유유자적 한가롭게 살았기에 취석시비가 세워졌을까 횡성군 서원면 취석정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3. 백로 왜가리의 번식지 서원 압곡리
서원면은 조선시대 말엽 원주군(현재 원주시)에 속해 있으면서 “고모곡면(古毛谷面)”이라 불렀다. 고종 임금 32년인 1895년에 원주군에서 횡성군으로 편입, 면소재지를 산현 칠봉에서 서원면 창촌리로 옮겼다. 1914년 산현 칠봉서원(七峰書院) 이름을 따서 서원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칠봉서원은 1612년(광해군 4년)에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에 서당으로 건립되었다. 12년 뒤인 1624년(인조 2년)에 지방 유림에서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원천석(元天錫, 1330-?), 원호(元昊, ?-?), 정종영(鄭宗榮, 1513-1589), 한백겸(韓百謙, 1522-1615)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원천석은 본관이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 말 조선 초 원주 치악산 자락에 은거한 은사(隱士)이다. 시조로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가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원호는 본관이 원주이고,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 또는 무항(霧巷)으로 단종 임금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의 세조 제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음해 단종이 유배되자 영월 서쪽,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의 서강(西江)가 높은 절벽위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단종 임금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단종이 살해되자 영월에 가서 삼년상을 마쳤다. 이후 계속 영월 주천(당시는 원주에 속함)에 칩거 했다. 세조가 호조참의로 임명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단종의 능이 집의 동쪽에 있어서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반드시 동쪽을 향했다.
정종영은 원주 출생으로 본관이 초계(草溪)이고, 자는 인길(仁吉), 호는 항재(恒齋)다. 나이 서른에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과 공조참판, 강원감사를 지냈으며,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찬성까지 지냈다. 1589년 관직을 떠난 이후 7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향인 원주에서 후학을 길렀다. 도학문장으로 당대에 뛰어난 인재로서 중종, 인종, 명종, 선조 임금에 걸쳐 한결같이 청렴한 충신으로『조선왕족실록』에 100여 회나 이름이 올라있으며 저서로『항재집(恒齋集)』이 있다.
한백겸은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반사건 때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염해 준 사실이 발각돼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 때 사면으로 석방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왜군에게 아부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처단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내자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쌀, 국수, 술, 간장, 기름, 꿀, 채소, 과일 등의 물자를 공급하고, 연회(宴會)와 직조(織造)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그 후 호조좌랑 형조좌랑. 청주목사, 호조참의를 거처 광해군 때인 1610년 강원도안무사를 지냈다. 저서로『구암집(久菴集)』이 있다.
이렇게 원천석, 원호, 정종영, 한백겸의 위패를 모신 칠봉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돼 현재는 터만 일부 남아있다.
그곳 산현리에서 빠져나와 409번 지방도를 따라 북상하다보면 서원면 소재지 창촌리를 지나 압곡리(鴨谷里)가 나온다. 압곡리는 2008년 ‘참살기좋은마을’과 2009년 ‘새농어촌건설운동 우수마을’, 그리고 2010년 ‘녹색농촌마을’에 선정된 마을이다. 그 보다도 그동안 백로, 왜가리 서식지와 기암괴석과 병풍바위로 풍광이 수려한 취석정 계곡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은 곳이 되었다.
