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아오르는 시의 샘물을 향하여
⸺강인한 시집 『두 개의 인상』
이숭원 (문학평론가)
1. 현실인식의 지속과 변주
강인한 시인이 2017년 『튤립이 보내온 것들』을 낸 지 3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 『두 개의 인상』을 냈다. 3년 간격이면 평균적인데 70대 중반의 걸음으로는 빠르다 할 수 있다. 그의 보법은 나이에 비해 민활하고 유연하며 신선하다.
1944년에 태어나 1962년에 대학에 입학한 그는 대학 4학년 때인 1965년 12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았으나 기 발표작이라는 이유로 당선이 취소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응모하여 1967년 1월 당선되었다. 전후의 사정을 고려하면 그는 20대 초반에 동아, 조선 두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한 셈이니 조숙한 재능으로 소년등과의 쾌거를 거둔 것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1965」년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는 모두 분장체로 된 장형의 형식으로 당시의 예민한 현실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다. 〈동아일보〉 심사위원 김현승은 「1965」에 대해 “현실을 보는 눈과 비평정신이 믿음직스러웠다”고 평했다. 1965년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조인된 해이며 월남 파병이 결정되어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월남에 상륙한 해다. 강인한은 당시 가장 민감한 현실적 쟁점인 월남 파병을 소재로 취하여 총을 들고 월남 전선에 배치된 친구의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1965」에서 사랑하는 젊은 친구가 가을에 부두를 떠나고 남은 사람들의 텅 빈 가슴에 겨울이 닻을 내렸다고 한 것은 당시 상황에 그대로 부합하는 내용이다. 친구는 총을 들고 낯선 이국 산천 포화의 밀림 속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 일반인들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러나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현장인 월남 파병 문제를 과감히 소재로 택하여 상황의 비극성을 장형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는 구성이 확장되고 다면화되어, 낯선 남지나해의 땅굴 속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와 조국의 군사분계선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를 병치시켰다. 이 두 병사는 각각 어린 시절 대운동회의 즐거운 고함 소리와 신나는 환호의 북소리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한갓 추억의 환상일 뿐이고 현재는 알 수 없는 적을 향해 어둠 속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다. 월남 파병을 바라보던 시선이 분단 조국의 현실로 확대되고 유년의 순수한 시대와 대비되어 현실의 비극성이 강조되는 시상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현실 문제에 초점을 두고 시인으로 출발한 강인한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한 시도 놓친 적이 없다. 비판적 예언자로서의 시인의 기능을 그는 선험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특징은 제3시집 『전라도 시인』부터 제5시집 『칼레의 시민들』까지 더욱 강화된 형태로 표출되었다. 그런데 당대의 현실 문제를 시로 다루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서정의 밀도를 유지하면서 순정한 감성의 언어로 현실의 아픔을 감싸 안는 방법을 사용했다. 시대의 아픔과 현실의 모순을 시로 표현하면서도 시가 영혼의 고백이라는 기본 문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번 시집 『두 개의 인상』에도 현실에 대한 관심과 비판은 뚜렷한 줄기를 이룬다. 「질풍노도 시대가 있었다」는 모교인 전주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시이니 당연히 역사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물속에서 눈 뜨기」는 여섯 살 때 겪은 6.25 전쟁의 시작을 회상한 것이고, 「철길의 유령」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둠 속에 목격한 커다란 증기기관차의 위압적 형상을 회상한 것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어린 시절 순정한 의식에 강압적으로 들이닥친 현실의 폭력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1961 어느 새벽의 장난」은 첫 시집에 들어 있는 「오늘 새벽」을 부분 개작하여 다시 발표한 것으로 군화발로 동북아시아 지도를 짓밟고 30년간 악취를 남긴 5.16 쿠데타를 비판한 작품이다. 그의 역사의식으로 판단할 때 5.16은 생명의 성장을 결정적으로 저해한 죄악의 폭거이기 때문에 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다시 수정하여 시집에 수록한 것이다. 「바람의 향기를 맡아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과 천안함 대응 방식을 풍자한 것이고, 「펜로즈 삼각형 위에 서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 장면을 풍자한 것이다. 「서울 가서 얼굴 고치고 팔자 고치고」는 장자연 사건으로 언론에 공개된 여성 연예인 성 접대 실태를 풍자한 시다. 「벽호壁虎가 온다」는 2019년 10월 23일에 영국의 냉동 컨테이너에서 발견된 베트남 밀입국자 39인의 시신 사건을 소재로 그 인간적 참상을 애도한 작품이다. 「밤새 안녕들 하신가요」는 코비드-19 신종 코로나가 창궐한 암울한 최근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처럼 강인한 시인은 현실의 크고 작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시로 표현했다. 이러한 이력은 1964년 대학 3학년 때 경북대학교현상문예에 당선한 「사자死者 공화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56년의 연조를 지닌 것이다. 그는 출발 초기부터 역사의식과 예언자적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 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그의 비판정신이 이 시집에도 뚜렷이 표출되어 있고 그 시들은 시집의 3부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 비판적 지성을 지닌 문학인은 모든 권력을 악으로 본다. 플라톤이 꿈꾼 이상 국가는 역사에서 실현된 적이 없다. 아무리 좋은 이념과 선의에 바탕을 둔 권력이라 하더라도 권력이 타인을 통제•지배하는 순간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억압의 요소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예술가, 문학인은 본능적으로 억압을 기피하고 자유를 추구한다. 모든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자라는 말도 있다. 진정한 문학인이라면, 그가 원하는 정치체제가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권력 형태로 민중에게 다가올 때, 그것이 행사하게 될 억압을 주시하고 그것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강인한은 그러한 비판적 지식인의 자리에 서 있는 시인이다.
