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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페루에서 1200년 전 미라 발견
1000년을 훌쩍 넘긴 것으로 추정되는 미라가 페루에서 발견됐다. 페루 산안드레스대학 고고학발굴팀은 최근 리마 인근 카하마르키야에서 입구가 봉해져 있는 고대무덤을 찾아냈다. 이 무덤의 흙과 바위를 걷어내자 깊이 2m 정도의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에 들어간 고고학자들 앞에는 줄로 온몸을 묶은 미라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미라는 키 1.3m 정도의 아이로 보였다. 산안드레스대학은 “성별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12~13살 어린이의 미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미라 곁에서는 볼레아도(고대문명 때 돌을 묶어 사용하던 무기), 마테, 구리로 만든 바늘, 세라믹, 밧줄, 옥수수, 고추 등 부장품이 발견됐다.
2022년 검찰 수사건 완전박탈 및 형사소송법 개정안 국회통화한지 2시간 만에 청와대 국무회의 의결 공표
문재인 대통령이 3일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공포안을 의결했다. 문 대통령은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찰개혁은 역사적·시대적 소명에 부합하는 정책 방향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검수완박 법안의 모든 입법·행정 절차가 마무리됐다.
문 대통령은 오전 10시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검수완박 법안을 의결하기 위해 통상 오전 10시에 개최하던 국무회의를 오후 2시로 연기해 비판을 자초했다.
이번 법안으로 오는 9월부터 검찰의 직접 수사권은 현행 6대 범죄에서 2대 범죄(경제·부패)로 줄어들었다. 단 선거 범죄 수사는 오는 12월까지 검찰이 수사할 수 있다.
앞서 국회는 이날 오전 10시 본회의를 열고 수사기관의 이른바 ‘별건 수사’ 금지를 골자로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검찰청법 개정안은 지난달 30일 통과됐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고성을 지르고, 구호를 외치며 거세게 항의했지만, 수적 우위를 점한 민주당은 박병석 국회의장의 협조 아래 법안 처리를 강행했다.
검수완박 입법 절차가 마무리됐지만 민주당이 입법 과정에서 강행한 ‘안건조정위원회 무력화’ ‘소수당의 발언권(필리버스터) 제한’ 등이 의회주의를 위협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민주당이 민형배 의원을 탈당시켜 안건조정위원회 구성을 무산시킨 점과 임시회 회기를 쪼개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시킨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2021년 멕시코시티 지하철 교곽붕괴로 열차 추락 100명 이상 사상
2020년 GP 총격 사건
북한군이 KPV(고사총)를 대한민국 육군 GP에 사격한 사건이다.
"당시 4발의 총탄이 GP 관측소 외벽 하단에 1.5∼2m의 탄착군을 형성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당시 남북 GP간 거리는 1500 m 이상이었다.
2020년 5월 3일 07시 41분, 북한군이 14.5mm 구경 고사총으로 강원도 철원군 제3보병사단 (대한민국) GP를 사격했다. GP 근무자들은 총성을 연속으로 세 차례 청취했다.
07시 45분, GP 소초장(중위)이 즉각 비상벨을 눌렀고, GP 근무자 전원이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했다.
07시 51분, GP 외벽에서 4발의 탄흔과 탄환을 발견한 군은 북한군이 고사총(14.5mm 중기관총)을 쏜 걸로 결론내렸다. 부GP장이 GP 외벽에 총알에 맞은 흔적 4개를 식별했다.
07시 56분, GOP(일반전초) 대대장(중령)이 북한군 GP에 사격을 지시했다. 그는 전날 오후 4시에 퇴근해, 당일 오전 출근하던 차량에서 보고를 받고 지시했다.
08시 1분, GP장 통제하에 12.7mm K-6 기관총 원격사격체계(KR-6 기관총)로 타격을 시도했으나, 고장으로 불발됐다.
08시 05분, GP 외벽에 총알 1개를 추가로 발견했다. 북한군이 사격한 총탄은 전방을 감시하기 위해 GP 관측실에 설치된 방탄 창문 아래에 맞았다. 4발은 1∼2m 내에 탄착군이 형성됐다.
