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에서 하루를 더 묵은 우리는 충주로 올라간다.
충주는 여기서 가까운 거리다. 20분 정도.
우선 충주역으로 가서 내일 조카 올라 갈 김천~서울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월요일인데도 오후표가 6시반 1장 밖에 없고 그리곤 밤차표란다. 6시반 표를 대학생 20% 할인해서 끊고, 시내에 있는 탄금대로... 여기선 탄금공원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면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절경, 그러나 상상했던 것보단 실망. 공원은 아주 잘 조성이 되어 있었지만...
또한 신립 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패함으로서 서울까지 짓밟히게 된 뼈저린 역사의 현장.
신립장군은 왜 문경새재에 배수진을 치지 않고 탄금대에서 적을 맞았을까... 물론 작전상의 요인도 있었겠지만, 여기 따르는 전설 한토막....
신립장군이 젊은 시절 조령 근처를 지나다 길을 잃어 외딴 집에 머물게 되었다.
처녀 혼자 지키고 있던 이집은 밤마다 괴물이 나타나 부모를 다 잃었다한다. 그 괴물을 처치하고 처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자기를 데려가 달라는 청을 거절했다한다. 그집을 나선 장군이 새재를 넘으며 돌아다보니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르고 불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단다. 그후 장군에게 처녀의 혼이 나타나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를 지키라고 일러 주어 앙갚음을 했다는 전설, 자랄때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얘기이기도하다.
신립장군이 뒤에 흐르는 달천강에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12번 오르내렸다는 12대에서 달천강을 내려다 보니 높은 바위 절벽이다.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중앙탑으로 향한다.
탑평리 7층석탑. 통일신라시대 때 나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나라의 거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해서 속칭 중앙탑이란다.
남한강 상류의 강가 높은 토단위에 건립된 통일신라 유일의 7층 거탑.
원래 절터였으나 지금은 공원이 잘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다른 지방과 달리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게 느껴지는 곳이다.
강가에서 왁자한 소리가 나서 무슨 문화행사라도 하나하고 달려 가니 잉어를 한통 가득 잡아 놓고 스님과 신도들이 방생중이었다.
대형버스로 동원이 되었나보다. 돈을 내고 고른 잉어에다 빨간 주사(?)로 무신 글을 새겨 강에다 놓아 주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뭐하는 거냐고 물어 설명을 해주니 하는 말 "잡지나 말지..."
다시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삼거리 오른쪽에 서있는 중원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한가운데 황색 보호선에 주차를 하고 길을 건넌다. 보호각을 세워 놓았다.
남쪽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만주 즙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이라고..
오랜전부터 입석마을로 불리웠었지만 정작 이비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1979년이란다.
사면에 모두 글을 새긴 사면비로서 마멸이 심하나 대략 400여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당시 고구려의 영토가 이지역에까지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는것이며 당시의 삼국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비석이다.
빨래판으로 또는 대장간 기둥으로 쓰여지기도 했고, 아들 낳기를 빌며 마을 수호석으로 여겨져 오던 이비석은 뒷면 윗부분은 깨어져 나갔다.
늦게나마 문화재로 보호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 시내로 들어와 충주댐을 보기 위해 충주호쪽으로... 높은 곳에서 댐을 보기 위해 휴게소쪽으로 올라가고 수자원관리소까지 올라가봤지만 실패.
댐을 건너 반대편 선착장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건너편 절경이 훨씬 아름답고 댐도 잘 보인다.
그러나 선착장은 여기보다 월악선착장이 훨씬 경관도 아름답고 개끗하다.
다시 댐을 건너 충주호를 끼고 산을 한바퀴 돌아 시내를 거쳐 임경업 장군이 모셔진 충열사를 찾았다.
남편으로 인해 청나라 심양까지 압송되었으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심양의 감옥에서 자결한 부인 이씨의 정절비가 함게 모셔져 있었다.
충열사 바로 건너편 길가에 단호사, 얼핏 보기엔 조촐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여러가지 흔적들... 수령 500년된 용틀임하는듯한 소나무가 낮게 드리워져 있고, 몇백년씩의 수령을 자랑하는 키큰 느티나무들...
그리고 조그마한 3층석탑...
큼지막하게 천불전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모습만 아니면 어디 운치 있게 정원을 가꾼 가정집에 들어선 느낌이 들 정도로 아담하다.
그 유명한 철불좌상을 찾으니 오른켠 좁은 약사전 안에 계신다.
문이 닫쳐 있어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옆으로 난 문으로 모두 들어가서 인사드리고 살펴보니. 그야말로 근엄함이 지나쳐 심술스런 모습이 딱 맞다. 고려시대 지방 호족들의 세를 과시하는 철불상의 모습답다고할까.....
밖으로 나오니 채마밭에서 런닝차림의 여스님이 땀을 흘리며 김을 매고 계신다.
절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시골의 할머니댁을 찾은것 같다.
충주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다시 문경으로 내려간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 생긴 터널로 가지 않고 이화령을 넘는다.
이화령에 오르면 한쪽은 여기서부터 충청도라는, 조금 지나면 경상북도라 새겨진 표지석이 나온다. 고개 휴게소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는 너무나 시원하고 세상이 다 발아래 있는것 같다.
온천지역으로 들어가면 숙박할 곳이 많을것 같아 문경온천쪽으로 들어갔다.
읍내를 한바퀴돌아 문경종합온천, 새로 생겼나보다.
그 옆 공지에 인제 개업했나, 앞에 화환이 줄을 선 모텔이 깨끗하다.
~국회의원, ~무술협회장....... 등을 읽으며 들어간다.
3일전에 개업했단다.
객실도, 시설도 그만이다.
장같은 호텔, 호텔같은 모텔.... 아이들이 하는 말이다.
다른불은 다 껐는데 스탠드가 희한하다. 꺼지질 않는다.
어쩌다 한번 두드리니 조금 어두워지고, 또 한번 치니 더욱 어두워지기만한다.
야들아 이게 우찌된거고....
엄마 센슨가봐,
역시 젊은이들이다. 과연 등앞에 센스조절기가 있네...
무식한 구세대 엄마.........
내일은 내려가면서 지나친 데를 들르면서 내려갈 것이다.
"보나는 두번 다시 이모따라 나서지 않겠지?"
조카에게 물으니 "헤헤" 웃는다.
친구들은 이모랑 여행갔다고해서 아마 어느 계곡이나 바닷가에서 발을 담그고 있으리라 여길거란다.
"힘들었지만 지나서 생각해 보면 즐거웠고 보람있었던 여행이라 여겨질 것이다.
그리곤 또다시 이모더러 가자고 할걸..."
방학하자마자 '라파엘의 집'에서 며칠을 봉사했다는 아이는 환하게 웃는다.
2001. 7. 29
마지막날
상주쪽으로 내려가다 함창읍내에서 괴산으로 이어지는 32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견훤산성을 찾았다.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 문장대를 보은 법주사쪽으로 오르지 않고 반대 방향인 시어동 계곡쪽으로 오르는 길,
공원 매표소 가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표지판, 눈여겨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입구에 견훤산성과는 관련이 없는 큰 비석 2기가 더 눈에 띈다.
700m, 사람도 잘 다니지 않을 좁은 산길을 오르면 거대한 산성이 나타난다. 이 수많은 돌덩이들을 어떻게 날랐을까? 수많은 돌들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곽, 허물어진 곳도 있지만 그 아래는 천길 절벽이다.
불어 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하고 저 멀리 산과 산사이를 가르며 이어지는 도로와 마을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으며 상주쪽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