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곤수(鄭崑壽) 1538년(중종 33)~1602년(선조 35)
[문과]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별시(別試) 갑과(甲科) 1[壯元]위(01/19)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규(逵).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 · 경음(慶陰) · 조은(朝隱).
곤수는 명종이 내린 이름이다. 증 이조판서 정윤증(鄭胤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직 정응상(鄭應祥)이고, 아버지는 부사맹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종백부(從伯父)인 대호군 정승문(鄭承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생가 동생이 한강 정구이며 여헌 장현광이 질서이다.
시호: 충민(忠敏) 危身奉上曰忠 應事有功曰敏
충익(忠翼) 危身奉上曰忠. 思慮深遠曰翼 현종 4년 改諡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사려가 깊고도 원대한 것을 익(翼)이라 한다.
봉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제향처: 성주 유계서원(柳溪書院)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규(逵).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경음(慶陰)·조은(朝隱). 곤수는 명종의 하사명이다.
아버지는 부사맹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부사과 정희수(鄭希壽)의 딸이다. 백부인 대호군 승문(承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퇴계 이황 문인이다.
1565년(명종 20) 예안 도산정사(陶山精舍)로 이황(李滉)을 찾아가 《심경(心經)》을 전수하였다. 그 이후로도 관계를 지속하여, 1566년에는 김굉필(金宏弼)의 사적‧시문과 그에 관한 다른 선비들의 글을 모아 이황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이황은 주로 그것들을 바탕으로 《경현록(景賢錄)》을 편찬하였다.
1555년 별거초시(別擧初試)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의금부도사가 됨으로써 관로에 들어섰다. 그 이후 경력‧전생서직장‧주부‧장례원사평을 역임하였다.
1576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였고, 부사과를 거쳐 1577년에 공주목사로 승진하였다가 곧 상주목사로 옮겼다.
1581년 사과‧파주목사, 1583년 부호군 겸 오위장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단종의 능인 영월의 노릉(魯陵)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1585년 첨지중추부사‧동부승지‧우부승지, 1586년 상호군‧호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1587년에는 여러해 흉년을 겪은 황해도의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진휼사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8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
1589년 도총관을 겸하고 판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충훈부 공신등록을 편찬하고 동지돈령부사 겸 오위장‧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 동지의금부사‧대사성‧한성부좌윤 등을 거쳐 159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으로 옮겼으며,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1593년 원병을 얻어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즈음 영위사(迎慰使)‧접반사(接伴使)를 맡아 명나라 장수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같은해 거듭 보국숭록대부에 오르는 상을 받고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595년 도총관‧예조판서, 1596년 좌찬성을 역임하고, 1597년 판의금부사‧도총관 등을 겸하고 사은 겸 변무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선조를 호종한 원훈으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녹훈되었다. 일찍이 수령을 지낼 때는 학문을 진흥시키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는 데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대명외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죽은 뒤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록되었다.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곡집》 4권 4책이 규장각도서에 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조대왕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 치제문
옛적 남쪽 왜구가 침략해 왔을 때 / 昔有南寇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월(播越)하였는데 / 翠華西巡
모사가 비늘처럼 일어나고 / 謀士䚬興
용부는 구름처럼 많았었네 / 勇夫如雲
평양(平壤)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 浿城不守
서로 돌아보며 놀라서 당황했으니 / 相顧錯愕
누가 책략을 내어 / 誰其籌之
어육이 될 뻔한 우리를 구했던가 / 拯我魚肉
경은 당시에 형조 판서였는데 / 卿時豸冠
강개한 심정으로 말고삐를 잡았으니 / 慷慨執鞚
임금은 중국 조정에 귀부(歸附)할 듯하고 / 王如內附
신하는 그림자처럼 따랐네 / 臣則景從
중국에 구원을 청하여 / 控于大邦
황제의 영무(靈武)를 맞이하러 감에 / 徼我皇靈
한 대의 수레로 머나먼 만 리 길을 / 單車萬里
별처럼 빨리 달렸다네 / 其馳如星
소매에 주청할 글 한 통을 넣어 / 袖一封奏
구중궁궐에서 부르짖어 / 叫九重闕
조정의 의논이 어긋났으나 / 廷議齟齬
가슴엔 혈성(血誠)이 가득하였네 / 我有腔血
천자가 차탄하며 칭찬하기를 / 天子曰咨
그대 사신을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 嘉汝行人
민복의 병사를 다 징발하고 / 悉賦閩濮
이에 용감한 장수를 명하였네 / 迺命虎臣
종묘사직이 바뀌지 않고 / 鐘簴不改
산하가 다시 온전하게 되었으니 / 山河復圓
우리나라가 안정되어 / 奠我宗祊
억만년에 이르게 되었네 / 垂萬億年
성조의 공업과 / 聖祖之業
신종황제의 은혜여 / 神皇之恩
경이 한 번 힘쓴 덕분에 / 賴卿一辦
건곤(乾坤)의 자리가 바로 서게 되었네 / 轉乾旋坤
신포서(申包胥)가 진 나라 궁궐에 엎드려 울고 / 包胥哭秦
목숙이 주 나라에 가서 절하였으니 / 穆叔拜周
위엄이 오랑캐 나라를 두렵게 하고 / 威懾蠻邦
이름이 천자의 나라에 떨쳐졌네 / 名動帝州
높은 품계에 오르고 / 煌煌華衮
일등공신에 녹훈되었으니 / 奕奕旂常
중흥의 공이 있는 신하 가운데 / 中興諸臣
경과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네 / 侯莫與方
수립한 바가 우뚝한 것은 / 卓乎所立
대개 독서의 공이었으니 / 蓋讀書功
멀리 한훤당(寒暄堂)을 사숙하고 / 世淑寒暄
퇴계(退溪)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네 / 親炙陶翁
충신을 주로 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 曰主忠信
가슴에 깊이 새겼으니 / 三字佩膺
정성이 움직이는 바에 / 誠之所動
하늘인들 어찌 감동하지 않으랴 / 天豈不能
북원에서 재계함은 / 齋衣北苑
천추절이 돌아와서이니 / 節回千秋
풍천의 감개가 더욱 크고 / 風泉增愾
한강은 유유히 흐르도다 / 江漢悠悠
이렇게 의관을 보존한 것이 / 葆玆冠裳
그 누구의 공이던가 / 伊誰之力
사신 노릇을 경처럼 한다면 / 使乎如卿
나라에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 何憂疆場
찬후의 자손을 녹용하고 / 錄酇侯孫
문정공(文貞公)의 집을 돌려주게 하였으며 / 還文貞第
거듭 술을 올려서 / 申以伻酹
길이 후세를 권면하노라 / 永勸來世
중씨(仲氏) 서천부원군에게 올린 제문 -동생 정구(鄭逑)-
아, 애통합니다. 선인(先人)께서 남기신 자식이 네 명이었으나 백씨와 누나는 진즉 세상을 떠났고 세상에 남은 것은 우리 형제 두 사람뿐이어서, 그동안 서로 의지하여 밀접하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한몸의 수족 같다는 말로도 그에 비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형께서 또 갑자기 이렇게 되셨으니 의지할 데 없이 고단한 이 몸이 장차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형의 그처럼 아름다운 덕과 높은 행실로도 끝내 하늘의 큰 보답을 받지 못하셨으니, 천도가 과연 있으며 신의 이치가 또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벼슬은 1품의 반열까지 올랐으나 평소의 뜻을 펴지 못하고 수명은 60여 세를 헤아리나 장수를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가승(家乘)과 세보(世譜)는 50년 동안 초안을 잡아왔으나 결국 난리로 인해 잃어버렸고 의택(義宅)을 지으려는 뜻을 지녔으나 이루지 못했으며, 정원의 정자와 들판의 별장에 대한 기문(記文)을 지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단 하루도 그 낙을 누려 보지 못하셨습니다. 이 모두 어찌 어리석은 저희들 자제가 그 유지를 받들어 계승하여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비록 만년에 쓸쓸한 모습으로 집안에 홀로 앉아 당대에 어떤 영향을 행사하신 일은 없었으나 온 세상이 우러러보고 사림이 의지하였으며, 내외의 친족들이 친소(親疏)와 원근의 관계를 막론하고 모두 태산 북두처럼 추앙하여 믿고 의지하였으니, 길흉을 판단하는 시초(蓍草)와 거북의 영검이며 말없이 혜택을 끼치는 산천의 은덕 같은 위상으로서 세도(世道)와 가정에 과연 얼마만 한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산이 무너지듯 들보가 쓰러지듯 갑자기 세상을 떠나 붙잡을 수 없었으니, 그 깊은 슬픔과 큰 아픔은 어찌 우리 한 가문만의 사적인 일이겠습니까.
임진년 난리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임금의 행차를 호종하고 중국 조정을 감동시켜 우리나라 삼도(三都 강화(江華), 수원(水原), 개성(開城))를 수복하심으로써 제일가는 공을 세워 종정(鍾鼎)에 그 공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철권(鐵券)이 곧 이루어질 시기에 병이 들어 조정에서는 한 해가 지나도록 그 대상 인물에 대한 심사를 늦추었고 반드시 병세가 차도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는 성상의 간곡하신 하교에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나 끝내 하루의 목숨을 더 연장하여 기린각(麒麟閣)에 공신으로서의 초상화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이 또한 만조 백관이 모두 슬퍼한 일로, 임금께서도 부음을 접하고 놀라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심지어 저 길 가는 보통 사람들까지도 다 “원훈(元勳)을 잃었구나.”, “나라의 원로가 죽었구나.”, “덕 있으신 분이 가셨구나.”, “어진 이가 사라졌구나.”라고 하지 않은 자가 없어 평소에 형과 서로 알던 사람이건 모르던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모두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으니,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겠습니까.
40년 동안 병을 안고 살아온 이 아우는 한평생을 신음 속에 지냈는데, 항상 우리 형을 우러러보면 덕 있으신 모습이 충만한 데다 정신이 온화하고 기운이 넘치며 또 쌓은 덕이 두터워 세상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복하고 있으니, 반드시 신령의 도움을 받아 꼭 장수를 누리실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집의 자제만 그처럼 믿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심으로 ‘나는 반드시 형보다 먼저 죽을 것인데 내가 죽은 뒤에 우리 형의 마음이 어떠할까?’ 하였는데, 그 믿었던 것은 헛되었고 꼭 그렇게 되었어야 할 것이 잘못되어 이 아우가 도리어 우리 형이 차마 견디지 못했을 슬픔을 대신하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형께서는 막연하게 아무것도 모르시겠지만 이 아우만은 깊은 슬픔으로 가슴이 시리고 쓰라립니다. 저는 평소에 불평스러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우리 형에게 호소하곤 하였는데 앞으로는 이 속마음을 누구에게 호소한단 말입니까.
