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 2018년 여름호
【김현경의 회고담 5】
【김수영 시인의 결혼과 피난 생활】
일시 : 2018년 5월 11일 및 18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김수영 시인과 언제부터 이성적으로 만나게 되었는지요?
김현경 : 1947년 5월에 내가 관계된 배인철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내 주위의 문인들이 경찰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고, 나도 낙인이 찍혀 활동하기 어려웠어요. 학교에서도 제적되었구요. 그런데 몇 달 있으니까 김수영 시인이 찾아왔더라구요. 공부를 해야 된다고 나를 달랬어요. 나는 그때 헉슬리의 소설을 읽고 있었고, 김 시인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있어 서로 바꿔가며 보았어요. 시를 써서 나누어 읽기도 했지요. 그때 김 시인은 일본어로 시를 쓰다가 한국어로 쓰기 시작한 때였어요.
김 시인이 8월 초순 즈음 치질 수술을 했어요. 김 시인이 종로5가에 있는 고모님 댁 뜰 아랫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가보니까 많이 아파했어요. 그래서 그냥 있을 수 없어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간 것이지요. 입원을 한 것은 아니고 수술한 뒤 몇 시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한 달 정도 병원에 데리고 다녔어요. 그렇게 고모님 댁에서 밥을 해 상을 차리고 간호하면서 동거를 한 것이지요. 고모님은 소녀 과부인데 신장이 나쁘고 허리가 꼬부라져 있었어요. 따라서 고모님 식사까지 차린 셈이지요.
김 시인은 나와 있기 전까지 충무로에 있는 어머니한테 가서 밥을 얻어먹고 고모님 댁에 와서 주로 지냈어요. 충무로에 있는 <유명옥>이란 설렁탕집이 김 시인의 집이었어요. 장사가 아주 잘 되었어요. 도봉동의 묘지기 아들인 만석이가 와서 시중을 들었을 정도예요. 시어머니가 인물이 좋았어요. 음식 솜씨가 좋았고 말씀도 재미있게 하셨어요. 한복을 입고 장사를 하셨는데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그 식당집의 지붕 밑에 방이 하나 있었어요.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어요. 김 시인이 거기에 가끔 있다가 고모님 댁에 와 있었어요. 고모님 댁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충무로에 가서 밥을 먹고 어머니한테 찻값 정도 얻어 명동 등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고모님 댁으로 돌아오고 한 것이지요. 그곳이 아지트인 셈이어서 문인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김 시인이 성격이 까다로워 방에는 잘 들이지 않았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치질 수술이라는 뜻밖의 일로 가까워지지 시작했네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뒤 순조롭게 결혼을 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을 간호하면서 나는 가진 돈을 다 썼어요. 그래서 김 시인이 수술한 날 집에 들어가지 않고 어머니한테 전화로 사정했어요. 친정어머니께서 다음날 민어를 한 마리 사가지고 오셨어요.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셨구요. 용돈도 좀 주고 가셨어요. 그런데 병원비며 반찬값이며 담배값 등으로 금방 돈을 다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집으로 갔지요. 아버지께서는 바쁘니까 집에 안 계셨어요. 어머니가 돈을 안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어머니 찬거리를 사러 나간 사이 다락에 올라가 피륙을 꺼내왔지요. 그렇게 두 번을 가져다가 팔았는데, 세 번째 들켜서 혼났어요. (웃음)
한 달 정도 있으니 수술한 부위가 꾸둑꾸둑 아물었어요. 결핵성 암치질이어서 완전히 야물지는 않았지만 걸을 수 있게 되었지요. 찬바람이 불 즈음에는 외출도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김 시인이 외출하고 돌아오더니 암만해도 우리는 같이 못 있겠다고 하더라구요. 사람들이 수군거려서 안 되겠다고 했어요. 앉아서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누워서 얼굴을 안 보인 채 얘기를 했어요. 김 시인도 우는 것 같더라구요. 그전에도 데이트를 할 때 명동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는 못 갔어요. 배인철 사건으로 인해 내가 낙인이 찍혔으니까요. 김 시인도 사건 용의자로 의심받을 수 있었지요.
