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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기쁨‧만족‧감사‧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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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기쁨‧만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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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족, 기쁨의 비결
(1) 행복한 사람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에 산다. 불행한 사람은 분노와 질투와 절망에 산다.
(2) 부자(富者)란 어떤 사람인가? 자기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유태인의 경전-
(3) 인간이 자기의 일에서 행복하려면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자기의 일을 좋아해야 한다. 또 자기의 일에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의 일이 성공하리라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러스킨-
(4)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지 않고 행복 이외의 딴 목적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밀-
(5)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배워라.
-프리올-
(6) 행복은 유능한 사람만이 오래 지닐 수 있는 재산이다.
-몰트케-
(7)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거든 지나간 일을 공연히 염려하지 말것, 좀처럼 해서는 성을 내지 말 것, 언제나 현재를 즐길 것, 특히 사람을 미워하지 말 것, 미래를 신에게 맡길 것
-괴테-
(8) 즐거움
군자에게는 세 가지 낙이 있다.
첫째는 부모가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고 형제가 무고한 것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둘째는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 (仰不愧於天, 府不作於人, 二樂也)
셋째, 천하의 영재를 얻어 이것을 교육하는 것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맹자-
예측 못할 삶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였던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만났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왕의 질문에 솔론은 대답했다.
“아테네의 텔로스입니다. 그는 자녀를 잘 길렀고 행복한 가정을 꾸몄으며 나라를 위해 전사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누구인가?”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사람들입니다.”
“솔론, 왜 자네는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지목하지 않는가?”
“전하, 인생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비석이 서기 전까지 행복한 사람인지 불행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공자가 태산(太山)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노나라의 성이란 마을 어귀에서 영계기(榮啓期)와 마주치게 되었다.
영계기는 사슴의 털가죽을 두르고 노끈으로 띠를 두른 허술한 차림으로 거문고를 타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자가,
“당신은 뭐가 그렇게도 즐겁소?”
하고 묻자, 영계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게는 즐거운 일이 수없이 많소. 우선 하늘이 만든 만물 가운데서 무엇보다 귀한 것은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첫째로 즐거운 일이오. 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남자가 더 귀하지 않소? 그런데 나는 그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둘째로 즐거운 일이오. 또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햇빛도 못 보고 죽기도 하고, 배내옷을 벗기 전에 죽기도 하는데, 나는 벌써 아흔까지 세상을 살았으니 이것이 셋째로 즐거운 일이오. 가난한 것은 선비의 본분이요, 죽음이란 인생의 종착점에 불과한 것, 그 본분을 달게 여기며 종착점까지 걸어가고 있는데 또 무엇이 못 마땅해 마음을 괴롭힌단 말이오.”
공자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대단한 인물이로군, 참으로 마음에 여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하고 감탄했다.
행복의 댓가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 일컬었다는 것이 창세기 1:27-28의 말씀이다. 이때 창세기 기자는 복이란 말을 ‘바라크’라는 히브리어를 썼다. 바라크는 ‘무릎을 꿇는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복종하며 영광을 돌릴 때 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악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보다 이익의 향배에 따라 무릎을 꿇는다. 그래서 돈에 무릎꿇고, 우상에 무릎을 꿇으며 권력에 무릎을 꿇는다. 이런 자를 하나님이 행복하게 하실리가 없다. 사람의 행복이란 이익의 향배에 따라 변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초나라 때의 자종은 학문도 높았거니와 고상한 성품을 갖춘 당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 지나치리만큼 깨끗하다보니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초막에서 아내와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오전에는 책을 읽고 오후에는 짚으로 신을 삼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종의 인품을 알게된 초나라 왕이 그를 불러 나라의 중책을 맡기려고 신하를 보냈다.
많은 예물과 보석을 실은 꽃마차가 자종의 오두막을 찾아들자 아무리 산골 오두막이라도 화려하기만 했다. 자종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자종은 아내와 상의를 했다.
“임금님이 국가의 중책을 맡기시려 이렇게 꽃마차까지 보내 오셨구려. 내일부터는 당신도 이 고생 끝났수다. 이제는 맛있는 음식에 비단 옷을 걸칠 수 있고 많은 종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소이다. 이때껏 당신을 고생만 시켜서 미안했소. 내일 당장 임금 계신 장안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당신의 의향은 어떻소?”
그러나 그의 아내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저는 보리밥에 나물 반찬을 먹고 신을 삼는 일을 하지만 행복합니다. 비록 맛있는 음식은 못 먹지만, 굶지 않고 또 당신의 사랑을 받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분수를 모르고 높은 자리에 올라 잘 먹고 잘 사는 댓가로 초나라의 근심을 떠맡겠습니까?”
자종은 아내의 충고에 뜻한바가 있어 어명을 거역하고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다. 비록 그는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평범한 소시민으로 행복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이 고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돈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돈에 굴종하는 자는 그 돈이 없어지고 나면 허망해져서 자결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꿈꾸는 사람의 꿈속으로나 찾아오는 것이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우상이란 실체가 아닌 허상을 이른다. 본래 인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고 그 앞에 경배하고 정열을 바치고 꿈과 소망을 바치다가 허망해지는 것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죽은 자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뜨겁고 피가 뜨겁고 꿈이 뜨거운 사람의 마음에 찾아온다.
발로도는 말했다. “진짜 행복은 그 값이 아주 싼데도 우리는 행복의 모조품에 많은 댓가를 지불한다.”
불행을 통해 얻은 행복
두 젊은이가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에까지 골인되는 행운을 얻었다. 남자는 물려받은 땅과 아주 큼지막한 아파트가 이미 준비되었다고 약혼녀에게 말했다. 약혼녀는 그 크고 멋진 아파트에 채울 혼수품을 고르면서 마냥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이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나서 형편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여자의 아버지는 쓰러져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결혼을 한 달여 앞둔 날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아내가 될 여인의 두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고금씨, 우리가 결혼하여 살기로 했던 아파트는 사실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앞으로 등기되어 있다고 했던 부동산도 사실은 제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약혼녀도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이제 그 큰 아파트를 채울 살림살이를 하나도 준비할 수 없게 되었는걸요.”
결국 두 사람은 검소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남자는 월급이 적었지만 여자는 마냥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 후 1년이 좀 지나자 쓰러졌던 아버지가 회복되고 부도난 사업도 회복되면서 전 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 때부터 여자는 자신이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많은 혼수 용품을 지금이라도 살 수 있었으나 남편이 가지고 있다고 큰 소리쳤던 큰 아파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혼하기 전에 아파트가 있다고 말한 남자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하니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친정 어머니에게 하소연했다. 가난한 남자에게 속아서 결혼한 것이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친정 어머니는 딸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김 서방이 너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 이젠 너에게 털어놓고 말을 할 때가 된 모양이로구나.”
남편이 될 젊은이는 약혼녀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혼수품을 해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이 상할까 봐 아파트와 가진 부동산을 처분하여 장인이 될 분의 빛을 갚아 주고, 병원비까지 지불했기 때문에 사업도 일어날 수 있었고 아버지의 건강도 회복될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만족이란 주는데서 온다
만족감은 받는 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 데서 온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 근성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참 기쁨이 없다. 주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한다.
뉴욕의 역대 시장 중 명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씨였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온 노인이 기소되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고 고백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됩니다.”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 씨에게 내주며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다.