형께서는 병을 앓은 지 80일이 지났으나 정신은 날로 더 맑아지고 눈빛도 날로 더 밝아졌으며, 사고력이 날로 더 정밀하여 담소하시는 정도가 평소 때와 다름없으셨으므로 비록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음식을 들지 못하시어 자제들의 깊은 걱정이 되기는 하였으나 믿는 데가 있어 행여 잘못되리라고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믿었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이처럼 정신이 나가고 꿈속 같은 슬픈 일이 생기고 말았으니,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제 어찌한단 말입니까. 천심이 어디에 있고 신령이 어디에 있으며, 형은 이제 어찌되고 이 아우는 또 어찌한단 말입니까. 선한 이는 복을 주고 악한 자는 화를 내려야 할 저 하늘은 아득하고 감감할 뿐이어서 이미 신령이 없고 믿을 수 없으니, 이 억울함을 누구에게 묻고 누구에게 따진단 말입니까.
앞으로 죽기 전까지 남은 생은 순전히 형을 그리는 날로 이어질 것이니, 비록 약간 생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어찌 살아가는 낙이 있겠습니까. 앞으로의 여생은 많이 남지 않았고 후일에 과연 우리 가족이 지난날 이 세상에서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정말 슬픔은 한계가 있고 즐거움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형은 지금 과연 먼저 가신 부모와 형이며 누나들과 서로 모여 즐거움을 나누시기를 제 후일의 기대처럼 하고 계십니까? 진짜 그러십니까? 이제는 절망입니다. 앞으로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이승에 미련이 있겠습니까. 눈물이 말라붙고 입은 더듬거리며 목이 메고 가슴이 갑갑한데, 곡소리답지 않은 곡소리와 조리 없는 이 말씀이 어찌 우리 형의 영혼이 굽어살펴 주실 만하겠습니까. 아, 이제 절망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서천(西川) 정 상공(鄭相公)에 대한 제문 -질서 장현광(張顯光)-
아, 상공이시여. 그 누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인자하고 간곡함은 인성에 근본하였고 공손하고 화락함은 형모가 자연 그러하였습니다. 효도하고 우애하고 친족간에 화목하여 형제들의 칭찬하는 말에 사람들은 이론을 제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순한 덕을 미루어 상하와 대소에 따라 오직 만나는 일마다 모두 돈독히 하였습니다. 남의 선행을 좋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듯이 여기시어 마음속에 기억해 두고 잊지 않으시며 남의 악행을 미워하되 용납하고 숨겨 주셨으니 어찌 일찍이 한 번이라도 입에 올렸겠습니까. 차라리 후함이 지나쳐 잘못될지언정 일이 조금이라도 박함에 해당하는 것은 마음에 차마 못하였고, 차라리 너그러움이 지나쳐 잘못될지언정 도량이 조금이라도 좁음에 손상되는 것은 마음에 실로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은혜가 남에게 미칠 수 있으면 자신에게 손해됨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힘이 남을 구제할 수 있으면 자신이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진퇴에 급급하지 않고 스스로 다한 것은 정성이었으며, 취사(取舍)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편 것은 간곡한 마음이었습니다.
큰 공훈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나왔으나 일찍이 공이 있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권력가들이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여 깊이 스스로 편안한 곳으로 삼으셨습니다. 옛 도를 좋아하는 생각이 간절하나 늦게 태어나 어쩔 수 없으므로 항상 천하의 서책들을 구하여 눈에서 문자를 떼지 않았으며, 친척을 친애하는 은혜가 돈독하였으나 후손이 근본을 모르는 것을 애통하게 여기고 반드시 삼한(三韓)의 계보(系譜)를 연구하여 온갖 성의 기맥(氣脈)을 연결하였습니다.
아, 이는 상공이 실제로 간직한 덕이니 사람들이 모두 알고 함께 탄복하는 바입니다. 높은 품계와 큰 벼슬로 말하면 반드시 덕이 있는 자가 모두 거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상공에게 영달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작은 행실과 소소한 일은 자연 후한 덕에서 흘러 나온 것이니, 어찌 상공을 위하여 일일이 다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천한 시생(侍生)은 문하에 췌객(贅客)이 되어 오랫동안 사랑을 입으며 언제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았사온데, 그 말씀이 간곡하고 간곡하였습니다. 오늘 별세하시니 사사로운 애통함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마침 형편에 구애되어 무덤에서 영결하지 못하옵고 술잔을 올려 슬픈 마음을 펴오며 감히 굽어 강림하시기를 바라옵니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行) 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서천군(西川君) 증(贈)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공(鄭公) 행장
공의 휘는 곤수(崐壽), 자는 여인(汝仁)이다. 자호(自號)는 백곡(柏谷)인데 또 경음(慶陰), 조은(朝隱)이라고도 했으며, 향년 65세이다.
성은 정씨(鄭氏)로 본관은 충청도 청주이다.
증조의 휘는 윤증(胤曾)이다. 생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철산 군수 의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鐵山郡守義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지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 청성군(淸城君)에 추증되었다. 증조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숙인(淑人)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계증조비(繼曾祖妣) 현풍 곽씨(玄風郭氏)도 숙인으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응생(應生)이다. 생전에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 부사직(忠佐衛副司直)을 지냈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서평군(西平君)에 추증되었다. 조비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숙인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휘는 승문(承門)이다. 생전에 어모장군 행 충좌위 대호군(忠佐衛大護軍)을 지냈고 추충적덕병의보조 공신(推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선비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숙인으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생부의 휘는 사중(思中)이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선비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정씨의 본관은 서원(西原)이다. 대대로 고려조에 벼슬하며 송경(松京)에서 살았는데 유학(儒學)을 표방하는 가문으로 이름났다. 곧 목은(牧隱) 선생 이공 색(李公穡)이 〈정씨가전(鄭氏家傳)〉을 지으면서 서원(西原)의 대성(大姓)이라고 말한 집안이다.
보승별장(保勝別將) 휘 극경(克卿)이라는 분이 족보에 처음으로 실려 있는데, 이분이 증(贈) 중랑장(中郞將) 휘 효문(孝聞)을 낳고 중랑장이 휘 의(顗)를 낳았다. 이분은 고종(高宗) 때 필현보(畢玄甫) 등을 거느리고 서경(西京) 역적 최광수(崔光秀)를 무찔러 그 공으로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으로 뛰어올랐는데, 나중에 필현보가 또 반란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고 그를 회유하러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순절함으로써 상장군(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어사(御史)로 우복야(右僕射)로 추증된 휘 현(儇)을 낳았고, 복야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장경공(章敬公) 휘 해(瑎)를 낳았으며, 장경공이 중대광(重大匡) 청하군(淸河君) 휘 책(㥽)을 낳았다. 청하군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하부원군(淸河府院君)에 추증된 설곡(雪谷) 선생 휘 포(誧)를 낳았고, 설곡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 청원군(淸原君)으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추증된 문간공(文簡公) 원재(圓齋) 선생 휘 추(樞)를 낳았다. 원재가 본조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정당문학(政堂文學) 서원군(西原君) 문민공(文愍公) 복재(復齋) 선생 휘 총(摠)을 낳았고, 복재가 절충장군 상호군 휘 효충(孝忠)을 낳았으며, 상호군이 통훈대부 겸 사헌부집의 휘 옥경(沃卿)을 낳았는데,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된다.
서평군(西平君)의 동복아우로, 감찰(監察)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된 휘 응상(應祥)은 어릴 적에 단정하고 총명한 자질로 학문에 뜻을 두어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서흥(瑞興) 김 선생(金先生) 휘 굉필(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사랑하여 자기 딸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대사간으로 대사헌에 추증된 아우 휘 응린(應麟)과 함께 서상(西庠)에 유학하여 당시 사류들의 존중과 칭찬을 받았다. 참판공(參判公)을 낳았다.
참판공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품이 온화하고 활달한 데다 진실하여 거짓이 없었다. 평소에 마음이 너그러워 세상의 사물에 연연해하지 않음으로써 온종일 태연하여 시비와 이해를 따지는 사심이 없어,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서실(書室)을 지어 후생을 가르쳤으며 글을 읽을 때 한 번 보면 그 깊은 의미를 환히 알아 문학으로 이름난 인물들이 많이 찾아와 질문하곤 하였다.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재주를 숨기고 벼슬하지 않은 휘 환(煥)의 딸이다. 은군(隱君 이환(李煥))이 너그럽고 후덕한 장자(長者)였는데, 부인도 온화한 덕과 단정한 성품을 지녀 인자하고 검소하였으며 옛 성현들의 훌륭한 언행을 많이 알아 자식들을 가르쳤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은 둘째로, 중종 33년 가정(嘉靖) 무술년(1538) 11월 15일 을유일 미시(未時)에 성주(星州) 남산리(南山里) 유촌(柳村)의 고향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총명이 비범하여 본 사람은 다 기특하게 여겼다. 당시에는 참판공이 이 은군(李隱君)의 집에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은군이 항상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비범한 아이이니 잘 기르도록 하라.” 하였다. 4, 5세 때 벌써 숫자와 방위의 명칭을 이해하였으며, 이따금 혼자 방석을 포개고 단정히 앉아 사해(四海) 신의 이름을 거침없이 암송하였는데, 목소리가 맑고 또랑또랑하여 주위에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청원공(淸原公)이 종손으로 아들이 없고 형제도 없는 처지에서 여러 사촌 형제 가운데 오직 참판공이 그 차례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공을 후사로 삼겠다고 청하였다. 계묘년(1543, 중종38) 봄 공이 이제 막 6세가 되었을 때 성주 고을에서 서울 집으로 올라가 자랐다. 그 이전에 청원공의 꿈에 백발노인이 사당 문을 열고 나와 말하기를, “너는 아들이 없다고 걱정하지 마라. 반드시 귀한 아들이 생길 것이니 그 이름을 곤수(崐壽)라고 하여라.” 하였다. 꿈을 깬 뒤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등불을 켜고 그 글자를 벽에 써 표시해 두었다. 공의 처음 이름은 규(逵)라고 했는데 이때 와서 마침내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공은 놀이를 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처음 문자를 가르치자 나날이 진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노숙한 선비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기동(奇童)이라고 불렀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같은 동(洞)에 살았는데, 공에게 글자를 한번 써 보라고 시키고 또 함께 말을 나눈 뒤에 기뻐하며 말하기를, “반드시 크게 성취할 인물이다. 동장(洞丈)은 문벌을 이어 갈 훌륭한 아들을 얻었다.” 하였다.