나는 김 시인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못했어요. 내가 죄인이니까요. 그렇지만 자존심이 있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왔어요. 그런데 집에 들어서니 억울해서 못 참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뒹굴며 통곡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달랬어요. 내가 자살이라도 할 것 같으니까요. 어머니는 “끝장 나면 나는 것이지 뭐 그러느냐”고 하셨어요.
맹문재 : 그 장면이 눈에 선한데, 참으로 서글프네요. 배인철 사건으로 인해 외로운 처지에 있다가 의지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났는데 그 일도 순조롭지 않았으니…… 어떤 점이 그렇게 억울했는지요?
김현경 : 정이 들었잖아요. 치질 수술을 하면서 볼 것 안 볼 것 다 본데다가 한 달 간이나 간호하면서 정이 든 것이지요.
맹문재 : 그렇군요. 집으로 돌아온 뒤 어떻게 지냈는지요?
김현경 : 아버지께서 결혼은 좀 힘드니까, 뭐가 하고 싶으냐고 물으시더라구요. 그래서 불란서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소로본대학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은 왠지 배신감이 들어 싫었어요. 불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이희영 불어학원에 들어가 불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가 잘 되더라구요. 아버지께서 돈을 두둑하게 주셨어요. 아주 비싼 캐시미어 코트를 사 입었어요.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지요.(웃음). 이희영 선생이 자기 집도 돈암동이라고 해서 같이 다니기도 했어요.
맹문재 : 그러면 김수영 시인을 언제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요?
김현경 : 하루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종로4가에서 전차를 타려고 하는데, 누가 내 손을 꽉 잡더라구요. 돌아보니 김 시인이었어요. 헤어진 지 두 달 즈음 되었을까요. 자기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간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어요. “오늘이 월급날이니까 같이 가자”고 했어요. 원남동에 있었는데, 야간 강의였어요. 나 보고 자기가 강의를 하고 올 테니 벤치에 앉아 있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얌전히 앉아 있었지요. 왠지 싫지 않고 좋았고 반가워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두 시간 강의인데 다 안하고 일찍 나왔더라구요.
김 시인이 종로5가 고모님 댁으로 가자고 해서 갔어요. 그날부터 다시 동거를 시작한 것이에요. 그날 저녁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어요. “나 오늘 못 가요. 만났어요.” 딱 두 마디를 했어요. 어머니께서 화를 내시더라구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그냥 끊었어요. 나랑 헤어진 뒤 김 시인은 고모님 댁에서 나와 충무로에 있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 살았대요. 그래서 시어머니께서 근처에 셋방을 하나 얻어줘 혼자 살고 있었대요. 문인들이 드나들기도 했나봐요. 그런데 계약 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고모님 댁으로 간 것이지요.
다음날 시어머니가 금반지를 해서 고모님 댁으로 오셨더라구요. 다섯 돈 되는 가락지였어요. 시어머니가 나 보고 돈암동 집으로 가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갔어요. 시어머니가 우리 어머니를 보고 “어떻게 하느냐, 짝을 지어 줍시다”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내가 배인철 사건도 있고, 김 시인을 간호하면서 정이 든 것을 알고 계셨으니 그러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일수 돈을 얻어 돈암동에 어엿한 집을 마련해주셨어요. 부엌과 마당도 있고 건너편에 방이 또 하나도 있었어요. 그래 내가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는 시동생 수경이를 데리고 왔어요. 시끄러운 충무로 설렁탕집에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잖아요. 그때가 1949년 11월 즈음이었어요.
맹문재 : 참으로 잘 되었네요. 그러면 결혼식은 언제 올렸는지요?