사람이 호흡을 하려면 들여 마시기만 해서는 안된다. 내뿜는 호흡도 있어야 한다. 벌기도 잘 해야겠지만 내주는 일에도 멋진 인간이 되어야 참 기쁨을 발견한다. 우리는 저축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쓰고 각종 투자를 연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저축은 필요한 이웃에게 내어 준 돈과 사랑이다.
행복한 사람이 갖는 공통점
미국 콜롬비아대학의 프린트만 교수가 미국인 10만 명을 대상으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조사를 하면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갖는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첫째, 낙천적인 인생관을 갖는 사람, 둘째,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는 사람, 셋째,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며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일 처음으로 본다는 기쁨
크로스비(Fany Crosby)라는 여자는 어려서 소경이 되었는데 할머니가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성경 진리를 들려주고 예수님을 믿게 해서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서 찬송가를 8,000개 이상을 썼다.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204장), “나의 갈길 다 가도록”(434장)등 은혜로운 찬송 가사들이 다 그 여자가 쓴 것이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크로스비양에게 주께서 다른 은혜는 많이 주시면서 왜 시력을 안 주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니까 크로스비양이 얼른 대답하기를 “내가 태어날 때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요?” 하고 물었더니 “내가 천국으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기쁨으로 바라보는 얼굴이 나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는 8세 때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아! 나는 어찌 그리 행복된 영인지, 비록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결심했다네, 이 세상에서도 만족하기로,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축복을 나는 누리는도다. 나는 소경이라고 하여 울지도 않고 한숨 짓지도 않으리라. 그렇다. 나는 그럴 수 없으리라”라고.
가진 자(to have) 보다 있는 자(to be)로
에릭 프롬은 ‘현대인은 존재보다 소유를 우선하기 때문에 물질 지상주의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생존이요, 행복에 있다. 소유와 행복은 같은 것이 아니다.
현대인은 가진 자가 되려는 욕망은 하늘에 닿고 있지만 있는 자가 되려는 노력이 없기에 풍부한 것을 가지고도 항상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
많이 먹었는데도 배부르지 않다.
큰 집을 가졌는데 평안이 없다.
많은 지식과 학위를 가졌는데 인격이 없다.
좋은 옷을 입었는데 진실이 없다.
많은 것을 가졌으나 행복이 없다.
세상의 즐거움 중 가장 큰 것은 자기를 이기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동양 성현의 말씀에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으니, 위로 하나님을 섬겨 두려워 아니하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음이 첫째 즐거움이요, 부모와 형제가 구비(具備)하여 있음이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英才)를 많이 교양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믿는 자에게는, 믿지 않는 자가 깨닫지 못하는 즐거움, 여덟 가지가 있다.
1. 감응의 낙(感應之樂)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즐거움이다. 어느 나라 백성이든지, 그 백성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그 상소에 응답해 주시면 그 백성의 즐거움은 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천지의 대주재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시면, 그 즐거움이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어떤 임금이 7년 동안 비가 오지 않으므로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께 잘못된 것을 자복하고 구했다. 이에 응답이 있어서 비가 내릴 때, 임금은 비오는 것보다도 자기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을 얼마나 즐거워했겠는가! 임금으로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즐거워했다면, 하물며 우리들의 기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으로 들어주실 때에, 그 즐거움을 다 말할 수 있으랴! 이에서 더 크고, 영광스럽고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실로 이것은 신자의 가장 즐거워할 일이요 권위가 되는 일이다.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서 밤을 맞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결과, 앗수르 대왕의 수모를 면했을 뿐 아니라, 변하여 즐거움이 되었으니 이는 감응의 즐거움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기도하여 하만의 화를 면하고, 슬픔이 도리어 즐거움이 되었으며, 근심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었으니 이것도 감응의 즐거움이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기도함으로써, 어려운 일이 변하여 즐거운 일이 되도록 하자.
2. 도미의 낙(道味之樂)이다
유치한 교인은 성경의 맛을 몰라, 권면에 이기지 못하여 몇 장 보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보지만, 성경의 그 보는 이치를 성령의 감화로 깨달을 때에, 그 말씀은 꿀 송이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시 19편). 실로 우리에게 영화를 받게 하고, 윤택하게 하여 힘을 주시고, 장성케 하며, 영생케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하나님의 성경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이것이 곧 성경이다.
사람은 지혜가 높고 학문이 높은 사람에게서 그 말하는 바를 듣고자 한다. 들을 때에 유쾌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지혜가 우주에 충만하고, 무소부지 하신 하나님의 교훈이 어찌 인간의 즐거움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는 이는 맛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예컨대 앓고 있을 때는 단 꿀이 입에 쓴 것과도 같다. 그 꿀이 쓴 것이 아니라 입맛이 없는 연고이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 자체가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이 병들어서 재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재미가 없다는 사람은 반성하여, 다시 도미(道味)의 맛을 얻기 바란다.
3. 극기의 낙(克己之樂)이다
혹은 풍금을 치며 즐겁다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즐겁다 하며, 혹은 이기고 즐겁다 하지만, 오직 신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원수를 이기는 즐거움이 가장 큰 즐거움 인 것이다. 원수가 무엇인가? 곧 교만이다. 이 교만은 자기를 지옥으로 이끌고 뭇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하는 것이다. 교만으로 사람을 업신여기면, 업신여기는 대로 몇 배를 거둘 것은 그것을 심었기 때문이다. 이 교만을 이기고 겸손한 자리에 앉게 되면,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배워 지혜 있는 자가 되고, 나보다 못한 자에게 대하여는 불쌍히 여기며, 위로하고, 도와주게 되니, 하나님 앞에 가도 설만 하며, 뭇 사람에게도 대접을 받을 만한 것을 이루었으므로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또 자기에게 있는 음욕을 이기는 즐거움이 있다. 뭇 사람이 음란한 바다에 빠져서 눈을 여자와 더불어 노는 것으로 범죄하고, 귀는 더러운 소리를 듣는 것으로 영혼을 더럽게 하며, 정신과 마음과 생각과 뜻이 음란한 일에 빠져 쉬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이 마치 구더기가 더러운 속에서 춤추며 즐거워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때, 이 일을 분토 같이 여기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비록 땅에서 먹고 입지만, 이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천사와 같이 거룩한 삶이며, 할렐루야 찬송할 즐거움인 것이다.
4. 교인을 양성하는 즐거움이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쉽고 아무 재미가 없는 것 같으나, 그 중에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부인이 아기를 많이 나서 기르는 수고가 많으나, 그 즐거움은 날로 더하여 그 어린이의 자라는 것을 볼 때, 수고를 모두 잊어 버리는 것이다. 남을 인도하는 자도, 그 교인이 어린이의 상태에서 변하여 장성하여 가는 것을 볼 때, 그 재미는 자녀를 키우는 부인의 즐거움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에 찬미를 못하던 교인이 찬미를 하게 되는 것을 볼 때, 기도를 못하던 교인이 기도하게 될 때, 성경으로 남을 가르치게 되고 직분이 무엇인지 모르던 교인이 믿어 중한 직분을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볼 때,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즐거움은 가히 비할 것 없이 큰 것이다.