“산림비조(山林飛鳥) 뭇새들은 농춘화답(弄春和答) 짝을 지어 쌍거쌍래(雙去雙來) 날아든다. 공기(空氣) 졍동 공기 쭈르록, 숙궁 솟텡 가가갑술이 날아든다. 야월공산(夜月空山) 깊은 밤에 두견새는 슬피 운다./ 오색채의(五色彩衣)를 떨쳐입고 아홉 아들 열두 딸을 거느리고 상평전(上坪田) 하평전(下坪田)으로 아주 펄펄 날아든다. 장끼 까투리 울음 운다. 꺽꺽꾸루룩 울음 운다./ 저 무슨 새가 울음 우는 고, 저 뻐꾹새가 울음 운다. 꽃 피어서 만발하고 잎 피어서 왕성한데 청계변(淸溪邊)으로 날아든다. 이 산으로 가며 뻐꾹, 저 산으로 가며 뻐꾹, 뻑꾹 뻑꾹 좌우로 날며 울음 운다./ 저 무슨 새가 울음 운다. 저 무슨 새가 울음 운다. 야월삼경(夜月三更) 저문 날에 저 두견이 울음 운다. 이 산으로 가며 귀촉도(歸蜀道), 저 산으로 가며 귀촉도, 짝을 지어 울음 운다./ 저 꾀꼬리 울음 운다. 저 꾀꼬리 울음 운다. 황금 갑옷 떨쳐입고 양류청청(楊柳靑靑) 버드나무 제 이름을 제가 불러 이리로 가며 꾀꼬리루, 저리로 가며 꾀꼬리루, 머리 고이 빗고 시집 가고지고. 게알가가남실 날아든다./ 저 할미새 울음 운다. 무곡통 한 섬에 칠푼오리(七分五厘)를 해도 오리가 없어 못 팔아먹는 저 방정맞은 할미새. 경술(庚戌) 대풍시절(大豊時節)에 쌀을 양(兩)에 열두 말씩 해도 굶어 죽게 생긴 저 할미새. 이리 가며 팽당그르르, 저리 가며 팽당그르르 가가감실 날아든다./ 저 머슴새 운다. 저 머슴새 울음 운다. 초경(初更) 이경(二更) 삼사오경. 사람의 간장 녹이려고 이리로 가며 붓붓, 저리로 가며 붓붓, 이리 한참 날아든다./ 저 비들기 울음 운다. 나의 춘흥(春興) 못 이기어 숫비들기 나무에 안고, 암비들기 땅에 콩 한 줌을 흩어주니, 수놈은 물어 암놈 주고, 암놈은 물어 수놈을 주며, 주홍 같은 입을 대고 궁글궁글 울음 운다./ 저 무슨 새 울음 우는고, 오색단청 때저구리, 연년 묵은 고목나무 벌레 하나 얻으려고, 오르며 딱딱으로, 내리며 딱딱으로, 이리 한창 울음 울고./ 아랫녘 갈가마귀, 웃녘에 떼까마귀, 거진 중천 높이 떠서 까옥까옥 울음 운다./ 소상강 떼기러기 장성 갈재 넘으려고 백운(白雲)을 무릅쓰고 뚜루룩 너울너울 춤을 춘다./ 저 종달새 울음 운다. 춘삼월 호시절에 한 길을 오르며 종달이, 두 길을 오르며 종달이, 아주 펄펄 노니는구나.”
조선 후기에 널리 불러진 12잡가 가운데「새타령」이다. 온갖 잡새의 외모와 울음소리를 익살맞게 부른 노래로 두견새, 장끼, 까투리, 뻐꾹새, 두견이, 꾀꼬리, 할미새, 머슴새, 비들기, 딱따구리, 갈가마귀, 떼까마귀, 기러기, 종달새 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압곡리에는 해마다 잡새가 아닌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은 새오나니/ 창파에 조희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는 시조처럼 깨끗함과 고고함을 상징하는 백로(白鷺)가 찾아오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압곡리 산 186-2 외 일대(23,140㎡)를 백로와 왜가리 번식지로 1973년 10월 1일 천연기념물 제248호로 지정했다.