김현경 : 친정에서 결혼식 얘기가 나왔어요. 시어머니도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구요. 친정어머니가 아버지께 얘기해서 결혼식 비용을 받았는데, 내가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결혼식을 올리기 싫다고 했어요. 배인철 사건도 있고 해서 어디 절간이나 교회 같은 곳에서 조용히 하고 싶다고 했어요. 시어머니도 친정어머니도 납득을 하시더라구요.
그랬는데 2월 즈음 김 시인과 함께 부산으로 여행을 갔어요. 신혼여행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어요.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여관을 하나 정해 놓았는데, 김 시인이 잠깐 일을 보고 들어오겠다고 하고 나가더라구요. 그런데 밤 12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온갖 나쁜 생각이 들었어요. 고약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구요. 그래 잠도 못 자고 있는데 김 시인이 새벽이 되어 눈이 퀭해 가지고 들어왔어요. 얘기하는데 밀선을 구하려고 갔었대요. 김 시인이 일본어도 잘하고 일본문학도 잘 아니까 일본으로 가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밀선을 구하려고 나갔던 것이에요. 그래 주선한 사람을 따라 마산인가에 어딘가에 가서 진짜 출발할 배와 사람을 만났대요. 그쪽에서 돈을 줘야 배를 댄다고 해서 일단 돈을 건네고 아내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대요. 그쪽에서도 그러라고 했대요. 그런데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사기당한 것 같더래요.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인 데다가 밤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돈을 건넨 데에 부리나케 가보니 아무도 없더래요. 두 사람이 완전히 짜고 김 시인을 속인 것이지요.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해서 돈을 다 날린 것이에요. 김 시인이 그렇게 어수룩한 면이 있어요. 그래서 그 이튿날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결혼하고 나서도 주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고민이 많았던가 봐요. 그래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땅에 가서 살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 심정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네요. 서울에 올라와서는 어떻게 사셨는지요?
김현경 : 친정집에 가서 돈을 좀 얻어왔지만 금방 다 쓰게 되었지요. 그래서 수표동에 있는 두 아이들 가정교사를 했어요. 친정집 할머니의 동생이 있었는데 그분 딸의 아이들이었어요. 김 시인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간호학교에 야간 강의를 계속 나갔어요. 그러다가 6·25전쟁이 났지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한국전쟁에 큰 영향을 받았지요. 그 상황을 들려주시길 부탁해요. 『김수영 시 전집』에 보면 한국전쟁이 일어난 12월에 경기도 화성군 조암리로 피난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피난가기 전에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김현경 :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시댁은 충무로에서 하던 설렁탕 장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여름에 김 시인이 의용군에 붙들려가게 되었구요. 그래서 나는 친정집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우리 집은 돈암동에 있는 양옥이었는데, 집이 좋았어요. 그래서 인민군 장교들이 우리 집을 점령하고 사무실로 사용했어요. 우리를 해꼬지는 안 하고 집의 한쪽 방을 쓰게 했어요. 장교들이 아주 젊잖았어요. 물론 우리는 뒷문으로 드나들었지요. 그리고 집의 밭 끝에 초가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아버지가 숨어서 지냈어요. 9·28 서울 수복 때 인민군들이 우리집을 나갔는데 불은 안 질렀어요.
인민군이 후퇴한 뒤 숨어 있던 아버지가 밖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같은 동네에 사는 탁 씨라는 아버지의 국민학교 동창생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성북경찰서 형사였어요. 그가 우리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등 귀찮게 했는데 안 들어주니 그렇게 보복을 한 것이에요. 아주 좋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는 잘못한 것이 없다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조병옥 박사를 많이 도와드리기도 했구요. 그런데 그 형사가 우리 집을 빨갱이로 덮어씌웠어요. 그렇게 해서 아버지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요. 몽둥이로 맞아 허리가 부러졌다고 해요.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몰라요. 시체도 못 찾았어요. 아버지는 1901년 신축생 소띠로 시어머니와 동갑이었어요. 어머니는 1906년 병오년 말띠였지요. 우리 식구는 무서워서 수표동으로 급히 도망쳤어요.
맹문재 : 수표동에는 아는 집이 있었는지요?