08시 13분, 화상 시스템으로 지켜보던 연대장(대령)이 5.56 mm K-3 기관총 사격을 지시했다. GP에서 K-3를 신속히 옆으로 옮겨 북한군 GP 하단부를 향해 15발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바닥에 떨어진 북한군 탄두가 발견됐다. 확인결과 14.5㎜ 고사총으로 파악됐다.
08시 18분, 12.7mm K-6 기관총으로 15발을 발사했다. 사단장(신상균 소장)이 "북한은 14.5㎜인데 우리는 5.56㎜로 사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해서 동종 화기인 12.7mm K-6 기관총으로 사격하라"고 지시했다.
2018년 스웨덴 2018 세계탁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맞붙을 예정이던 남북여자팀 단일팀 구성
2017년 서울 한낮 기온 30.2℃ 85년 만의 최고기온
2014년 시민모금(4046명 134개 단체 9071만5860원)만으로 세워진 첫 번째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수원) 열림
2010년 제3경인고속화도로 개통
2009년 아시아 공동기금 출범..한국 192억달러 부담
2009년 5월 3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 국가들이 역내 자금지원체계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 다자화 기금의 분담률을 확정하고 역내 채권에 신용보증을 하는 채권보증투자기구(CGIM) 설립에 합의했다.
우리나라는 CMI 공동기금 1천200억 달러 가운데 16%인 192억 달러를, 중국과 일본은 각각 32%에 해당하는 384억 달러씩을 부담하며 나머지 20%인 240억 달러는 아세안 국가들이 분담키로 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양자계약에 기반했던 CMI는 2006년부터 시작된 다자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역내 금융위기 방지를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된다.
중국의 분담금 384억 달러에는 이번 다자화에 독립통화당국으로서 참여한 홍콩의 42억 달러가 포함됐다. 아세안의 분담금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태국 각 47억7천만 달러, 필리핀 36억8천만 달러, 베트남 10억 달러, 캄보디아 1억2천만 달러, 미얀마 6천만 달러, 브루나이.라오스 각 3천만 달러 등이다.
분담금 대비 인출배수는 중국과 일본이 각각 0.5, 한국 1.0으로 정했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등 아세안 ’빅 5’ 국가는 2.5, 나머지 아세안 5개국은 5.0으로 차등화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분담액과 같은 192억 달러까지 위기 때 인출할 수 있다.
2007년 대우건설 임직원 3명 나이지리아서 피랍
2007년 5월 3일 오전 9~10시(한국 시각·현지 시각 새벽 1~2시) 나이지리아 남부 니제르 델타지역 포트 하코트시(市)에서 북동쪽으로 30㎞ 떨어진 아팜발전소 건설 현장에 무장 괴한들이 총을 쏘며 난입해 대우건설 임직원 3명과 필리핀 출신 근로자 8명, 현지인 운전사 1명 등 12명을 납치했다.
피랍된 대우건설 임직원은 정태영(52) 상무와 안종태(53) 전문위원(상무급), 하익환(50) 부장으로 파악됐다.
무장 괴한들은 현장을 경비 중이던 나이지리아 군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고 차량을 탈취해 당시 숙소에서 자고 있던 대우건설 임직원을 납치했으며,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 군인과 민간인 등 2명이 사망했다.
2004년 유한일 서울대 교수, 한국인 최초 훔볼트 연구상 수상
서울대 재료공학부 유한일(柳漢一·53) 교수가 한국 공학자로는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독일 훔볼트 연구상(Humboldt Research Award)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울대는 3일 유 교수가 나노이온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상을 받게 됐다고 밝혔다. 훔볼트 연구상은 인문·자연과학·공학 분야에서 매년 국제적으로 뛰어난 연구업적을 인정받은 학자에게 주는 상으로, 독일 자연과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기념해 제정한 상이다.
유 교수는 수상배경에 대해 “새로운 나노의 발견을 통해 연료전지(Fuel Cell)에 들어가는 전극 또는 전해질 소재 입자를 나노사이즈로 작게 만드는 분야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유 교수의 연구는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지에도 소개된 바 있으며, 초정밀 전자재료 분야에서 다양한 응용이 기대된다고 서울대측은 밝혔다. 유 교수는 5만 유로(한화 7000여만원)의 상금과 함께, 독일에서 6개월~1년 동안 관심분야의 연구를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연구비용을 추가로 지원받게 된다.