5. 환난안위의 낙(患難安慰之樂)이다
신자가 주를 위하여 환난을 받게 될 때에, 사람들은 보고 환난을 받는 줄 아나, 신자는 그 중에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즐거워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은 죄로 인하여 갇혔지만, 자기는 주의 도리를 위하여 갇혔으므로 그 욕이 도리어 상이 될 것을 즐거워했으며, 그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할 것을 즐거워했으며, 그 고난으로 복음이 더욱 증거 됨을 인하여 즐거워했으며, 그 고난으로 인해 남이 고난 당할 때 속히 위로할 만한 자가 될 것이므로 즐거워했던 것이다. 우리도 환난 중에 즐거움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6. 영생의 낙(永生之樂)이다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 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 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7. 주님과 동행하는 낙(與主同行之樂)이다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하며, 어진 친구를 만나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있게 되는 즐거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지라도 주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해롭게 못할 때 비록 사자 굴에 있었지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니엘의 친구 세 사람이 비록 불화로 가운데 던진바 되었을지라도 주님이 같이 하셔서 불이 그들을 해하지 못할 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한이 밧모섬에 정배갔을지라도 주께서 같이하시고 계시(啓示)를 보여 주시는 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떠한 때를 막론하고 주님께서 같이 하셔서, 혹 암시(暗示)로 성경의 교묘한 이치를 알게도 하시고 말할 수 없는 이치를 보여 주시기도 하시며, 강론할 좋은 제목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실수할 것을 붙들어 실수 못하게 하시며, 잘못하면 통회하는 마음도 주시고, 우리 소망되는 하늘 나라를 보여 알게도 하시는 때, 그 즐거움이야말로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와 같이 동행(同行)하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신자에게는 이에서 더한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8. 만물을 관할하는 낙(萬物管轄之樂)이다
사람이 만물을 볼 때에, 꽃이나 초목이 만발할 때에 그 나타나는 빛을 보고 좋다고 하지만, 그 보다 더 오묘막측한 것은 모든 꽃이 땅에 올라오는 것으로, 각각 이 유를 따라 빛이 다르며, 나무는 각각 유를 따라 별스럽게 된 것과 모든 실과는 그 유를 따라 각각 맛이 다른 것이다. 짐승은 그 유를 따라 모양이 다르며, 바다에서 물을 끌어 올려 구름을 만들고, 비를 주시는데 폭포와 같이 하지 않으시고, 방울방울이 내려 초목에 해(害)를 주는 일이 없이 유익하도록 한 것이며, 추울 때는 얼음장으로 내리지 않고 백화 모양의 눈을 내려 상치 않도록 하심이다. 또 일월성신을 궤도에 따라 운행하시며, 인생에게 가장 특별한 지혜를 주시어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하신 것으로,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무미하게 보이지만, 오직 신자는 대주재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주장이심을 깨닫는 동시에 모든 물건을 볼 때에 찬송치 아니할 것이 없고, 그 지혜와 공의와 능력과 절제를 배우지 않을 것이 없으며, 감사함이 심중에 솟아나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이다.
9. 이 즐거움은 수고가 지나간 후에 오는 즐거움이다
기도하는 수고가 없이는 응답의 즐거움이 없을 것이고, 성경을 상고하는 수고 없이는 십자가 도애의 낙이 없을 것이고, 자기를 이기려고 하나님 앞에 직고하는 수고가 없이는 극기의 낙이 없을 것이고, 순복하는 수고가 없이는 동행의 낙이 없을 것이고, 주를 위하여 핍박받는 수고가 없이는 환난안위의 낙이 없을 것이고, 성령의 감동시킴을 따라 수고함이 없이는 영생하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만물을 연구하는 수고 없이는 관할의 낙도 없을 것이다. 이 즐거움을 보고자 할진대, 수고를 아끼지말고 즐거움으로 지내시기를 바란다.
-김익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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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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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예물을 삼으라
유럽의 어느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고 감사 예물을 드리는 시간이 되었다. 헌금 바구니가 도는데 한 소년이 헌금 바구니에 들어갔다. 온 교우들이 소년을 주시했다.
예배 후에 목사님이 소년에게 “왜 헌금 바구니에 들어갔느냐”고 물으니 그 소년의 대답은 “헌금은 없고 몸이라도 드리고 싶어 헌금바구니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 소년이 그 유명한 리빙스턴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헌신 결단에 따라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어 죽음의 사선을 넘는 선교를 하여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감사의 나무를 심어라
어느 철인은 말했다. “평화와 행복을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 마음의 정원에 감사의 나무를 심어라”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다. 평화는 감사의 나무에 피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의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있다. 있다고 해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왜 그런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영향이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나 혼자 모든 것을 이룩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감사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올 수 없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여기까지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의 큰 은혜, 나를 가르치신 스승들의 은혜, 정신적 성장을 도운 양서와 그 저자들. 나에게 좋은 잠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해 준 동포들의 노고, 맑은 공기와 햇볕, 사계절의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지켜주는 하나님의 은혜.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을 세상에 대하여 빚진 존재라고 한다. 무슨 빚인가? 은혜를 되돌려 드리지 못한 부채다.
인간다운 참 모습은 감사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감사를 모르는 인간은 저 차원의 인간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인은 ‘은혜를 아는 자, 이것을 인간이라고 일컫고, 은혜를 모르는 자, 그를 짐승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배은망덕하는 사람이 있다. 정성껏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는데 은혜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다. 치욕적 인간이다.
사도 바울도 외쳤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니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사도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감사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다른 사도들보다 특심했기 때문이다.
루소도 감사를 이렇게 강조했다. “감사는 우리가 당연히 지불해야 할 의무다. 아무도 감사를 남에게 기대할 권리는 없다.”
감사의 고갈은 인간 관계의 가장 큰 불행이다. 감사의 교류 속에 행복의 미소가 오간다. 감사도 훈련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성숙한 믿음의 감사
공산 치하 때, 어느 목사님을 체포해다가 고문을 하니까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였다. 그래서 내무서원이 “매를 맞으면서 뭐가 감사하냐?” 하니까 그 목사님은 “나는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예수님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하면 예수님밖에 안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매를 맞으면서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느냐?”고 하니까 “내가 예수님을 위해 매를 맞으면 그만큼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감방에 집어넣었더니, 이번에도 기뻐하며 감사를 연발했다. 그래서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냐고 했더니 “조용한 방에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놈의 목사, 사형을 시켜 버리겠다.”고 하니까 더 기뻐하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죽인다고 하는데 뭐가 그렇게 감사하냐?”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순교하면 이 다음 하늘 나라에서 제일 큰 상급을 받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순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하니까 내무서원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심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유치한 아이들은 달콤한 사탕이나 과자를 하나 주면 좋아하지만 그보다 천 배, 만 배 더 귀중한 약을 먹여주면 쓰다고 원망하며 안 먹으려고 든다. 아니, 울면서 부모에게 덤벼들기까지 한다. 이와 같이 유치한 신앙의 사람들은 무슨 달콤한 일이 생길 때만 감사하고, 더 큰 그릇으로 만들고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과 실패가 올 때에는 원망, 불평을 한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가 되면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감사의 조건은 많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hew Henry)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도 돈도 다 빼앗기고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나 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돌아오자 온 식구는 다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만약에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네 가지 감사
회랍의 철인은 그의 삶 속에서 4가지를 감사하였다.
첫째는 동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소나 개나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둘째는 사람으로 태어나되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문명의 도시 아테네에서 문명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셋째는 사람으로 태어나되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넷째는 유명한 철인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제자가 된 것을 감사했다.
