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녀 덕에 다녀온 영월 관광
오늘은 질녀 덕에 영월로 미식 관광을 나섰다. 잔뜩 흐린 날씨, 따끈따끈한 아랫목과 로맨틱한 영화가 그리운 으스스한 기온이었지만 환불 불가 예약임으로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16시 전까지 동생네가 제안한 문화 체험이 한둘이 아니었다. 맛집 시식, 장릉 탐방, 미술관 관람.
11시경 출발했다. 일반국도를 1시간 반 서남쪽을 향해 달렸다. 주위는 온통 운무에 가린 경치, 눈 익은 옛 산수화의 첩첩산중, 그 아래 좁은 계곡을 흐르는 물, 어쩌다 보이는 집들, 비탈진 마을, 노랑 코스모스 같은 금계국이 하늘거리는 언덕, 하얀 감자꽃 들판, 아직은 키가 작은 옥수수밭, 그리고 정연한 고랑과 이랑이 아름다운 갈색 흙밭, 강원도 내륙 높은 산지 길을 관통한 것이었다.
<장릉시골밥상>에서 먹은 점심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곤드레밥에 버섯전골과 된장찌개가 딸린 메뉴였다. 강원도 특식인 달콤새큼한 장아찌 채소 반찬이 흔히 집 근처 식당에서 먹은 것이었다. 쓴맛이 매우 강한 오가피, 두릅과 닮은 엄나무(개두릅), 인삼의 실뿌리가 연상되는 삼채뿌리를 구별해 보았다.
산책 삼아 길 건너 장릉에 들어갔다, 작은아버지 이조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1455) 단종의 무덤이었다. 장릉은 소나무 숲길 끝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시체가 있을 리 만무한 무덤이 멀리서 보아도 웅장했다. 할아버지 세종의 사람을 듬뿍 받았던 단종이 17살에 숙부가 내린 사약을 받은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단아하게 위엄을 갖춘 무덤이 단종 본인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내는 단종의 애사를 집약하는 건축물로 배치되어 있었다. 단종에게 올리는 국가차원의 제향을 위한 재실(정자각), 단종의 비각, 사육신 등 충신들의 제사를 지내는 제단(배식단), 제사를 관할하는 한옥 등이었다.
친형제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를 보면 인간의 본능 권력욕이 참으로 처참하다. 현실의 정치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살인은 없어도 여전히 치열한 암투의 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제할 수 없는 인간 본능이 안타까울 뿐이다.
발길을 서둘러 <인도미술박물관>은 추후로 미루고 젊은달(영월)와이파크로 향했다. 영월하면 탄광촌은 옛말인 듯 문화시설이 한둘이 아닌가 보다. 주차장 입구 강렬한 붉은 색의 길고 긴 장대에서 눈이 떼지지 않았다. 압도하는 크기가 놀라웠다. 인터넷 사진이 주는 인상과는 너무 달랐다. 뚫린 문으로 들어가니 인디언 텐트 속 같았다. 벽면 한쪽에 길이가 다른 쇠파이프가 잘린 표면을 드러내며 물결 의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앉아보니 아플 거라는 우려가 싹 가시었다. 작품 제목 그대로 멀리서 보면 세워 놓은 <붉은대나무. 높이10m> 뭉치였으나 쓰다 남은 쇠파이프의 재활용이었다. 작가는 어디서 그 많은 헌 쇠몽둥이를 모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잘라 이었는지 기술과 정성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붉은대나무>를 나서니 붉은 쇠파이프 나룻배 모형 통로가 매표소로 안내했다. 연이어 아늑한 분위기의 돔에 들어갔다. 일정한 길이의 소나무가 비스듬히 엮이며 올라가 쾌나 높고 큰 반구의 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가운데 동그랗게 뚫린 천장과 마를 대로 마른 소나무 장작 사이로 온화한 빛이 스며들었다. 금방 안온한 마음이 느껴졌다. 원시인 움막이 연상되었다.
재활용의 설치미술가 최옥영이 붙인 제목은 <목성>이었다. “생명의 분화구와 같은 빛과 에너지를 품은” 엎어 놓은 “바구니”에서 관객은 차분한 평화 입자의 마음이 된 것이다.
그 다음 전시실은 방 전체가 꽃으로 덮인 아름다운 꽃동굴이었다. 물론 진짜 같은 가짜 꽃이었으나 향기가 은은했다. 최옥영 부인 그레이스박(박신정)의 작품 <사임당이 걷던 길>이었다. 작가는 복잡한 구성으로써 생로병사의 인생을 표현한 것이리라. 포토존으로써 의자가 놓여 있었다. 관람객의 참가를 유도하는 설치 미술의 장점이었다. 부부는 이미 강릉에 <하슬라아트월드> 미술관을 창설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하슬라는 강릉의 옛이름이다.