유 교수는 74년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거쳐 76년 한국과학원(현 KAIST)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84년 MIT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85년부터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해왔다.
2004년 에어프랑스 네덜란드 KLM항공 인수
2004년 한국, 혈전증(뇌졸증) 치료제 오줌으로 생산하는 `바이오 돼지` 생산에 성공
2003년 강남 교보 개장, 광화문 교보에 이어 문고량 2위
서울 서초구 옛 제일생명사거리에 자리잡은 강남 교보문고가 5월 3일 문을 열었다. 35만종, 200만권을 축구장 두 배 가까운 크기인 3600평(전용면적 1800평)에 꽂아넣은 국내 최대규모다. 높이 100m가 넘는 25층짜리 신축 교보타워 빌딩의 지하1·2층에 서점공간이 마련됐다.
이전까지 국내 최대서점은 광화문 교보문고. 보유장서는 230만권으로 ‘광화문 교보’가 조금 더 많지만, 서점 면적은 ‘강남 교보’가 500평이 더 넓기 때문에 서점을 찾은 독자들이 보다 쾌적하게 책을 고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1999년 국내 천문학자 나일성 교수 이름 딴 소행성 탄생
천문학자 나일성 교수. 국내 원로 천문학자인 나일성(66) 연세대 명예교수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탄생했다. 국제천문연맹(IAU)은 1995년 8월 21일 일본 천체관측가인 와타나베 가즈오씨가 삿포로과학관에서 발견한 소행성을 나교수의 이름을 따 ‘(8895) NHA-1995 Q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1999년 5월 3일 밝혔다.
국제천문연맹은 회보에서 나교수가 사재를 털어 한국 예천에 건립하는 ‘나일성천문관’의 개관을 기념하고 그동안 그가 천문학 분야에서 쌓은 업적을 기려 이같이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 이름이 붙은 소행성은 지난 1993년 후루카와 기이치로 도쿄대 명예교수가 발견해 일본에 천문학을 전수한 백제인 관륵의 이름을 딴 ‘칸로쿠(KANLOKU)’와 1996년 와타나베씨가 발견한 ‘세종’에 이어 세 번째다.
1999년 조흥은행-충북은행 합병 선언
조흥-충북은행의 합병은행인 조흥은행이 3일 공식 출범했다.
조흥은행은 오는 9일 전 임직원의 화합과 뉴뱅크 창조의 결의를 다지기 위한 노사 한마음 행사를 열기로 하는 한편 모든 영업점에서 출범을 기념하는 다양한 고객 사은행사를 실시한다.
조흥은행은 합병은행 출범 전 충북은행과 전산시스템을 합쳤으며 지난 달 초 통합을 선언한 두 은행 노조도 조만간 단일화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 조흥은행은 지난 4월 말 자본금 2조5천311억원, BIS(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2.47%를 각각 기록하고 있다. 한편 조흥은행은 충북은행 영업기반인 충북지역담당 본부장에 임정빈 전 충북은행 상무를 임명했다
1999년 정부수립후 첫 `문화재청` 설립.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청으로 승격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청(廳)이 설립되게 됐다.
국회가 1999년 5월 3일 정부조직법 개정을 통해 문화재관리국을 `문화재청`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문화재 보존-관리 행정이 지금까지 볼 수 없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정부 조직이나 공무원 축소가 `화두`로 인식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문화재청 승격은 뜻밖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힘있는` 정부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은 문화계뿐 아니라 국회와 정부도 공감해왔다.
문화계는 그러나 "문화재청 설립이 단지 1급청이 증설돼 관료들의 `밥그릇 `이 늘어난데 그친다면 개악일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명실상부하게 우리 문화유산을 책임지는 청으로 승격된 만큼 전문성을 최대한 중시해야 하며, 문화재 보존 관리의 강화와 연구기능을 확대하고, 다른 문화기관들과의 협조 증대가 요구된다.
