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1열왕 21,17-29
복 음 : 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도하면 저절로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원수를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요? 기도하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정말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안 되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여인이 기도의 힘으로 무엇을 얻었는지를 말하며,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이마쿨레 일리바기자의
『로사리오 기도: 나의 생명을 구한 기도』를
덴버 가톨릭(Denver Catholic)이라는 블로그에서
“감히 용서하라!”라는 제목으로 정리해서 쓴 글입니다.
임박한 죽음의 고통이 "천 개의 바늘처럼" 임마쿨레의 몸을 찔렀다.
그녀는 "어떻게 죽는 거지?"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그녀가 다른 8명의 여성과 함께 숨어있던 3x4피트 크기의 화장실 밖에서,
그녀는 총과 마체테와 창을 든 남자들이 집을 수색하기 위해 다가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까?"
의심과 분노, 용서할 수 없는 그녀의 치열한 내적 싸움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 그랬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만약 내게 신의 힘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순식간에 모두 죽일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뿌리는 르완다의 두 주요 부족인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오랜 정치적, 민족적 긴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박한 비극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고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나왔는데,
성모 마리아는 1981년 키베호라는 작은 마을에서 슬픔의 성모라는 제목으로
세 소녀에게 나타나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바꾸고 하느님을 따르지 않으면
르완다에 피의 강이 흐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투치족을 몰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계획된 종족 말살 사건은
1994년에 대통령의 헬리콥터가 격추된 후에 시작되었다.
투치족을 비인간화하기 위한 수년간의 마케팅 노력 끝에,
이제 그 메시지는 라디오에서 공개적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죽여라. 바퀴벌레를 끝장내라! 아이들을 잊지 마라. 나라를 깨끗이 해야 한다!"
투치족인 이마쿨레 일리바기자는 겨우 十代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는 그녀에게 묵주를 주고 이웃집으로 보내 숨게 했다.
그 이웃은 반대 부족의 일원이었지만 정직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91일 동안 피에 굶주린 남자들이 대낮에 수천 명의 투치족을 학살하는 동안
나머지 8명과 함께 작은 화장실에 숨어 지냈다.
이마쿨레의 증오와 용서의 신앙적 갈등은 그녀가 숨어든 지 불과 며칠 만에 시작되었다.
발각될 가능성에 그녀는 내면의 목소리로
"문을 열어라, 고문을 끝내라! 어쨌든, 놈들은 널 죽일 거야."
그러나 다른 목소리가 그녀에게
"문을 열지 마라.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라!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것은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기회가 있다."
그때 그녀는 인생을 바꾸는 약속을 한다:
"하느님, 저는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다시는 당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이 때문인지 집을 수색하던 남자들은 화장대 뒤에 잘 숨겨져 있는 화장실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를 도와주는 남자에게 성서를 달라고 부탁하였다.
처음으로, 그는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성서를 주의 깊이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순수한 사랑으로 자신을 창조하셨고 천국의 축복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하늘나라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곳에 가려면 예수 말씀과 계명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천국의 영원성에 비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나 이마쿨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따끔한 현실에 직면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용서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나는 내가 곤경에 처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느님은 내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셨다."라고 이마쿨레는 회상했다.
대신 그녀는 아빠가 준 묵주로 눈을 돌렸다.
기도하면서 그녀는 새로운 것, 즉 깊은 평화를 경험했다. 그녀는 이 평화를 꽉 붙잡았다.
그녀는 매일 총 27번의 묵주기도와 14번의 하느님 자비의 기도를 바쳤다.
이것만이 그녀가 분노와 절망의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나 며칠 후, 하느님의 온화한 손길이 다시 한번 용서로 그녀를 이끌었다.
성부께 기도할 때,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듯이"라는
구절이 너무 불안해서 아예 생략하기로 했다 — 적어도 하느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그녀는 다른 음성이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네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예수 자신도 이 기도를 바치셨고, 그분은 실수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때 처음으로 항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제게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내게 주어라.'라고 하실 때
'좋아, 기도는 하겠지만, 아직도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어.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다."
하느님의 도움이 왔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의 싸움은 십자가 밑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는
예수 말씀을 읽었을 때 끝이 났다. 이마쿨레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순간 저는 진정으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예수 예수님께서 제게 용서의 공식을 건네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길,
'너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은 그들에게 닥칠 결과를 측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처럼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게서 배워라!"
그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은혜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저는 증오의 편에 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야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개월 만에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새로운 사람이었다.
그 은총에 의해서만 그녀는 부모, 형제, 사촌, 친구들을 포함하여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끔찍한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임재는 결코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분이 나를 꽉 붙잡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여정은 이 지상에서 끝났지만, 너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의 삶이 얼마나 길든 간에 어떻게 살기로 선택하는가는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몇 년 후 그녀는 르완다로 돌아와 자기 가족을 죽인 모든 사람을 직접 용서했다.
이마쿨레와 함께 키베호와 키갈리로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은
그녀가 기뻐하며 한 남자를 껴안고 돌아서서
"그의 오빠가 내 오빠를 죽였다."라고 말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용서하지 않음의 고통과 피해를 알고 있다."라고 말한 이마쿨레는 모든 이들에게
"그러니 간청하노니 감히 용서해 달라.
하느님을 붙잡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미사에 가고….
용서에는 너무나 많은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감히 도전하라!"