플라톤이 이와 같은 사실에 감사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감사의 이유는 율법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된 은혜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안요한 목사의 감사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는 안진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눈병으로 37세에 맹인이 되었고 절망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도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는 삶 전체에 대한 절망으로 죽으려고 하다가 “요한아, 요한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음성을 듣고 37년 동안 영적으로 감겼던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뉴욕 헬렌 켈러 재단의 도움으로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저는 장님이 되고 수지 맞았지요. 보았던 37년보다 앞못보는 7년이 오히려 행복하고 보람이 있습니다. 온 천하를 가져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없기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
큰 병원의 구급차 운전기사로 일해온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여전히 응급 환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차를 돌리려는데 병원 창문에서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부르는 겁니까?”하고 대답하자 병실 창문에 상체를 내어놓은 환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소,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당신에게 물어보겠소. 당신은 건강한 몸을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 본 일이 있소?” 이 질문을 통하여 그 운전기사는 10년 동안 병원에서 구급차를 운전하면서 한 번도 건강한 몸에 대하여 감사해 본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아기 엄마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세면서 열 손가락을 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한다. “감사는 축복의 어머니며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지 못하면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키프리나)
벙어리의 기도
어느 날 벙어리가 열심히 기도를 했다. “내 입을 열어 주시면 내가 죽는 날까지 목청이 터지도록 감사하는 찬송을 부르고 평생을 전도하겠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낙망한 나머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때 마침 길가에 있는 개천에 어떤 사람이 빠진 것을 발견했다. 얼른 가서 건져주고 보니 그는 장님이었다. 이 벙어리는 그때에야 하나님이 자기를 소경되지 않게 하신 것에 감사했다. 그 후부터는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고 힘써 전도하며 더욱 행복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1)
어떤 분이 배를 타고 가다 배가 파손되는 바람에 바다에서 나무조각을 붙잡고 표류하다가 어떤 무인도에 닿았다.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나뭇가지를 꺾어서 움막처럼 집을 지었다.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다가 어떻게 나뭇가지를 비비서 불을 피워 구워 먹고 했다. 하루는 조개를 잡으러 나갔다가 돌아와보니까 자기가 피워 놓은 불이 집에 붙어서 집이 다 타버렸다. 그날 밤은 노천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배 한 척이 그 무인도로 와서 그 사람을 구출해 주었다. 그가 “어떻게 여기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왔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어제 배에 짐을 싣고 지나가다 보니까 여기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짐을 풀어내려 놓고 오는 길에 지금 들른 것이라고 하였다.
애써서 지어놓은 집이 불타서 낙심할뻔 했지만 도리어 그 집이 불탄 것 때문에 그 연기를 보고 자기를 구출해 준 것이다.
전화위복(2)
한 어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고,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덧 캄캄한 밤이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마저 잃어버리고 표류하게 되었다. 어디로 뱃머리를 돌려야 할지 전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얼마 동안 있으면 배가 파선되어 삼부자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들이 이 같은 위태한 지경에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저쪽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보이더니 점점 커져서 불기둥이 되어서 솟아올랐다. 그들은 그 불기둥을 보고 그 쪽이 육지라고 판단을 하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까스로 살아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부인이 울먹이며,
“우리 집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어요”
그 순간 아버지와 두 아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육지를 찾지 못해 지금쯤 바다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고난은 이렇게 때때로 우리에게 예상치 못했던 복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전화위복(3)
캘리포니아(California)에 큰 홍수가 났을 때 한 사람의 방앗간이 떠내려갔는데 그 방앗간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이 홍수로 재산이 파산하고 이 사람은 낙심하고 주저앉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이런 일이 자기에게 왜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재난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선을 이룬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그 홍수로 큰 황금 광맥을 발견하게 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 결국 그를 가난하게 했던 일이 오히려 큰 부자가 되게끔 하였다.
또 미국 서부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큰 농장에 물을 대 주던 유일한 우물이 무너지고 막혀 버렸다. 그러나 이튿날 그 막혀버린 샘에서 석유가 솟아올랐다.
감사를 담아 오라
옛날 회랍 신화에 제우스 신이 두 시종을 불러서 각각 바구니 하나씩을 맡겨 주면서 지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한 시종에게는 불평 불만을 찾아 담아오고, 한 시종에게는 반대로 감사만 찾아 바구니에 담아오라 했다. 조금 있으니 한 시종이 올라왔는데 그는 불평 불만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는 말하길 “지상에 내려가니 불평 불만이 너무도 많이 있어 금방 담아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감사만을 찾아 바구니에 담으러 간 시종은 지금까지도 그 바구니에 진정한 감사를 다 채워 담지 못하고 인간 세계를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진짜 감사는 잊어버리고
어느 시골 장날에 아버지가 십 오륙 세쯤 되는 소녀 딸하고 장에 갔다. 그 당시에는 돈을 마련하는 방법이란 농사 지은 쌀을 한 자루쯤 가지고 장에가서 팔아 돈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이것저것 일용품을 사오곤 했다. 시골 장날이라 버스가 만원이었는데 그만 타고 가던 버스가 전복되었다. 중상자가 속출하고 모든 사람이 아우성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다행히 무사했다. 마침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우는 딸을 한참 보다가 중상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쌀 포대가 없어졌다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는 길
수년 동안 행복한 생활을 보낸 후 남편을 잃은 부인이 있었다. 자녀도 없이 홀로 남은 그녀는 점점 더 자기 연민과 우울에 빠져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아무 버스나 타고 정신없이 가다가 종점에서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르간 소리가 나는 교회 안에 들어갔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가 지난 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 곁에는 초라한 옷을 걸친 두 어린아이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니?”라고 물었다. 그 작은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부모님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과자와 선물을 사 주었고 그들과 말벗이 되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의 우울증에서 벗어나 자기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행복하게 지냈던가를 기억하고는 감사하게 되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시간 호수에서 큰 배가 파선하여 많은 사람이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헤엄을 잘 치는 용감한 청년이 무려 17명을 구조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문이 대서특필하고 설교자들이 영혼 구원의 실화로 자주 인용하곤 했다. 한 번은 어느 설교자가 그 실화를 들어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를 마치자 청중 가운데 한 청년이 손을 들면서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였다. 설교자는 그를 강단으로 초청하고 반가워하면서 교인들과 함께 크게 환영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대가를 바라거나 인사 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때 목숨을 걸고 17명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나 그들 가운데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군요”라고 했다. 감사는 당연한 인간의 도리요, 신앙인의 기본 덕이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 침례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해티 매 와이아트(Hatue Mae Wyatt)라는 소녀가 템플교회 주일학교를 찾아갔으나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무책임하게도 이 아이에게 “애야, 너는 앉을 자리가 없다”라고 했다.
그 아이는 슬픈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병을 앓다가 죽었는데, 나중에 침대의 베개 밑에서 낡아빠진 두툼한 지갑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동전 57전과 메모지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템플 주일학교를 좀 더 크게 지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아이는 주일학교 건축을 위하여 근 2년간을 푼푼이 용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교회의 루셀 콘웰 목사는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전했고, 이로 인해 건축 기금 모금 운동이 벌어져 57전으로 시작된 어린아이의 오병이어가 무려 57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기금으로 3천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교회가 건립되었고, 후에 템플 대학과 병원이 이 교회의 재단으로 세워졌다.