2. 인간에 대한 관심과 순결성의 지향
강인한 시인이 현실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인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작詩作의 출발과 끝에는 늘 인간이 있다. 인간은 한 마디로 딱 잘라 규정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존재다. 인간이 이루어내는 역사 역시 복잡다기한 몇 겹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인간과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 역시 복합적 다층의 시각을 갖기 마련이다. 강인한 시에는 다층적인 인간 이해의 저변에 흐르는 두 개의 축이 있다. 인간의 양심과 정의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바탕을 둔 리리시즘이 그것이다. 그것은 시집의 앞에 놓인 「푸른 당나귀」와 「두 개의 인상」만 보아도 단번에 확인된다.
「푸른 당나귀」는 이집트 여행 때 목격한 식당 광경을 시로 구성한 것이다. 2019년 2월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이집트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파이윰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다. 거대한 오아시스 분지 형태의 도시로,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 농업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고대 유물과 유적이 많다. 카이로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시인은 그곳의 고급 호텔에 딸린 식당 ‘푸른 당나귀(Blue Donkey)’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식당 천장에는 하얀 배에 푸른 등을 한 당나귀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그 모형은 거꾸로 매달려 있어서 천장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 반대쪽 세상에 자리 잡은 파이윰, 그곳 식당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푸른 당나귀. 시인은 그 장면에서 이국적 정취와 함께 이방인들 사이에 이질적으로 위치해 있는 자신의 위상을 새롭게 자각했다. “뒤집힌 세상을 / 하루 종일 / 또각또각 밟고” 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 푸른 당나귀에서 연상했다. 그러니까 푸른 당나귀는 한갓 여행의 풍물이 아니라 이질적인 세계를 걷고 있는 시인 자신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사람에 관심이 있지 여행 경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인상」은 제목 그대로 두 개의 상황을 독자의 상상에 맡겨 그것이 어떠한 인상을 주는지 자유롭게 방임한 작품이다. 여름날 모두 잠든 한밤중에 앞마당 우물에서 물 끼얹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집에 사는 열여덟 여고생이 목욕을 하는 것일까? 흰 교복 블라우스를 정갈하게 입고 다니던 여고생의 복숭아처럼 솟은 흰 가슴이 보일 것 같다. 화자는 잠들락 말락 어렴풋한 감각으로 한 줄기 물소리와 함께 정갈한 흰 가슴을 상상해 본다.
또 하나의 장면은 장례식장이다. 이곳이 장례식장 빈소라는 것은 셋째 연의 “웃고 있는 사진 속 / 향연香煙처럼”이란 구절에서 암시된다. 향연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이 배치된 것이다. 그 구절 다음에 “흰 / 물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세월이 흘러 열여덟 살 여고생이 나이 들어 생을 마친 사실이 연상된다. 그러한 문상 중에 문득 누군가 지나가는 말처럼 흘리는 “진심으로 달라고 하면 / 주고 싶데요”라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순결한 여고생이 세월의 파도를 만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여성의 삶과 어디선가 들려온 그 말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황을 통해 우리는 삶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높낮이를 조용히 관조해 볼 뿐이다. 이 시에서도 시인의 인간에 대한 강력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시를 함께 읽고 생각해 보면 머나먼 서쪽나라 파이윰에서 본 ‘푸른 당나귀’ 모형이나, 오래전 기억에 남아있는 한 여고생과 흰 물소리의 청순한 감각과 함께 향연 속에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의 모습이나 모두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간직한 삶의 단층들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기억의 갈피에 남아 있는 것이건,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이건, 인간의 다양한 행적과 삶의 굴곡진 곡절을 사색하고 여과하여 시로 표현한다. 그러한 사색과 실천의 시간 속에서 그의 의식의 지향은 언제나 순수를 향한다. 그것은 앞의 「두 개의 인상」에서도 확인되지만, “사물은 / 내 피가 닳는 저 어둠의 뒤에서 / 희게 말하고 / 희게 웃는다.”(「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라는 구절에서 분명히 체감된다.