또 새 문화 창출에 기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98년 유럽연합 정상들, 유럽단일통화인 유로화 참가 11개국을 발표
1998년 정부소장 미술품 정부수립 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국민에게 공개
1997년 대북구호물자 전달 위한 남북적십자사 대표 베이징 접촉
1997년 고양 세계꽃박람회 개최
1997년 5월 3일 `97 고양 세계꽃박람회`가 개최됐다. 일산 호수공원에서 열린 이 박람회는 국내 최초의 세계 꽃박람회를 표방했으며, 1백5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그러나 운영면에서 무질서 등 여러가지 미숙한 점을 보인데다, 박람회의 당초 목적인 상담과 정보교환보다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관람객을 유치하는데 치중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김학재 꽃박람회기획단장은 "국내 최초로 치른 세계꽃박람회인만큼 다소 기대에 못미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며 "좀더 나은 세계꽃박람회를 치를 수 있는 노하우를 쌓은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번 꽃박람회를 통한 수출 계약 실적은 24건 14억5천2백만원이고, 상담을 통한 수출 예약은 73건 8억5천8백만원이라고 고양시는 집계했다.
고양시는 이번 박람회를 투자와 수입액이 같은 균형예산으로 치렀다고 밝혔다.
도로 확장-포장 등을 제외하고 박람회에만 약 90억원이 투자됐는데, 입장료 수입 50억원과 시설임대, 광고협찬 40억원 등 수입도 90억원이었다
이후 매년 고양에서는 꽃박람회를 개최한다
1996년 영국, 광우병에 걸린 소 첫 도살
영국 정부가 자국산 소고기가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광우병에 오염됐다고 1996년 3월 공식 발표하자 유럽은 온통 공황상태에 빠졌다. 유럽연합(EU)은 영국산 소고기 전면 금수 조치를 내렸고 대륙과 영국은 긴장 상태에 빠졌다. 영국 정부는 460만 마리가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다 도살하는데는 최소 6년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첫 도살은 1996년 5월 3일, 30개월 이상된 소 8만 마리에 대해 이뤄졌다. 화장 시설이 갖춰진 영국내 9개 공식 도살장이 완전 가동되면서 한달간 20만 마리를 도살했다. 파동은 곧 대륙으로 번져,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포르투갈, 독일 등 곳곳에서 적게는 몇마리에서 십수만 마리까지 도살됐다.
광우병 공포는 식생활에만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소뼈, 부산물을 사용하는 화장품도 위험물 목록에 올랐고 의약품 캡슐도 유통이 전면 금지됐다. 광우병은 전세계에서 발견됐다.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영국으로 1996년 4월 현재 16만1663건이 보고됐고 스위스에서 205건, 아일랜드 123건, 포르투갈 31건 등 유럽에서 주로 발견됐지만 중동의 오만, 캐나다, 포클랜드에서도 한두건씩 발생이 보고됐다.
1989년 부산 동의대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찰관 7명 사망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에서 학생시위를 진압하던 경찰 7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5월 1일 학생들이 노동자파업 지지결의대회를 갖고 가야3 파출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공포 10발을 쏜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다음날 학생들은 경찰 총기난사 규탄 실천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다 경찰관 7명을 납치, 학교도서관 7층에 감금하고 연행된 학생 9명과 교환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5월 3일 새벽, 경찰이 무리한 구출작전을 전개하던 중 도서관 7층 복도에서 화재가 발생, 경찰관 7명이 중화상을 입고 숨졌다. 이 사건으로 경찰은 학생 94명을 연행, 77명을 구속했으며 이종현 총학생회장 등 4명에게는 살인혐의 등을 적용했다. 이 사건 직후 동의대는 89일간 휴교했고 과격시위 자제의사를 표명했다
1987년 샹송 가수 달리다 자살
1986년 5.3인천사태발생, 경찰이 직선제개헌운동 집회를 용공폭력집회로 몰아 강경진압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운 제1야당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985년 8월 말 개헌추진본부를 구성한 후, 9월 정기국회에서 ‘개헌을 위한 특별위원회’ 설치를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신민당은 1985년 12월 초, 김대중과 김영삼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중심으로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면서 다음해 2월 12일 본격적으로 개헌운동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3월 8일 신민당은 헌법개정추진위원회 서울시지부 개소를 기점으로 장외에서 본격적인 개헌운동을 시작했다.