백로의 우리 말 이름은 해오라비, 해오라기. 해오리 등이다. 해는 희다[白]는 뜻이니, 해오리는 흰오리는 말이다. 황새목 백로과의 새로 크기에 따라 쇠백로, 중백로, 중대백로의 구분이 있고, 부리나 깃털의 빛깔로 구분하는 이름도 있다. 이와 달리 왜가리는 백로과지만 겉모습은 백로와 비슷하나 몸 전체가 회색을 띠고, 머리에 두 개의 검은 댕기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앞목에는 점줄 무늬가 있고, 어깨도 검은 빛이다. 압곡리를 찾아오는 백로는 중대백로로 예전에는 많게는 5천, 적어도 2,3천 마리씩 찾아들어 장관을 이루었으나 오늘날에는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4. 최문달 선생을 기리는 취석비
압곡리에는 백로처럼 고고하게 살다간 은자가 있었다. 도연명처럼 세상과 등지고 살다간 최문발(崔文潑, 1607-1673) 선생이다. 본관은 강릉이고 호는 취석(醉石)으로 강릉 최씨 시조 충무공 최필달의 23손이며 성균관 박사, 예조참판을 지낸 매곡 최기벽(梅谷 崔基鐴, 1573-1645)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맏형 문오(文澳)는 군수를 거쳐 사헌부 장령, 예조 정랑을 지냈고, 둘째 형 문활(文活)은 함양군수, 증좌승지를 지냈다. 동생 문식(文湜)은 삼조 참판을 지냈다. 하지만 최문발 선생은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세속의 명리를 초탈해 시(詩)와 술로 일생을 보냈다.
최문발 선생은 선조 임금 40년인 1607년 음력으로 3월1일 원주 서곡(鋤谷)에서 태어나, 스물아홉 살 때 생진과(生進科)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서른세 살이던 1639년 원주 고모곡(현 서원면) 압곡 수동(水洞)에 정착해 예순아홉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섬강 상류 구곡한천이 흐른다는 용곡천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수동에 최문발 선생이 정자를 짓고 은자(隱者)로서 시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기면서 살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정자는 자취조차 없어진지 오래였다. 문헌에 의하면 최문발 선생의 시집 중에 “물골냇가에 작은 정자를 세운다(水洞溪上結小亭)”에 따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수동에 있는 취석정은 1984년에 새로 지었으며, 선생의 아호(雅號) ‘취석’을 따서 ‘취석정(醉石亭)’이라고 하였다. 정자의 누각 정면에 최규하 전 대통령이 쓴 ‘취석정’ 현판이 걸려있고, 누각 안에는 ‘취석정상량문(醉石亭上樑文)’, ‘취석정복원현황(醉石亭復元現況)’이라는 현판과 ‘취석정’이라는 시판이 걸려있다.
내가 찾아보고자 했던 ‘취석시비(醉石詩碑)는 정자의 정면 왼쪽에 세워져 있었다. 시비는 1991년 6월 16일 강릉최씨 취석공파 압곡종친회에서 세운비로 1984년 새로 지은 취석정보다 7년 뒤에 세운 셈이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강릉최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조상의 혈통[상계(上系)]을 달리하는 3계통이 있다. 첫째 혈통은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에 영첨의좌정승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에 봉해졌던 충무공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고, 둘째 혈통은 고려 태조의 부마로 대경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고, 셋째 혈통은 고려 충숙왕의 부마로 삼중대광 판군기시사에 올랐던 충재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그러니, 강릉최씨 취석공파 압곡종친회는 충무공 최필달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다.
山中偶吟
杜鵑聲裡但靑山, 人影難逢寂寂間
唯有庭花相對笑, 不言終日慰幽閑
두견새 우는 소리 뿐인 푸른 산 속에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만날 수 없는데
오직 뜰에 핀 꽃들이 마주 보고 웃으면서
말없이 하루 종일 나의 한가함을 달래주네
취석시비에 새겨져 있는 최문발의 시「산중우음(山中偶吟)」이다. ‘산중우음’이란 산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읊은 시로 들려오는 소리는 두견새 울음일 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단지 뜰에 핀 꽃들만이 서로 보고 웃으면서 온종일 한가함을 달래준다는 은자의 유유자적함을 엿볼 수 있다.
