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1독서 : 이사 49,1-6
제2독서 : 사도 13,22-26
복 음 : 루카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심리학자들이 쥐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의 기다란 두 통에 쥐를 각각 한 마리씩 넣었습니다.
한 통은 깜깜했고, 다른 통은 뚜껑에 바늘구멍을 뚫어 빛 한 줄기가 들도록 했습니다.
빛이 전혀 통하지 않는 통의 쥐는 세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빛 한 줄기만 비치는 통 안의 쥐는 무려 서른 시간을 견뎠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서 살맛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덕분에 희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인생을 비칠 빛만 찾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빛으로 다른 이가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우리 역시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내일은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어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라고 불리는 또 다른 빛도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빛이기에 가능합니다.
오늘은 오실 주님을 준비한 요한 세례자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이웃과 친척 모두 기뻐합니다.
단순히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시다.’라고 하지요.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지금 갓난아기인 요한 세례자에게,
그리고 요한의 명명식 때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내려서
불신으로 말하지 못했던 그가 혀가 풀려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했던 것은 하느님 찬미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았기에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 기쁨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줄기 빛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받아야 할 빛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야 살 수 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또 그 희망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고 앞세웠습니다.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주님의 영광을 말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 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더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흔들어 떨어뜨려야 내가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세상이 아닌가 합니다.
여당 대표로 나서는 사람들의 주장이 꼭 그렇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물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성장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섬김을 통하여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 (이규경) ***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 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통 속에 감추셨다." (이사 49,1-2)
"~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다른 성인의 축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쌓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경자, 복자, 성인’의 순서를 거쳐야 합니다.
증인이 있어야 하고, 성인의 전구를 통해서 ‘표징’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신앙의 증거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성인과는 달리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는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엘리사벳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따라서 속죄의 예식을 거치고,
제물을 바쳐야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데,
요한은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죄의 사함을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요한이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요한 세례자는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하셨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셨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분이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 해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도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며
그분과 같이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비혼주의 : 행복할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탄생의 특이한 점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 뜻에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며
처음에 의심했던 즈카르야까지도, 아들의 사명의 협조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뜻을 따르는 이를 긍정하고 도와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수준이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즈카르야가 귀와 입이 풀렸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의로움은 양심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의로움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의로워진 이는 그 받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녀를 그렇게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오리를 엄마로 착각한 길잃은 강아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는 착해 보이는 오리에게 다가갑니다.
오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강아지를 태우고 돌아다닙니다.
강아지가 안정됩니다. 강아지는 오리를 어미처럼 따릅니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는 꽤 자랐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오리는 새끼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개가 대신 새끼들을 돌봐줍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모기들은 알을 낳아주는 데까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고 그만입니다.
개는 두 달 이상 어미가 돌봐줍니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해 줍니다.
인간은 20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양심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 양심의 자유를 누릴까요?
나의 자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신앙이 없고 하느님 뜻에
자기를 봉헌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에는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일곱 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과 부활의 희망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자녀에게 생명을 구하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너를 하느님 자녀로 낳았는데,
너는 네 자녀까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못했느냐?”라고 혼이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혼 남녀 15%는 자신은 비혼주의라고 하고
51.7%는 비혼을 생각 중이라고 하며
결혼을 꼭 하겠다는 청년들은 33.3%였습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나는 자녀를 안 키우겠다고 한다면
이제 부모와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비싼 핸드백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도
마음은 공허하고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원리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을 ‘요한’이라고 짓는 동시에
그들은 아들을 주님 뜻에 바친 것입니다.
주님 뜻에 바친다는 말은 순교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모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양심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녀 출산율이 1위일까요?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는 것을
내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아들을 청한 한나를 생각해 봅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아들을 주님께 청했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음이 없이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명심합시다.
진짜 헛수고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헛수고.
저는 헛수고를 정말 싫어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전에 산청 성심원에서 했던 포르치운쿨라 축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인상이 많이 남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금 새로 프란치스칸이 된 분들에겐 그런 체험이 없어서 안 됐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수천 명이 모여서 그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감명으로 남았다는 것이 한편
저의 보람으로 남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은 다른 한편 헛수고로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하나의 일이랄까 행사일 뿐이고,
전국적인 축제는 없어져도 어쨌거나 여기저기서 축제를 지내니
이 프란치스칸 운동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헛수고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더 헛수고로 느끼는 것은 사람 농사입니다.
수도원 안팎에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저의 노력이 열매 맺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이, 비록 일부에게서지만,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난받을 경우, 무척 마음이 아프고 헛수고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정말 제가 세속적이라는 표시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헛수고 체험은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하지요.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저의 노력과 수고가
세속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과 욕심이
아직도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이사야가 얘기하는 헛수고 느낌은 제게 필요하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비교하면
헛수고 체험을 오히려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의 수도회 개혁 노력이 반대와 박해로 보상받고,
성 프란치스코도 자기가 시작한 운동이 제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았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제자들은 다 자기를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의 목숨은 한낱 계집의 앙심 때문에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생각에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범인은 이 헛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지만
성인은 이 헛수고 체험이 하느님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이 없는 수고가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헛수고는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고,
그 이상의 하느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헛수고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진정 가련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에게서 보상받지 않고,
세상에서 보상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통상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인(聖人)들의 축일은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분들께서 돌아가신 날, 다시 말해서 천상 탄일을 축일로 정해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천상 탄일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탄생 축일을 경축합니다.
그에게는 축일이 두 개입니다. 탄생 대축일과 수난 기념일.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등급이 높은 성인인 것입니다.
그를 성인 중에서 대 성인으로 인정하며 각별한 공경과 예우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0년 세월을 나자렛에서 조용히 지내셨듯이,
세례자 요한 역시 오랜 세월 광야에 머물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 내공을 닦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는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헤로데 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혹시 이분이 왕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럴 때마다 세례자 요한은 정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요.
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자 요한을 성인 중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지녔던 탁월한 겸손의 덕 때문입니다.
이토록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 의식은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무리 없이 연착륙하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제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때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히 귀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