한 작은 불꽃이 넓은 벌판을 다 태운 격이 되었거니와,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일은 이렇게 축복받게 마련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만도 감사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준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슨 자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훈련 중 전차에서 떨어져서 목을 심하게 다쳤다. 이 때문에 그는 머리와 목만 제하고 전신이 마비가 된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같은 참담한 처지에서 뜻하지 않게 성경을 읽게 되었다. 손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입에다 젓가락을 물고 성경책을 넘기면서 성경을 읽게 되었다. 날마다 이런 일을 계속 하던 중에 성경에서 놀랍고도 소망에 찬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할 만한 삶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처지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감사할 수 있고 소망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는 이때부터 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글씨까지 쓰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붓을 입에 물고 애쓴 탓으로 이가 흔들리고 잇몸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입술이 부어 터질 정도로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지만 말씀을 깨닫고 보니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동양화 40점, 서예 15점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미 81년도와 84년도에 전시회를 두 번이나 열었다.
그는 신체적으로 볼 때 무능한 자요, 가난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통하여 삶의 능력과 삶의 지혜를 얻은 사람이었다.
종 탑에 새겨진 옥수수
독일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이 교회 종 탑에는 여섯 개의 옥수수가 그려져 있는 아담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이 종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250년 전 예배당의 종소리는 마을의 시계를 대신하여 종소리를 듣고 멀리 있는 사람도 제때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을 맞추지 못해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넉넉지 못한 형편이어서 큰 종으로 바꿔 달기는 힘들었다.
목사님은 큰 종을 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마당에 한 그루의 옥수수를 기르기로 생각한 것이다. 목사님은 그 한 그루의 옥수수를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면서 정성껏 길렀다. 그 결과 여섯 자루의 옥수수를 딸 수 있었다. 목사님은 그 옥수수 씨를 모든 교인에게 나누어주고 정성껏 길러 수확을 거두게 하였다. 이렇게 8년을 기르니 새 종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종에 6개의 옥수수를 그려 넣어 오래 기념하기로 하였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 진정한 감사
어느 마음 착한 농부가 농사를 짓다가 특출나게 크고 좋은 무가 생산되었기에 그것을 원님에게 보냈다. “모든 것이 원님의 선정 덕분입니다” 하면서 원님에게 바쳤을 때 원님은 너무나 기특한 생각이 들어 무언가 보상을 하고자 했다. 요즘에 들어온 것 가운데 뭐 좋은 것이 없는가 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물으니 큰 황소 한 마리가 있다고 했다. 원님은 그것을 끌어다가 농부에게 주라고 했다. 무 하나로 큰 횡재를 얻은 농부의 소식을 들은 심술쟁이 농부가 무 하나에 황소 한 마리면 자기는 황소를 바쳐 땅이라도 몇 마지기 타낼 속셈으로 황소를 몰고 갔다. “원님, 저는 수십 년간 황소를 길러 왔습니다만 이렇게 크고 좋은 황소는 처음 봅니다. 이는 원님의 선정 덕분입니다” 하였다. 원님은 농부에게 고맙다고 한 후 요즘 들어온 물건 중에 좋은 것이 있는가를 물으니 크고 좋은 무가 하나 있다 하기로 그것을 가져다 주었다. 진정한 감사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드리는 것이다.
역경 중에 감사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그리스도인은 전체 중에 몇%나 될까. 역경을 당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어찌할꼬” “재수없게 이게 뭐람”이지 “감사합니다”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고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이다. 수 년 전 내게 한 분밖에 없는 외삼촌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외삼촌이 나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가 문득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평생 70여 년을 살아왔지만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감사 헌금을 교회에 바친 녀석은 처음 봤다. 내 막내아들이 바로 그 녀석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 모교회 집사인 내 외삼촌은 좀 믿음이 약한 분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다. 내 외사촌 동생되는 그 막내 아들은 다음해에 감신대에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지금은 서울의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감사의 삶
감사에는 망원경보다 현미경이 더욱 필요하다. 망원경으로는 하나님의 신묘한 솜씨를 자세하게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 세포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사랑과 의미를 찾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감사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감사는 몇 가지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믿음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감사가 가능하다. 둘째, 통찰력이다. 자신의 껍질을 벗고 밖으로 나와서 통찰할 때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자기 객관화라고 부른다. 자신을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 진정한 존재의 감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셋째, 마음의 기억이다. 감사는 마음의 밭에서 나온 열매이기 때문에 그 마음 밭을 너그럽게, 때로는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에머슨은 말하기를 “그대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하더라도 그대가 가진 것에 최선을 다하라.”라고 했다. 인간의 소유욕이 생기면 그때부터 감사가 줄어든다. 소유욕은 불안과 좌절을 맛보게 한다. 그러므로 가급적 떨쳐버리는 무소유(無所有)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감사 정신에서 나온다. 일생을 배울 과목이 즐비하게 많으나 그 가운데 마스터할 수 없는 과목이 감사 과목이다.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의 은총, 부모님의 은공, 스승의 교육, 이웃의 도움, 가족의 사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늦가을 낙엽의 하찮은 몸부림까지도 감사의 프리즘으로 보면 감사의 원소를 찾을 수 있다. 인생 종말의 값진 진리의 발견이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바울의 말은 달관(達觀)의 경지가 된 그의 신앙의 한 표현이었다. 감사는
① because의 감사, 즉 때문에(소유)의 감사가 있고
② in spite of의 감사, 즉 불구하고의 감사로 무소유의 감사라 할 수 있다.
오병이어의 감사 정신을 생각해야 한다. 1회용 식사를 감사할 때 수천 명을 배불리게 할 수 있었다. 쌀(米)은 八十八의 합성어이다. 즉, 쌀 한 알이 밥으로 입에 들어가기까지 농부의 수고를 88번 한 끝에, 식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많을수록 좋다. 감사 결핍증의 한국인들이 좀더 세미한 부분의 감사 조건을 찾을 수 있다면 한국은 더욱 밝을 것이다. 감사는 원어 우칼리스트, 즉 하나님을 향한 상쾌한 감정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 신앙이요, 상쾌한 감정이 기쁨이다. 즉, 믿음에 기쁨이 있을 때 감사가 나온다. 그것은 신앙의 희열이다. 병상에 누운 뒤에야 감사의 조건을 찾은 환우들을 자주 보게 된다. 기운이 펄펄할 때는 천지를 모르고 우쭐대던 사람들이 병상에서 그토록 변해 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한계를 접하게 된다.
감사는
①마음으로 해야 한다.
②얼굴에 미소를 짓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③손으로 악수하며 감사를 표해야 한다.
④입으로 감사를 연발해야 한다.