물소리 천둥치듯 여울을 달리고
물거품 돌을 치듯 차가운 눈을 뿜는다
조용한 터에 시끄럽다 싫어 할 소냐
도리어 속세의 시끄러운 소리 안 들어 좋아라
殷地晴雷走急灘, 激湍衝石雪噴寒
不嫌靜裏轟喧聒, 却喜塵囂到耳難
최문발 선생의 시「수동탄성(水洞灘聲)」이다. 즉 ‘수동의 여울물 소리’로 수동은 압곡에서 1.5㎞ 지점을 말하며 물골이라고 하는데 물골은 물이 깊고 물굽이가 꼬불꼬불하고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계곡으로 20여리나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산현(山現)에 이르는 계곡을 ‘20리 압곡 계곡’이라 하고 “꼬불 꼬불 돌아가는 20리 냇가/ 산마루의 푸른 하늘 봉따라 꼬불/ 걸음마다 진달래가 발목을 잡네/ 취석정 술 한 잔에 시 한수 하니/ 졸고 섰는 해오라기 나래를 친다// 건너가고 쉬어가는 20리 냇가/ 굽이마다 맑은 물결 돌머리 꼬불/ 미나리아재비가 손목을 잡네/ 용운사 돌부처님 눈감고 천년/ 흰 구름만 왔다 갔다 세월만 가네// 올려딛고 내려딛는 20리 냇가/ 나그네의 도포자락 길따라 꼬불/ 스쳐가는 꽃내음에 가는 곳 잃고 칠봉산 철벽 아래 길을 멈추니/ 서원터의 하마비기 나를 부른다”라는 노래「압곡계곡 20리」가 전해온다.
지금은 취석정이 자리 잡고 있는 수동은 찻길이 열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뭇사람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별유천지(別有天地)였다. ‘별유천지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이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問爾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라고 읊조린 시「산중문답(山中問答)」일 것이다.
그 옛날 별유천지 수동 물가 취석정 누각과 그 주변 반석에서는 최문발 선생이 ‘진솔회(眞率會)’란 모임을 갖고 자주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청산(靑山)을 병풍처럼 맑은 계곡 터를 잡고
봄에는 진달래가 가을엔 석국(石菊) 만발
언덕 위 나래 편 정자 시인묵객(詩人墨客) 줄잇네
옥수(玉水)가 흐르는 곳 천하(天下)를 그린 반석(盤石)
바둑판 그려놓고 세월(歲月)을 벗 삼으니
거룩한 선조(先祖)의 뜻을 자손만대(子孫萬代) 이으리
우거진 숲을 찾아 뻐국새 날아들고
달 밝은 밤이 되면 두견새 이르노니
취석공(醉石公) 높으신 은덕(恩德) 새기면서 살리라.
이 시는 취석정 누각 안에 걸려 있는 시판에 새겨진 「취석정」이다. 1995년 국화꽃이 피는 가을에 최종민(崔鐘珉)이 지은 시로, 그는 취석공 최문발 선생의 종손이다. 취석정 앞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건너편 너래 반석에는 선생이 한자로 크게 ‘醉石’이라 새겨놓은 글씨가 있고, 그 옆에는 바둑판이 그려져 있다. 아마 선생을 비롯해 시인묵객들이 시회를 즐기다 취해서 잠이 들기도 하고 바둑을 두기도 하였을 터다.
보아라
높기도 하여라 마산(馬山)이여!
그 아래 압곡(鴨谷)이란 곳 있으니
가진 뜻 높았던 은자(隱者) 이곳 취석정(醉石亭)에서
세월은 오래 되었으나 노닐던 풍모(風貌) 쟁쟁하고
남기신 시문(詩文) 예전 자취 완연하였네
아! 우리는 선비의 후예임을 자랑하노라.
사랑하리!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은 팔경(八景)으로 이름 짓고
해마다 찾아오는 백로(白鷺)의 순결한 자태여!