각 지방에서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지부 결성대회와 현판식이 잇달아 열리면서 시민과 학생들이 결집되기 시작했다. 1986년 3월 23일에는 부산 대한극장에서, 30일에는 광주 YMCA에서 개헌추진위원회 전남도지부 결성이 이루어졌으며, 뒤이어 대회장 주변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4월 초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그간 민추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개헌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4월 5일 대구 대회는 민통련의 지역조직인 지역운동협의회가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대전과 청주에서도 각각 19일, 26일에 대규모 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4월 28일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 이후, 29일 김대중 민추협공동의장이 “소수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고 발언했으며, 30일 청와대 영수회담 석상에서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좌익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운동권 학생들의 급진경향에 대해 분리의 선을 긋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분개한 재야와 운동권 세력은 5월 3일 인천 시민회관에서 열릴 예정인 신민당 인천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를 앞두고 시민회관 앞 주안사거리를 점거하고 무기한 철야연좌농성에 돌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일 행사장 주변에는 경인지역 재야단체 소속 운동가들과 4,000여 명의 노동자·시민들이 집결했으며, 각 단체명의 총 39종에 달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신민당 지도부는 대회진행 장소였던 시민회관 내부로 입장하지 못 했으며, 낮 1시부터 5시간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경찰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시위대는 신한민주당의 각성과 함께 이원집정(二元執政) 개헌 반대를 외치며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를 소집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화염병과 투석전, 최루탄이 난사되는 격렬한 무력시위와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민통련을 5·3사태의 배후로 삼아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 전두환 정권은 인천사태를 국가전복을 획책하는 용공좌익조직의 조직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검찰과 경찰은 5월 5일과 8일, 민통련과 인사연 간부, 학생, 노동자 45명에 대해 특별검거령을 내렸다. 구속된 170명 중 57명은 국가보안법위반죄, 소요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죄 등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88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한
분단의 아픔과 민주화를 향한 진통으로 신음하던 한국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러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4박5일의 일정으로 1984년 5월 3일 방한했다. 바오로2세는 김포공항에 도착, 트랩을 내리자마자 허리를 굽혀 땅에 입을 맞추었다. 교황은 이 친구의식(親口儀式)을 하는 내내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이라고 되내었다.
“여러분의 벗으로 평화의 사도로 여기에 왔습니다”. 서투른 한국말이었지만, 그가 전하는 평화의 위력만은 대단했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것 같았다.
가톨릭 교황으로는 처음으로 이날 한국을 방문한 그는 인자한 얼굴, 조용한 미소, 하얀 수단 차림에 환영인파를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그가 지나는 거리마다 태극기와 교황청기가 물결쳤고, 1백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인도를 메운 채 경건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를 맞았다.
교황이 방한한 이날, 교황방한 기념으로 발행한 우표 및 우표책, 우표첩 등이 발매 1시간 만에 동이 나기도 했다.
교황은 광주와 소록도 등지를 순방한 후 5월 6일에 1백여 만명이 모인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천주교 박해 순교자 103명의 시성식을 가졌다.
당시 가히 ‘슈퍼스타’라고 일컬어질 만큼 많은 인파를 몰고 다닌 그는 평소 정신질환증세를 보이던 한 대학생이 교황전용방탄차에 뛰어들어 장난감권총 2발을 쏘는 웃지 못할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1년 테레사 수녀 내한
1980년 한국-이란 석유 온산공장 준공
1979년 마거릿 대처, 영국 최초 여성 총리에 당선
1979년 5월 3일 실시한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야당 보수당이 안정 과반수 의석을 획득, 5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면서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탄생했다.
1925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난 대처는 귀족과 상류계급 출신이 많은 보수당 당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서민출신이었으며 쌍둥이를 출산한 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위대한 어머니였다. 게다가 실업가의 아내로서 가사업무를 담당하며 1959년 총선거에서 3번째 도전 만에 의원에 당선돼 의회에 진출한 당찬 아내이기도 했다. 그녀는 1975년에는 히스정권하에서 교육과학장관에 취임했고 그 해 실시된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대승, 사상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됐다.