미국인은 'Thank You'를 습관화하고 있다. 감사에 결코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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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내용은 ‘워싱턴이 이긴다’, ‘아니다 진다’였다. 워싱턴이 이긴다는 사람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 겨울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숲 속을 지나는데 숲 속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그 근처로 가보니, 워싱턴 장군이 얼굴을 눈 덮힌 땅에 댄 채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워싱턴이 이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기도 요청
1945년 4월 12일 목요일에 미국 제 32대 루즈벨트 대통령이 급서하므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에 오르게 되었다. 많은 기자들이 찾아가서 취임 소감과 국민들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묻자 그는 단 한 번이라도 기도를 올린 일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지금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실로 기도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기도
세계 2차 대전 때, 블란서가 독일 나치스 군대에게 패해 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너갔던 30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국으로 다시 건너오려고 했다. 그 때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가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때 영국 왕 죠지 6세가 온 영국에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전 국민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하기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날 독일군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가 한 대도 뜰 수 없었다.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영국군 편에는 이상할 정도로 도버 해협이 잔잔하고 고요하고 거울같이 맑아서 수천의 배가 30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37세된 새 교우의 기도
청장년회 헌신예배 때 일이다. 기도 많이 하는 부인 따라서 교회에 나온 새 교우가 대표 기도를 자청하고 주일 밤 예배 때 기도하게 되었다. 부인이 적어 준 시편으로 기도를 하던 도중 갑자기 기도가 멈추었고 교인들은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새 교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난 기도할 줄 모릅니다. 기도 잘 하게 해 주세요.” 그때 모든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하며 통성 기도가 터져 큰 은혜를 받았다. 기도 잘 한다는 것은 유창한 말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손
많은 성화(聖畵)들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설교일 수가 있다. 그런데 그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때, 또는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과 동기를 알게 될 때, 더 큰 감동적인 설교가 될 수 있다. 그런 그림들 중 하나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하는 손’이다. 거칠어진, 그래서 힘줄까지 눈에 뜨이는 손, 그러나 경건히 아름답게 포개진 채 위로 향해져 있는 손! 이 그림 자체만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경건한 마음, 기도하고픈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한 마을에 두 소년이 살았다. 그림을 즐기는 같은 재간을 가졌기 때문에 피차의 나이는 서너 살 달랐지만 늘 좋은 친구였다. 어느 날 두 소년은 이런 의논을 했다. 즉, 도시로 나가 둘이서 힘을 모아 그림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다.
두 소년은 드디어 도시로 나갔다. 둘이 다 함께 공부하면 밥을 먹을 수 없으므로 나이 많은 소년이, 자기가 일을 할테니 어린 소년이 먼저 공부를 하고 공부가 끝나면 서로 바꾸기로 했다.
먼저 공부하기로 된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몇 년 후에는 그림을 팔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 저녁에는 대단히 기쁜 마음으로 처음으로 그림을 판 돈을 들고 다른 소년이 일을 하고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 소년은 창 밖에서 식당을 들여다보고 말문이 막혔다. 콘크리트 바닥에 자기의 친구가 꿇어앉아 빗자루를 옆에 놓고 기도드리고 있었다.
“하나님, 저는 심한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뼈가 굳어져서 이제는 그림을 공부해도 훌륭한 화가는 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제 친구는 더욱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창 밖에서 소년은 이 기도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곧 종이를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다. 자기를 위하여 봉사한 그 거룩한 손, 비록 거칠지만 친구를 위하여 희생된 그 손을 그려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응답받는 기도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가 어느 날 자기 집에 친구들을 초청하였다. 얼마 후 친구들은 잠자리에서 주인이 없어진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는데, 마당 한가운데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에 애통하여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는 “오 하나님이여,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아니면 이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하며 부르짖었다. 그의 기도는 실로 한 나라의 운명을 걸머지고 백성을 대신하여 생명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이와 같은 기도가 응답 못받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왕 메리는 일만 군대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고 하였다. 국가는 기도로 터를 닦고 성을 쌓아야 한다.
미국 역사에서 새 나라 헌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헌법 제정 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되었을 때였다. 그들은 한가지도 의견일치를 못보고 서로 분열하여 퇴장하려고 할 때에 벤자민 프랭크린이 말했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탄생한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기도의 응답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무릎을 꿇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이 어려운 궁지와 문제에 해답을 주시기를 기다립시다.”
그러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고, 드디어 불후의 문서인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기도로 세운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기도로 세운 나라는 번영한다. 미국 의사당에는 기도실이 있다고 한다.
6.25 때 장마를 멈추게 한 기도
우리 나라도 6.25때에 공산군에게 밀려 낙동강까지 내려갔을 때에 유엔군이 비행기로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 때가 심한 장마철인고로 비행기 한 대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 피난온 목사님들을 불러모아 놓고 장마를 그치게 하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때 대통령과 모인 수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매어달려 기도하게 될 때 억수같이 퍼붓던 장마가 맑게 개어서 유엔군이 상륙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행복한 부부 이야기
결혼한 지 5년 된 임집사 내외는 매우 금실이 좋았다. 그런데 3살 짜리 아들 녀석이 장난하다 깨뜨린 청자 때문에 서로 몹시 다투게 되었다. “아이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집에서 뭘했어!” “내가 집에서 애만 붙들고 살 수 있어요?” “뭐야?” 서로가 성이 나서 각각 딴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하고 닫았다. 아내는 밤잠을 못 자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내가 가만히 문을 열어 보니 소파에 얼굴을 묻고 남편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여, 오늘도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려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평화를 구하는 농부의 기도
김형석 교수가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에 유엔 본부를 견학한 일이 있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인 만큼 큰 기대를 가지고 방청석에 앉았다. 마침 안전보장 이사회의 소집이 공고되어 있었고, 정해진 시간 10분 전부터 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어도 제시간에 출석한 대표는 하나도 없었다. 무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하나 둘 씩 자리를 잡고 앉았고, 회의에 임하는 자세는 더욱 엉망이어서 진지한 구석이라고 전혀 없었다. 각자의 주장을 끝내고 나면 다른 대표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딴전을 부리거나 잡담을 하다가는 회의장을 빠져 나가더라는 것이다. 실망감이 컸다. 이들에게 세계의 평화를 맡겨도 좋을것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날 저녁에 초대받아 간 한 농부의 집 식탁에 앉았다. 조촐하지만 단란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농부는 기도를 드렸다.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김교수의 나라인 한국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온 세계가 평화 가운데서 인류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했다. 김 교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유엔 본부에서의 답답했던 가슴이 한 농부의 기도를 통하여 평안하게 되었다. 김교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세계의 평화는 유엔이 지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드리는 한 농부의 진실어린 기도가 있어서 세계의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응답 안해 주시면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신 정영창 선생님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거창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셨다. 학교에 부임하고 보니 그 학교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교장 선생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굴속에 들어가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을 읽으며 사흘 동안 금식 기도를 드렸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 앞에 떼를 썼다. “하나님! 이렇게 응답 안 해 주시면 서울로 올라가 제일 많이 팔리는 일간신문에 ‘하나님은 안계시다’라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침상을 젊어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학교 가까이 오자 교장을 기다리던 서무 직원이 미국에서 수표가 왔다고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꼭 빚을 진 액수만큼의 돈이 왔다. 그 후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22만 달러를 보내와 그 돈으로 교사와 강당을 지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다.
유혹을 이긴 기도
지금은 훌륭한 교역자가 되어 성역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젊은 시절 군대 생활을 할 때 잊을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가 아버지로 모시는 목사님께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이다.
“저는 오늘도 하루의 고달픈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제일 밑바닥 하급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일도 없이 억울한 단체 기합을 받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내무반에 돌아오니 내무반장이 모두 우울한 기분을 풀러 나가자고 하면서 돈을 거두었습니다. 저도 그들과 동참하여 내무반장의 인솔로 한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술집들이 즐비하고 전등불이 혼란하게 번쩍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를 혼자서 기르시고 가르치셔서 군대에 입대케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과 책망을 하실 듯하면서도 인자하게 웃으시는 아버지(목사를 말함)의 모습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선임하사에게 내무반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가 무수히 매를 맞았습니다. 겨우 내무반으로 돌아온 저는 혼자 있으면서 왜 이렇게 불쌍한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불만 속에서 불평을 하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다 지친 저는 무릎을 꿇고 곰곰히 생각하다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의 마음 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의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신학생으로서의 올바른 군대 생활을 하리라는 것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랑이 아닌 고백으로 이러한 형편을 아버지께 알리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염려하시고 늘 기도하여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월을 올립니다.“
목사는 이 편지의 내용을 교인들에게 공개해서 큰 감동을 받게 했다.