인간에 대한 관심, 순수에 대한 지향은 비극적 운명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된다. 우리의 삶이 순수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인간 행위가 정도를 벗어나 파탄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에 동일한 제목을 가진 「물 위의 오필리아 1」과 「물 위의 오필리아 2」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가련한 여성을 통해 인간의 슬픈 운명을 뚜렷이 각인한 작품이다.
햄릿의 애인 오필리아는 광란에 빠진 햄릿이 그의 아버지를 왕으로 오인해서 죽이자 충격을 받고 실성해서 떠돌다 물에 빠져 죽는 인물이다. 꽃묶음을 나뭇가지에 걸려고 하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 물에 빠진 것으로 되어 있고 옷이 물에 다 젖도록 노래만 부르다 점점 물속에 잠겨 익사했다고, 등장인물의 대사로 오필리아의 사연이 전달된다. 당시는 자살이 죄악시되기 때문에 자살인지 익사인지 불분명하게 처리되었다. 이 가련한 여인의 죽음이 연민을 일으켜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물 위의 오필리아 1」은 오필리아가 물에 떨어져 생명을 잃어가는 장면을 정교하게 포착하여 섬세하게 묘사했다. “물 위로 떠내려간 하얀 쪽배였네”라는 구절은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죽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고한다. 자작나무 흰 그림자가 비둘기 빛 그늘을 드리워 죽음을 애도하고, 늙은 버드나무 꺾인 가지가 향긋한 수액을 부어주어 장례를 예비했다고 했다. 여자의 흰 손가락 곁으로 소금쟁이가 무정하게 건너는 장면도 묘사했다. “버림받은 처녀 더운 눈물”은 볼 수 없지만 오필리아의 처지를 생각해서 상상해 넣은 것이다. 오필리아의 몸이 물에 잠겨 흔들릴 때 무정한 물뱀인 양 백양나무 이파리와 자작나무 이파리가 어깨 겯고 떠내려가는 장면도 보여주었다. 버림받은 처녀의 가련한 죽음을 애도하고 미화하는 시인의 마음이 절도 있는 진심으로 표현되었다.
「물 위의 오필리아 2」는 오필리아가 화자로 등장하여 앞의 시의 끝 구절을 이어받아 “그래요, 한 마리 물뱀인가 봐요”로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여”라고 햄릿을 지칭하며 자신의 죽음을 따라와 보라고 청한다. 오필리아가 햄릿에게 하는 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의 비감이 크게 고조된다. 햄릿과 다정히 지내던 시간도 회고하고 죽기 전 머리에 여러 가지 꽃을 얹어 아름다운 화관을 만든 것도 이야기한다.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남기기 위한 오필리아의 마음의 배려를 표현한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고 레테의 강을 넘어 죽음의 세계로 가는 처지니 더욱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 슬퍼한다.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눈부신 당신 웃음을 오래 담고 싶다며 눈을 감는다. 오필리아의 소망은 작고 예쁜 로빈 새로 다시 태어나 당신의 새벽을 깨워주고 싶은 것이다. 초록 그늘에 연두의 환한 빛이 햇살에 아른대며 자신의 몸을 따라 내려간다고 말하고 이별의 결사를 끝맺는다. 앞의 시가 순정한 소녀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라면 이 시는 소녀의 지순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두 편의 시에서도 인간에 대한 관심과 지고지순한 순결성에 대한 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그의 시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순수에 대한 지향에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는 초지일관 이러한 주제에 바탕을 두고 시를 써 온 것인데, 인간의 진실을 유린하거나 순결성을 저해하는 요소에 대해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러니 서정적 순수 지향과 현실적 비판 정신이 분리된 두 측면이 아니라 한 몸의 두 얼굴이라는 사실도 다시 깨닫게 된다.
3. 창조의 의지와 새로운 다짐
70대 후반에 접어들었음에도 그의 창작의 열의는 뜨겁고 정신의 순도는 고고하다. 그것을 선언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시집 끝에 두 편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마음이여, 길어 올릴 뿐」과 「적셔다오, 나를 적셔다오」 두 편의 시다. 여기 담긴 창작의 정기는 서늘하면서도 매섭다.