순박한 인심에 마음 편하고
전해오는 향약을 서로 지키며,
손자 증손 며느리 대대로 이곳에 살고 있네.
아! 살기 좋은 내 고장 사랑하리라.
흙에서!
고요하고 맑은 산봉우리는 점점이 막아 있고
쏟아지는 계곡물 저 멀리 흘러간다.
여기서 밭 갈고 씨 뿌리고 우물 파서
한가로이 흙에서 살며 남은 생애 압곡(鴨谷)을 위해
아! 더욱 더 살찌게 영원히 노래하리라.
압곡리를 노래한 ‘송(頌) 압곡마을’비에 새겨진 칭송이다. 비는 취석정 오른쪽에 서있다. 지은이는 취석정 누각 안에 걸려있는「취석정」의 시판의 지은이와 같은 사람 최성민(당시 85세)이다. 2008년 6월25일 건립되었다.
비 뒷면에는“이곳은 원래 조선시대에는 원주 목(牧)에 속해 있다가 고종 32년 을미(1895) 5월에 원주군에서 횡성군으로 편입되었고 처음에는 고모곡면(古毛谷面)이라 불렀으며 1914년에 서원면(書院面)이라 불렀다. 편입당시에는 서원4리 압실(鴨室)이라 불러오다가 1973년부터 압곡리(鴨谷里)라 개칭되었다. 압곡 압실 이란 동네 압산이 오리 형상이고, 못둔지[方池]에서 오리가 서식했다고 하여 압실 압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약 400년 전 압곡 中始祖 崔文潑(醉石)공께서 1635년 28세에 생진과(소과) 입격하시던 해 백로와 왜가리, 철새가 처음 둥지를 틀고 서식하여 현재까지 마을주민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압곡리 압산 165-3번지 일원이 천연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된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로 역사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음”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압곡리는 최문발 선생의 후손들이 일궈낸 마을로 볼 수있다.
최문발 선생은「산장십영호운(山庄十詠呼韻)」이라 하여 압곡의 열 가지 풍경을 읊었다. 그중 두 편을 소개하면,
꽃 지는 봄 산에 두견이 운다
애달픈 그 소리 서쪽으로 가자는 하소연인가
천년(千年)의 고한(苦恨) 다할 날 없어
날아왔다 날아갔다 정처 없네
花落春山杜宇啼, 聲聲似訴欲歸西
千年苦恨無時盡, 飛去飛來不定栖
시제는「법수산제견(法峀山啼鵑)」이다. ‘법수산에 두견이 운다’로 법수산은 압곡리 뒷산 이름이다.
밤비에 못물 늘어 출렁이는데
물오리 짝지어 물놀이 하네
떴다 빠졌다 유유히 즐겨하니
시객의 흥(興)을 차지하고도 남으리
野雨添波水滿池, 一雙游鴨弄淸漪
悠悠自得浮還沒, 剩占詩家物色宜
시제「방지희압(方池戱鴨)」이다. 즉 ‘못둔지에 물오리 놀다’로 못둔지는 압곡 윗마을에 있는 못 이름으로 물오리의 서식지다.
최문발 선생은 압곡 수동에 정착하기 전에 산수(山水)에 몸을 담고 시문을 지으며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람 때 지은 시도 상당 수 있다. 평양 유람에서는 부벽루에 오르기도 하고 대동강 기생들을 희롱하기도 했다.
나는 장생객(長生客) 되고
너는 불사선(不死仙) 되자구나
오늘 비록 이별이 있을지라도
뒷날 어찌 인연이 없을소냐
흰 눈이 관산(關山) 밖에 날리는데
술잔을 패강(浿江)가에서 드노라
지나간 일장(一場)의 꿈이런가
我作長生客, 娘爲不死仙
今朝雖有別, 他日豈無緣
白雪關山外, 淸樽浿水邊
一場餘夢在, 來往惜離筵
시제「패강취희제랑(浿江醉戱諸娘)」의 세수 중 둘째 수다. ‘패강’은 대동강이므로 ‘대동강기생을 희롱하다’는 시다.