기도는 만능의 열쇠
어느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직장에 가는 남편이 한참 동안 비탈길을 걸어서 시내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직장에 필요한 서류 뭉치를 그만 잊어버리고 집을 나온 것이었다. 비탈길을 뛰어올라 집에 도달하니까 부인이 방문을 잠그고 금방 어디를 갔다. 잠긴 문을 열어 보려고 젓가락으로, 칼끝으로, 숟가락으로 아무리 애써 보았지만 열 수가 없었다. 별의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인이 쫓아오면서 “남편씨, 미안합니다. 당신 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오는 길” 이라고 하며 애를 등에 업고 달려왔다. 그 부인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아무리 애써도 안되는 자물통을 철컥 열어 주었다. 남편이 그렇게도 억센 존재인 것 같지만, 열쇠를 갖지 못하니까 아내보다 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기도하면 불가능한 것 같은 일도 가능해진다. 우리도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하늘에까지 연결되는 기도라야
전깃불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시골 사는 노인이 서울 아들 집에 갔다가 밤에 전깃불을 처음 보았다. 그 밝기가 대낮과도 같았다. 낮에 그것을 살펴보니 전구, 소켓트, 전선이 전부였다.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에게 부탁하여 전구, 소켓트, 전선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서울에서 구경한 여러 가지를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면서 햇빛 같은 전깃불을 사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오늘 저녁에 어두워지면 보여줄테니 자기 집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노인은 전선을 마당에 쳐 있는 빨랫줄에다 연결하고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저녁에 동리 사람들이 서울서 사온 전깃불을 구경하러 노인 집에 가득 모여들었다. 어둡기 시작하자 노인은 이제 전깃불을 보여주겠다며 일어나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탁!” 하는 소리는 서울에서와 같이 나는데 전깃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다시 틀어도 전깃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왜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전선을 빨랫줄에다 연결했기 때문이다. 전선이 발전소에까지 연결되어야 전깃불은 들어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도 하늘에까지 연결(상달)되어야 응답이 된다. 우리의 기도가 땅에서만 맴돌지는 않는지, 사람에게만 들리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자.
문은 넓게 열려 있다
무디 목사가 하나님을 떠나고, 아버지의 교훈과 어머니의 충고마저 저버린 채 이리 저리로 헤매다가 깊은 죄에 빠져버리고 만, 한 스코트랜드 소년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밤 이 소녀는 에딘바라 시에서 무서운 고민에 빠져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자기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 집에 가보고 싶었다. 소녀는 한 밤 중에 옛 마을로 돌아가 어머니가 계시는 집의 대문 앞에 섰다. 사방이 아주 캄캄했기 때문에 소녀는 대문을 밀치고 살짝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서 현관 문 앞에까지 가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것이었다. 별안간 늙은 어머니에게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소녀는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어머니의 대답이 들렸다. 소녀가 “어머니! 어째서 문을 열려 있어요?” 하고 물으니 “아가야 네가 집을 나가고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그러나 나의 가슴속에는 항상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늘 이렇게 기도하곤 했지. ‘주여, 내 딸을 돌려보내 주소서. 그 아이가 밤에 돌아오든지 낮에 오든지 열려 있는 문을 보고 집에서는 항상 그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당신들의 어머니들 중에서도 항상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당신의 마음과 생활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당신의 어머니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분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며 문은 아직도 열려 있다. 주께서는 지금도 권면하시고 호소하시며, 간청하시고, 또한 요구하시며 환영하신다.
합심 기도
일본 오오사카 산기슭에 고아원이 하나 있다. 산 뒤편에 위치한 까닭에 언제나 산에 가리워 햇볕이 들지를 않았다.
1946년 겨울 제대로 입지도 못한 고아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본 원장은 고아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원장은 그날 밤 원내 모든 사람들에게 합심해서 기도하자고 말하고 계속해서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3주만에 응답이 있었다. 미군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산을 헐기 시작한 것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장소도 많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곳이 비행장 부지로 결정된 것이었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
미국의 유명한 치즈 제조업자였던 크래프드라는 사람은 처음에 마차에 치즈를 싣고 다니면서 팔았다. 그런데 그는 매일 아침 치즈를 팔러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나서 떠났다. 그때마다 그에게 지혜가 생겨서 사업이 점점 번창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수많은 트럭으로 치즈를 보급하는 ‘치즈 왕’이 되었다. 그에게 ‘당신이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이처럼 축복을 해주셨다’고 고백했다.
리듬이 있는 기도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독일의 성 니콜라스 교회에 성탄 예배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교회 오르간이 고장나 버렸다.
당황한 목사 요셉 몰은 오르가니스트 글뤼버에게 즉석에서 기타 반주곡을 작곡하게 하고 그 노래에 자작시를 붙여 임시 변통의 연주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1818년 니콜라스 교회에서 기적처럼 새롭고도 감동적인 찬송가 하나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6.25동란 당시, 우리 국군이 북한의 인민군에 밀려 나라가 적화될 뻔한 위기에 처했을 때다. 만약 유엔군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절박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한국 파병을 의결하기 위한 안보리 상임이사회가 열렸고, 그 중 한 회원국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부결되는 것이다.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거의 확실한 소련 대표는 그 회의 개최 시에 급격한 복통 설사를 만나 의결 시간에 맞춰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파병 결의안이 무난히 가결되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공산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하나님은 핍박과 고통과 설움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정황을 모두 보고 계셨고, 나라 곳곳에서 이름도 없는 백성들이 간절하게 기도하는 음성을 모두 듣고 계셨다. 그리고 그토록 결정적인 순간에 직접 개입하신 것이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다음은 미국 L.A에 있는 바이올라 대학의 교수이자 목사인 어느 분의 간증이다. 그가 틴 에이저였을 때 친구의 인도로 바이블 캠프에 참석하여 예수께서 자기 구세주요 주님이란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마침내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부모님께 그의 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신학교를 가려면 모든 인연을 끊고 집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부모를 설득시키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는 어린 나이로 부모의 도움없이 대학에 입학하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많은 갈등 속에서 6개월이 지났을 때 그의 생활비는 바닥이 나고 친구가 조금씩 도와주던 것 마저 끊어져서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어서 그는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제가 비록 집을 나왔지만 저를 향한 어머니의 애정은 변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 등록금도 떨어지고 기숙사비도 못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저를 사랑하시는 어머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어머니의 답장은 냉담했다.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네가 집을 나갈 때 무어라고 했니? 너는 나에게 분명히 큰 소리쳤다. 내 하나님이 나를 돌볼 것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너를 돌보지 아니하느냐? 네 하나님께 구하라.”
이 편지를 받고 그는 너무 막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저의 부모님도 저를 돌보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님이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는데, 왜 저를 돌보아 주시지 않습니까?”
수 일 후에 어머니로부터 또 편지가 왔다. 그 내용은 앞으로 일주일 후에 어머니가 로스 엔젤레스에 갈테니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고, 그때까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음이 분명하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일주일이란 기한부 시간을 두고 그는 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그렇게 엿새가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드디어 어머니가 오시는 아침이 되었어도 응답이 없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짐을 쌓았다. 그리고 실망하여 축 늘어진 모습으로 학교 문을 나서다가 그 학교 교무과장을 만났다. 그의 표정을 보고 그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며 잠시 함께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다.
