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집회 48,1-14
복 음 :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절로 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초등학교 이전이 좋을까요?
아니면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초등학교 때가 좋을까요?
성소에 대해 갈등했던 중고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또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신학생 시절은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나의 과거를 쪼개어 보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는 결론을 짓게 됩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예전에 비해 지금 부족한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나이가 드니 운동 능력도 떨어졌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책을 보기 힘들 정도로 시력도 좋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하늘나라에 가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과거의 시간으로 굳이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나이 들어 할 수 없는 것도 많아졌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여전히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할 수 없어.’라며 슬퍼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며 ‘아직도 할 수 있어’라며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나 많은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이유는 참 많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아질수록 더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대화를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편하십니까?
감사의 말, 인정과 지지의 말, 기쁨의 말, 긍정적인 말 등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편하지 않습니까?
만약 계속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부탁만 한다면,
남에 대한 험담과 갈등을 일으키는 말만 한다면,
듣기 싫은 부정적인 말만 하면 어떨까요?
이런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피하고만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는 기도를 통해 어떤 대화를 하십니까?
빈말만 되풀이하면서 진정한 대화를 만들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주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참 기쁨의 시간을 할 수 있는 것들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간절한 믿음의 기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 ‘기도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고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바람을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하오나 제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것임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성 보니벤뚜라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묵상할 때 감각적으로 무엇을 느껴야만 제대로 기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감각적인 느낌 없이 기도하는 편이
하느님께 더 큰 봉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감각 없이 기도를 지속함으로써 그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낮출 줄 알게 되고 겸손하게 되어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에 감각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면 그런 감각이 자칫하면
그 사람을 부풀게 만들고 자기가 성덕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처럼 느낀 나머지
교만해지고 게을러져서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랑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 안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의 기도'에는 주 예수님이 담겨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65)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맨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곧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부르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이 기도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초청하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 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음식에 맛을 내는 것을 ‘조미료(調味料)’라고 합니다.
조미료의 종류에는 설탕, 소금, 고춧가루, 식초, 간장, 된장, 고추장, 마늘, 후추, 기름이 있습니다.
미원, 다시다처럼 인공조미료도 있습니다.
캠핑 가면 마법의 조미료를 가지고 다니는데 ‘라면 스프’가 있습니다.
마트에 가면 육수를 낼 때 필요한 복합 조미료를 팔기도 합니다.
음식은 재료가 싱싱해야 하지만, 조미료가 있어야 음식의 맛이 살아납니다.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있었습니다. 강사들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심, 이상, 은총생활, 활동, 공부, 평신도, 은총생활의 장애,
은총안의 생활,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칫 단조롭고, 지루할 것 같은 강의가 활력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은
음식에 맛을 내는 조미료와 같은 ‘체험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교재를 읽을 때는 강사도, 강의를 듣는 청중도 대면 대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담이 시작되면 강사의 눈빛도 빛나고, 청중도 귀를 쫑긋하며 듣게 됩니다.
교재의 내용이 음식의 재료라면, 강사의 체험담은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와 같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청중은 체험담에 웃고, 체험담에 울고, 체험담에 박수 칩니다.
구약의 예언자 중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어떤 예언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그분들이 체험했던 이야기는 기억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과 싸워서 통쾌하게 이겼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던 아합왕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전했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자,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처럼
엘리야가 옷을 강물에 내리치니 요르단강이 갈라졌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것처럼,
엘리야도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승천하였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것처럼
엘리야가 아주 작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과부와 그 아들이
가뭄이 멈출 때까지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르단강에 몸을 담갔고,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자질, 예언의 종류, 예언의 효과는 잘 모르지만,
예언자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보였던 표징은 알고 있습니다.
2023년 7월에 실종자를 수색하던 과정에서 숨진 해병대의 군인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사건의 진실을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해병대의 수사단은 사건의 전모를 조사했고,
바뀐 법령에 따라 조사한 자료를 경찰에 이첩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이첩이 되었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끝이 났을 겁니다.
작년 8월에 경찰에 이첩이 되었다면 지금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첩이 되었던 조사 자료는 회수되었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던 계획도 취소되었습니다.
사건을 조사했던 해병대의 수사단장은 항명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지만, 그 사건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사단의 조사 이첩을 막으려는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자료를 회수하며 다시 이첩하는 과정에서 혐의의 대상에 있던 사람들이 빠졌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누군가의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특검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고, 국회에서 ‘특검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대통령은 특검법의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앞으로 이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역사에 기록될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대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였고,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조직, 제도,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듯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유혹에 빠지지 말며,
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아이들과 재미있게 살 때의 일입니다.