의상대 아래 두어 척 배 삿대를 다투면서
거센 파도 속에 전복을 따네
서릿발 같은 칼로 썰어 절음으로 내놓으니
신선한 맛이 뱃속에 가득히 차네
兩舡爭掉古臺下, 採得鯨波石決明
霜刃斫來分片玉, 一般仙味滿腔淸
시제「의상대관채복(義湘臺觀採鰒)」으로 ‘의상대에서 전복을 따는 것을 보고’ 이다. 선생이 동해안 강릉 등의 여행길에 양양 낙산사 의상대에서 두어 척의 배가 석결명(石決明), 즉 전복을 따온 것을 회로 먹고 지은 시다. 석결명은 한의에서 전복 말린 것을 뜻하나 여기서 바다에서 갓 잡은 전복이다.
그밖에 다양한 시를 지었다. 풍속에 대한 시도 있다. 다음은 시제「객중견추천희감음(客中見鞦韆戱感吟)」으로 천중절(天中節), 즉 단오에 ‘그네를 뛰는 것을 보고’ 지은 시다.
세월은 실북같이 빠르기도 한데
나그네 가슴에는 헛꽃만 피고진다
오늘이 벌써 오월(五月) 단오란 말인가
아낙네 비단필 내걸고 그네를 매네
坐覺光陰一擲梭, 客邊春事摠虛花
今朝又値天中節, 綵縷爭纏處處家
최문발 선생은 젊었을 때는 빈한(貧寒)했지만, 도연명 같은 기개가 있었다. 나이 많아서는 중병에 시달리며 노년을 보낸 것 같다. 부인 단양우씨(端陽禹氏) 사이에서 아들 동상(東相)과 두 딸을 두었다. 동상은 무과에 급제 후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재취한 부인 남양홍씨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다 무과에 급제하여 첨지(僉知) 또는 동지(同知)가 되었다. 선생은 1673년 69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묘소는 원주시 호저면 광격리 동막에 있다. 선생은 방대한 시문 11권을 지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병화(兵禍)에 많이 소실되었다. 하지만 후손들이 1977년「취석시집(醉石詩集: 3권 2책 395수)」이란 이름으로 한권의 책을 편찬했다.
5. 나오는 글 - 서원농협 선식 ‘그래인 스무디’
취석시비 답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내 친구 이규삼 서원농협 조합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답이 없었다. 워낙 바쁜 친구이니 안 받을 수도 있겠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와 압곡리에서 창촌리로 향했다. 창촌리는 서원면 소재지로 서원농협이 있는 곳이다.
서원면 인구는 2014년 9월 현재 2,240명의 규모가 작은 농산촌이지만 서원농협이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원지역에서 생산된 청정잡곡으로 만든 서원농협의 선식(禪食), ‘그래인 스무디(Grain smoothie)’를 2014년 6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식품홍보전에서 미국 현지인들에게 그래인 스무디를 맛보게 한 결과 폭발적인 인기와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100만 달러의 수출을 기대하고 있다.
선식이란 불가에서 참선할 때 머리를 맑게 하고 위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먹던 음식이다. 이후 승려나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을 하기 전에 준비하는 고단백 영양식으로 이어지다가 그 편리함과 영양가가 알려지면서 일반인도 즐겨 먹는 식품으로 발전하였다.
서원농협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추석연휴이기 때문이다. 나도 추석연휴를 이용해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취석시비 답사를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이규삼 조합장의 전화를 기다릴 순 없었다. 선식 그래인 스무디 맛이나 보고 가려던 애초의 바람은 어긋났다. 아내더러 빨리 집에 가서 남은 추석 명절 음식으로 골동반(骨董飯)을 만들어 먹자고 채근을 해서 귀가를 서둘렀다.