[출처: ‘Dare to forgive: Immaculée Ilibagiza & radical reconciliation’, Denver Catholic]
기도는 성령을 받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받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면 점점 그것과 어긋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가장 큰 것이 미움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랑받는다고 믿는 이상 기도 안에서 미움은 성령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결국 하느님과 있는 행복을 택하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기를 택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런 능력이 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스테파노 성인처럼, 모세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음이 믿어지고 더 행복해집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미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부터 벌렁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善人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이 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저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나는 못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미처 사랑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 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 하여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기서 ‘하느님의 성전’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유품을 보관한 박물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렇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하느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코린토 지역에는 우상숭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에게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 우상숭배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신앙인을 보고 하느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부르는데, 에덴동산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동산이라고 표현하는데 영어 성경에는 ‘에덴가든’이라고 합니다.
동산과 가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동산은 울타리가 없습니다. 가든은 울타리가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천주교회로 간다며 개신교 목회자들이 걱정한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은 그 원인으로 개신교회의 울타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목회자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식었다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져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져서 신앙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울타리가 견고해야 세상 사람들이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었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 칼로 울타리를 쳤다고 합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사제성소가 줄고 수도자성소도 줄고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도 현저히 줄고 있습니다.
박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팬데믹 때문도 아닙니다.
사제들이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벗고, 기도 시간을 줄였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이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수도복을 벗고 순명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의무와 직분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이, 수도자들이, 신앙인들이
울타리를 세우고 믿음의 횃불을 높이 든다면,
사제성소도 수도자성소도 늘어날 것입니다.
아합왕은 잘못했지만, 회개의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합왕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스스로 울타리를 치우곤 했습니다.
기도의 울타리, 나눔의 울타리, 섬김의 울타리를 치웠습니다.
울타리를 치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치워서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울타리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를 말씀하십니다.
그 울타리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울타리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의 비결, 주님 현존 안에 지속적인 머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한국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박해의 순간을 잘 넘기고
놀라운 순교의 영예를 누리게 된 가장 큰 비결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고민과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비결은 인간의 힘에 있지 않고
주님 현존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 순간 주님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그분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은 절대로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비결은 일상의 작은 기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간대별로 이루어지는 아침저녁 기도, 삼종기도, 식사 전후 기도를 충실하게 하는 것.
특히 틈틈이 수시로 바치는 묵주기도는
주님 현존 안에 살아가기 위한 더없이 좋은 도구일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 일정을 촘촘하게 기도로 짜고 또 짤 때,
우리는 하루 온 종일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만이 순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요구가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 44)
또 다른 순교라고 할 수 있는 원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냥 맨정신으로는 그 어려운 원수 사랑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묵주를 쥐고, 하루 온종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 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 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오고 연장시키는 탁월한 도구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영예로운 순교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 토마 신부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가 된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한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모실 수 있고, 참으로 누릴 수 있으려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의 정체성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사람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을 것입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을 왜 사랑하고,
천벌을 받아 죽었으면 좋은 사람을 위해 왜 기도하냐고.
지금까지 이런 물음에 그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주로 대답해 왔습니다.
사실 원수가 있는 것보다 원수가 없는 것이 낫지요.
원수가 있다는 것은 나의 불행이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불행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미워하는 나보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더 완전하고 성숙합니다.
그러니 나의 행복과 나의 완성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해온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이지만
오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왜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보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이라는 각도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왕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왕족의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든 그답게 하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더 그러겠습니까?
원수는 미워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하고 세리나 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 말씀하시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를 무척 경멸하는 존재였잖습니까?
이렇게 세리와 비교하면서 너희도 세리처럼 되겠냐고
오늘 주님께서는 도전하시며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일깨우시고,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녀가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듯
선인과 악인 가리지 않는 완전한 사랑을 하라고 오늘 주님 도전하시는데
그 도전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이라도 먹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5,48)
저는 완전한 사람도 아니며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또한 제가 부족하고 못난 아들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듯이 제 삶에 피할 수 없는 원수가 생기고,
그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과 싸우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다 보면,
“원수를 사랑하여라.”(5,44)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영적 영웅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제게 그저 오늘의 복음 말씀 가운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라는
가르침은 너무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완전함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결함이 없는 사람이라기보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이시고 용서이시듯,
자녀인 우리도 사랑과 용서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권고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저를 잘 아는 데, 사랑이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기에
늘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적하시고 나무라시는 것처럼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인사하고”(5,46)
관계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의 뜻을 살지 못하는 저 자신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저를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저를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나가지 못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저희 수도회 박도세 신부님은
“그렇게 살아야 함에도 그렇게 살지 않은 게 바로 죄”라고 하셨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확실히 죄인입니다.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은 죄,
용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않은 죄 말입니다.
물론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점은
원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원수이더라고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며 기도하지도 않은 제가
누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라는
하느님의 제한 없는 사랑의 햇살을 지금은 누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마음의 양산으로 그 사랑의 햇살을 가리고서 스스로 칙칙한 그늘 속에 살았다면,
이젠 양산을 내려놓고 그 사랑의 햇살을 쐬면서 사랑의 온기를 만끽하고 싶습니다.
비록 햇빛 알레르기를 갖고 있지만,
주님 제게 사랑을 주시기보다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간청할 뿐입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수용되어 죽어가면서도 기도했던 사람들이
실천한 사랑을 저도 살 수 있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오 주님,
선한 의지의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한 의지의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고통의 일체를 잊지는 마옵소서.
대신 이러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맺은 열매들, 우리의 교제,
서로에 대한 충성, 겸손, 용기, 관대함을 기억하소서.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성장한 마음의 위대함을 기억하소서.
핍박하는 자들이 주님 앞에 심판받게 될 때,
우리가 맺은 이러한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
(‘라벤스부룩’ 수용소의 벽에 쓰여 있는 기도문)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