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외 4편 / 이어진
어제 책을 읽었는데
책 속에 내가 잠들어 있었다
오늘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갔는데
그곳이 이웃 나라 바닷가였다
나를 책에서 봤다며 어떤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고 그곳을 그와 어깨를 부딪히며 걸었다
나는 원래 여자였는데
오늘은 남자의 음성이 내 입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고 싶은데
그는 나더러 구름이라고 말한다
나는 뛰어가는 아이스크림이고 싶은데
그는 나더러 모자라고 말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가보자고 말한다
그는 버스를 탔고
나는 기차를 탔고
우리는 빌딩 위에서 만나 각자 자신이 가져온 커피를 마셨고
내가 그를 떠올리자 그는 내가 좋다고 말한다
아이가 빌딩 위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다
그가 공을 받아서 아이에게 돌려주고
아이가 나에게 공을 던지고
공놀이를 하다가 우리는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가방이 있었다
가방 안에는 공이 있었고
투명한 공 안에는 그가 아이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와 책을 같이 보았는데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다고
그리고 그 아이가 나의 아들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내가 없으면 못 살 거 같다고 말했고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그가 차려 주는 밥을 맛나게 먹었다
아이는 로고 조립을 잘해서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당신은 도깨비인가?
당신은 도깨비인가?
가방이 가만히 소파 위에 있었다
소파가 물끄러미 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의 깊이
신발을 신는데 불이 켜졌다 계단을 오르는데 벽에서 땀이 났다 백 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벽이 높아진다 밑줄 그은 문장이 벽에 매달려 있다 신발이 계단을 밀어내고 있다 공간이 더 넓어지고 단어들이 너를 끌어올리고 있다 단어들 사이로 땀이 번져 가고 있다 잎사귀가 손바닥 위에서 자라고 있다 손바닥 위에서 문장이 돋아나고 있다 파란 줄기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다 네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너의 숨소리가 가빠지고 있다 너의 발소리를 단어들이 따라가고 있다 나무들이 벽 위에서 점점 많아지고 있다 활엽수의 넓은 길들이 너를 이끌고 달려가고 있다 네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단어들이 너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흰구름 속으로 너의 모자가 걸어가고 있다 네가 나무처럼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흰구름이다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흰구름이다 네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벽 위에 나무들이 계속 자라고 있다 단어들이 너를 따라오고 있다 단어들 사이에서 너는 몸을 작게 움츠리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문장들이 너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너는 문장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네 손에서 자란 잎사귀가 너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너는 잎사귀로 눈을 가리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백 층 깊이의 계단으로 떨어지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내리고 너는 벽을 타고 내려와 다시 계단을 오르고 있다 벽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잎사귀가 너의 몸에서 자라고 있다 너는 문장들을 밟고 있다 단어들이 계속 계단을 만들고 있다 너는 단어들을 밟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너는 흰 구름을 밟고 문장을 오르고 있다 문장으로 연결된 계단을 밟고 너는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불이 꺼지고 너는 단어처럼 가만히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다 백 층 깊이의 계단을 파헤치며 너는 시를 읽고 있다 계단이 되어가는 나를 읽고 있다
검은 피아노의 흰 파도
검은 피아노 한 대 바닷가에 앉아 있네 파도는 피아노 발목을 감으며 흘러가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눈 꼭 감고 말해 주지 않고 나의 손가락은 도마뱀처럼 바닷속으로 달아난다 너는 멀리서 나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고 너는 단풍들과 희희낙락 떠들고 있고 나는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도마뱀, 사랑을 할 때 우리는 한 음악이었을까 손가락에 파도가 흘러넘친다 바다는 파도를 사랑하고 단풍은 단풍을 사랑하는 법, 나는 몸을 둥글게 말고 커다란 피아노에 몸에 싣고 바다 위에 떠 있듯이 구름이듯 흘러간다