메마른 산골 밭에 세금도 부역도 많아
어젯밤 마을이 한 반쯤 비었네
오직 두어 세 집 남아있어도 생계가 말이 아니고
모두 나머지 집도 또한 살기 어렵다 하네
오상촌(五祥村) 사람들 모두 떠돌이 돼서
십년을 이웃해 살아도 이름을 알 수 없어
하루는 길을 물어 텅빈 움막을 찾으니
산골 밭 삼월(三月)인데 봄갈이도 안했더라
山田荒薄賦徭煩, 昨夜仍空一半村
唯有數家生計少, 盡言餘戶亦難存
五祥村舍盡流氓, 十載洞隣未識名
聞道一時空舊幕, 峽田三月廢春耕
최문달 선생의 시「문오상촌민유산(聞五祥村民流散)」즉 ‘오산촌민들이 흩어졌다는 소문을 듣고)’라는 시를 떠올렸다. 선생이 살던 17세기 농촌 현실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오상촌이라는 마을의 촌민들이 메마른 산골 밭에 농사를 지으면서도 하라는 것도 많고 내라는 것도 많아 어젯밤에 마을의 사람들이 절반쯤 떠나버렸다. 그런 소식을 듣고 길을 물어 오상촌을 찾아갔으나 농사철이 다가온 춘삼월인데도 씨 뿌릴 전 단계인 밭갈이를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의 현실은 팍팍하다. 그래도 팍팍한 농촌을 기름지게 하려고 노력하는 내 친구 이규삼 같은 조합장이 많아야 농촌이 윤택해질 텐데 ... ... ...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귀가했다. 막 마당에 들어섰는데 전화가 왔다. 이규삼 조합장이었다.
“추석 잘 보낸 기여? 원주에 나와 있었는데 진동으로 해 놓아 전화를 못 받았어!”
“잘 보냈지. 그런데 나, 오늘 서원 갔다 왔지!”
“그럼 벌써 집으로 간 거여?”
“그 왜 압곡리 수동에 있는 취석정을 둘러보러 갔다가 둘러보고 왔지.”
“아이고 어쩌나! 내 휴대폰 주소 찍어 줘. 선식을 보내줄께.”
아무튼 그렇게 전화가 끝났다.
대죽리 마을에서
-연동이 아버지 정준화 씨는 위대하다-
연동이 아버지 정준하 씨, 술 취해 “형님! 나는, 우리 아들 연동이 때문에 살았슈. 그놈 아니면 살 이유가 없슈. 연동이 네 살 때 연동이 엄마와 헤여졌슈.” 그러면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이고, 힘껏 빨아 당겼다가 연기를 내뿜어댄다. 그리고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이어 “나 연동이 때문에 살았슈. 연동이 엄마 집이 강원도 정선이유. 처갓집에 갈 때 기차타고 갔슈. 선평역(仙坪驛)에서 내려 산골로 두어 시간 가야 했슈. 처음 갔을 때 장인이 마중을 나왔슈” 하고는 또 담배 연기를 힘껏 빨아 당겼다가 연기를 내뿜어댄다. 이어서 또 “형님, 나, 오늘 술 한 잔 했슈. 그런데 우리 연동이가 애비를 보고 술 마신다고 뭐라 해서 정월 대보름날까지 마시고, 그만 마신다고 했슈”라고 금주선언(禁酒宣言)을 한다. 그리고 피우던 담배꽁초를 목 졸라 발로 비벼 끄고 자빠질 듯 자빠질 듯 집으로 간다. 이층 난간을 겨우 올라간다. 방문 열기는 에베레스트 등정만큼이나 어렵나보다. 마지막 베이스캠프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운다.
지금껏 연동이 때문에 희망을 갖고 혼자 살아왔다는 정준화 씨
아들만은, 그래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부사관으로 키웠다
그 누가 뭐래도 연동이 아버지 정준화 씨는 위대하다
위대한 연동이 아버지를 위하여
받들어 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