김현경 : 아까 얘기한 친정 할머니 동생의 딸 집이 있었어요. 우리와 한 식구처럼 지냈어요. 나중에 내가 부산에 내려갔을 때 광복동에 피난 가 있는 그 집을 찾아가기도 했지요.
맹문재 : 수표동에서 얼마나 있다가 경기도 화성군 조암리로 피난 갔는지요? 왜 조암리로 갔는지요? 어떤 교통수단으로 갔는지요?
김현경 : 수표동에서 한 달 정도 숨어 있다가 조암리로 갔어요. 조암리에는 친정 어머니의 마름집이 있었어요. 이름이 송기학인가 그래요. 그곳에 가면 방 한 칸은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친정어머니는 시집올 때 쌀 2백석을 가져올 정도로 잘살았어요. 기대했던 대로 마름이 방을 한 칸 마련해주었어요.
수표동에 숨어 있을 때 돈암동의 집에 살살 가보니까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화장대 등의 서랍을 열어 이불 호청에다가 쏟아붓고 싸서 수표동 집으로 조금씩 옮겼어요. 피륙은 다 가지고 왔어요. 그걸로 피난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수표동에서 조암리로 피난 갈 때는 지나가는 트럭을 하나 불렀어요. 그래서 짐을 싣고 간 것이지요.
내가 조암리로 피난가면서 종로5가에 있는 고모님께 주소를 적어 드렸어요. 나중에 그 주소를 보고 시댁 식구들도 조암리로 왔어요. 시댁 식구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의 친정 식구들까지 왔어요. 시댁은 시어머니의 동생이 인쇄소를 운영하는 신당동으로 피난 가 있었어요. 나중에 인기 가수가 되는 차중락의 어머니 집이었어요. 그분은 김 시인의 이모님이 되지요. 시댁은 거기에서 숨어 있다가 조암리로 피난을 온 것이에요.
맹문재 : 조암리로 피신할 때 친정 식구들 모두 함께한 것인지요? 시댁 식구들은 누구누구 왔는지요?
김현경 : 친정집에서는 어머니, 나, 세 여동생, 모두 다섯 식구가 왔어요. 언니는 그때 결혼한 상태여서 출가외인이었지요. 시댁 식구는 시어머니, 김 시인의 남동생인 수성과 수환, 여동생인 수명 수련 송자 이렇게 왔지요. 시어머니의 친정 식구들도 같은 날 왔는데, 시어머니의 친정어머니를 비롯해 며느리, 딸, 아들 해서 거기도 댓 식구 정도 왔어요. 김 시인의 동생인 수성이 피난 올 때 국민병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환자로 위장했대요. 피똥을 싼다고 피난민들에게 소문을 내었대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김현경 여사님의 자매가 다섯이네요. 오빠나 남동생은 없었는지요.
김현경 : 네. 딸만 있어요. 언니 이름은 김현정인데 나보다 세 살 위예요. 배병우 사진작가의 장모가 되어요. 언니는 1950년에 딸 하나를 두었어요. 언니는 작년에 94세로 돌아가셨어요.
아래 동생은 1935년생으로 이름이 김현소예요.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두었어요. 아들과 며느리는 대학에 있고, 큰 딸은 판사이고 사위는 변호사예요. 작은 딸은 대학에 있고 사위도 대학에 있어요.
둘째 동생은 김현락이에요. 아들이 둘인데, 하나는 백남준과 비디오 아트를 같이 했어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다른 아들은 삼성 제일기획에서 일하고 있어요.
막내가 김현진이에요. 아들 하나 딸 둘이 있어요. 아들은 현대자동차에서 일하고, 딸 하나는 미국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사위는 컴퓨터 엔지니어에요. 다른 딸과 사위는 모두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돈을 잘 번다고 해요.
여동생들이 모두 살아 있는데, 자식 농사를 다 잘 지었어요.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조암리에 피난 가서는 어떻게 지냈는지요?