병오년(1546)은 명종의 원년이었는데, 청원공이 어가(御駕) 앞에 나아가 청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아 후사로 세웠다. 외부의 스승을 찾아가 글을 배워 견문이 한층 더 넓어졌다. 매일 자기가 배울 부분을 배운 다음, 스승 곁에 모시고 앉아 다른 사람이 배우는 글을 주의 깊게 함께 들어 두었다가 이튿날 그 사람이 혹시 자기가 배운 부분을 외우지 못하면 공이 거침없이 외우곤 하였다. 언젠가 부친을 따라 마을에서 벌어진 잔치에 갔다가 그 자리에 앉은 어떤 손님의 갓에 꽃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시구를 지어 부르기를, “겨울 잔치에 꽃 꽂으니 머리 온통 봄이로세.〔揷花冬宴一頭春〕” 하니, 한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였다. 무신년(1548, 명종3) 봄에 문장의 기교를 배웠는데 함께 배우는 많은 아이들 속에서 항상 으뜸을 차지하였다.
신해년(1551, 명종6) 봄에는 생부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으며 계축년(1553, 명종8)에 심상(心喪)의 복제를 마치고 갑인년(1554, 명종9)에 남학(南學)에 들어갔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하동 정씨(河東鄭氏) 충의위(忠義衛) 행 사과(行司果) 희수(希壽)의 가문으로 장가들었으며, 이해 가을에 별거 초시(別擧初試)에 입격하였다. 이때부터 시험을 보면 그때마다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는 늘 떨어졌다.
임술년(1562, 명종17)에 부인 정씨가 죽었다.
을축년(1565, 명종20)에 예안(禮安)의 도산정사(陶山精舍)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을 찾아가 뵙고 《심경(心經)》을 배웠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인년(1566, 명종21)에 예천 권씨(醴泉權氏)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우(祐)의 가문으로 다시 장가들었다. 한훤당 김 선생의 세계(世系), 사적 및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과 제현이 선생에 관해 서술한 내용들을 퇴계 이 선생에게 보냈다. 이 선생이 《경현록(景賢錄)》을 편찬한 것은 이것을 근본으로 한 것이었다.
정묘년(1567)은 곧 우리 선묘(宣廟)가 즉위한 해로, 그해 겨울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청원공(淸原公)의 상을 당하고 또 생모인 정부인(貞夫人)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천리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두 초상이 동시에 터져 참최복(斬衰服)을 미처 성복(成服)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자최복(齊衰服)의 부음을 접함으로써 참혹한 변을 거듭 만나 상례를 어찌해야 할지 난처한 상황에 처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이 선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공의 벗 추연(秋淵) 우성전(禹性傳)이 선생의 문인으로 본디 예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선생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상의하여 이 예에 있어서의 특별한 상황을 참작하여 도리에 합당하게 정하였다. 그리하여 성복하는 예를 마친 뒤에 부음을 받들어 영위(靈位)를 설치하였으며, 일단 성복한 다음 하루 동안 중상(重喪)에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본생(本生)의 상에 분곡(奔哭)하였다. 이는 다 이 선생의 명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법으로 볼 때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미년(1571, 선조4) 봄에 삼년상을 마치고 예안(禮安)에 가서 이 선생의 무덤을 참배하고 곡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5) 봄에는 성균관의 천거로 인해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공은 그 천거가 보편적인 격식이 아니고 사적인 의리상 온당치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려 하다가 모부인(母夫人)이 벼슬할 것을 극력 권하여 마지못해 부임하였고 얼마 뒤에 곧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본디 법전을 잘 아는 데다가 관리로서의 행정 능력이 뛰어나 어떤 송사에 대해 한 번 물으면 상대방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옥사의 정황을 훤히 알았다. 그리하여 판결문을 물이 흐르듯 써 내려갔는데 문장과 논리가 다 완전하였으므로 스스로 억울한 사정을 밝히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피의자들이 모두 한 번 휘두르는 붓대 아래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으니, 오랫동안 갇힌 죄수나 묵은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이 다 공에게 가서 심리받기를 원하였다. 언젠가 수십 명의 죄수를 심문하고 눈 깜박하는 사이에 판결을 끝내자, 대청에 있던 재상들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정말 뛰어난 재주라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항상 원고와 피고의 사정을 잘 따져 공정한 판결을 해야겠다는 기본적인 생각 위에 형량을 신중히 정하고 생명을 중시하는 임금의 마음을 행여 잘 받들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일의 실정을 규명하고 법을 적용할 때 관대하게 풀어 준 경우가 많았다. 명도(明道) 선생이 말한 “정말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사람에 대해서도 반드시 구제해 주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은 곧 공이 평소에 늘 외우며 스스로 노력한 부분이었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6) 여름, 상이 문신(文臣)을 대상으로 정시(庭試)를 보일 때 공이 가주서(假注書)로 입시(入侍)하였는데 보좌하는 예법이 능숙하고 기풍이 단아하므로 여러 각로(閣老)가 서로 공을 가리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6월에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7) 6월에는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되어 잉화도(仍火島)의 분서(分署)로 출사(出仕)하며 염소와 돼지를 기르는 일을 맡았다. 분서에 지난날 죽은 가축이 많아 해묵은 결손이 쌓여 있었는데 공이 호조에 말하여 모두 청산해 버렸다.
을해년(1575, 선조8) 12월 본서(本署)의 주부(主簿)로 승진하였고 승진한 그날 장례원 사평(掌隸院司評)으로 전보되었다. 그 벼슬은 곧 옛날의 도관 좌랑(都官佐郞)이라 할 수 있는데, 송사의 심리를 반드시 정밀히 하고 판결을 반드시 사리에 맞게 함으로써 그 자리에 재직한 10개월 동안 재심을 청구한 사건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는 자형과 종의 소유권을 놓고 송사를 일으킨 자가 있었는데, 그 자형은 그 사람의 선대 때 친구의 아들이었다. 공은 가엾은 생각이 든 나머지 그에게, 같은 피를 나눈 남매간의 의리로 볼 때 종 한 명의 소유권을 가지고 송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고 아울러 선대의 정분을 상기시켜 간곡하게 일깨우자, 그는 즉시 감복하여 송사를 취하하고 그 종을 누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날 밤 공의 꿈에 그의 선친이 나타나 정성을 다해 고맙다고 말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 4월에는 윤대관(輪對官)으로 입시하여 시사(時事) 몇 가지를 아뢰면서 당시 몸담고 있던 장례원의 폐단을 아울러 언급하였다. 9월에 중시 별거(重試別擧)에 응시하여 갑과(甲科) 제1인으로 급제하였고 10월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의흥위 부사과(義興衛副司果)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577, 선조10) 1월 통정대부 공주 목사(公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바꿔 제수되었다. 상주 목사로 정사를 펼 때는 오로지 평탄하고 관대한 자세를 견지하여 애잔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굴과 말하는 가운데 물씬 풍겨 나왔다. 공무를 처리할 때는 반드시 법에 따라 하되 인정을 깊이 참작하고 반드시 정성을 다하면서 민폐를 힘써 제거하였다. 그리고 일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사안에 대해서는 강직하여 그 주장을 도저히 꺾을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선을 좋아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며 사류를 예우하여 학덕과 행실이 온 고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수레를 타고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경치 좋은 장소에서 함께 모여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의견을 청취하기도 하였다. 선비의 후손에 대해서는 더욱 관심을 갖고 보살펴 혹시 글을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병졸 명부에 들어가지 않게 하여 가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친구의 자제로서 형편이 가난하여 찾아와 의지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도 반드시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가까운 경내에 있는 내외의 선대 무덤도 모두 일일이 둘러보고 참배하였다.
무인년(1578, 선조11) 겨울에 모부인(母夫人) 김씨의 상을 당하여 상여를 받들고 장단(長湍)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으며, 반곡(返哭)한 뒤에는 정침(正寢)에 궤연(几筵)을 설치하는 한편 무덤 곁에도 여막을 지어 두 곳을 왕래하며 모시면서 3년을 마쳤다.
신사년(1581, 선조14) 봄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 사과(司果)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곧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자상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정사를 펴기를 상주 고을에서의 경우와 똑같이 하였다. 고을 경내에 거주하는 어진 사대부에 대해서는 반드시 정중히 대우하고 성의를 다해 함께 어울렸다. 선대 임금 때 의빈(儀賓)의 후손으로 관아의 일수(日守 잡무를 보는 종)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특별히 양역(良役)으로 돌려주게 하였다. 공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선유(先儒)의 말씀에 ‘사람과 사람은 동류로서 서로 친하기 마련이다.’ 했는데, 더구나 사족(士族)과 사족은 동류 중에서도 더 밀접한 동류이니 어찌 더욱 친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언제나 그 정신을 지녀 사족을 만나면 일반 백성과는 다르게 대하였다. 이러므로 사족들은 누구나 감동하여 좋아하며 친근히 하였다. 조사(詔使)인 한림(翰林) 황홍헌(黃洪憲)과 급사(給事) 왕경민(王敬民)이 파주 고을을 지나갈 적에 백성의 재물이 빈약하여 그들을 영접하고 전송하는 고충을 이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부역을 반드시 고르게 부과하고 소원이 있으면 그대로 따라 주어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계미년(1583, 선조16) 가을에 임기가 만료되어 부호군 겸 우림위장(副護軍兼羽林衛將)에 제수되었다. 대독관(對讀官)으로 심우정(沈友正)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함께 시험을 관장한 재상들이 응시생을 합격시킬 때 대부분 공에게 의견을 물어 결정하였다. 겨울에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고 곧 다시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 당시는 북쪽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국가에 일이 많을 때였다. 본도는 북쪽 세 도와 경계가 서로 맞닿아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으므로 전후에 걸쳐 장병들의 왕래가 줄을 지었고 영남에서 북쪽으로 이주해 가는 백성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복잡하였다. 수로와 육로로 곡물을 운송하는 과정에 관아 상호간에 공문이 빈번하게 오갔는데, 공은 거리의 원근이며 각 고을의 빈부를 정밀히 헤아리고 조정하여 적절하게 조처하였다. 풍속을 살피고 백성을 교화시키되 유학(儒學)을 높이고 절의를 숭상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정기적으로 문묘(文廟)를 참배하는 것을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행여 폐한 적이 없었다. 선비를 잘 접대하여 비록 가난한 후학이라 하더라도 일반 사람과는 달리 보았다.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크고 작은 제향에 관해서는 각 고을을 감독하고 경계시켜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신, 효자, 열녀로서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는 그 자손을 거두어 돌보았고 혹시 생존해 있으면 방문하여 예우하였다. 농사와 길쌈을 격려하고 고통 겪는 사람을 돌보아 주는 일은 고을 목사를 지낼 때부터 다 각별히 치중하던 정사였는데 본도에 부임해서는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예전부터 영월군(寧越郡)에 왕위를 물려주고 노산군(魯山君)에 봉해진 분의 무덤이 있었는데, 잡초 속에 매몰되어 묵혀진 지 거의 100년이 지났다. 그래서 일찍이 누가 임금에게 무덤을 수축하자고 계청한 적이 있었으나 실제 시행할 수 있는 제도를 미처 마련하지 못했고, 또 수년 전에 어떤 감사가 계청하여 제사를 올리고 사당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미비한 점이 있었다. 공은 일단 몸소 그 무덤을 찾아가 참배한 뒤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제반 문제를 모두 점검하여 바로잡고 무덤과 사당을 더 수축하고 꾸몄다.