하얀 건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심장의 여행
내가 나를 사랑하는 계절엔 나뭇잎이 무심결에 허공을 응시한다 꿈에서 나를 만났다는 생각, 새벽까지 그 꿈이 이어진다는 생각, 갑자기 꿈에서 당신이 내 옆을 스쳐갔는데, 깊은 어둠 속이어서 당신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기분, 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날은 심장의 슬픔을 대신해서 나의 눈이 오물거린다는 생각 나를 바라보는 사람과 내가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서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렇게 내가 나의 잎속으로 스며든다는 생각,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동자 위로 가볍게 스며든다는 생각 날아가는 허공 위로 내가 슬며시 떠오른다는 생각 수평으로 흩날리다가 저기 지나가는 사람의 뒤통수를 쓰다듬는다는 생각 조용한 나의 생각이 하늘의 귓가에 젖어서 내가 하염없이 행복해진다는 생각 비스듬한 내가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다는 생각 당신이 나를 믿는데도 왜 나는 자꾸 믿음을 수집하는가 질문을 던진다는 생각 기쁨이 사라진 뒤부터 내 안에는 검은 태양이 자라고 그 말들이 심장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자세 안에서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떨어진 나무의 귀에 대본다 내가 구름의 한 모퉁이에서 떨어졌다는 생각, 거리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황급히 나의 심장을 들여다본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검은 태양 사이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심장 속의 말,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려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가 심장을 움켜쥐자 나뭇잎이 지나가는 사람의 눈 속으로 떨어졌네 당신이 꿈에서 나를 호명하자 내가 나의 꿈속으로 사라집니다 나뭇잎이 스르르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세계에서 내가 빗줄기와 겹치는 순간 날카로운 바람이 플래카드를 팔랑거렸다 내가 나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심장의 여행을 꿈꾸던 순간
장미의 전설
가시를 삼켰습니다 내 몸의 가시가 이토록 많은지 가시를 삼키면서 알았습니다 내 목의 가시가 당신 목의 가시를 삼키는 것처럼 아파서 목이 따끔거렸습니다 내 몸의 가시를 당신 정원에 옮겨 심던 그해 여름이었습니다
내 몸의 가시가 다시 장미꽃을 피우는 담장을 이룬 건 가시의 통증이 터지는 유월이었습니다 붉어서 차마 삼키지 못했던 당신 가시의 꽃나무들이 내 몸에 피어났습니다 내 몸의 정원에 핀 꽃이 줄지어 당신 정원의 담장까지 내달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곳에서 소년이 장미 꽃잎과 눈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아름답고 장미 꽃잎은 흐드러져서 지나가다 멈춘 동네 사람들의 소곤대는 눈빛이 가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소년의 손은 장미 꽃잎처럼 작고 맑아서 장미 가시를 손으로 쥐어도 피가 나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눈망울이 장미 꽃잎의 눈에 못 박혀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는 정원이었습니다 어디부터 따라왔는지 모를 소년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장미꽃으로 피어난 건 그 이듬해였습니다 그 심장 한켠이 탐스러워 당신은 며칠 밤잠을 설쳤습니다 소년의 심장을 따서 당신 심장에 집어넣고 꼭 보듬어주고 싶은 밤이었습니다 소년의 심장은 맑고 아름다워 피를 흘려도 계속 피어나는 정원이었습니다
당신과 나의 담장 사이에서 아리따운 눈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장미 꽃잎들이 우거져 가시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숲속에 소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장미의 향기에 취한 소년의 가시들이 죄다 높다란 철조망으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가시를 삼켰습니다 내 몸에서 당신 몸까지 줄지어 선 장미 숲속에서 소년들의 합창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시인_ 2015년 <시인 동네>에 『식탁 위의 풀밭』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 등이 있다.
첫댓글 시상을 자연스럽게 끌고 가는 긴 호흡도 좋지만 이미지의 차용이나 전환도 감각적이고 좋네요.
네, 이분 시 괜찮았어요. 첫 시집 나오고 한 달만에 두 번째 시집이 여우난골에서 출간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