그의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아침에 네 편지가 온 것 같은데 못보았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체크를 해보니,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백 불 짜리 수표가 왔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 그 수표를 들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를 보자 어머니는 “네 하나님이 너를 돌보았느냐?”고 물었다. 그가 가만히 있자 하나님이 안 돌보신 줄 알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가 말하였다. “어머니, 이것을 보십시오. 저는 어머니께 60불을 구하였는데 하나님은 40불을 더 보태서 100불을 주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화가 나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믿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는지 가르쳐다오.”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족은 구원을 받았고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다만 제게 일사 각오 있을 뿐입니다(순교자 명 설교)
-의에 살고 의에 죽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어 이번에는 오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이 산정현 강단(講壇)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오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려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설교가 아니고 갇히운 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 곧 ‘오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말씀하겠습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의(義)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고자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하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재사,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열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긴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과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싯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년 십 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버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마 4:13)고 신신 부탁하였습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사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아픔 어떠하였으리오! 나와 여러분의 죄, 억만 죄인의 죄 짐을 대신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중대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핏방울 소리를 우주도 감당할 수 없이 지축(地軸)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 8:8).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 불사의 몸이오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길이 참아 주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라(약 5:7).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3.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남의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① 자식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머나 아프실꼬!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밤 달빛이 철장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시던 주님 심정 어떠하였을꼬! 십자가 밑에서 가슴치며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였을까?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을, 80 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②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 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두고 잡혀 다니는 이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 이 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소서.
③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리 어린 것은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끝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에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위로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 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 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나의 자식을 부탁합니다. 어미 죽은 어린 것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④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에,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나가지 못합니다. 맡기나이다. 내 양들 다 목자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나이다.
나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주님 손수 인도하여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내 마음 차마 못 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주시옵소서.
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자못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도 변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이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忠節)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무너지는 한(漢) 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 스러질 때까지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기까지 애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교회와 그 의를 붙잡고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 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 나라에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불고 있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망하는 고려 나라를 위하여 선죽교에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싯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변할줄이 있으랴
이는 우리 선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대절(忠義大節)입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 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 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여 풀무 불이냐! 예수를 사랑하여 사자 굴이냐,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이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습니다.
백제 나라의 도미부인(都彌夫人)은 개루왕(蓋婁王)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늘 뫼 아래에서 한평생 그 남편을 섬기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 눈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부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으랴! 주 후 200년 카르타고의 벨 뼈추어는 22-3세의 방년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받쳐 죽었습니다. 천고의 열녀 벨 뼈추어는 주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헌신하기로 열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盜生) 피할 줄이 있으랴!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죽고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大義貞節) 변치 아니하오리다.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 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주기철 목사)
믿음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영국의 자선 사업가 조지 뮬러는 오직 믿음의 기도로써 6천여 명의 고아를 길러냈다. 어느 날 고아원에 양식이 떨어졌다. 식당 담당자가 뮬러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뮬러의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염려할 것 없네. 식사 종을 치고 아이들을 식당에 모으게.”
종을 치자 아이들이 우르르 식당에 모여들었다. 식탁 위에는 빈 그릇만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뮬러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제 머리 숙여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께 식사 기도를 드립시다.”
아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빈 그릇을 놓고 무슨 기도야?”
이 소리를 들은 뮬러는 다시 말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하니님께서 곧 주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자 뮬러는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 기도가 막 끝나자마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떤 낯선 신사가 인부들의 손에 큰 통 몇 개를 들려 들어섰다. 그는 말했다.
“뮬러 선생님, 오래 전부터 무엇인가 도와 드리려고 생각했는데, 오늘에야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통들 속에는 빵, 야채, 고기 등의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빈 접시를 놓고 기도를 드렸던 뮬러의 믿음은 실로 놀라웠다.
아빠를 회개시킨 기도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한 집사 부부의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았다. 남편이 간증하기를 자신의 모친이 권사였고,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나 대학 1학년 때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교회를 떠났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어린 아들이 기도할 때마다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시켜서 그런다면서 아내를 몹시 구박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이름 모를 병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아이는 의사에게, “선생님, 아무리 선생님이 훌륭하셔도 하나님이 제 병을 고치시기 전에는 못 고쳐요. 그러니 꼭 기도를 하고 고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교회 장로였던 의사가 감탄하여 간절히 기도한 후 진찰하려 하자, 아이는 또 “선생님, 기도하실 때 꼭 한 가지를 빠뜨렸어요. 우리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으셨어요”라고 덧붙였다.
깜짝 놀란 의사는 아이의 아빠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다.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빠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곧 회개하고 여생을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후, 지금까지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집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회개하자 아내의 병도 완쾌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육 십 년 동안 새벽 네 시에 일어나고 구십 세까지 살던 건강한 존 웨슬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한 편의 설교를 하고는 강단 아래서 한 사발의 피를 토하곤 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같이 곧 쓰러져 죽을 듯한 연약한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열 아홉 살에 예일대학의 교수가 된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천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드와이트 무디와 같은 무학자를 들어서 위대한 복음 사역의 꽃을 피우게도 하셨다. 이름 있는 목사는 사용하시는가 하면 이름 없는 평신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던 이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며 바쁠 때는 더 많이 기도하던 마틴 루터를 들어서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하는 나팔로 사용하셨다. 또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해에 천 편이 넘는 설교를 하면서도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기도하던 웨슬리를 들어서 영국을 변화시키셨다.
뿐만 아니라 우유 배달부보다 늦게 일어난 날이면 괴로워하며 자책하던 기도의 사람 조셉 얼라인은 비록 다른 목회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를 누렸지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자신보다 두 배나 더 산 목회자들도 이룰 수 없는 수확을 거두게 하셨다.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기도하던 보헤미아의 후스를 들어서 칠흑같이 어둡던 중세 암흑의 교회사를 밝히는 종교개혁의 새벽 별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하루를 오직 기도에만 바쳤던 아도니람 저드슨을 들어서 불교에 잠들어 있는 절망의 땅 버어마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도 하셨다.
사람들은 발달된 기계문명이나, 새로운 조직,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의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에 의해 이 모든 일을 해 오셨다. 사람들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그들은 언제나 기도의 사람이었다. 이 나라가 치유되는 길도 기도밖에는 없다. 라일의 말과 같이 “기도의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인다.” 기도 없이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언제나 꿈일 뿐이다.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
영국의 노예해방 운동가 윌리엄 월버포스는 아들에게 새벽기도의 중요성에 관해 편지에 써서 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단다. 그것은 결코 아침기도를 무시하거나, 짧게 해버리거나, 성급하게 마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골방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보다 치명적인 것은 달리 없다. 만약 네가 아침부터 하나님과 친근한 교제를 하게 된다면 너는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노예해방을 지지하고 살아있는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투사의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그런 행동 뒤에는 새벽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루의 첫 시간을 어떻게 시작하는가에 따라서 하루의 결과가 어떨 것인가를 예상해 볼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새벽을 여는 사람은 아침 햇살만큼이나 찬란한 은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긴 밤의 고통과 기다림을 알기에 그는 밝아오는 새벽을 하나님과 함게 깨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 119:14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