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회 발코니
저자 박세미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행 2023.11.11.
출판사 서평
“우리는 모두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걸음걸이를 가졌지”
─걷고 뛰다가 멈춰 서서 생각하기
시의 화자들은 어느덧 제법 안정적이고 평온한 하루를 보내게 된 듯하지만, “절대 상하지 않겠다”(「일조권」)는 다짐을 되새기듯 끊임없이 걷고 뛴다. “늪에/빠지지 않기 위한”(「현실의 앞뒤」) 걸음걸이로, “두 팔목이 잡힌 채로”(「사회의 시간」)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아슬아슬하고 숨 가쁘다. “팔다리를 효율적으로 가동”해 “최대한의 속도를”(「육상선수」) 내는 법을 훈련하지만 누군가를 제치거나 결승선에 닿는 데 그 목적을 두진 않는다. 오히려 때로는 “한 발자국씩 뒤로”(「뒤로 걷는 사람」) 가거나, “스툴의 다리 끝에 올라서는 연습을”(「기능」) 하며 시간을 유예한다.
‘시간’은 박세미식 세계에서 사회를 주관하는 개념이다. 시인은 과거와 미래의 양 끝을 연결한 고리에 현재의 몸이 묶여 있다고 느끼며, “다른 존재들과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감각한다. 매일같이 걷고 뛰는 동작을 반복하는 인물들이 이러한 시간의 자장에서 벗어나는 공간은 오직 ‘발코니’뿐이다. “안에도 속하지 않고 밖에도 속하지 않은, 안과 밖의 자장에서 벗어난 무중력의 시간”(인터뷰)이 흐르는 곳이다. 「Balkon」에서 ‘나’의 딸 리자는 안온한 발코니 위에 선 채로 “아름답고 무섭고 아득한 사회의 바다”를 항해한다.
Balkon* / 박세미
나의 딸 리자는 발코니를 건물의 정면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라고 한다**
오늘도 리자는 작은 배를 타고 항해중이다
등 뒤에서 다른가족들이 식사를 하든 말든,집안 청소를 하든 말든,노랫소리가 들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앞에 펼쳐진 바다만을 경험한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방금 돛을 펼친 사람처럼
어느날 리자가 말한다
사실 발코니의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빠그렇지요?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할지, 무언가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어보는건 어때?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를 계속 찍으면 무엇이 보일까? 그건 나도 모른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길 발코니 아래
끊어진 닻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Orhan Pamuk, Balkon, Steidl,2019.그는 2012년 12월부터 2013년 4월까지 5개월 동안 자신이사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8천5백여 장의 사진을 찍었고,그중 5백여 장을 묶어 책으로 냈다.그의 아파트 앞으로 항해하는 배가 지나가곤 했다.
**지오폰티, 건축예찬 김원 옮김, 열화당,1979.
앞선 시의 제목은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집 『Balkon』에서 따왔다. 파무크는 반년간 매일 발코니에서 바라본 풍경을 8천5백여 장의 사진으로 남겼고, 그중 5백여 장을 책으로 엮었다. 소설 쓰기가 막힐 때마다 발코니에 서서 바깥 풍경을 찍고 그 꾸준한 기록을 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낸 파무크처럼, 『오늘 사회 발코니』에는 성실한 생활의 포즈를 묘사한 시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 20년간 화이트 셔츠 공장에서 일해온 ‘나’는 “마흔 가지가 넘는 와이셔츠 제작 공정에서 칼라와 커프스를 다는” 작업을 수행한다(「생산 라인」). 1인 운영 국숫집의 주인인 ‘그’는 “국수 한 그릇이 손님에게 나가기까지 필요한 모든 과정”을 도맡는다(「일」). 생각이 끼어들 틈 없는 반복적인 일상을 멈추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사고다. “검붉은 피가 번지”고, “노릇하게 구운 냄새가 나”고, 얼굴도 모르는 “옆자리의 동료가 사라”(「생산 라인」)지는가 하면, “기계가 그의 손을 반죽인 양 빨아들인”(「일」)다. 사고(事故)가 일어난 순간에서야 사고(思考)가 시작된다.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가끔씩 “스스로를 인질 삼아 겁박”(「일 앞에서」)한 후에야 비로소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를 얻는다.