김현경 : 조암리로 피난 가서 집을 한 채 빌렸어요. 조선매약주식회사의 야초밭이 있는 집이었어요. 그 집 며느리가 딸 하나를 키우고 있었는데 우리가 빌려 썼어요. 나중에는 가지고 간 옷감을 팔아 집을 한 채 샀어요. 초가집인데 새로 지은 것이었어요. 마루가 없어 흙을 파다가 마루를 만들었어요. 진흙을 퍼다가 쌓고 그 위에 멍석을 까니 그럴듯한 마루가 되었요. 나는 그곳에서 삼규고등공민학교 교사를 했어요.
맹문재 : 삼규고등공민학교의 교사 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이 새롭네요. 그 상황에 대해 좀 더 알려주세요.
김현경 : 교장이 서00였어요. 나중에 국회의원으로 나갔지요. 고려대 출신으로 깨끗하고 잘생겼어요. 교사로 나와 달라고 해서 갔는데 곤색 세비로(신사복)를 입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전쟁 중에 그렇게 깨끗한 신사를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고등공민학교는 조암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었는데, 내가 영어, 국어, 작문, 미술, 가사 등을 가르쳤어요. 1학년, 2학년, 3학년 각 한 반씩 있었어요. 전쟁 중이어서 교사를 구하기 힘들었으니까요. 1951년 4월 말에 시작해서 이듬해 겨울 방학 전까지 했어요. 김수영 시인이 돌아오기 전까지였어요.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고 젖을 먹여야 했으니까 학교로 데리고 다녔어요. 학교 소사실에 넣어두고 수업에 들어가곤 했는데, 방문 바깥의 가마솥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어 위험했어요. 그래서 수업을 하다가 걱정이 되어 달려가 보기도 했어요.
학교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길가에 있는 한 산소 옆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분홍색 흰색 도라지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아이에게 잔디 위에서 놀게 하고 나는 학생들이 쪽지 시험을 본 것을 정리하기도 하고 다음 날 예습도 했지요. 집에 들어가 봐야 저녁 먹고 나면 남폿불에 글씨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산소 옆을 공부방으로 삼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어느 집이 소를 매어 놓았는데 송아지 낳는 것을 보았어요. 어미 소가 삥삥 돌더니 툭 하고 송아지를 떨어뜨리더라구요. 그리고 한참을 핥으니 글쎄 송아지가 일어서서 걷더라구요. 그리고 어미젖을 빨더라구요. 참 신기했어요.
고등공민학교에서는 학생들 교복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가사 수업 발표회도 열었어요. 에프런을 만드는 수업이었지요. 수업 연구회를 한다니까 주위 동네의 교사들이 왔는데 카레 밥을 만들어 대접했던 기억이 나네요. 난리통인데 어떻게 카레를 구했는지 알 수 없네요.
맹문재 : 삼규고등공민학교의 교사 생활이 참으로 인상적이네요. 힘든 생활을 당차게 하신 모습이 대단한데, 슬프기도 하네요. 그곳의 교사 생활을 왜 그만두셨는지요?
김현경 : 교사 생활을 하면서 부업으로 겨울에 조끼를 만들어 팔았어요. 여름에는 적삼을 만들어 팔았구요. 그래 조암리 5일장에 나가 셋째 동생하고 팔았는데, 어느 날 장터에서 서울 돈암동에서 아버지를 끌고 간 형사 아버지 탁 씨를 본 것이에요. 그 사람도 우리를 보았구요. 아마 그들도 1․4후퇴 때 조암리로 피난을 왔는가봐요. 그래서 파출소에 부역자 가족이 있다고 신고할까봐 겁이 나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요. 주막집 앞에서 조끼를 팔고 있었는데, 우리가 도망치려고 하니까 주막집 아줌마가 왜 그러냐고 했어요. 겁나는 사람이 있다고, 누가 우리 집이 어디인지 물어보면 절대로 알려주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그래서 일주일 뒤 수원으로 이사했어요. 동생들 학교 교육 문제도 있었구요. 주막집 아줌마가 정말로 안 알려주었는지 무사히 수원으로 피신할 수 있었어요.
