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의 飮茶 慣習
(1) 고려 茶文化의 특성
신라의 茶風, 즉 실내와 야외에서의 풍류적인 飮茶 관습은 고려시대에도 거의 변함없이 계승되었고 진일보한 감이 있다.
차를 마시는 이유는, 첫째 차의 맛 때문이며, 둘째 차의 藥效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고려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 외에 차를 달이는 즐거움에 도취하곤 하였다.
다음의 시는 차 맛에 도취한 심사를 읊은 韓脩(1333- 1384)의 「嚴光大禪師寄惠芽茶」이다.
뉘라서 차 따러 해변을 두루 돌아다니나
오직 엄광의 솜씨가 가장 좋다오
나는 묘련사에서 이 맛 알았더니
대사가 멀리 보내어 나의 회포 위로하네
이색의 「茶後小詠」은 茶効를 읊었다.
작은 병에 샘물 길어
깨어진 솥에 露芽茶를 달이네
귀는 참으로 맑아지고
코는 紫霞를 관통하네
갑자기 눈이 가리니
밖의 적은 허물도 보이지 않는다
혀로 맛본 후 목으로 내려가니
몸은 발라 비뚤어지지 않도다
가슴속 신령스런 마음
맑고 밝게 無邪를 생각한다
한가함 어찌 천하에 미치지 못하랴
군자는 마땅히 집안을 바르게 해야 하리
그런가 하면 차 달이는 분위기에 심취한 예가 적지 않다.
물과 불의 공세는 참으로 어려운데
다행이도 쇠와 돌이 사이했구나
氣가 합하여 用을 이룸 알겠거니
이같은 유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이로부터 생긴 맛 내 배를 채워 주니
소리는 어디로부터 생겨 나를 기쁘게 하느뇨
세상의 재상집 方丈에 차솥(鼎) 벌여 있어도
모두가 심신의 한가함 얻은 것 아니네
이색의 「聞煎水聲」이라는 시인에, 차솥에서 물 끊는 소리를 즐겨 듣고 있다. 정몽주는 돌솥의 솔바람소리를 즐겨 듣는다. 「石鼎煎茶」라는 시에서 차 달이는 무아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報國에 공이 없는 늙은 서생
차 마시기 버릇되니 世情을 모르노라
눈보라 휘날리는 밤 그윽한 서재에 홀로 누워
돌솥의 솔바람소리 즐겨서 듣는다오.
한편, 林椿은 돌솥에서 물 끊는 소리를 지렁이 울음소리로 들었다. 차 달이는 즐거움에 오죽 도취했으면 지렁이 울음소리로 들었을까.
(2) 茶房과 茶店, 차 겨루기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단차와 말차, 잎차가 음용되었는데 이 중에서 말차와 단차의 음용이 많았다. 그리고 왕과 귀족, 승려 등 상류사회뿐만 아니라 평민사회에까지 차 마시는 관습이 확산되어 있었다.
고려 왕실에서는 중요 행사마다 거의 차를 사용하였다. 즉 태후의 책봉, 왕태자의 책봉, 왕자․ 공주의 下嫁, 元會 등의 의식과 대관전에서 군신이 연회하거나 노인에게 賜宴하는 의식, 그리고 연등회, 팔관회와 같은 의식에 進茶의 의식이 행해졌다. 또 외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와, 喪禮, 重刑奏對儀 등에도 차가 쓰였다. 이와같은 행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茶房이란 관청이 설치되었다. 다방의 관리들은 궁중의 행사를 전담하는 외에, 왕의 행차시에 茶具를 갖추어 수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개성에는 민간인을 위한 차가게, 즉 茶店이 마련되었다. 다점에서는 차 이외에 달인 차를 판매하였는데, 낮잠도 자는 휴게소였던 것 같다. 또, 여행자를 위한 휴게소 겸 숙박소인 茶院이 여러 고갯마루에 설치되었다.
이와같은 차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茶所村이 설치가 불가피하였다.
당시 고려인들은 차 달이기도 겨루었다. 李衍宗의 시 「謝朴恥庵惠茶」가 이를 증명한다.
