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2열왕 2,1.6-14
복 음 : 마태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분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저 때문에 자기 아이가 잘 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들어 보니 제가 독서를 강조해서 자신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는데,
어린 자녀도 시간이 나면 자기 옆에서 책을 읽고 읽는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 다른 아이들처럼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있는데,
아직까지도 스마트폰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책에 취미를 갖게 되어서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자녀 역시 그 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갖춘 좋은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 독서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큰 도움을 책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행동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따른다고 해서 내게 큰 손해가 올까요? 반대로 큰 영향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모범을 따름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에게도 좋은 영향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의 뜻이 이 땅 곳곳에 펼쳐지게 됩니다.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 하나의 변화를 통해서도 세상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그 기준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엄격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시지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이 아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선, 기도, 단식은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목적을 두고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이런 모범이 나의 이웃들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더욱 넓게 펼쳐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느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상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의 속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대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인데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이는 숨겨놓은 애인의 이름을 부르고,
자녀의 이름이나 배우자의 이름을 부른단다.
그의 속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깨어나서 제가 한 행동을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누구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 부름을 받았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지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구애받지 않고 당당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풀든, 단식하든, 기도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바랍니다.
생색내기가 아닌 사랑의 진정성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러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뼛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한복음에서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머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습니다.
자명한 수학적인 진리도 있고, 존재의 근거를 알려주는 철학적인 진리도 있고,
현대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본과 물질의 진리도 있습니다.
수학적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감시의 그물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일에 그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사형집행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유배를 갔습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유배가 끝나 자유인이 되었던 그는
성경 말씀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유명한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가 되면서 성경이 금서로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이 감옥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도,
극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고, 이 말씀이 진리이며,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극한의 순교와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순교한 후,
한국교회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사제들이 올 때까지,
30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있었습니다.
사제가 없이, 미사가 없이 한국교회가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직해’라는 성경말씀입니다.
교우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박해가 심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조직이 무너져서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물질의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우리가 말씀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사목지침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0년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복음 나누기 7단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복음 나누기는 미국의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또한 자연에게
별의별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며 죄를 쌓아갑니다.
때로 이 산더미 같은 죄 어떻게 보속 해야되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죄를 보속하고 청산할 길이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선⋅기도⋅단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정성있는 자선⋅기도⋅단식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외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 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 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래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 2)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 그리고 또 다른 부인 시간, 재능, 경험과 연륜 등등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올바른 자선
조욱현 토마 신부
우리가 자선을 베풀 때는 그 자선이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으로
사람들 앞에서 베풀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되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몰래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띌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말씀하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남 앞에서 넘치게 기도함으로써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자선은 자랑하려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 왼손의 의미는 이것이다.
오른손은 의인이나 의로운 행위를 말하고, 왼손은 죄가 되는 행동이나 죄인들을 말한다.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하고,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된다.
기도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대천사가 토비트에게 “너희의 기도를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토빗 12,12) 했다.
골방이라는 것은 마음의 침실이다.
그 마음으로 자기가 기도하는 것과 자신이 기도를 바치는 분만을 생각하도록,
기도할 때는 다른 것은 보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단식할 때도 겉꾸미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는 행위나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얼굴을 찌푸린다.”(16절) 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남에게 드러내는 자랑거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라는 말씀으로
양의 옷차림을 한 이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실제로 양인지 결국 드러날 것이다.
말씀으로 언제나 참 열매를 맺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칭찬 결핍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칭찬받으려고 선행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악령이나 세상은 칭찬을 위해 선행하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칭찬받으려고 선행하는 것이 왜 나쁘다고 말씀하실까요?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말입니다.
우선 선행하는 것이 나쁜 것은 분명 아니고,
제 생각에 칭찬받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며,
다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나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칭찬받으려는 것은 왜 나쁠까요?
그것은 칭찬받아야 행복한데 야단맞으면 괴롭고 불행하게 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더 나쁜 이유는
그것이 칭찬 결핍증 더 나아가 애정 결핍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애정 결핍증의 사람은
늘 애정의 결핍을 느낄 뿐 아니라 인정과 칭찬도 고파합니다.