을유년(1585, 선조18) 봄에 임기가 만료되어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된 뒤 그해 여름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가을에는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19) 여름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 옮겼다가 곧 호조 참의에 제수되고 가을에는 좌부승지에 제수되고 겨울에 우승지로 승진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 봄에는 해서(海西) 지역에 흉년이 계속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가에 즐비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그 지역을 구제하는 문제가 시급하여 반드시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필요하였는데, 공을 가선대부로 특별히 승진시켜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공은 발탁이 되자 그 은혜에 감격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그 지역에 부임하자마자 흉년에 백성을 구하는 정치에 정신을 다 쏟아 몸소 음식과 곡물을 제공하는 현장에 드나들며 다방면으로 조처하여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그 당시 모든 적절한 조치를 내릴 때 사안이 큰 것은 역참을 통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소소한 문제는 스스로 결단을 내리되 몸이 지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지닌 역량과 생명을 다 바칠 것만 생각하였다. 기타 교화를 펴거나 일반적으로 행하는 정사도 모두 앞서 관동에서 했던 대로 하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애쓰다가 우연히 찬바람에 감기가 들어 손발이 마비되고 심장이 크게 상하자 즉시 이듬해의 구황 절목(救荒節目)을 조목별로 계문(啓聞)하고 아울러 병을 이유로 파직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그 사직소가 미처 조정에 도착하기 전에 조정에서 공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벌써 아뢰어 체직하고 첨지중추부사로 제수하였다. 10월에 들것에 실려 서울 집으로 돌아온 뒤 서천군(西川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무자년(1588, 선조21) 4월에 병세가 약간 차도가 있자 비로소 벼슬에 제수되었다. 7월에 입시하였을 때 임금이 이르기를, “이전에 경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었다. 이제는 나았으므로 기쁘기 그지없다.” 하고, 아울러 침과 약을 어떻게 써서 치료했느냐고 자세히 묻고 재삼 위문하는데 그 말씀이 애절하였으므로 그 자리에 함께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7월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고 9월에는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앉아 있던 의자가 어쩌다 넘어지는 통에 땅바닥에 쓰러져 상처를 입고 본직과 겸직을 다 사양하여 체직되었으며, 다만 서천군의 신분으로 한가로이 있으며 몸을 돌보았다. 겨울에, 상이 인견(引見)하여 입시한 자리에서 일본국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는 것이 옳겠는가의 여부를 묻고 아울러 《공신등록(功臣謄錄)》을 편수할 것을 명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23) 1월에 충훈부(忠勳府)의 《공신등록》을 편수하여 올렸다. 7월에 동지돈녕부사 겸 오위장(同知敦寧府事兼五衛將)에 제수되고, 8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이달 공신 회맹(功臣會盟)에 재차 참여하였다. 9월에는 대사성에서 체직되었다가 곧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0월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 1월에 오위장을 겸하고 또 조사위장(曹司衛將)을 겸했으며 조금 있다가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3월에 동지돈녕부사로 옮겼다가 7월에는 대사성에 제수되고 11월에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옮겼다.
임진년(1592, 선조25) 2월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4월에 왜노(倭奴)가 전 국력을 기울여 침입하여 각 고을을 연이어 함몰시킴으로써 상황이 위급해지자 조정에서 공이 군무(軍務)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체직하고 형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그달 29일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공이 호종(扈從)하여 함께 떠났다. 5월, 평양(平壤) 행재소(行在所)에 있는데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어 평양 지방 12명소(名所)의 신에게 제향을 지낼 것을 청하였다. 또 사헌부와 함께 상에게, 몸소 호종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진영으로 달려가 장수들에게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도록 당부하라고 청하였으며,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때가 더 늦기 전에 나라를 되찾자고 하였다. 7월, 의주(義州)에 있었는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8월에는 청병 진주사(請兵陳奏使)에 차임되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옮겨 제수되었다. 공은 진주사의 명을 받자 단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결연한 각오로 당장 길을 떠났다. 공이 떠나기에 앞서 하직할 때 상이 가까이 접견하고 다정하게 유시한 뒤에 아울러 말씀하기를, “경은 잘 다녀오시오. 경이 지금 부여받은 임무가 극히 중대하니 부디 힘쓰기 바라오. 나라가 망하느냐 보전되느냐 하는 문제가 경의 이번 걸음에 달려 있는데, 일이 만약 성사된다면 이는 경의 공이오. 각별히 유념하오.” 하는 등 거듭거듭 당부하였으니, 당부하며 기대를 건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였다. 공은 감격에 겨워 비장한 각오로 출발하여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조금도 멈추지 않고 말을 달렸다.
북경(北京)에 들어가 황제에게 주문(奏文)을 올린 결과 황제가 “병부(兵部)는 이 글을 보고 빨리 의견을 말하라.”라고 명하였다. 공은 즉시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사신을 위해 베풀어 주는 상마연(上馬宴)과 하마연(下馬宴)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고 아울러 빨리 군대를 출동하여 우리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병부에 글을 올려 그 뜻을 더욱 간절하게 개진하는 한편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찾아가 슬픔을 가누지 못해 통곡하며 호소하자, 상서가 감격하여 그 역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주위 사람에게 말하기를, “구원병을 요청하는 조선 사신이 지성으로 애통해 마지않으니, 진(秦)나라 대궐 뜰에서 7일 동안 통곡하며 구원병을 요청했던 초(楚)나라 신포서(申包胥)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 당시 여러 과도관(科道官)이 대부분 이론을 제기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국 지역만 방어하고 조선은 구제할 필요가 없다.” 하기도 하고, 혹은 “군대를 많이 내보내면 반드시 중국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 하는 등 많은 사람의 주장이 서로 엇갈려 가닥이 잡히지 않았는데, 오직 석 상서 혼자서만 구원병을 출동할 것을 시종일관 강력히 주장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복제(覆題)에,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동정(東征)하겠다는 말까지 하는 등 의분에 겨워 말이 올바르고 의기가 씩씩하였는데, 이는 공의 지극한 정성에 감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황제가 즉시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에게 동국으로 달려가 군대를 점검하게 하는 한편, 우선 1만 7600명의 군사를 출동시킨 뒤에 곧 대군(大軍)을 이동하여 장수를 정해 뒤따라 파견하였으니, 이는 다 석 상서의 제본(題本)에서 건의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 공은 또 병부에 청원하여 은자(銀子) 3000냥을 받아 궁전(弓箭)과 화기(火器), 화약(火藥)을 사서 20량의 수레에 싣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달려와 복명하며 그간의 사정을 낱낱이 아뢰자, 상이 기뻐하며 극진히 위로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 1월에 흠차 제독총병관(欽差提督摠兵管) 영하후(寧夏侯) 이여송(李如松)이 남북 관군(官軍)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와 평양 성문 밖에 진을 치고 앞장서서 직접 전투를 독려하여 성을 점거하고 있던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왜적 1285명의 머리를 베고 말 2985필과 무기 452건을 노획하였으며, 적에게 사로잡힌 우리나라 남녀 1015명을 구출하였다.
조정에 그 첩보가 들어오자 상이 즉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이번에 적을 토벌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에 의한 것인데 명나라 군대가 출동한 것은 정곤수의 간청에 의한 것이다. 정곤수에게 장차 큰 상을 내릴 생각인데 우선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려 주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 서장관(書狀官)은 당상관으로 올리고, 데리고 갔던 역관도 사신의 의견을 물어 상을 주도록 하라.” 하고, 즉시 숭정대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올려 제수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자 상이 답하기를, “이전에 요동(遼東)에 여러 번 구원병을 요청하여 군대를 출동하겠다는 허락을 받아내기는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통일되지 않아 즉시 나와서 구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조정에 직접 호소하여 황제의 재가를 얻음으로써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과연 누가 한 일인가. 경의 공이 으뜸이니 사양해서는 안 된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공이 관북(關北)에 머물러 있는 적의 토벌을 지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상소하여 병력을 나누어 북쪽 지방을 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지극하다. 이는 정말 내 생각과 같다. 반드시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고, 그 상소문을 비변사에 내렸다. 공은 또 옛 도성을 수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상소하여 개성(開城)의 적을 공격하여 되찾을 대책을 극력 개진하자,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 경의 충성이 이렇게까지 지극하다는 것을 알았다. 반드시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이 당시 흠차 경략방왜(欽差經略防倭)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이 나와 압록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공이 영위사(迎慰使)에 차임되어 강을 건너가 그를 만나 위로하고 돌아왔다. 또 평양에 사명을 받들고 가서 도독(都督) 이여송과 부총병(副摠兵) 장세작(張世爵)에게 글월을 올려 도성의 왜적을 진격하는 조치를 빨리 내릴 것을 청하고 다섯 가지 대책을 조목별로 개진하였으며, 또 사명을 받들고 경략 송응창과 흠차 경략어왜(欽差經略禦倭)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에게 자문(咨文)을 올렸다. 6월에 제독 이여송의 접반사(接伴使)에 차임되어 도성에 갔다가 제독의 분부로 인해 곧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공주(公州)를 경유하여 전주(全州)까지 갔다. 이는 제독이 장차 남쪽을 정벌하기 위해 공에게 먼저 내려가 군수 물자를 정리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제독이 용인(龍仁)까지 왔다가 군대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갔다. 공도 뒤따라 돌아오다가 익산(益山)에 이르러 학질을 앓아 그곳에서 머물러 조리하였다.
9월에 상이 이조(吏曹)에 전교하기를, “당초 구원병을 요청할 때 요동에만 고하여 중국 조정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았으므로 매우 한심했었는데, 정곤수가 사신으로 황제에게 사정을 진달하고 지성으로 사명을 수행하였다. 오늘 나라를 수복한 공은 오로지 정곤수에게 있다. 앞서 자급을 올려 주긴 했으나 이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되니 정1품의 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행 판돈녕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서천군(西川君)에 봉해짐으로써 삼공(三公)의 품계와 같게 되었다.