소년시절 영남의 절간에서 손님되어
茗戰, 신선놀이 여러번 참여했지
용암의 바위가 봉산의 기슭
대숲에서 스님다라 매부리 같은 차잎을 땄었다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는데
용천봉정의 물까지 있음에랴
少彌僧 시원스런 삼매의 손길
찻잔 속에 설유를 쉬지 않고 넣었지
돌아와선 벼슬따라 풍진 세상 치달리면서
세상살이 남북으로 두루 맛보았지
이제 늙고 병들어 한가한 방에 누웠거니
쓸더없이 분주함은 나의 일 아니로다
羊酪도 蓴羹도 생각없고
호화로운 집 풍류 또한 부럽지 않다네
한낮의 竹窓엔 차 끊이는 연기 피어 오르고
낮잠에서 깨어나면 한잔 차 간절하다
남녘에서 차 달이던 일 추억하기 몇 차례
산 중의 친구는 소식조차 없구나
어찌 당시의 卿相들이야
소원한 사람 기억하고 하사품 나누어 주랴
치암상국은 홀로 잊지 않으시고
좋은 新茶 초당으로 보내주었네
봉합 열어 자용향 살필 틈도 없이
종이에 배어든 품격 이미 코에 와닿네
차의 고아한 품격 다칠세라 염려하면서
타는 불에 끊이기를 손수 시험하며
차솥에서 불어오는 솨솨 솔바람 소리
그 소리만 들어도 마음 맑아진다네
찻잔 가득 피어나는 짙은 그 맛
마셔보니 시원하여 골수를 바꾸는 듯하구나
남쪽에서 놀던 그 시절은 童蒙이었기에
차 마셔 깊은 경지 이르는 것은 몰랐었지
이제야 공의 선물로 인연하여
通靈했소이다. 玉川子와 같이
때때로 두 겨드랑이 바람을 타고
봉래산 상봉으로 날아 올라가
西王母의 紫霞觴 한반 기울여
인간세상 묵은 때 말끔히 씻고
九轉眞金丹 가지고 와
公의 진중한 그 뜻 보답하고 싶구료
(3) 고려시대의 茶具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에 개경을 다녀간 견문기인 『高麗圖經』에, 고려인의 다구와 차 마시는 관습을 살필 만한 기록이 약간 보인다.
사신 일행이 유숙하는 곳은 순천관이었는데, 순천관내 정사와 부사가 거처하는 낙빈정에는 각종 글씨․ 그림․ 향․ 진기한 차 등을 진열해 두었다고 한다. 관사내의 향림정은 차를 달이고 바둑을 둘 수 있는 좋은 휴식처였다. 관사 안에는 홍조를 놓고 그 위에 다구를 진열한 다음, 붉은 색의 깁사 상보로 덮었다고 한다. 또 고려인들은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茶具를 많이 만들었는데, 金花烏盞․ 翡色小甌․ 銀爐湯鼎은 모두 중국 것을 모방한 것이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에서 차를 달여서 銀荷로 덮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데, 의식의 진행자가 “차를 다 돌렸소”라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례 冷茶를 마시기 마련이었다. 매일 세 차례씩 차를 내고 뒤이어 끊인 물을 약이라고 하여 내었다.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면 기뻐하고, 혹 다 마시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하면서 불쾌한 모습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늘 그것을 억지로 마셨다고 한다.
서긍의 이상의 표현은 고려인들이 차를 무척 좋아한 사실, 손님의 면전에서 차를 달이지 않고 다른 장소에서 달여온 사실과, 주인이 권해야 손님이 마신 차예절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단차나 말차를 마신 후 잎차를 달여 마신 관습을 전하는 것 같다. 약이라는 끊인 물이 잎차라고 생각된다.
사신의 숙소에는 제법 화려한 다실을 꾸며 놓았다. 다실엔 그림, 글씨와 향이 놓였고 다구가 정연히 놓였다. 야트막한 붉은색의 도마형 상 위에 다구, 즉 은화로와 솥 그리고 금으로 꽃무늬 그린 검은색의 잔과 작은 청자 잔을 놓고 그 위를 붉은 깁 보자기를 덮은 듯하다. 진열된 이 다구들은 중국 것과 유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귀절을 빌어 고려의 다구가 모두 중국형이었으리라고 추리하면 곤란할 듯하다. 송나라 사신을 위하여 그들의 기호에 맞게 차를 달이도록 중국의 다구와 흡사한 다구들을 구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밖에 고려인들이 사용한 다구는 어떤것이 있으며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우선 말차를 만드는 차맷돌이 있다. 成宗(981- 997)이 功德齋에 쓸 차를 손수 맷돌에 갈았다는 일화와, 李仁老(1152- 1220)의 「僧院茶磨」라는 시가 차맷돌에 의한 말차 제조 광경을 전하고 있다.