그녀는 어떤 부유한 배경 없이 스스로 정치의 초석을 쌓아 마침내 세계 정치 정상에서 오른 제1호 자수성가형 여인정치인이었다.
대처 여사는 일명 ’영국병‘이라고 불린 악성 인플레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 전횡 저지ㆍ자유경제주의ㆍ세제개혁 등을 강행, 병든 영국을 치료하는데 힘썼다.
그래도 경제가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의 인기는 곤두박질 쳤지만 1982년 발생한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처리즘'도 서서히 효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1983년 정부가 적자를 기록하던 20개의 석탄채굴회사의 문을 닫아버리면서 또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최강의 노조인 탄광노조가 반발한 것이다. 1974년 히스 정권을 몰락 시켰던 탄광노조는 1년 뒤 완패를 선언하고 대처에게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후 영국이 안정을 찾아가자 대처는 1983년과 1987년에 연거푸 총리에 당선되며 11년간 영국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대처리즘'이 더이상 효과를 못보자 1990년 11월 당수 투표에서 패배한 뒤 사임했다.
1977년 미국-베트남 대사급 수교 합의
1970년 거물간첩 한인동 사건, 검거간첩을 역이용, 안면도에서 접선공작을 실시 침투한 간첩 3명을 사살.
1969년 한국-이란 우호 조약 조인
1968년 프랑스 5월 사태
발단은 학내 문제였다. 부실한 학교 시설을 개선해달라는 것. 학생들이 교내에서 집회를 강행하자 대학의 요청을 받은 경찰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68년 3월 22일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5월 2일 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며 반발하자 학교측도 다음날 ‘학교 폐쇄’로 맞섰다. 양측은 본교인 소르본에서도 충돌, 60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됐고 본교 역시 폐쇄됐다.
파리에서 베트남평화회담이 시작된 5월 10일 밤에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해방구를 만들려는 급진파 학생들과 경찰 간의 난투극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느덧 구호도 기성 질서 전복을 겨냥했다. 노동자들이 가세했고, 미테랑 등의 좌파세력도 동참했다. 무정부주의자·마오주의자·트로츠키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들도 정치·사회혁명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설개선 요구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로, 다시 정권타도로 발전한 것은 그동안 쌓여온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I am France)’라는 드 골 대통령의 가부장적 통치 스타일이 정치권을 짓누르고 있었고, 사회는 점점 보수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5월 사태’는 단기간에 끝나버렸다. 공산당이 ‘5월 사태’를 프티 부르주아적 모험주의라고 비난하며 돌연 돌아선 데다 노동자들도 임금인상과 최저임금 상향조정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드 골은 여세를 몰아 의회해산과 총선실시라는 정면돌파를 시도해 6월 말에 실시된 총선에서 드 골은 485석 중 358석을 획득하는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5월 사태가 이후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여성운동·녹색운동·게이정치 등 모든 운동들이 이때를 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대문명도 탈근대 쪽으로 물꼬를 틀어 포스트모던의 새 시대로 접어들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당선
박정희 대통령의 4년 치적(治績)을 판가름하는 제6대 대통령선거가 1967년 5월 3일 전국7천8백63개 투표소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이번 선거에서는 박 후보가 5백68만8천6백66표를 얻어 신민당 윤보선 후보의 4백52만6천5백41표 보다 1백16만2천7백31표를 더 많이 획득,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번 투표에서는 83.6%의 투표율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재선한 것은 국민들이 조국 근대화로 민족을 중흥시키겠다는 박대통령의 공약에 기대를 걸었고 집권당의 강력한 조직과 막대한 자금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민당은 민중계와 신한계가 단합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이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공화당이 전국 1백31개 지역구에서 1백3석, 신민당이 27석, 대중당이 1석을 차지했다
1966년 울릉도 수력발전소 준공
1965년 민정-민주 양당, 민중당 창당
민정당과 민주당이 1965년 5월 3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두당을 통합해 민중당 창당을 선언했다. 두 야당의 통합교섭 30인 전권대표들은 이날 대회에서 기립박수로 합당을 의결, 합당선언을 채택하고 윤보선 민정당총재와 박순천 민중당대표최고위원이 합당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두 야당은 지난 1963년 국민의 당으로 통합하는데 실패한지 2년 만에 통합한 셈이다.