다음 방엔 공중에 떠 있는 긴 원기둥에서 맞은편 벽의 그림이 보이는 조형물이었다. 즉 가운데가 빈 둥근 원이지만 가장자리는 매끈한 나무조각들이 삐죽빼죽 엉켜서 긴 원통을 만들고 그 원통이 길게 누워있는 형태였다. 여기서도 사람들이 잘린 중간 공간에 들어가거나 얼굴을 내밀며 사진 찍는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버려진 나무 파편들로 이루어진 최옥영의 <우주정원>, 우주로 가는 통로를 시도한 것이라 한다.
전시가 다시 밖에서 계속되었다. 붉은 쇠파이프 3층 구조물 <붉은 파빌리온>이었다. 열린 블라인드처럼 파이프 사이로 안과 밖. 위와 아래가 보였다. 어지러워 발밑은 안 보고 위를 보며 올라갔다. 외계를 상징하는 듯한 기인한 물체(거울도마뱀)가 파이프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지 나가는 중인지 구별이 안 되게 천장에 걸쳐 있었다. 외계 동물이 징그럽고 그냥 싫었다.
반대편 구조물 한가운데는 노끈 그물망이 구불구불 공중에 떠서 우주선 터널 같았다. 실제로 추가비를 내면 터널을 통과하는 놀이기구가 된다고 한다. 이곳 설치 미술은 매우 실용적이다.
<붉은 파빌리온>에서 다음 실내 전시실로 향하는 길은 붉은 쇠파이프 옥외 통로였다. 제법 긴 거리의 가지런한 통로가 직각으로 꺾였다. 공상의 세계에서 본 복도 인상을 주었으나 <바람의 길>답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과 들, 온 사방을 둘러보는 여유로운 순간을 갖게 했다.
좀 떨어진 곳에 은빛 알루미늄판 집합체의 하나하나가 모두 한결같이 위로 향하며 움직이는 동작이었다. 토네이도가 연상되는 대형 원통 조형물이었다. 자연은 <바람의 길>에 겨울 칼바람이 일게 하고, 예기치 않게 위협적인 토네이도 바람도 생성하지 않는가. 매력적인 바람만 존재하는 자연이 아닌 것을 깨우치려는 의도인지 모른다.
연이은 실내 전시실에는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재료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젊은달와이파크>의 전신이었던 술샘박물관도 사진과 주막 모형으로 옛 자취를 모색하고 있었다. 술샘박물관은 이곳의 지명인 주천면의 "주천酒泉" 의 전설에서 비롯된 전통주 박물관이었다. 즉 신분에 따라 양반부터 천민까지 종류가 다른 술이 흘러나왔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었다.
구 술샘미술관 전체가 강원도 출신 최옥영(1959~ )의 우주를 생각하는 도량으로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통로와 구조물로써 하나의 커다란 공원과 같은 공간예술, <젊은달와이파크. 2019>로 재탄생된 것을 알 수 있는 관람이었다.
오늘의 목적지 <그래도팜>이 5분 거리였다. 새로운 경험에 가슴이 설렌 프로그램은 토마토 전문가의 설명을 들은 후 각가지 토마토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흙밭 농장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일단 훤하고 아담한 공간에 놀랐다. 깔끔한 자갈밭 맞은편 정갈한 2층 양옥이 모두 흰색이었다. 왼쪽에 무척 아름다운 작은 별채가 주홍색이었다. 색다른 공간이었다. 먼 산이 품은 작은 현대 문명이 이채로웠다.
20여 명 되는 손님을 이끌고 <그래도팜> 대표는 토양전시실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토양관리의 중요성이 많이 와닿았다. 지구는 도시화로 토양이 점점 줄어들고, 원래 비옥도가 낮은 우리나라는 화학비료를 많이 써서 생산량은 늘었지만 아주 척박해졌다. 그런데 토양의 생성은 아주 느리다.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설명 중 재미는 대표의 퀴즈 질문에 손들고 맞는 답을 하면 얇은 주홍색 ‘여권’에 스티커가 붙여지는 것이었다. 3개 이상을 얻으면 나중에 상을 준다고 하니 모두 귀가 쫑긋 열렬히 답하는 모습이었다. 3개 맞을 확률이 낮아 내가 남편 것을 내 여권에 붙여 주면 안 되겠느냐 했더니 닮았다고 무슨 관계냐고 물어서 웃었다. 운 좋게도 부부합작으로 나중에 토마토 방향제를 상으로 받았다.