깊은 마음 속 어두운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그렇게 한 십 년을 내리다가
길어 올린다.
캄캄한 밑바닥에 배 깔고 엎드린
잉어의 퍼덕이는 금빛
울음을 길어 올린다.
무서움도 없이
밧줄이 견디는 힘의 그 끝까지
길어 올린다.
마침내 두레박에 실려 나와
빛 부신 햇물과 만나
용이 되어 날아갈지라도,
몇 조각 비늘에서 쏘여지는 금빛으로
내 눈이 멀지라도
길어 올린다.
마음이여, 길어 올릴 뿐이다.
⸺「마음이여, 길어 올릴 뿐」 전문
솟아오르는 빛의 샘물이여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다오.
시들은 꿈의 정령이 피로한 내 가슴에
지친 나래를 접기 전에,
불씨를 입에 물고
눈 내리는 밤의 광야를 향해 떠나간
작은 새들은
이 밤에 돌아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 숨은 충혈된 살의를
아 벗어나지 못한다.
밤의 기슭을 흐르는 아름다운 추상이여
빛의 샘물이여
몰려오는 어둠의 피 묻은 발자국 소리를
지금 내가 듣는다.
강철의
어둠 속을 캄캄하게 날뛰는 개,
개를 개라고 부를 수 있는
강철보다 강한 이 밤의 신념을 다오,
내가 듣고 볼 수 있도록
적셔다오, 나를 적셔다오.
빛의 샘물이여
불씨를 입에 물고 떠나간 작은 새들은
이 밤에 돌아오지 않는다.
⸺「적셔다오, 나를 적셔다오」 전문
「마음이여, 길어 올릴 뿐」에서 깊은 마음 속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일을 한 십년을 계속하다가 비로소 길어 올린다고 했다. 하나의 시상이 착상되면 금방 시를 쓰지 않고 지속적인 노력과 시간의 숙성을 통해 완성한다는 뜻이다. 우물 안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잉어의 퍼덕이는 금빛 울음까지 길어 올리는데, “밧줄이 견디는 힘의 그 끝까지” 길어 올린다고 했다. 극한의 상태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전력을 다해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전심전력으로 잉어의 금빛 울음을 길어 올리면 눈부신 햇살과 반응하여 거룩한 용으로 승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눈부신 금빛에 “내 눈이 멀지라도” 창작의 두레박을 길어 올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것은 창작에 대한 그의 의지가 확고하고 냉엄한 것임을 의미한다.
「적셔다오, 나를 적셔다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현실에 대한 저항을 포함하여 시 창작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올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극단의 의지를 드러냈다. “솟아오르는 빛의 샘물”에 잠기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불굴의 신념을 표현했다. 최후의 날은 시든 꿈의 정령이 피로한 내 가슴에 지친 나래를 접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그런 최후의 시간을 맞이하기 전 싱싱한 감성이 살아 있는 순간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진정한 시를 창조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다.
창밖의 현실은 좋지 않아서 “어둠 속에 숨은 충혈된 살의”가 도사리고 있고, “몰려오는 어둠의 피 묻은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캄캄한 어둠 속에는 사나운 개들이 날뛰고 있다. 그는 사나운 현실을 직시하며 “개를 개라고 부를 수 있는 / 강철보다 강한 이 밤의 신념을 다오.”라고 외친다. 인간의 진실과 내면의 순결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면, 그 폭압에 눈감지 않고 맞서서 저항의 증언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작은 새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이 모든 사실을 바로 보고 바로 들을 수 있도록 빛의 샘물이 자신을 적셔주기를 간곡히 기원하며 시를 끝맺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현실을 증언하겠다는 시인의 확고한 신념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두 편의 시를 시집 끝 부분에 배치한 것은 70대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인의 연륜을 고려하여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자기 다짐과 자기 선언을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나 젊은 감성으로 새로운 시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푸른 시의 방〉의 주인으로서 후배 시인들에게 정당한 시인의 위상을 명시적으로 남기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두 편의 시인 선언이 미학적 표현의 구도로도 훌륭한 조응을 이루고 있어 미래의 창조를 예비하는 전범으로 삼기에도 조금의 어긋남이 없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할까. 미덕에 복락을 겸한 시의 배치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이 글을 마친다. (*)
⸺격월간 《현대시학》 202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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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 / 1986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저서 『몰입의 잔상』 『목월과의 만남』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 『미당과의 만남』 『백석을 만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