이날 선언대회에는 두 당의 통합교섭 30인 전권대표와 이효상 국회의장을 비롯한 내빈과 일반 시민과 당원 3천여명이 참석했는데 윤보선 박순천 두등록대표자의 인사말을 듣고 한일간의 제협정 백지화 등을 요구하는 대일 매국외교저지투쟁 결의문을 채택했다. 6월 14일 개최한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참석 대의원 9백90명중 박순천씨가 5백13표를 얻어 4백60표를 얻은 윤보선씨를 누르고 당수가 됐다.
1964년 이라크 민주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
1960년 최인규 전 내무장관 첫 구속
1960년 국회 이승만의 3대 대통령직 및 4대 대통령의 당선사퇴를 선포
1956년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개막(일본 동경)
1955년 엠마 게이트우드(67세) 미국 애팔래치아 트레일(3,300km) 걷기 시작, 146일 만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완주
1949년 중국 국민당정부 본토를 공산당에게 내주고 타이완으로 쫓겨감
1949년 서울신문 정간
1947년 일본 신헌법 시행
1946년 부산신문 창간
1946년 2차대전 전범처리를 위한 동경재판 개정
세계2차대전 A급 전범을 재판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동경재판)이 1946년 5월 3일 동경 구육군성 대강당에서 개정됐다. 기소된 28명중 도조 히데키 등을 비롯한 26명의 피고인이 무장한 MP의 지프의 호위를 받고 구치소로부터 도착했다.
오전 11시17분 오스트리아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하자 법정에는 일순 긴장이 감돌았다. 수석검사가 11개국어로 된 기소장을 낭독했다. 기소장에는 `평화에 대한 죄` `살인범죄 및 살인 공모죄` `관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의 3가지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고 구체적으로는 전쟁계획, 준비, 수행의 공동모의,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 노예화 등 55항목이 열거되어 있었다.
동경재판은 1948년 11월 12일까지 이어졌다. 판결문에서는 전체 55개의 항목 가운데 10개의 항목을 인정했다. 10개의 항목 가운데 8개는 평화에 대한 죄를 적용한 것이고 나머지 두개의 소인이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가 적용됐다. 판결문의 낭독이 끝나고 비로서 모든 피고인에 대한 형이 선고됐다. 교수형 7명, 종신금고형 16명, 금고20년 1명, 금고7년 1명으로 25명 전원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1933년 미국 물리학자 와인버그 태어남 『최초의 3분간』 양자론 우주론 등 업적으로 노벨상 받음
1929년 인도 회교도와 힌두교도 충돌
1928년 일본군 제남서 장개석의 북벌군과 충돌(제남사건)
1919년 신흥무관학교 개교
1915년 이탈리아 3국동맹 탈퇴 선언
1592년 임진왜란의 일본군 서울 침입
1494년 콜럼버스 유럽인으로는 처음 자메이카 상륙
1469년 ‘군주론’ 의 저자, 마키아벨리 출생
우리에게 ‘군주론’ 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마키아벨리가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매우 어려운 삶을 꾸려나가야 했다. 훗날 마키아벨리는 “나는 즐거움 이전에 인고(忍苦)를 먼저 배워야 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가난으로 인한 독학은 인문주의 교육의 무절제와 오류로부터 그를 보호했고 이로부터 사고의 독창성과 기품뿐만 아니라 설득력을 갖춘 문체의 힘이 보전될 수 있었다.
그는 1498년부터 피렌체의 제2서기 관장직으로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며, 대사로도 활약했다. 1512년 메디치가(家)가 피렌체로 복귀하게 되자, 한때 음모의 죄명으로 체포된 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실의 속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특히 ‘군주론’ 은 그의 대표작으로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 책은 군주의 자세를 논하는 형태로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 임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비윤리적 견유주의를 제창한 것으로 인식돼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정·교 분리의 주장과 함께 권력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행해지자 근대 정치학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1281(고려 충렬왕 7) 고려-몽골 연합군 제2차 일본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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