설명은 바깥 유기농 비료저장소에서 계속되었다. 구멍 뚫린 벽돌 칸막이로 만든 3칸에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퇴비의 역겨운 냄새가 전혀 없었다. 유기농이었기 때문이었다. 토마토 고유의 향을 유지하려면 오로지 유기농 비료이어야 하고 유기농 비료는 참나무 껍질, 닭똥, 쌀겨에 빗물이 들어가 토양의 미생물이 작용해야 발효된다. 그러려면 흙을 우리가 서 있는 밖으로 옮겨 여러 번 뒤섞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유기농 개념이 처음으로 확실히 들어왔다. 뿌리는 농약만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비닐하우스로 안내되었다. 나무처럼 키 큰 넝쿨 지지대에 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에어룸이라 해서 에어콘 설치인가 했더니 대대로 보배, 가보의 뜻 에어룸(heirloom)이었다. 토마토의 품종을 구별하는 명사였다. 전세계 25,000종에서 이 농장은 18가지 에어룸을 기르고 있었다. 세상에 색과 크기와 모양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빨간, 노란, 연두, 진보라의 폭넓은 영역에다 진한 체리빛이 익을수록 누런색으로 변하는 토마토, 방울토마토에서부터 오이고추 모양의 노란 토마토, 신데렐라의 둥근 호박 토마토, 수박 줄무늬의 토마토, 관상용 가지 모양이 구별되었다.
미각 테스트가 있는 마지막 시식 시간에 우리의 자리는 주홍색 별채였다. 대표의 티샤츠도 전시장 내부 강조 부분도 모두 예쁜 주홍색이었다. 토마토의 본래 색 주홍색을 살린 아이디어였다. 알고 보니 대표는 전직 디자이너였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의 유기농 농장을 이어받아 온라인 주문은 기본이고 농촌관광을 개척하는 등 매우 독창적인 경영자가 틀림없었다.
농장 이름 <그래도팜>은 자주 듣던 아버지의 말, ‘그래도 해봐야지’ ‘그래도 어쩌겠냐’ ‘그래도 그럼쓰냐’에서 왔고 브랜드 이름 합성어 토마로우(tomarrow)는 “지속가능한 내일의 토마토를 위해 다양한 경험”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즉 토마토 농장 견학, 시식, 피자 만들기 등의 마케팅 상표였다. 재미있는 발상의 이름짓기였다.
우선 커다랗고 두툼한 원판 나무접시에 크기, 색, 모양이 다른 품종 10여 개가 얇게 썬 상태로 부라타치즈와 함께 화려하게 밥상에 올려졌다. 미묘한 맛과 향의 차이를 느끼려 애썼지만 3, 4개 맛본 후 포기했다. 그저 토마토 맛에 토마토 향일 뿐이었다. 유난히 향기로운 올리브오일이 신선한 토마토에 잘 어울려 입맛을 돋우었으나 오히려 향 감식에는 훼방꾼이었다.
둘째 접시는 신맛이 강한 “문어 세비체”였다. 메뉴판에 페루식 회요리라 적혀 있었다. 그리고 라쟈냐, 그다음엔 노랑 “토마토 그라니따”, 시칠리아 빙수, 젤라토였다. 깔끔했으나 포도주가 그리운 식사였다.
어느새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 요리가 영어와 프랑스어 음식보다 인기가 더 있나 보다. 변한 세상 한 귀퉁이가 뒤떨어진 나를 보게 했지만, 질녀 덕에 즐거웠던 하루였다.
첫댓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네.
정말 가 보고 싶어지네
덕택에 나도 관광 잘했어요 ~ ^^
영월까지는 각자 따로 가는 거야 ?
그래도팜 이름도 재미있어.
그래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그래도 ? ^^
맛깔스런 문장으로 자세히 그 여행을 묘사했네. 좋은 경험 하셨구먼 !!!
경위는 질녀덕에 우리는 경위덕에 그래도 팜간접관광 잘했네요.^^
도마토가 저렇게 종류가 많은 줄 몰랐어...난 한 10여가지나 되나 했는데...
도마도는 어디에 넣어도 맛있더라고...
글도 잘 쓰는데 사진도 잘 찍으니 더 좋아 ~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정말 추천하고 싶은 영월이었어요~~
복딩 경위는 글도, 사진도 일품이에요.
덕분에 편히 앉아 영월여행 잘 다녀왔네요.
싱그러운 초록을 보니 에너지가 팡팡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