맹문재 : 한국전쟁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네요. 이념의 대립에 새삼 가슴이 아프네요. 남편은 집을 나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시동생을 둘이나 잃었고, 친정아버지도 억울하게 세상을 뜨고…… 겪어야 했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컸네요.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볼게요. 조암리에 피난 가서 큰 아드님을 낳았잖아요. 그 상황에 대해 좀 들려주시지요.
김현경 :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아들을 낳았어요.
맹문재 : 『김수영 전집』에는 12월 26일 조암리로 피난했고, 28일에 아들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김현경 : 『김수영 전집』에 잘못 나온 것이에요. 내가 제일 잘 알지 않겠어요.(웃음) 나는 친정 식구들과 10월 말 즘에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시댁 식구들과 시어머니 식구들이 12월 크리스마스 즈음 온 것이에요. 1․4후퇴 전에 정부에서 대피령을 내렸잖아요. 그래서 시댁 식구들이 피난을 왔어요.
내가 이름을 준(儁)이라고 지었어요. 준걸 준 자인데, 재주와 슬기가 뭇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뜻이지요. 나는 이 글자를 싸워서 이기라는 의미로 썼어요. 애 아빠가 전쟁터에 나갔는데 싸워서 이겨야 돌아올 수 있잖아요.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준으로 지은 것이에요. 그런데 김 시인이 몸이 약한데다가 치질 수술까지 했으니 아무래도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기도 했어요.
맹문재 : 큰 아드님의 이름에 아주 깊은 뜻이 들어 있네요. 그러면 작은 아드님 이름이 우(瑀)인데 어떤 의미로 지은 것인지요?
김현경 : 작은 아들은 마포로 이사해서 양계를 할 때 낳았어요. 그때 집 주위에 밭이 있어 밭을 경작한다는 의미로 경(耕)이라고 지었어요. 그런데 김경이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자살을 했다든가 자살 미수를 했다든가 하는 뉴스가 신문에 났어요. 그래서 김 시인이 안 된다고 해서 옥돌, 패옥 우(瑀)를 썼어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주의 우두머리가 되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맹문재 : 작은 아드님의 이름에도 큰 뜻이 담겨 있네요.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돌려볼게요. 김수영 시인이 언제 돌아오셨는지요?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었으니까 가족이 조암리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은데요.
김현경 : 내가 김 시인이 있는 포로수용소에 자주 편지를 썼으니까 주소를 알고 있었지요.
맹문재 : 그렇군요. 그러면 김수영 시인이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언제 처음으로 아셨는지요?
김현경 : 영등포에 계신 시어머니가 알려주었어요. 김 시인이 종로 5가에 있는 고모님 댁으로 자기 상황을 엽서로 보냈어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고모님 댁에 갔다가 알게 된 것이지요. 고모님은 소녀 과부로 허리가 꼬부라져 피난을 가지 않고 그냥 그 집에 눌러 있었어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그곳에서 받은 주소를 조암리로 가지고 와 알려주었어요. 그 소식에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나도 울고 식구들 모두 울었어요. 시어머니가 조암리에 오면 한 이틀 정도 쉬다가 가셨는데, 식사를 하다가도 아들 생각이 나면 마냥 우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친정어머니도 울고, 그야말로 집안이 통곡의 바다였어요.
맹문재 : 저도 가슴이 뭉클하네요. 김수영 시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시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셨는지요?
김현경 : 마냥 흐뭇했어요. 그래서 장문의 편지를 포로수용소에 보냈지요. 편지 내용은 주로 앞날의 인생 설계였어요. 그런데 답장이 오질 않는 거에요. 그래서 애를 업고 매일 십리 길을 걸어 혹시 답장이 왔을까 하고 주재소에 가봤어요. 주재소는 지금의 파출소 같은 곳인데, 편지도 그곳에서 취급했어요.
