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1일 금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 2열왕 11,1-4.9-18.20
복 음 : 마태 6,19-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연애의 고수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상대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말에 자기 속마음을 슬쩍 얹어서 이야기하면
열이면 열 넘어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애 때만 그렇겠습니까? 사기꾼들도 그렇다고 하지요.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해주면서 사기를 칩니다.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저 역시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누군가 저에 대해 말하면 귀가 쫑긋 세워지곤 합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이 아닐걸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자기 SNS 계정의 글에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신경을 씁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이렇게 신경 쓰면서
정작 주님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댓글을 달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말씀을 직접 해주지 않아서일까요?
사실 계속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또 이웃을 통해,
무엇보다 자기 삶을 통해 직간접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주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침묵 속에서, 또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워낙 다른 사람 말에 집중을 잘하는 우리이기에
조금만 노력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충분히 담을 수 있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웃이나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요.
보물이 망가지지 않고 안전한 곳인 하늘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따라 우리 몸이 빛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어둠 속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봐야 할까요?
주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일치할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만을 바라보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삶은
이제 버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두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보십시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은 보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이 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바다에 두면 바다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선한 곳에 두면 선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나쁜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성한 눈은 맑은 눈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학부모는 하느님께서 최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녀가 입시를 준비하면, 성당에 가는 것은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최고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아깝고 성당에 머무는 시간을 아깝게 여기며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최고 이십니다.
이 세상의 무엇과 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보물 이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동시에 차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2,7-8)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기려 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낮추고 섬기는 곳에서는 협력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특별히 열두 제자들을 뽑으셨는데
뽑힌 이들을 보면 아주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으로 멸시받던 세리 마태오, 혁명당원 시몬, 배반자가 된 유다, 베드로…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새 희망을 안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의 허물을 보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사람이고
그 사람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때로 기적을 베풀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능력을 드러냈을 때,
트집을 잡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소신 있게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시작한 일이 선하다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흔들림 없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께로,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님께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다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며,
또한 ‘이스라엘’에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신명 7,6).
한편,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찾은 이에게 발견됩니다.
또한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도 있고,
그런가 하면,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가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마라.” (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 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받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 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분명, 여기 저희 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만약,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 6, 22)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있는 것을 쓸모없다고 보는 불평의 눈이 아니라
있는 것을 소중하다고 보는 축복의 눈이 되게 하소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경탄과 탄성, 경배와 경외를 바라보게 하소서.
상처를 보되 그 속에서 구원을 볼 줄을 알고,
죄를 보되 자책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보는 맑은 눈이 되게 하소서.
진부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보고 행위를 넘어 존재를 보는
거부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의 눈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흥부네는 자식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아이들까지 많으니, 흥부네는 열심히 일해도
겨우 먹고살기 바쁘기 마련입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작은 가게를 시작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해서 건물이 부서졌습니다.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제게도 큰 행사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본당 견진성사와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겹쳤습니다.
둘 다 일정을 제가 잡지 않았습니다.
견진성사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꾸르실료 교육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제가 댈러스로 오면서 꾸르실료 지도신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꾸르실료 교육을 맡아야 했기에 일정이 겹친 겁니다.
견진성사는 주교님이 오시고, 본당의 큰 행사이니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꾸르실료도 지도신부이기에 당연히 교육에 함께 해야 합니다.
주일 새벽에 꾸르실료 미사를 마치고, 본당으로 와서 견진성사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주교님이 떠나시고, 다시 꾸르실료 마침 예식을 위해 갔습니다.
견진성사도, 꾸르실료 교육도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견진성사 미사를 하면서 주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하시고 소탈하신 모습입니다. 작은 차를 손수 운전하고 오셨습니다.
장백의도 직접 입으셨고, 제의는 본당 것을 빌려 입었습니다.
공지사항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님이 오시니, 제가 순위에서 밀리네요?” 교우들은 웃었습니다.
주교님은 한국말을 이해 못 하시니 나중에 교우들이 왜 웃었는지 궁금해하였습니다.
주교님에게 본당 사제와 주교는 순위와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교와 본당 사제는 직책이 다를 뿐이지 권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교님은 점심 도시락을 드시고, 남은 건 가져갔습니다. 저녁에 드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주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도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30개월 임기를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건 저와 부주임 신부님이 속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께 먼저 청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에게도 관심을 보여 주시니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권위와 직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겸손과 단순함입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나눔입니다. 그것은 누가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료는 교육 특성상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마친 사람을 꾸르실리스타라고 합니다.
3박4일 교육을 마친 형제님이 소감을 발표하면서
‘꾸르실리스타와 바리스타’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스타는 일정 정도 교육을 받은 후에,
커피의 맛과 풍미를 내서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줍니다.
명동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은 가톨릭 바리스타 협회를 통해서 교육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자원봉사로 커피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은 하늘에 재물로 쌓일 것입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도 누가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리스타도 3박 4일 교육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맛과 풍미를 이웃에게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꾸리실리스타는 기도, 활동, 공부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어서
복음을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꾸르실료 교육의 목적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입니다.
저는 32년 꾸르실리스타로 지내고 있지만,
그렇게 멋지게 설명하는 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타는 별이라는 뜻도 있고, 전문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번 3박 4일의 교육에 15명의 봉사자가 함께했습니다.