또 정원에 전교하기를, “국사가 망가지자 조정 신하들이 너나없이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가느라 어떤 자는 처음부터 나를 따르지 않았고 어떤 자는 도중에 핑곗거리를 만들어 도망가는 등,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차마 다 말할 수 없다. 오직 몇몇 신하만은 부모와 처자를 돌아보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며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호종하였으니, 이는 충성과 절의가 철저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용만(龍灣 의주(義州))은 머나먼 변방으로 사람들이 귀신이 출몰하는 곳으로 여기니, 나를 따라 이곳까지 온 자는 철석 같은 심장을 지녔다 할 수 있다. 나라가 수복된 것은 실로 내가 용만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니, 이들 몇몇 신하의 공은 황하수가 마르고 태산이 평지가 되는 그날까지도 보답하기 어렵다. 나를 호종한 신하들에게 본도(本道)의 둔전(屯田)을 우선 넉넉히 떼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 당시 임금의 행차가 해주(海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도성으로 돌아왔다. 공은 남쪽 지방에서 병을 무릅쓰고 조정으로 달려와 상소하여 새로 제수된 정1품의 품계를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수복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병력에 의해서인데 명나라 병력이 온 것은 실로 경이 황제에게 진정하고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비록 요동에 요청하였으나 출병을 허락하지 않았고 경이 사신으로 나간 뒤에 비로소 장수를 명하여 출병하였으니, 오늘의 공은 오로지 경에게 있다. 보국숭록대부에 가자한 것 정도로 어찌 충분히 보답했다 할 수 있겠는가. 경은 마음을 편히 가지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1월에 판의금부사를 겸하고 안집제점도감 사무(安集提點都監事務)에 차임되었다. 윤달에 조사(詔使)인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사헌(司憲)의 원접사(遠接使)에 차임되어 그를 의주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갑오년(1594, 선조27) 1월에 복명하였다. 10월에 문과 시험을 담당하여 유담(柳潭) 등 10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12월에는 명관(命官)으로 무과(武科) 전시(殿試)를 담당하여 90인을 뽑았다.
을미년(1595, 선조28) 여름에 의금부의 직함을 사양하여 체직되었다가 6월에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차임되었다.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했을 때, 종묘와 능침(陵寢)에서 사용하는 제기가 투박하고 평범하여 온당치 못하다는 뜻으로 입계(入啓)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선왕의 제향에 쓰는 그릇도 정결하게 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전하의 수라상에 사용하는 그릇도 마땅히 검소해야 합니다. 은기(銀器)와 같은 그릇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9월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이 본디 조정의 의식에 관해 능숙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다 조정의 크고 작은 의식을 반드시 예법에 맞게 거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공은, 자신의 품계는 정1품이지만 관직이 정2품이므로 삼공(三公)과 같은 품계에 있으면서 자리를 동서벽(東西壁)에 낮추어 앉게 되니 체면이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에서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이때부터 규정이 만들어져 정1품 품계에 있는 관원은 으레 정2품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다. 11월에 명관(命官)으로 무과 전시를 담당하여 600여 인을 뽑았다.
병신년(1596, 선조29) 1월에 도총관(都摠管),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 접대도감 당상(接待都監堂上)을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5월에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공식 석상에서의 좌차(坐次)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정유년(1597) 9월에 판의금부사를 겸하고 조금 뒤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가 상차(上箚)하여, 몸이 쇠약하고 병이 깊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을 개진하여 마침내 체직되었다. 이 당시 칙서를 내린 황제의 은혜에 반드시 사례해야 하고 우리나라가 일본과 결탁하여 중국을 침략하려 한다는 명나라의 의혹을 반드시 해명해야 할 처지에 놓였는데, 공이 사은 겸 변무 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에 차임되어 영중추부사의 임시 직함을 제수받았다. 12월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에 들어가 다각도로 교섭하고 변론하여 황제의 의심이 깨끗이 풀렸다. 무술년(1598, 선조31) 6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복명하였다. 임금이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룬 것을 가상히 여겨 공의 자제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그 공로에 보답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는데, 이는 공의 품계가 이미 높아 더 올려 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기해년(1599, 선조32) 가을에 계청하기를, “소신의 생부와 생모의 무덤이 성주(星州)에 있는데 지난 을유년(1585, 선조18) 가을에 임금의 은전으로 휴가를 받아 성묘한 뒤로 15년이 지났습니다. 정해년(1587)에는 신이 황해 감사로 재직하던 중 풍병이 들었고 경인년(1590)에는 신이 서울에 있었으나 전염병에 걸렸으며, 그동안 또 지방 감사와 대간이 잇달아 진계(陳啓)하여 사대부에 대해서는 고향의 선영을 찾아가 성묘하지 못하게 한 일로 인하여 이제까지 미루어 왔습니다. 지난 임진년(1592)의 변란 때 적병이 무덤 아래 주둔하였으니 묘역의 수목이 잘리고 불타는 재앙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천리 타향에서 애타는 심정이 한량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적병이 물러가 길이 뚫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고향에 돌아가 성묘하도록 특별히 허락하시어 난리를 치르고 난 자손이 부모의 무덤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주소서. 절박한 충정을 가누지 못해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이 당시 조정 사대부가 성묘하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이 특별히 자신의 처지를 개진하고 계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공은 일단 고향에 돌아와 선영을 참배하게 되자, 내외 선대의 여러 무덤과 난리 때 죽은 친지들의 무덤까지 두루 살펴보았으며, 시골서 사는 사우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생사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동안 그리웠던 정을 한껏 나누고 두 달이 지나서야 돌아갔다.
경자년(1600, 선조33) 여름에 접대도감 당상(接待都監堂上)으로서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기절했다가 겨우 살아났다. 그 뒤에 곧 유릉(裕陵 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국상을 만나 병을 무릅쓰고 달려가 곡하였는데, 성복(成服)하기 전까지 대궐에 나아가 곡하지 않은 날이 없어 이로 인해 다친 상처가 점점 더 심해졌다.
신축년(1601, 선조34) 여름 녹훈(錄勳)하라는 임금의 명이 내렸다. 이때 전교하기를, “영상 이항복(李恒福)은 도승지로 나를 따라 내 곁에서 떨어져 있지 않았고 또 병조 판서가 되어 난리를 치르는 동안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으며, 정곤수는 명나라 병력을 청하여 나오게 하였다. 나는 경 두 사람은 마땅히 원훈(元勳)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경들은 원훈으로서 기타 인물들의 공을 자세히 살펴 등급을 매기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임진년 가을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행을 보낼 때 신이 사신에 차임되긴 하였으나 그 이전에 이미 자문(咨文)과 게본(揭本)으로 계속 요청하였고 그 내용이 빠짐없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대국을 섬기는 우리 성상의 지성이 마침내 황제를 감동시켜 군대를 출동하여 구원하겠다는 성지(聖旨)가 이미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신이 사신으로 간 것은 그와 같은 일이 다 이루어진 맨 나중의 일로, 진주(陳奏)하는 문서 한 통을 가지고 가서 올린 것 이외에 힘을 크게 들여 조처한 일이 없어 털끝만큼도 문서에 기록할 만한 공이 없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어제 내리신 전교에 신을 원훈의 반열에 올리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 명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운 나머지 몸 둘 곳을 몰라 식은땀이 등을 적십니다. 명나라 병력을 요청하여 얻어온 것은 사실 신의 공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높은 품계로 승진하여 분수를 벗어난 정도가 심한데 이제 원훈이 된다면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더욱 깊을 것이니, 어찌 감히 얼굴을 버젓이 들고 다른 사람들의 공에 대한 높낮이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절박한 사정을 굽어 헤아리시어 특별히 성명(成命)을 거두심으로써 신의 분수에 편케 해 주소서. 황공한 심정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이전에 비록 요동 등지에 이자(移咨)하긴 하였으나 비밀 문서를 들고 명나라에 가서 호소하여 결국 요청한 것을 얻어냄으로써 대군을 출동하여 구원해 준 황제의 은혜를 특별히 입었으니, 이것이 과연 누구의 공인가.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왜적이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우리나라를 침략해 와서 백만 대군이라 소문난 군사로 진영을 수천 리에 잇따라 세우니 7도(道)가 모두 함락되어 남은 곳이라고는 오직 순안(順安)의 서쪽에 있는 몇 고을뿐이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가 개벽한 이래 없었던 큰 변란이다. 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중국 천하를 넘보아 우리에게 길을 빌리자고 요구하였는데, 병력이 우리의 만 배나 되므로 우리나라를 하찮게 보고 지푸라기를 줍듯 쉽게 수중에 넣었다. 처음 그의 생각은, 우리나라를 그들의 군현(郡縣)으로 만든 다음 우리나라 사람을 길잡이로 삼아 승승장구 몰아가서 관외(關外)가 일단 격파되면 천하가 반드시 흔들릴 것으로 여겼으니, 그 흉모와 비계(秘計)로 보면 적 가운데 간웅(姦雄)이라 이를 만하다. 또 유언비어를 만들어 ‘조선에서 함께 모의하여 길을 열어 주었다.’라느니, 혹은 ‘나귀를 공물로 바쳐 신복(臣服)하였다.’라느니 하여, 중국의 시각을 현혹시켰다. 그들이 꾀한 음모는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갑자기 침략해 들어오자 우리의 힘으로는 막아 낼 수 없었다. 다행히 중국 땅에 가까운 곳에까지 가서 일변 우리의 절박한 심정을 밝히고 일변 구원병을 요청하자, 황제가 굽어살펴 대군을 내보내 적을 정벌함으로써 이 나라 수천 리 강토가 수복되었으니, 이 또한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 일찍이 없었던 큰 공이다. 기구하고 험난한 상황에서 이리저리 허겁지겁 떠돌며 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고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는 명나라 병력을 청하여 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함으로써 종사(宗社)가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이는 누가 한 일인가? 어찌 호종한 여러 신하들의 공이 아니겠는가. 이는 나 한 사람의 사적인 말이 아니라, 실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눈으로 보고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 어느 것이 국가를 위한 공이 아니겠는가마는 이 공이 가장 크고, 어느 것이 왕가(王家)에 충성을 바친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오직 이 호종한 신하들의 충성이야말로 세상에 일찍이 없었다. 그 공신호(功臣號)를 전례(前例) 이외에 4, 5자를 더 넣어 다른 공신과 구별하되 나라를 회복했다는 뜻을 추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경들은 의리상 사양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이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아뢰기를, “예로부터 중국에서 속국이 난리를 만났을 때 대군을 내보내 시종여일하게 구원해 준 일이 오늘날 명나라가 우리나라에 한 것처럼 한 적은 없었으니, 이는 널리 보살펴 준 명나라와 같은 은혜가 일찍이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속국이 중국을 위해 대의에 입각하여 외부의 침략자를 배격하면서 차라리 우리가 먼저 전쟁을 치르는 화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충성을 표시한 적은 있었으나,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길을 빌리겠다는 요청을 물리쳐 죽음을 각오하고 뜻이 흔들리지 않기를 오늘날 우리나라가 중국을 위해 그런 것처럼 한 적은 없었으니, 이는 한마음으로 대국을 섬기는 성상과 같은 정성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가 이처럼 하였기 때문에 오늘이 있게 된 것으로, 모두가 성상의 힘이니, 신들이야 무슨 역할을 하였겠습니까. 현재 왜적이 겨우 물러가고 명나라에서 포상하는 은전이 아직 전하에게 미치지 않았는데, 신들이 먼저 훈봉(勳封)을 받고 거기에 나라를 수복하였다는 ‘회복(恢復)’이라는 호칭까지 보탤 수 있겠습니까. 이미 나라를 수복하는 큰 계책에 작은 도움도 끼친 일이 없다면 10자에 달하는 기본 공신호 이외에 몇 자를 추가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신들은 결코 감히 무례하게 그 조치를 받아들여 마치 정말로 이러한 공이 있는 것처럼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하였다.