자유롭게 외출 외박을 못 나가던 아이들이었는데,
주간 생활 태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신부 수사들과 동반 외출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주일 점심 식사를 끝내고 나면 습관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이들 서너 명과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너무 많이 데려가면 집단 이탈 가능성이 많은지라, 딱 서너 명만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출 나가기 전날부터 제 머릿속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줄 것인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어딜까? 영화관? 피시방? 오락실? 노래방?
간식으로는 뭘 사줄까? 피자? 통닭? 아이스크림?
대여섯 시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머릿속에 좋은 추억의 사진 한 장 남겨줄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아마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비슷한 마음이겠지요.
보십시오.
세상 부족한 저희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좋을 것을 주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데,
선하신 주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틈만 나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고,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따라서 너무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고 졸라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련히 생각하고 계시고,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텐 데, 그분의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굳게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그 어떤 것도 좋습니다.’ 하면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니, ‘당신 뜻에 맡깁니다!’하고 외치며
남은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묵주기도 때 특별한 지향을 두지 않고 바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간에, 좋으신 어머니 성모님과 함께 좋으신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여정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바칩니다.
좋은 시간, 좋은 분들과 산책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의무감에서 숙제처럼 바치지 않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아주 아름다운 기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바라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 우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 안에 세워지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의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듯이,
죄인들이 회개하여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가 마침내 행사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나날이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 양식을 받아 모시며 우리는 거룩한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하루에 충분한 만큼만 주어지며 내일을 위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이 청원은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이렇게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약속이 담겨있다.
그것을 소홀히 할 때 앞서 한 모든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철저히 거부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하신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끌려가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세 가지 청원은 영원한 삶과 관련된 것이다.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되기를 바라는
뒤의 네 가지 청원은 현세의 삶과 관련한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잘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며,
우리의 삶으로 이 기도를 살아야 한다.
이 주님의 기도를 삶으로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좋은 방법으로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기도를 잘 하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제 말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단식과 자선과 기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면서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만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빈말이란 어떤 것이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빈말을 할 수 있을까요?
보통 빈말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하는.
빈말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면
하느님께 어떻게 빈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느님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진심인 사람은 이럴 수 없고,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말,
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관계부터 재정립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씨불여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고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하는 분으로 재정립해야 합니다.
그런데 재정립해야 할 관계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관계는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영광스럽게도 우리도 그런 관계를 맺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다니!
구약에서는 하느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게 했는데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다니!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도
저는 어머니로 부를 수 있게 해주셨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욕심도 내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이것이 욕심이긴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욕심은 괜찮을 것이고,
주님도 우리가 감히 이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더 따듯하고 푸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왜냐면 기도 특히 관상 기도는 말보다 만남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말도 중요하고 말도 많이 나누겠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아무 말 없어도 좋고 그것이 많은 경우 더 좋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말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의 사랑에 잠기기 위해서 만나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거듭 강조하지만 만나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기도가 명상이나 독백이 되지 않고,
그 다음에 대화를 하든, 청원을 하든, 뭐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바꾸고,
오늘 강론은 이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6,8~9)
기도할 줄 모르는 당신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살아야 할 삶과 진리는 너무도 가까이 있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의 기도를 사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이며 바탕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의 3가지 기원, 즉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그리고 아버지의 뜻과
후반부의 4가지 청원, 즉 양식, 용서, 유혹 그리고 악에 관한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상호 대칭 관계를 통해 그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악에서 구하소서. 』 ;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악에서 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원되는 것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유혹받기 마련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가 필요한 때입니다.
내 삶의 관심과 중심을 아버지의 나라,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둘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 용서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녀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며,
이를 살아갈 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아멘』 ;
아버지의 자녀답게 용서하고 세상에서 하느님 뜻을 살아갈 때, 천상적 삶과 지상적 삶이 하나로 묶이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육신적인 양식과 영적 음식을 베풀어 주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6,31.32)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보살펴 주실 것을 믿고 ‘아멘’하면서 맡기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심은,
당신의 기도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고 공유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방법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당신의 사랑과 신뢰의 언어를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꿈, 희망 그리고 이상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뢰, 우정 그리고 사랑의 일로써 기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끊임없이 사랑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당신을 부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성숙한 사랑의 교류와 태도를 함께 나누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아빠로서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죄와 한계, 약함을 없애시려는 이상과 꿈을 가지신 예수와의 친교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평화, 용서, 화해와 정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인간 영혼이 신적 지위로 격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변형됩니다.
‘Abba’를 향해 기도하는 것은 아빠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즉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죄의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 보호를 보증해 주고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일상의 걱정과 근심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자기 자신을 체험할 때 없어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