“나의 사회와 너의 사회가 만나는
촉촉한 뽀뽀”
─오늘의 맥락 위에 지어 올린 ‘실시간 시’
모빌 / 박세미
그림자에 매달려
그림자처럼 살던 사람
전시를 열기로 한다
여행을 떠나기위해
몸에서 가장 먼곳부터
아프지 않을 만큼
오렸다
실에 걸었다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잘라냈다
전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시장에 그림자가 가득 찼다
감정에 매달렸다
그사이
사람 모양 그림자
전시장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끊어진 실이 그림자의 그림자에 매달려 간다
「모빌」은 시인이 처한 일상, 노동, 예술의 균형감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그림자처럼 살던 한 사람이 전시를 열기로 한다. 그는 “몸에서 가장 먼 곳부터/아프지 않을 만큼” 오려 실에 걸지만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잘라”내자 “전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탄생하는 ‘실시간 예술’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겐 “아무것도 예술 작품이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 예술 작품”(「가난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방」)이다. 출근하고, 노동하고, 웃거나 울고, 저녁을 먹고, 잠드는 생활인인 동시에 곧 시를 쓰고 그림을 보고 전시를 관람하는 예술인이다.
(중요한 것은)
그는 매일 한 권의 도록을 꺼내는 사람
그날그날의 기쁜 페이지를 펼쳐 테이블 한가운데에 두는 사람
전화를 받다가 정확히 거기에 커피를 쏟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회화 작품을 프린트해 벽에 붙여두는 사람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를 쓰는 사람
필요하다면 그것을 떼어 바닥에 깔고 짜장면을 먹는 사람
침대에 누워 시스티나성당의 천장을 바라보는 사람
이윽고 코를 고는 사람
-「가난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방」 부분
가난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방* / 박세미
이 방에서 아무것도 예술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면,그 렇다
이 방에서 모든 것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역시 그렇다
이곳에는 책 한 권을 펼쳐놓을 테이블이 있고,
그림 하나를 세워두거나 걸어둘 벽이 있고,
조명이 있고 의자가 있고 작은 창고가 있고...... (이것들은 미술 수집가의 방이 아니더라도 어디에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는 매일 한권의 도록을 꺼내는 사람
그날그날의 기쁜 페이지를 펼쳐 테이블 한가운데에 두는사람
전화를 받다가 정확히 거기에 커피를 쏟는사람
한 달에 한 번 회화 작품을 프린트해 벽에 붙여두는 사람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를 쓰는 사람
필요하다면 그것을 떼어 바닥에 깔고 짜장면을 먹는 사람
침대에 누워 시스티나성당의 천장을 바라보는 사람 이윽고 코를 고는 사람
*알바 알토, <부유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집> 『몸부림』 에로시스, 2021 변용.
이 시의 화자는 생활과 예술이 서로를 간섭하고 침범하는 공간 속에 놓여 있다. 이십대를 통과하며 엮은 첫 시집이 일상에서 분리해낸 시적 순간들을 영감으로 삼았다면, 그다음 10년을 지나고 있는 시인은 다만 오늘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맥락을 지어 올린다. 생활의 토대 위에 시적 풍경을 건설한다. 시인이자 직장인, 한 집안의 맏딸이자 한국에 거주하는 삼십대 여성으로서, “오늘 나의 노동에 관해, 오늘 읽은 책에 관해, 오늘 걸은 도시에 관해, 오늘 만난 사람에 관해, 오늘 꾼 꿈 위에 시적 언어를 대응시키고, 중첩시키고, 충돌시키고, 균열을 발생시키면서”(인터뷰) 충실하게 다음 보폭을 내디딘다.