그렇습니다.
애정 결핍증은 사랑을 받아도 받아도 바다처럼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름다운 갈망이 아니라 지옥 같은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받아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칭찬을 목적으로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하느님의 상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이 세상 행복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저의 통탄할 가련함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아직도 바랍니다.
칭찬이 고프지는 않아도 아직도 바라기는 한다는 말입니다.
칭찬이 귓전을 울릴 때 사탕이 달콤하게 하듯 달콤한 것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실 상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합니다.
더 통탄할 가련함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모욕을 이것이 참을 수 없게 하고,
비난이나 모욕을 받을 때 그것을 주님 때문에 받지 못하게 하는 점입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하니 비난이나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칭찬의 달콤함을 의지적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수준이고,
그래서 저를 칭찬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마귀라고 하며 물리치려 합니다.
멀쩡한 사람을 마귀로 만들고 고마운 사람을 마귀라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칭찬하는 사람이 마귀가 아니라
그의 칭찬을 하느님 상 대신 받고 싶어 하는 제가 육의 영을 지닌 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저입니다.
“육의 영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 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신성한 두려움과 지혜와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6,4.6.17)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6)하고 예수님은 당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 선행의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로써 우리 역시 존재적인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인간의 칭찬이나 인정에 연연하기보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행하는 게
올바른 선행의 동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선행동기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에 치우치다 보면
자칫 의도적이며 선심적인 행위로 전락할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행실의 3가지 실천을 예로 들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하는 것은 율법의 속죄 행위이기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 특별한 공로를 쌓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자선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디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먼저 받았기에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모든 것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받은 것을 베풀 때 그 비워진 영적 곳간에 주님께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베풂은 남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받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베풂은 세상에 없습니다.
베풂은 때론 되돌려 받기 마련인데 그것은 나의 베풂을 받는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기쁨을, 행복을 선물로 되돌려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주고받은 존재들이고 이런 자선은 곧 참된 형제애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선을 베풀 때 자존심을 빼앗지 않도록 늘 조심합시다.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우리의 기도는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와 찬미, 찬양과 영광
그리고 그분 앞에서 나답지 않게 살지 못했음을 깨닫고 참회와 용서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한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삶의 필요한 은혜를 청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응답의 종류보다 참된 기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있기에 이 점을 늘 명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단식은 단지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료 그리고 담배 등의
기호품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줄이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런 노력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더 좋아하시는 단식은 이사야가 선포한 것처럼,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이58,6)
참된 단식은 음식이나 그 무엇으로 채우려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 탐욕을 버리고 비워서
그 비운 그 자리에 하느님의 것, 영적인 것으로 채우는 것이 진정한 단식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선행보다 더 중요한 오늘의 가르침의 방점은 이 모든 것을 행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하느님 앞에서”(6,4.6.18) 행하는 데 있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이런 선행은 비록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받지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분명 30배, 60배 아니 100배로 그 상급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위선자들처럼,
“남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을 받으려는 행동,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행동,
침통한 표정으로”(6,2.5.16) 하는 선행은
‘하느님의 영광 보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이기심과 허영심에서 기인하기에
하느님이나 사람들 눈에 역겨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행보다 그 선행의 동기이며 마음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시31,25)
김 마리 문모 수녀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6:3,4)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인상 깊게 남았던 구절이 있다.
'세상을 지키고 만들어 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선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한겨울에 눈이 많이 왔던 날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성당까지 눈길에 미사 준비하러 갈 걱정을 하며 수녀원을 나섰는데
수녀원에서 성당까지 가는 길에 눈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 이 새벽에 누군가 오셔서 눈을 치워주시고 가셨구나..'
생각지 못했던 그 누군가의 선행에 마음이 참 따뜻했다.
그때 또다시 느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위해 조용히 선행하는 이들에 의해 지켜진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