풍경도 울리지 않고, 개미행렬 느릿느릿
月斧 휘두르니 옥색가루 날리네
法戱는 참다운 自在로부터 오고
맑은 하늘에 우뢰소리, 눈발도 휘날리네
이규보가 누군가로부터 차 멧돌을 선물받고, 감사하면서 쓴 「謝人贈茶磨」를 보면 차 멧돌은 바퀴 모양이었다.
돌을 쪼아 만든 바퀴 같은 멧돌
빙빙 돌림에 한 팔이 수고롭다
그대 어찌 차 마시지 않으랴만
나의 초당에 보내 주었느뇨
내 심히 잘 즐기는 줄 알아
이것을 나에게 보내준 것이리
푸르고 향기로운 가루 갈아내니
그대의 뜻 더욱 고마와라
물을 끊이는 솥도 중요한 다구 중의 하나였으며 솥의 종류가 다양하였다.
송악산 바위틈에 가늘게 흐르는 샘물
소나무 뿌리 엉긴 곳에서 솟아난다네
사모를 눌러 쓰고 앉은 한낮이 지루할지면
돌솥의 솔바람 소리 즐겨 들어보세나
위의 李崇仁(1349- 1392)의 시에는 작은 돌솥인 石銚가 소개되어 있고, 이색의 시 「다후소영」에는 鐺이 보인다. 세 발 달린 돌솥인 石鼎은 여러 사람의 시에 등장하는 점으로 보아 널리 이용된 듯하며, 이색의 「문전수성」이라는 시에서 표현되었듯이 제상집마다 갖추어져 있었다. 찻물을 끊이는 도구로 솥 외에 병이 있었다. 이규보가 남녘의 누군가로부터 선물받은 鐵甁이 바로 그것으로서, 이규보의 시에 그 생김새가 그려져 있다.
센 불로 강한 쇠 녹여내어
이같이 단단한 것 만들었네
긴 부리는 학이 우러러 돌아보는 듯
불룩한 배는 개구리가 노여움을 내뿜 듯
손잡이는 뱀꼬리 굽은 듯
모가지는 오리목에 혹이 생긴 듯
입 좁은 항아리처럼 움푹하니
다리 긴 솥보다 안정하다
내 문원의 재주 없으면서
한갓 문원의 병만 얻었다
오로지 차 찾는 것만 생각하고
이미 酒聖되기 멈췄다
비록 양자강의 물은 없지만
다행히 건계의 차는 있으니
시험삼아 사내 종놈 불러서
차가운 우물물 길어와
벽돌 화로에 손수 달이니
밤 누각에 등불 반짝이네
처음에는 마치 목멘 소리 같더니
점점 생황소리 길게 나네
삼매의 솜씨 이미 익었으니
일곱 잔의 맛인들 어찌 미치랴
이로써 낙을 삼기에 넉넉한데
어찌 날마다 술에 취하랴
이 시로써 찻물 달이는 茶注子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이를 茶甁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찻물 끊이는 주자 이외에 물그릇을 병이라고 부른 사실은 이미 이색의 「다후소영」이란 시에서 밝혀진 바 있다. 이 밖에 찻물에 차를 우리는 기구도 병이라고 한 듯하다.
솥에 물을 끓이려면 풍로가 필요하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궁중에 은노구가 있었는데, 이 시에 의하면 이규보는 벽돌화로를 사용하였다.
(4) 고려시대의 茶器
다구를 따지자면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찻그릇이 있다.
고려시대의 다구를 고찰하기 위하여 우선 李齊賢의 시 한 편을 보자. 다음의 시는 송광산의 景瑚禪師로부터 차를 선물받고 감사하는 마음을 읊은 것이다.