누군가는 한집에 모이기보다 발코니 너머로 안부를 전하는 시인에게 모종의 거리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박세미는 그런 의문에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즐거운 사회’는 이해받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애써 욕심내지 않는 것, 곁에 있는 사람들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각자의 내면에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짐작 속」)이 쉬이 꺼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켜봐주는 일이라고. 「빈집에 갇혀 나는 쓰네」의 화자는 “빈집에 초대되”어 “스스로를 가두고” 다만 “쓰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너무 막막하게 느껴질 때면 그저 발코니로 나가봐도 좋을 것이다. 그곳에 서면 맞은편에도 발코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어떤 순간에는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구하기도 할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생활 전선
현실의 앞뒤
생산 라인
순환세계
장식
일조권
육상선수
뒤로 걷는 사람
일
선택권
서프라이즈 박스
실수
기능
Balkon
현관
외출
보이드
2부
빈티지
우는 몸
점의 위치
얼굴 무거운
사회의 시간
나는 터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기원전 3억 5천2백만 년경부터 살아온
밤의 인터체인지
밥과 술
짐작 속
백내장
나와 그녀
표면으로 낙하하기
살아 있는 작은 안개가 하는 일
리액션
매거진
가난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방
벽 없는 집
새로운 생활
3부
부정적 유산
미술관을 위한 주석
11 구역
잠의 마천루
파사드
일 앞에서
거울 앞에서
어떤 키스
구라마온천 가는 길
접속
사치
꿈의 형벌
무심코
모빌
빈집에 갇혀 나는 쓰네
인터뷰
이웃한 발코니의 사람들로부터 · 박세미
(요약)
1. 시집의 배경과 의의
1-1. 첫 시집 『내가 나일 확률』 해설에서 언급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의 응답으로 이번 시집이 탄생.
1-2. 시인과 편집자는 처음 만났지만, 시집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만남’이자 특별한 재회.
1-3. ‘되고 싶은 것’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더 멀어진 느낌.
1-4.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속는 힘으로 시를 쓰며 한 시절을 단락 지음.
1-5. 단락을 마무리하는 데는 용기와 포기가 동시에 요구됨.
2. 시집의 특성과 주제
2-1. ‘실시간 시’: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집중적으로 쓰여짐.
2-2. 오늘을 쓰지 않으면 겪지 않는 느낌, 오늘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라는 자각.
2-3. 현실과 시가 뒤섞인 느낌이 강하며, 발을 매립한 듯한 시들도 있음.
2-4. 일상에서 도피하지 못한 채 땅에 박혀 ‘식물의 힘’ 같은 것을 느낌.
2-5. 현실의 단면에 각주처럼 표식을 남김(기록의 의미).
2-6. 개인적 일상의 표면에서 맥락을 발견하고, 노동·책·도시·사람·꿈 등을 시적 언어로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층 형성.
3. 시적 방법론: ‘표면으로 낙하하기’
3-1. 시인의 ‘표면으로 낙하하기’ 방식에 강한 충격과 영감을 받음.
3-2. 표면을 핥듯 관찰하고, 사유나 관념을 섣불리 욕망하지 않음.
3-3. 관찰의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현실 인지 과정이 깊어짐.
3-4. 이러한 관찰은 다음 시적 단계로 향하는 상상력을 제공함.
3-5.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인지하고 시로 옮기는 과정, 그리고 시와 현실의 작용 관계 탐색.
4. 몸에 대한 인식
4-1. 몸은 현실의 한 층위로 인식되며 제약이자 부담으로 여겨짐.
4-2. 몸의 질량이 무겁고 귀찮게 느껴져 누워 있을 때 가장 자유로움.
4-3. 몸과 정신 사이의 차이에 대해 민감한 감각 가짐.
4-4. 요가 수련을 통해 ‘몸속의 달’, ‘커다란 물고기’, ‘태어난 물’ 같은 이미지로 몸을 재감각.