나중에 김 시인이 얘기하는데, 글쎄 내 편지가 포로수용소에서 위문 편지였대요.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어 너덜너덜 해졌대요. 그래서 베게 속에 감추어두었대요. 그리고 답장을 써서 간호사에게 부쳐달라고 했는데, 그 여성이 부치질 않았다는 것이에요. 김 시인에 대해 일종의 질투심을 가졌나봐요.
그 간호사가 노 여사였어요. 노 여사는 그때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는 유부녀였어요. 휴전 뒤 노 여사도 서울로 올라와 미도파 백화점에서 장사를 했어요. 가끔씩 김 시인과 만났는가봐요. 하루는 큰 타올을 선물로 받아왔대요. 기분 나쁘면 버리라고 했는데, 내가 버릴 이유가 없잖아요. (웃음)
맹문재 : 이 또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네요. 김수영 시인이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조암리의 집에 들어섰을 때 어떤 인상이었는지요?
김현경 : 멀쩡하더라구요. 나는 다 죽어가는 해골바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멀쩡했어요. (웃음) 해가 저물기 전에 집에 들어섰는데 소지품도 없이 빈손이었어요. 부산에서 석방될 때 여비로 쓰라고 담요 몇 장을 주었는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2월 2일 급작스럽게 방한하는 바람에 연기되었다가 온양에서 석방되었잖아요. 그 기간 동안 담요를 팔아서 사느라고 그랬대요.
맹문재 : 마침내 김수영 시인이 살아 돌아왔으니 집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겠네요. 당연이 그랬겠지요. 이후 피난지 생활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요?
김현경 : 방 두 칸을 쓰고 있었는데, 김 시인이 돌아와 우리가 안방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동네에서 제대로 된 집에 인사도 갔어요. 대접도 받았지요. 나는 김 시인한테 조암리에 눌러앉아 살자고 했어요. 집도 있고 논밭도 약간 있었거든요. 그런데 김 시인은 생각이 달랐어요. 그래서 한 일주일 있다가 취직하러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김 시인이 부산으로 내려간 뒤 우리는 수원으로 이사를 했어요. 아까 얘기한 탁 씨를 조암리 장터에서 만났기 때문에 무서워 피신한 것이지요. 조암리에서 동생들이 많은 고생을 했어요. 농사를 짓는다고 똥지게를 졌을 정도예요.
그 무렵 시댁 식구들도 조암리에서 부산으로, 영등포로 이사를 했어요. 수성과 수환 시동생은 부산으로 취직을 하러 내려갔고, 수명 수련 송자는 영등포 상도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조암리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영등포에 가서 수명 시누이는 소주공장에 들어가 경리를 보았고, 수련 시누이는 시장에서 김치 장사를 했어요. 송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일을 하지는 않았구요. 시어머니는 부산과 영등포에 오고가곤 했지요. 조암리로 오시기도 했구요. 나도 영등포에 가보았는데, 괜찮더라구요.
맹문재 : 수원으로 이사 가서는 어떻게 지냈는지요?
김현경 : 나는 애를 키우며 하는 일이 없었어요. 팔아먹기만 했어요. (웃음) 동생들이 수원 매산국민학교에 입학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언제 연락을 하셨는지요? 대구에서 먼저 직장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현경 : 김 시인이 부산에 내려가 일자리를 구하려 돌아다니다가 박태진 시인을 만났는가봐요. 그의 부인인 김혜원이 나와 이화여대 동창이에요. 그리고 박태진 시인의 장인이 교통부 차관이었어요. 그래 알선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김 시인이 대구에 있는 미팔군(美8軍) 수송관 통역관으로 취직했어요. 김 시인의 주소를 가지고 대구로 아이와 함께 내려갔어요. 냄비, 수저, 옷가지를 싸서 살려고 간 것이지요. 대구역에 도착하니 직원이 마중을 나와 하숙집으로 데려다주었어요. 하숙집이 일본집이었는데 고급스러웠어요. 여자 주인도 아주 인텔리였어요. 무척 반가워해주면서 안심하고 지내라고 친절하게 대해주었어요.