그분들 또한 하늘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분들이 쌓은 재물은 누가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19절) 하신다.
이것은 세상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재물은 좋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재물의 주인이 되어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에 마음을 쓰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게 되면
마음이 재물에 사로잡혀 어두워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상 숭배자가 된다.
하느님보다 그 재물이 우선하고 그 재물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20절) 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하늘은 주님의 하늘”(시편 115,16)에 나오는 하늘이다.
우리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 영원히 계속되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보물로 삼아야 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영적인 하늘이다.
유다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모노바즈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의 형제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두 흩어 버렸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았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없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다.”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이 일시적으로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우리가 관리하는 것임을 알고,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재능이나 사상 관념까지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나에게 허락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떠날 때는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고 간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22절) 라고 하신다. 눈은 우리의 정신을 가리킨다.
눈이 어두워지면 다른 지체들도 기능이 약해지듯이,
정신이 타락하면 우리의 삶은 악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건강하게 지키려 하듯이 늘 건전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분별력이 무너지면 모든 행위가 뒤죽박죽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23절) 하신다.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19-23)
1)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세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현세의 인생만을 위하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7-9)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는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허무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 생명을 받으려고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살아갑니다.>
2)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는 “현세의 인생에 대해서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또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욕심내지 말고,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입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는
“지상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진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은 완전하고 영원하다.”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입니다.
허무한 것만 찾는 사람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 것이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안 믿는 세속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즉 주님 뜻에 합당한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나중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되어서 ‘그날’에(종말의 날에)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그날 완성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지금 시작된 그 생명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는
“주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복음의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입니다.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는
“복음을 외면하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찾는 사람의 인생은 멸망을 향해서 간다.”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는
“구원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남들보다 더 짙은 어둠 속에 빠진다.”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멸망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1-4.9ㄴ-10ㄱ)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땅에 속한 것과 낡은 것은 죽이고,
‘새 생명’을 얻어서 ‘새 인간’으로 태어났고,
‘위’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4)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세상에서 온 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세상에서 온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6,20)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안경을 쓰기 전에는 가끔 길을 걷다가 동네 어르신들을 얼른 알아 뵙지 못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지나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력이 약한 탓으로, 본의 아니게 예의가 없는 아이로 오해받았던 기억도 있을 만큼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눈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은 늘 제 엄마는 제게 말했죠. ‘너는 눈이 예쁘다고!’
저는 압니다. 제 얼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눈이라는 사실을.
그런 제 눈이 나이 들어오면서 사람-사물-사건을 뚜렷하게 보지 못한 채 살아오다가
백내장 시술 후에야 비로소 다시 세상을 밝게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론 만나는 사람의 눈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때론 정말이지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저를 만나는 사람도 저의 눈을 보면
저의 눈을 통해서 제 마음 상태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제 마음의 등불인 눈의 색깔도 다르게 비춰줄 것이며,
그 빛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잘 인도할 수도 있고,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눈은 몸의 등불처럼 훤히 빛나고 있나요.
당신의 눈이 맑으면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세상 것이 아닌 우리 마음의 시선을 올곧고 순수하게 주님께만 고정한다면,
하느님을 우리는 일상에서 보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보는 그 자체가 행복이며 보물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눈이 곧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눈은 외부를 볼 수 있는 동시에 외부에서 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눈이 맑으면 마음 역시 맑고 투명하리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눈의 상태를 통해서
내적인 영적 눈이 맑고 투명한 시선을 가져라, 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은 곧 올바른 마음의 지향을 의미합니다.
죄의 유무에 연관 지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이란 곧 빗나간 마음,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세상의 사물, 사건이나 사람을 볼 때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올곧게 바라보는 것이 곧 깨끗한 마음입니다.
흔히 표현하는 것처럼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이지만
부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부처로 보인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위 말씀은 사실, 하늘과 땅에 상관없이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일뿐더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삶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위하여 그토록 재물을 땅에 쌓아 두었지만,
세상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게 인생임을 뒤늦게 깨닫잖아요.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에 목숨 걸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어라, 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보물을 지상적인 귀한 것, 좋은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당신이 보여 주신 참된 인간 삶의 태도인 진복을 의미한다고 보면
훨씬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도 불행도 결정된다고 봅니다.
진복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 삶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보물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삶의 가치를 최우선인 나의 삶의 보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런 삶의 결실이야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하늘이란 우리 마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보물인 참된 행복은 땅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쌓아야 합니다.
보물을 마음에 쌓아 두는 그런 사람의 보물은 진정으로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6,20)
우리 삶의 참된 보물과 같은 진복의 가르침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솟아나는 등불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자비롭고, 온유하고,
깨끗하고 평화롭고 의로운 빛을 비추지 않을까 싶네요.
과연 나는 내 마음속에 어떤 보물을 쌓아 두고 있는가?
내 눈에는 어떤 등불이 켜져 있는가, 라고 묻는
하루가 되고, 마음 살피기를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사물-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우리가 바라보는 사람-사물-사건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주님, 제 눈을 맑게 해주시고 제 온몸이 환히 빛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