이때 예조 판서 유근(柳根)이 올린 상소에, 신하들의 공을 보답하는 일은 명나라에서 포상이 내린 뒤에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공이 또 이로 인해 간절히 그 조치를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그래도 허락하지 않다가 두 번 세 번 한사코 사양한 뒤에야 비로소 따랐다.
임인년(1602, 선조35) 여름에 또 녹훈(錄勳)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또 김협(金)이라는 자가 상소하여 굳이 녹훈할 것이 없다고 말하자, 공이 이로 인해 더 극력 사양하였으나 상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공신을 심사하여 서열을 정하기 위한 기구가 설치되었다.
공은 이때 7월부터 병이 들어 여러 달을 공신도감(功臣都監)에 나가지 못하자, 상이 공의 병세가 차도가 있을 때까지 기구의 운용을 보류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상차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하찮은 신의 병세가 지난 7월부터 여러 달 동안 차도가 없는 데다가 8월 중순 이후로는 오른쪽 무릎에 종기가 나서 밤낮으로 쑤시고 아파서 음식까지 전폐한 지 지금 40여 일입니다. 신의 병세가 이처럼 오래 끌어 앞으로 나아질 가망이 까마득한 지금, 삼가 듣건대 공신도감이 신의 병세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을 진행하겠다는 뜻으로 입계하여 윤허가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공신의 서열을 정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그런데 신의 병으로 인해 그 일을 오래 지체하게 되었으니, 황공하고 불안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서열을 정할 것을 명하여 시일을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정곤수의 병세는 단시일에 차도가 있을 일이 아닙니다. 현재 별 탈이 없는 훈신(勳臣)으로 하여금 속히 심사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에 대한 의견을 도감에 물었다. 도감에서 아뢰기를, “비록 사세가 다급하기는 하지만 원훈(元勳) 한 사람이 마침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데 신들이 어찌 감히 성급하게 심사하여 결정하겠다고 스스로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공훈의 서열을 정하여 상을 내리는 일은 반드시 원훈과 함께 의논하여 심사해서 결정해야 한다. 정곤수가 비록 병세가 위독하다고는 하나 숨이 아직 붙어 있는데, 내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 먼저 심사하여 정할 것을 명한다면 이는 정곤수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으로 간주하는 꼴이다. 이럴 경우 일의 체모가 온당치 못하니 차라리 시일을 지체할지언정 구차하게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하니, 공이 그와 같은 상의 명을 듣고 감격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공은 매우 오랫동안 앓기는 하였지만 정신과 얼굴은 더욱 맑았다.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고 남들과 변함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누가 혹시 일을 조금 줄이라고 청하면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힘들다고 생각지 않으며 병중의 괴로운 심정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공의 병세가 더 위중해져 미음과 약을 물리치고 물만 마셨다. 상이 내의(內醫) 이종영(李種榮)을 보내 문병하고 또 약을 조제하여 내려보낼 것을 명하였으며, 또 대내(大內)에서 측근의 신하들에게 서천군의 병세가 지금은 어떠하냐고 묻는 등 염려해 마지않았다.
공은 별세하기 며칠 전에 경상 감사가 올린 장계에 별이 떨어진 이변이 일어났다고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여러 날이 지나도록 울적해하였다. 별세하던 날 아침에 재종제(再從弟) 구(逑)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고, 길이 한탄해 마지않으며 가사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았다. 종이와 붓을 가져 오라 명하여 시 몇 구를 써서 곁에 모시고 있던 자제들에게 보이고, 또 어린 시절 처음 글을 배울 때 읽었던 책을 가져다가 몇 줄을 읽은 뒤에 누운 자리 곁에 놓았으며 조금 뒤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는 11월 14일로, 향년 65세였다. 원근 각지에서 서로 알던 사람이건 모르던 사람이건 간에 모두 한탄하고 애석해하며 덕 있는 인물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크게 애도하여 전교하기를, “원훈이 갑자기 서거하니 놀랍고 슬프기 그지없다. 게다가 미처 공신호를 받기 전에 먼저 죽어 더욱 애통하다.” 하고, 즉시 예법에 따라 부의를 보내고 널도 내려 줄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나라에서 예장(禮葬)을 해 주고 이틀 동안 조정의 정사를 일시 폐할 것을 명하는 한편 예조 좌랑 이순경(李順慶)에게 명하여 제문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듬해 2월 9일 장단부(長湍府) 임진(臨津) 폐현(廢縣)의 진동면(津東面) 백목곡(柏木谷) 후동(後洞) 감산(坎山 남향) 자리에 장사 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전부인(前夫人) 하동 정씨(河東鄭氏)와 합부(合祔)하였다.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 유대일(兪大逸)과 내자시 봉사(內資寺奉事) 이박(李煿)이 장례에 참관하고, 관상감 정(觀象監正) 송륜(宋崘)이 묏자리를 정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윤형언(尹衡彦)이 신주를 썼는데, 이들은 다 상의 명을 받들고 나온 것이다. 성주(聖主)가 공의 공로에 보답한 것으로 살아생전이나 죽은 뒤에 내려 준 영광이 지극하다 할 만하다. 그 뒤 3년이 지난 갑진년(1604, 선조37) 7월 일에 1등으로 녹훈되고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총명함이 뛰어났다. 6세 때 스승에게 글을 배웠는데 한 번 가르치면 즉시 알아들어 7, 8세 때 이미 글 뜻을 알았으며 10세가 갓 넘었을 때 고금의 치란(治亂)을 대강 알았다. 본생(本生) 참판(參判) 부군은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는 평판이 있는데, 항상 하는 말이 “이 아이는 후일에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공의 양부(養父)인 청원공(淸原公)이 언제나 슬하에 데리고 있으면서 친구 간에 오가는 서찰을 모두 공에게 대신 초안을 잡게 하였는데, 붓을 잡으면 일사천리로 써 내려가 잠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평소에 장난치며 놀 때도 항상 문장 짓는 일에 마음을 두어 15세 이전에 이미 도성의 유수한 동류들과 두루 사귀었다.
공은 인자하고 너그러워 화기가 넘치고 공평하였다. 효우(孝友)는 천성에 근본을 두었고 충성은 자연에서 우러나왔으며, 진실한 마음이 언어와 얼굴에 역력하게 나타나고 온화한 기색이 표정과 웃음 속에 숨김없이 드러났다. 사람을 대할 적에 서로 간에 간격이 없어 앞뒤를 재는 계략이나 객기를 부리는 마음이 가슴속에 들어 있지 않았으며, 소소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날카롭게 내세우지 않아 논의가 혼후하면서도 명백하고 처사가 면밀하면서도 진지하였다. 후사로 들어가 모신 부모에게도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청원공의 성품이 준엄하여 관대한 면이 적었으나 여러모로 잘 받들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힘썼고 온화한 기색과 부드러운 얼굴 표정이 행여 미진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대부인(大夫人)을 받들어 모실 때는 만년에 음식이며 기거를 풍족하게 봉양하되 반드시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서 사랑과 공경을 동시에 다 독실히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본생 부군(府君)에 대하여는 부군을 일찍 여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으며, 본생 대부인을 섬길 때는 서로 멀리 헤어져 있는 날이 많은 처지를 깊이 괴로워하였다. 대부인을 찾아뵈러 갈 일이 있을 때는 비록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곁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와 같았다. 서울과 시골집의 상사를 동시에 당했을 때는 두 군데를 뛰어다니며 애통해하여 마지않았으므로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형을 섬기고 아우를 보살피는 면에서도 우애가 깊고 두터웠다. 형 참판공이 후사가 없자 아들 직(㮨)을 명하여 후사가 되게 하였으며 홀로 된 형수를 섬기되 각별히 공경하였다.
양부모의 집안에 속량(贖良)이 되지 않은 아우와 누이가 서너 명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애정을 다해 돌보아 그 대가를 치르고 다 양민으로 만들었다. 그 주인들이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나중에는 모두 공의 후한 덕에 감동하여 대가를 받지 않고 면천(免賤)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명나라에 들어가 변무(辨誣)하고 돌아온 공로로 인해 임금이 공의 자제에게 벼슬을 제수할 것을 명하였을 때 공이 자신의 아들인 저(櫧)를 놓아두고 조카 장(樟)을 천거하여 제수받게 하였다. 그런데 저가 장의 형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들과 조카를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이 간주한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형을 놓아두고 아우를 먼저 생각해 주는 것은 과연 본심을 속이는 혐의가 없지 않겠는가.” 하니, 말하기를, “나도 어찌 형을 먼저 생각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다만 우리 집은 맏아들이 이미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내 아우의 자식은 아직 평민이다. 이 때문에 내가 마음에 편치 못하여 그 형제의 순서를 따지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몸가짐을 청렴하게 하여 살림살이가 매우 빈한했으나 옛 도를 좋아하고 예법을 지킨 나머지 초상을 치르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오로지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길흉사에 의문이 있을 경우에는 대부분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에게 여쭈어 결정하였다. 제사 때 올리는 제물에 있어서는 혹시 수중에 들어온 것이 있을 경우 반드시 미리 따로 정결하게 보관해 두었다가 제사 지내는 날 꺼내 정성껏 올림으로써 애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였다. 조상의 무덤 가운데 혹시 제향을 지내지 않거나 그 위치를 모르는 곳이 있기도 하였는데, 공이 빠짐없이 수소문하여 알아냈고 찾아가 참배한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중에 묘표나 묘갈(墓碣)이 없는 곳은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석물을 준비하여 직접 비문의 음기(陰記)를 지었는데, 간혹 미처 글을 새겨 세우지 못함으로써 못다 이룬 유감으로 남은 곳도 있었다.