술이 오름에 마른 창자 연기나려 하고
책을 보는 늙은 눈 안개서린 듯하네
뉘라서 이 두 가지 병 감쪽같이 낫게 하리
나는 참으로 좋은 약 얻어올 데 있다네
東庵은 옛적에 녹야에 은거하였고
慧鑑은 조계의 법주가 되어 갔네
좋은 차 보내면서 안부를 물을 때면
긴 시로 보답하여 깊이 흠모함을 표했네
두 분 풍류는 유불에서 뛰어났건만
백년의 생사가 아침 저녁 같구나
衣鉢을 받을 스님 이 산에 사니
사람들은 스님의 법도 뛰어났다고 하네
내 평생 부족한 학문 후회하지 않지만
아버님의 일 계승함은 참으로 부끄럽네
향화의 인연은 대를 이어 전하지만
세속의 매인 몸 스님을 모실 수 없네
어찌 외로운 처지 물어 주기 뜻했으랴만
가는 길 다르다고 싫어하지 않네
서리 내린 수풀의 규묘 일찌기 붙여 주고
봄에 구운 작설차 여러번 보내왔네
스님은 비록 옛생각 못잊는 걸 보이려 하지만
공도 없는 나는 많이 받기 부끄럽네
낡고 조그마한 집 마당엔 풀이 자라고
유월의 궂은 장마에 길은 진흙투성이네
갑자기 문두드려 놀라 보니 대바구니 보내와
향기롭고 신선하기 옥과 보다 좋은 차 얻었네
향기 맑으니 한식전에 딴 것이요
빛 고우니 아직도 숲 아래의 이슬 머금은 듯
돌솥에서 끊는 물 솔바람 소리 내고
자기 찻잔에 도는 무늬 꽃망울을 토한다
山谷이 雲龍을 자랑할 수 있으랴
雪堂의 月免 차가 부끄러움 깨닫노라
서로의 교분에는 혜감의 풍류 남았지만
사례하려 해도 동암의 싯귀가 없구료
붓 솜씨 노동을 본받기 어려운데
하물며, 육우를 좇아 茶經쓰기를 흉내내랴
院中의 話頭랑은 다시 찾지 마오
내 또한 이제부터 시에 전념해야겠소
이 시로써 작설차 즉 잎차를 대바구니에 담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대바구니는 다구로서 차의 저장용구이다. 그리고 이 잎차를 자기잔에 마시되, 구형잔에 마신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구는 잎차용 잔이라는 의미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시 한 편이 있다.
반가운 서울 소식 시골집에 이르니
새로 봉한 작설차라네
식후의 한 잔 차 그맛 더욱 좋고
취한 뒤의 석 잔은 더욱 자랑할 만하다오
마른 창자 윤택해짐에 찌꺼기가 없고
침침하던 눈 열릴 때 眩花 사라지네
차의 신비로운 공덕 헤아리기 어렵고
詩魔가 가까이 이르니 睡魔는 멀어진다
元天錫(1330-?)의 이 시는 잎차용 잔이 구 임을 밝히고 있는데, 구와 椀이 혼용되고 있다. 이연종 역시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椀 역시 잎차 잔이었다. 椀은 盌과 동의어로서 사발, 주발 따위를 가리키는 점으로 보아 오목한 사발형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즉 구․ 椀․ 盌은 모두 오목한 사발형으로서 잎차 잔이었다. 그런데 碗의 字義는 椀․ 盌과 같으므로, 결국 구․ 盌․ 椀․ 碗은 거의 유사한 크기였거나 잔 크기에 따라 다른 차를 음용한 게 아니라 혼용하였다고 추측된다.
이 밖에, 盃도 찻잔으로 사용되었다. 眞覺國師 慧諶(1178- 1234)의 시에 盃가 보인다.
오래 앉아 피곤한 긴긴 밤
차 달이며 무궁한 은혜 느끼네
한 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
뼈에 사무치는 淸寒 모든 시름 스러지네
또 茶種이 사용되었다. 이색이 李友諒으로부터 편지와 찻종 한 쌍을 선물받고 다음의 시를 남겼다.
평안하다는 소식 더욱 기쁘고
찻종 대하니 아담하여 삿됨이 없네
계룡산 아래엔 인가가 드물고
긴긴 강물에는 달빛이 젖어드리
그러면 이들 찻잔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서긍의 기록으로 보아 여러가지 색깔의 꽃무늬 잔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시들이 있다.
피는 불에 맑은 물 스스로 끊이노니
청자다완에 향기 피어 더러운 창자 씻어 준다
마루턱에 찬 백만 창생의 운명
봉래산 여러 신선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이승인의 「白廉使惠茶」 싯귀 중에 碧椀은 푸른색의 잔, 즉 청자를 가리킨 것이다. E호 이들 잔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규보가 노규선사로부터 조아다를 선물받고 쓴 시에도 꽃무늬 그릇이 보이며, 金克己의 싯귀 중에도 꽃무늬 자기가 등장하였다.
이로써 고려시대에는 구․ 椀․ 盃․ 鍾 유형의 찻잔이 사용되었으며, 이들의 색깔은 검거나 푸르며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의례용인 듯한 잔과 잔대가 있으며, 차와 더불어 과자를 내므로 과기가 있었고, 찻숟가락과 차부젓가락 그리고 표주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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