4-5. 몸의 기관들이 잠겨 있다는 감각 → 자물쇠를 푸는 과정 시작.
4-6. 공연 <견고함으로부터>에서 ‘책상·돌·인간’이라는 물질의 사회를 감각.
4-7. 물질들과의 능동적인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발견함.
5. 산책과 발의 이미지
5-1. 산책 코스는 반려견 설화가 정함.
5-2. 비염 때문에 산책 중 코에 집중, 발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임.
5-3. 누워 있을 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습관 있음.
5-4. 시 속에는 ‘걷는 사람’, ‘뛰는 사람’, ‘붙잡힌 다리’, ‘스툴 끝에 선 다리’ 등 다양한 발 등장.
5-5. 이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인식에서 태어났으며, 시인의 발도 아직 인식되지 않은 곤경을 지님.
6. 사회와의 관계
6-1. 발바닥에 깊숙이 박힌 ‘생활 전선’이 시인의 문제의식.
6-2. 건축가 친구의 ‘푸하하하’ 웃음 → 자유와 해방의 에너지로 작용.
6-3. 시인도 복잡한 직능 앞에서 싸움을 계속하며, 방방 뛰는 발바닥에 힘을 숨김.
6-4.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지만, 스스로를 이해시키는 데 실패함.
6-5. ‘이해 불가능한 제한 구역’을 가진 사회를 긍정적으로 인식.
6-6. 디자인 속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에 설렘을 느낌.
6-7. 앞으로의 작업은 이해와 비이해의 합작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함.
7. 사람과의 관계
7-1. 시 쓰는 동안 사람들과의 공존, 사회 제도 안에 들어왔음을 실감.
7-2. ‘발코니’는 타인을 인식하는 경계 지점.
7-3. 사람을 좋아하지만, 늘 좋은 것만은 아님.
7-4. 베니스에서의 만남(5년 전): 비엔날레에서 각자 숨겨둔 식물과 시 이야기를 나누며 동료로 연결됨.
8. 어린 시절과 시간
8-1. 매미의 울음소리로 찾은 매미 → 매미에게 손가락 찔림 → 날개와 다리를 뜯은 기억.
8-2. 매미의 울음은 죗값을 받는 느낌으로 이어짐 → 생태계 속 존재로서의 자각.
8-3. 과거와 미래의 끝이 연결되어 있고, 현재의 몸이 그 고리에 묶여 있음.
8-4. 시 “순환세계”처럼 몸이 순환 구조 안에 있다는 감각.
8-5. 시간은 사회를 주관하는 힘으로서, 자연스럽게 흐르기보다 강제적임.
8-6. 시인은 시간에 끌려가며, ‘허무의 꼬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느낌을 품음.
9. 고통과 시
9-1. 시가 되지 못한 고통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님.
9-2. 고통을 ‘승화’시키기보다 ‘경유’하며 언어의 돌을 하나씩 놓는 방식으로 접근함.
10. 발코니의 상징
10-1. 발코니는 집에 부속된 구조물이지만, 안과 밖의 경계를 벗어난 무중력의 공간.
10-2. ‘어제와 내일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위치한 행간의 공간.
10-3. 현실에 정박한 작은 배로서, 이 시집 자체가 하나의 발코니일 수도 있음.
10-4. 발코니 저편에는 아득하고 무서운 사회의 바다가 펼쳐져 있음.
10-5. 파도가 밀려오면 발코니도 함께 흔들림.
11. 이웃한 발코니의 사람들
11-1. 질문을 던져준 이웃들: 사진작가 김경태, 편집자 방원경, 디자이너 오혜진, 안무가 이종현, 큐레이터 겸 원예가 정성규, 건축가 한승재.
11-2. 이들의 질문을 통해 자기 존재 방식을 배우게 됨.
11-3. 답하는 과정에서 이웃과 연결되었고, 감사를 전함.
11-4. 오랫동안 서로의 이웃이길 바람. (질문은 변형 및 누락된 부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