내가 왔다고 하니 김 시인이 일찍 퇴근해 왔더군요. 그래 두둑하게 차린 저녁을 먹고 자는데, 그날이 월급날이자 회사를 그만둔 날이라고 말하더라구요. 미군들과 일하는 것이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했어요. 김 시인은 원래 미군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그래서 김 시인은 부산으로 가야겠다고 했어요. 부산으로 가면 문인 활동도 활발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다음날 아침밥을 먹고 김 시인은 부산으로 가고 나는 수원으로 올라왔어요. 나에게 차비를 조금 주었는데, 기가 막혔어요. 이제 전쟁도 없고 헤어질 일도 없으니 아이를 키우면서 열심히 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만 꿈이 뒤틀리고 말았으니 주저앉고 싶고 울고 싶었어요. 마중 나온 직원이 사과가 든 대소쿠리를 선물로 주대요. 그런데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아이가 하나씩 먹다보니 한 개가 남더라구요. 그것을 들고 집에 들어오니 식구들 보기에 부끄러웠어요. 남은 한 알의 사과가 그야말로 절망과 허공의 심볼이었어요.
맹문재 :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네요. 그러면 부산에는 어떻게 가셨는지요?
김현경 : 수원으로 올라와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김 시인이 적극적으로 오라는 얘기도 없었는데, 살아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아이를 취직하면 데려가겠다고 하고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내려갔어요. 영등포에 계시는 시어머니가 부산에 있는 수성과 수환 아들에게 왔다 갔다 하면서 김 시인이 어디에 사는지 알려줘 찾아간 것이지요. 부산역에 내리니 수환 시동생하고 김 시인이 마중을 나와 있더군요. 부산역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야말로 인산인해여서 옆에 있는 사람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김 시인을 따라가 보니 구포동에 있는 하꼬방(판잣집)이었어요. 철로 옆에 있었는데 문짝도 없는 폐가였어요. 집안에는 세간 하나 없었어요. 김 시인이 낮에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돌아와 잠만 잤는가봐요. 전쟁 중 포로수용소에 갇혀 빨간 딱지가 붙은데다가 대학 졸업장이 없었으니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박연희, 박인환 등의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원고를 좀 써 푼돈을 받으며 지냈는가봐요.
다음날 서울 수표동에 있던 친정 할머니 동생의 딸 집에 김 시인과 함께 찾아갔어요. 광복동에 살고 있었어요. 피난 중에도 소식을 알고 있었지요. 이층집이고 규모가 컸어요. 그런데 그 집 조카가 서울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 조카가 학교로 뛰어가 이종구를 데리고 왔어요. 평소에 이종구가 나의 안부를 자주 물었다고 했어요. 이종구가 서울고등학교 영어 선생으로 있었어요. 수험생 반을 맡아 특강을 하고 있었는데, 인기가 많았나봐요. 워낙 실력이 있었으니까요.
이종구가 부민동에 자기 방이 두 칸 있으니 가자고 해서 그날 저녁 김 시인과 함께 갔어요. 그랬는데 김 시인은 일보러 간다고 먼저 나왔어요. 내가 광복동 집에 와서 잘 줄 알았겠지요. 나는 그곳에서 이종구가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이력서를 썼어요. 이종구는 자기가 아는 선생한테 부탁해보겠다고 하면서 그 결과가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어요. 그래 거기에서 빨래도 해주고 부엌도 치워주고 도배도 해주면서 기다린 것이지요.
이종구는 내가 달아날까봐 꿈자리가 사나우면 학교에도 안 갔어요. 그래서 급기야 김원규 교장이 찾아왔어요. 유부녀와 함께 산다는 소문까지 나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확인하러 온 것이지요. 다시 말해 야단치려고 왔지요. 그런데 막상 와서 살림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나봐요. 가(假)호적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식으로 결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내더라구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 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가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