백부들이며 종조부들을 섬길 때는 사랑하고 흠모하며 공경하고 삼가기를 친아버지와 친조부처럼 하였으며, 그들이 죽어 장사를 치를 적에도 있는 힘껏 도와줌으로써 그 정성을 다하였다. 혹시 이미 세상을 떠나 미처 섬기지 못한 친족이 있을 경우에도 반드시 추모하여 그 행적을 세상에 드러내고 무덤을 수축하는 등의 일에 관해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비록 대수가 먼 조상이라 하더라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외족과 당숙이며 당형제들에 있어서도 다 같이 고루 친밀하게 사랑하여 그들 중에 혹시 집이 없어 안주할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이 있으면 집으로 맞아들여 여러 해를 서로 의지하고 살면서 화목한 의리를 조금도 변치 않았다.
양가(養家)의 외가 친족에 대해서는 비록 친족의 정분이 멀기는 하였으나 거두어 돌보고 감싸 주기를 혈속과 다름없이 하였다. 항상 양가의 외가댁이 후사가 끊긴 것을 염려하여 양자를 들여오려고 시도하였으나 원근 간에 동성(同姓) 친족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이 몸소 제향을 받들어 한평생 태만히 하지 않았는데, 공이 항상 말하기를, “관계가 먼 저 외족이 나에게는 그다지 가깝지 않으나 우리 선대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면 똑같은 자손이다. 내가 어찌 감히 소홀히 하여 선조의 사랑을 손상시키고 조상을 존경하는 나의 본심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소원한 친족이라도 가까운 친척이나 다름없이 보아 아무리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이라 해도 곡진히 돌보아 은정을 베풀었다.
공은 벼슬하기 이전부터 친족을 후히 대하고 남을 구제하는 마음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인식되어 신분의 귀천이나 촌수의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공의 집으로 모여들었고, 억울한 일을 당해 밝히고 싶은 자들도 반드시 다 찾아왔다. 그리하여 이른 새벽부터 해가 저물도록 그들을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느라 몸이 지치곤 하였다. 정오가 되도록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을 경황이 없으며 밥도 제때에 먹지 못하는 상황은 여느 사람이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공은 그저 태연할 뿐 게으른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그렇게 하려고 억지로 노력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공이 고향집에서 태어나 도성에서 벼슬하였으므로 고향 친지의 자제들과 선대 외족으로서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도성에 들어오면 반드시 먼저 공을 찾아갔다. 공은 이들을 모두 반갑게 영접하여, 혹은 한동안 머물러 살게 하기도 하고 혹은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며 혹은 생활비를 보태 주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살림이 가난하여 그와 같은 접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돌보고픈 충정을 표시하며 정성을 다했으므로 사람들의 기대하는 마음이 모두 흡족하게 충족되어 자기 부형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겼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보고 비웃기도 하고 혹은 야윈 말에 부서진 갓을 쓰고 마을에서 서성거리는 자를 보면 반드시 “저자는 서천군 손님이다.”라고 말했는데, 공은 그런 말을 들을 때도 태연하여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과 사귈 때 궁달(窮達)이나 생사에 따라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도의로써 절차탁마하는 정분이 벼슬하기 이전과 차이가 없었으며, 그들의 불쌍한 어린 자식을 거두어 돌보아 마치 친자식이나 조카처럼 여겼다.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좋아하여 칭찬하고 흠모하였으며 혹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의 본심을 헤아려 용서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과실에 대해서 반드시 측은한 심정으로 감싸 주어 항상 그 잘못을 덮어 주는 것처럼 하였다. 어쩌다가 자제들이 남의 좋지 않은 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좋아하지 않으며 제재하기를, “남의 악을 말하고 남의 사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덕 있는 자의 일이 아니다.” 하였다.
어렵고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마치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괴로워하고 불쌍히 여겨 다방면으로 구제해 주되 반드시 심력을 다하였으며, 무리하게 횡포를 가해 오거나 모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이해하여 흘려 넘기고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았다. 공이 남들과 어울리기를 이와 같이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반드시 공을 성심으로 사랑하였고 거짓으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서리(胥吏)나 하인까지도 다 공을 좋아하였으므로 비록 사납고 교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히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공은 뭇사람을 두루 사랑하고 후하게 대하면서도 덕이 있는 자, 나이가 많은 자, 상복을 입은 자를 보면 또 반드시 더욱 공경하고 예우하였다. 공은 물건에 대해 그것을 이용할 때 반드시 아끼고 절약하여 항상 말하기를, “물건은 하늘이 낸 것이니 어찌 감히 함부로 낭비할 수 있겠는가.” 하며, 비록 맹물이나 잡초처럼 흔한 것이라도 함부로 쏟아 버리거나 짓밟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큰길을 걸어갈 때는 반드시 한쪽 갓길로 가며 말하기를, “길 중앙은 임금의 행차가 지나가는 곳이다.” 하였다. 남모르는 미덕으로서 글로 쓸 만한 일들이 사실 많지만 잡다한 행실을 낱낱이 다 쓸 수가 없다.
공은 어릴 적에 일정한 스승이 없이 여러 사람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므로 은혜를 받아 고맙게 여기는 정도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모두 성의로써 공경히 섬겼으며, 오랫동안 학업을 닦은 선생에 대해서는 더욱 정성을 다해 끝까지 유감없이 섬겼다.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의 문하에 종유하여 《심경(心經)》을 배워 마음을 다스리는 성현의 큰 방도를 들었다. 그리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법에 관해 묻자, 선생이 가르쳐 주기를, “《논어(論語)》 가운데 ‘충신을 위주로 한다.〔主忠信〕’라는 세 자가 가장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절실하고 그 장(章) 위아래의 내용도 다 배우는 자가 마땅히 힘을 경주해야 할 부분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우리나라에 도학을 주창하는 스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생 동안 그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하여 감히 잊어버리지 않았다. 선생의 상을 당했을 때는 천리 거리를 멀다 않고 찾아가 곡하고 제사를 올렸는가 하면, 한평생 존경하고 사모하기를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다음으로 하였다. 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도성에 들어왔을 때도 여러 번 찾아가 뵈었는데, 흠모하면서 말하기를, “선생은 천길 높이 우뚝 선 인물이시다.” 하였다.
공은 두 번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부임하고 두 번 감사로 재직하였는데, 어질고 은혜로운 정사가 백성들의 가슴에 깊이 박혀 그 두 고을과 두 도 사람들이 이제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판서 윤국형(尹國馨)이 일찍이 암행 어사로 상주(尙州)에 이르러 민간 마을을 드나들며 수령의 정치를 탐문했는데, 이때는 공이 떠나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로, 궁벽한 산골의 우매한 백성이 모두 공을 그리워하며 말하기를, “전임 영공(令公)의 깊은 사랑을 베푼 정사를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윤공이 다시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고을 사류와 백성을 자주 만났는데, 공에 대해 언급하게 되면 반드시 다 말하기를, “어진 목사였으나 악을 다스리는 데에는 용서가 없었습니다. 비록 조금이라도 억울한 실정을 밝히지 못할까 염려하여 자세히 묻고 또 물었으나, 결국 범죄 사실이 규명된 뒤에는 반드시 법의 적용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며 크게 인정을 받았고 임금도 공의 본심을 가상히 여겨 각별히 사랑하였다. 언젠가 경연 석상에서 강론이 끝난 뒤에 뭇 신하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인물의 장단점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공은 반드시 그 장점부터 먼저 말하였다. 그리고 상에게 아뢰기를, “일찍이 어떤 사람이 밭 주위를 지나가다가 소 두 마리에다 멍에를 얹고 쟁기질하는 자를 보고 묻기를, ‘네가 부리는 소 두 마리 중에 밭을 가는 힘이 어느 소가 더 센가?’ 하니, 쟁기질을 하던 자가 즉시 작업을 멈추고 그 사람 앞으로 달려나와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는 소리로 ‘왼쪽 소가 오른쪽 소보다 낫습니다.’ 하였답니다. 그래서 이상하여 묻기를, ‘소의 우열을 말하는데 왜 쟁기질을 중단하고 내 앞에까지 나와서 속삭이는 소리로 비밀히 말하느냐?’ 하니, ‘동물이 비록 하찮다고는 하나 어찌 그놈이 듣는 곳에서 그의 장단점을 평할 수 있습니까.’ 하자,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감탄하기를, ‘이 밭갈이하는 자의 말이 마땅히 세간에서 남의 장단점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 하였다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하찮기는 하나 큰 일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선종(宣宗)은 경의 말이 매우 좋다고 칭찬하며 다시 더 말을 해 보라고 하여 공이 마침내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정말 후덕한 말이다.” 하였다. 공이 경연에서 이따금 방언이나 속담으로 자연스레 상에게 아뢰어 그것이 수용된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선종의 행차가 의주(義州)로 떠날 적에 갑작스러운 일이라 공은 가족을 놓아두고 혼자 빠져나와 상을 호종하였다. 이때 말 한 필에 종 한 사람을 대동하고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 굳은 마음을 더욱 가다듬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았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명을 받들었을 때는 속도를 갑절로 잡고 밤낮으로 달려갔다. 북경에 도착해서는 처절하고 절박한 슬픔과 고민이 말소리와 얼굴에 역력하여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으니, 곁에서 접해 본 자들이 모두 비통해하며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조선에 이와 같은 사신이 있으니 나라를 수복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였다.
결국 대군을 내보내 구원해 준 황제의 은혜를 입어 서경(西京)에서의 큰 승리를 얻었고 적이 퇴각한 뒤에 임금의 행차가 도성으로 돌아옴으로써 팔방의 백성들이 이전의 생업을 모두 회복하였다. 이는 신하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직분을 그런대로 유감없이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도 공은 줄곧 겸손해하며 일찍이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에 걸쳐 내린 성상의 하교에 칭찬하고 기리는 뜻이 여러 번 있었고 이 땅에 일찍이 없었던 일등 원훈(元勳)으로 삼는다는 명이 특명으로 나왔으며, 공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공신의 서열을 심사하여 정하는 일을 수행하도록 하는 명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공이 별세한 뒤에 애도하며 부의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 줄 때도 다 그 일로 간곡한 뜻을 부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로써도 정말 거룩하다 할 만한데, 더구나 온 조정 공경과 사대부들이 조문하고 곡하면서 슬퍼하는 때나 지방 도처에 길 가는 자들이 탄식하고 칭찬하는 때도 다 그 일로 말거리를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공의 얼굴도 모르는 먼 지방 사람들까지 간혹 공의 무덤을 찾아와 “이곳은 나라를 중흥시킨 공훈이 있는 사람의 무덤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인심이 감동하고 공론이 같은 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공은 자신의 몸을 보양하는 면에 매우 검소하여 밥상에 거친 밥과 나물국 몇 그릇만 놓여 있을 뿐이고 고기를 먹더라도 두 가지를 놓지 않았으며, 철 따라 입는 의복은 그저 맨살만 가릴 뿐 겹으로 껴입는 일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은 부서진 벽이며 휑뎅그렁한 대청마루에 방석도 변변히 갖추지 않았으며, 문간에 있는 종은 몇 사람 안 되고 마구간에는 쓸 만한 말이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처지를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으나 공은 넉넉하게 지냈다.
공은 옛날 중국의 역사서와 우리나라 전고(典故)에 대해 모두 섭렵하여 훤히 꿰뚫었고 기타 소설, 잡기(雜記), 냉화(冷話), 쇄록(瑣錄) 등 잡서까지도 두루 열람하고 기억하였다. 언젠가 권 사문 문해(權斯文文海)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함께 토론한 적이 있었다. 권씨도 사학(史學)에 밝다는 평판을 들은 사람이었으나 토론을 마치고 주위 사람에게, 정 아무개가 바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고 말하였다.
무엇보다 성씨(姓氏)와 보첩(譜牒)에 밝아 경향(京鄕) 사족(士族)의 선대 조상에 관한 이름과 자(字), 진퇴와 사적들을 널리 통달하였다. 혹시 어떤 사람이 찾아와 자기네 조상의 세계(世系)와 내력을 물으면 반드시 하나하나 세어 가며 자세히 설명하되 반드시 “당신의 선조는 어느 지방에서 일어나 어떠어떠한 벼슬을 역임했으며 몇 대조는 세상에 드러나고 몇 대조는 벼슬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마치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것처럼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고 탄복하였다. 일찍이 우리나라 씨족에 관한 책을 편찬하여 각 가문의 자손들이 저마다 상고할 수 있도록 하려 하였으나 만년에 한직으로 물러나 곁에 글씨를 쓸 사람이 없고 또 그 일을 보조하여 완성할 만한 자손도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명문가의 자손들이 모두 불행한 일로 생각하였다.
공은 속마음이 여유롭고 소탈하였는데, 무엇보다 아름다운 산수에 대한 벽이 있고 특별한 흥취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다. 소년 시절 한강 물이 두껍게 얼고 하얀 달이 빛을 뿌릴 때 뜻이 맞는 한두 명의 벗과 강 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느꼈던 상쾌하고 구김 없는 흥취를 늙어서까지 이야기하곤 하였다. 어쩌다 천석(泉石)이 맑고 깔끔하며 산골짝이 한적한 곳을 만나면 언제나 거기에 흥취를 부치고 감상하여 해가 저물도록 돌아갈 줄을 몰랐다. 사는 집이 서울 남산 밑에 있었는데 거기에 경음(慶陰)이라는 당호(堂號)를 붙이고 살았다. 나이가 들어 늙었을 때에도 이따금 잠두봉(蠶頭峯)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마음을 탁 터놓았는데, 소탈하고 한적하여 마치 조정에 벼슬하는 관원의 신분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강원 감사로 있을 적에는, 천하에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금강산(金剛山)이 첫여름과 늦가을이 되면 어느 때보다 황홀하였으므로 공은 그때를 잡아 산기슭에서부터 오솔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되 따르는 종이며 물품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주변 고을에 폐를 끼치지 않았고 여기저기 한적하고 아름다운 곳을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아울러 바다에 인접한 주위 산천의 경치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데 공은 적절히 틈을 내어 두루 둘러봄으로써 울적한 기분을 씻어 내는 한 방편으로 삼기도 하였다.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에 옛날부터 사선정(四仙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이는 곧 생조비(生祖妣)인 김 부인(金夫人)의 외선조인 고려조의 학사(學士) 박숙정(朴淑貞)이 창건한 것인데 폐허로 변하였고, 남아 있는 낡은 초가집은 누추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공은 즉시 본군(本郡)에 새로 짓도록 명하여 그 규모가 매우 아름답게 변했는데, 공이 직접 기문을 지어 벽에 게시하였다. 나중에 서호(西湖) 근처에 적당한 자리를 잡아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한가로이 노년을 보내려 하였으나 재력이 모자라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은 조정에서 국사를 논할 적에 옳고 그른 것을 똑똑히 분별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확신이 서면 그 주장을 굳게 지켜 저 옛날 맹분(孟賁), 하육(夏育)과 같은 장사라도 꺾을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시비와 사정(邪正)에 대한 구분이 마치 흑백이 서로 혼합되기 어려운 것처럼 항상 가슴속에 확연히 갈려져 있어 어지러운 시사에 관해 깊이 한탄하며, 혹시 남들과 얘기하던 중 언급하게 되면 화가 나서 분개하는 기운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다만, 평소에 관대하고 중후한 도량을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기 때문에 그 개결한 지조와 엄중한 지론에 대하여는 간혹 낱낱이 알지 못하는 점도 있었다. 항상 스스로 절의를 갈고닦아서 옛사람의 절조와 의리를 지킨 처사에 대해 감탄하며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는 반면, 당시에 맺고 끊는 기개가 없어 시세에 빌붙고 남의 뜻과 비위나 맞추는 자를 보면 마음에서부터 반드시 천시하고 미워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다.
일찍이 계획하기를, 가숙(家塾)을 세워 담을 둘러치고는 그 안에 따로 서책을 보관해 두는 건물을 만들어 자물통을 단단히 채우고 친족의 자제들이 모두 와서 열람하게 하되 이를 ‘의서(義書)’라 이름하고, 따로 쌀과 베를 마련하여 친척의 길흉사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되 이를 ‘의재(義財)’라 이름하며, 경향 각지의 자제로서 글을 배우기를 원하는 자도 그곳에 머무르게 하고 가르치되 자제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는 등, 그 절목이며 체계가 다 질서정연하였다. 앞으로 장구히 그대로 유지해 나갈 생각으로 이를 자나 깨나 염두에 두고서 이리저리 궁리하여 반드시 성취하려고 하였으나 병세가 너무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별세한 뒤에 자제들도 공의 유지를 받들어 행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은가.
공의 처음 아내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고, 나중 아내는 예천 권씨(醴泉權氏)로 역시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아들은 셋으로, 장남 부()는 맹산 현감(孟山縣監)인데 공보다 1년 앞서 죽었고, 차남 저(櫧)는 현재 와서 별좌(瓦署別坐)이며, 막내아들 직(㮨)은 전 의금부 도사로 공의 백씨 증 호조 참판 괄(适)에게 출계하였다. 딸은 하나로, 동부 주부(東部主簿) 심혁(沈)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셋으로, 유점(惟點), 유유(惟黝), 유훈(惟勳)이고, 손녀는 둘인데 다 어리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이 셋인데 본(本), 동(東), 속(束)이다.
공이 지은 문장은 뜻이 분명하고 유창하였으며 시법(詩法)은 맑고 여유로웠는데 초고를 많이 남겨 두지 않아 《경음부여(慶陰瓿餘)》 4책만 집안에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공은, 선대의 유고(遺藁) 중에 설곡(雪谷 정포(鄭誧)), 원재(圓齋 정추(鄭樞)), 복재(復齋 정총(鄭摠)) 세 분의 문집은 비록 이미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는 있으나 지금 그 판본(板本)이 없는 데다 장경공(章敬公 정해(鄭瑎))과 방친(旁親)인 설헌(雪軒 정오(鄭䫨)), 춘곡(春谷 정탁(鄭擢)), 판목(判牧), 소윤(少尹), 시정(寺正) 등 부군(府君)들의 유고가 다 흩어져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겨우 《동문선(東文選)》, 《대동시림(大東詩林)》,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에 한두 편 들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이것을 거두어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서원세고(西原世藁)》라고 이름하고 판각하여 세상에 유통시켰다.
또 정씨의 내외 세계(世系)의 근원과 지파(枝派), 그리고 그 사적을 수집해 기록하여 《정씨가승(鄭氏家乘)》이라 이름하고, 또 설헌(雪軒)과 설곡(雪谷) 두 조상의 내외 자손에 관한 내용을 편집하여 《서원정씨족보(西原鄭氏族譜)》라고 이름한 뒤에 이들을 다 책으로 만들어 간행하려 하였는데, 마침 난리를 만나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 이렇듯 공은 선대의 일에 대하여 훌륭한 덕을 드러내고 숨겨진 사실을 밝히는 면에 있어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그리고 염계(濂溪) 선생의 사적과 저술이 합쳐져서 한 책으로 된 것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책이 곧 완성되어 갈 시기에 또 전쟁으로 인해 참고할 만한 서적이 없어 결국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아, 공은 훈업이 한 세상에 드높고 지위가 삼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덕은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게 젖어들고 행실은 친족들의 모범이 되었으나 자손이 의지하고 살아갈 만한 전답조차 없고 가족이 함께 모일 만한 집도 없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한탄하며 못내 그리워하고 길 가는 자들은 공이 살던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공이 평소에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아 준 마음이 그처럼 지극하였는데도 죽은 뒤에 남은 흔적은 어쩌면 저렇게 쓸쓸하단 말이냐.” 하였다. 이로써 공이 일신의 영예를 위해 어떤 경영도 하지 않았고 존귀하면서도 가난하게 살 수 있었던 덕이 더욱 오늘에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그 쓸쓸한 흔적이 또한 어찌 공의 하자가 되겠으며 그렇다고 어찌 또 공의 칭송거리가 될 만하겠는가.
다만, 선대왕이 도성을 빼앗기고 의주로 망명했을 때 호종한 여러 신하들 중에서 굳이 공을 발탁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삼았으며, 공은 곧 분연히 그 임무를 한 몸에 지고 만리를 달려가 호소함으로써 마침내 대군을 출동시켜 왜적을 무찔러서 나라를 수복하고 이 나라를 길이 무사하게 만들었다. 이는 진정 예사로운 군신 간의 만남이 아닌데, 공이 우리 선대왕의 인물을 알아보는 지혜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나라가 다시 살아나는 업적을 이루어 낸 이 점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옛날 주 부자(朱夫子)가 유평보(劉平甫 유평(劉玶))를 대신하여 그의 백씨인 공보(共甫 유공(劉珙))의 행장을 지었다. 거기에 “삼가 법령을 살피건대, 공의 품계로 보면 실로 살아생전의 행적을 서술하여 나라에서 시호를 내려 줄 만하고 그 성명과 사적 또한 마땅히 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다. 이 때문에 감히 그 출신지와 세계(世系), 역임한 관직이며 행했던 사실들을 이상과 같이 서술하여 태상경(太常卿)과 고공 시랑(考功侍郞)에게 고하고 아울러 태사씨(太史氏)에게 이첩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체모와 군기(軍機) 등 중대한 일에 관한 사실은 감히 다 드러내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 다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은 어찌 감히 그럴 수 없는 점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지금 나도 공의 사적에 대해 감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으나 전부 드러낼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이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력 41년(1613, 광해군5) 2월 일 아우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구(逑)가 행장을 쓰다.